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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1년은 정약용이 정조 곁에서 관직을 이어온 지 9년째로 접어든 해였습니다. 약용과 외종질 사이였던 진산의 천주교도 윤지충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실로 서학에 대한 옥사가 일어났습니다. 목만중, 이기경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해 서학의 강학에 참석하며 서학에 심취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몰아세우려 했습니다. 정약용은 벼슬을 하면서 첫 번째 맞는 시련이었습니다. 약용은 문초를 받으며 서학의 책을 읽고 강학에 참석한 것을 시인했으나, 믿음은 없었다고 강변합니다. 이로서 정약용은 무사하고 오히려 고변자 이기경은 경원으로 귀양길에 오릅니다. 이 당시 부친 정재원이 사망하자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3년 보상을 치르게 됩니다. 이후 다시 조정으로 나와 참의 벼슬을 제수받고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때가 바로 1794년에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잠입해 포교활동을 하던 시기입니다, 목만중은 또다시 정약용 일파를 걸고 늘어집니다. 두 번째 시련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조는 이때 반대파를 의식하고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이라는 한직으로 잠시 내려 보내게 됩니다. 여사울 출신 이존창의 사도 역할로 천주교도가 많았던 내포지역 한 고을의 금정찰방으로 가서, 천주교도들을 설득하며 조정의 금령을 어기지 말고 제사를 잘 받들라고 권고합니다. 몇 달 뒤 그를 정조는 다시 불러 승지벼슬을 내립니다..
이 무렵 정조는 백성의 수탈을 일삼는 관리들의 부정으로 무척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곡산부사 직을 약용에게 주어 조세와 부역 등을 공평하게 베풀고 옥사를 바르고 너그럽게 하는 목민관으로서의 직책을 잘 수행하게 됩니다. 외직에서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약용에게 정조는 형조참의, 승지 등을 내려 곁에 두지만 약용에 대한 모략은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목만중, 이기경 등에 사주를 받은 조화진이 정약용과 이가환 등을 거론하며 서학을 받들며 역적을 모의한다는 상서를 올립니다. 약용은 당시 자신의 마지막 벼슬을 버리고 고향 마현(馬峴)으로 돌아옵니다. 잠시 후 정조의 승하 소식을 접하고 정조의 상을 치른 후 다시 마현으로 돌아와 도덕경(道德經) 한 대목인 여 (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라는 글귀에서 발췌한 조심조심 살아가자 하며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 걸었지만 약용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약용은 큰형 약현이 죽자 묘지명을 적어 가문의 내력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전문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중 큰 형님 진사공(進仕公) 정약현(丁若鉉) 묘지명(墓誌銘) 정약용찬
공의 휘(諱)는 약현(若鉉)이고 자는 태현(太玄)이다. 우리 정 씨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지금은 나주에 속해 있다. 고려 때에 무관이 연이어 나와 9대에 걸쳐 끊어지지 않았다. 시조 정윤종은 종 3품 대장군이니 당시의 부장이다. 아조(我朝) 들어와서 문직이 9대에 연이어 끊이지 않았다. 그 중간에 은사(隱事) 정연(丁衍)이 있었는데,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께서 나라를 세우던 초기에 운둔하여 벼슬하지 않았지만 위로 고려의 조상을 이어 아래로 후손을 열어 주어 우리 정 씨의 복록을 든든히 하셨다. 이분 이후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낸 정자급(丁子伋),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정수강(丁壽崗), 병조판서를 지낸 정옥형(丁玉亨), 좌찬성을 지낸 정언벽(丁彦璧), 병조참의를 지낸 정시윤(丁時潤), 우부승지를 지낸 정도복(丁道復)이 모두 옥당(玉堂)에 오름으로써 9대를 전한 것이다. 승지공(정도복)의 맏형으로 정도태(丁道泰)라는 분이 있는데, 음보(蔭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니 공에게 고조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정항신(丁恒愼)으로 진사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정지해(丁志諧)이니 음보로 통덕랑을 지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정재원(丁載遠)이다. 영조 임오면(1762, 영조 38) 과거에 합격한 진사로서 연석에 올라 제의(祭儀)를 강론하고 특지(特旨)로 관직을 임명받았다. 벼슬살이를 오래 하는 동안에 치적(治績)이 있었으며, 진주목사에 이루러 임지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숙인 의령 남 씨로 처서 남하덕의 따님이며 개국원훈 남재의 후예이다. 영조 신미면(1751. 영조 27) 5월 6일에 광주의 마현 집에서 공을 낳았다. 그 이듬해 10월에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유모를 따라 외가에서 자란 기간이 여러 해였다. 점차 자라면서 경서와 사서를 배웠고 약관 20세에 감시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시험에)에 합격하였다. 계묘년 91783. 정조 7,33세) 봄에 감시의 양장에 합격하였으나 회시에는 모두 합격하지 못하였다. 을묘년 1795.19,45세) 봄에 이루러 진사시에 3등으로 제34인으로 합격하였으니 그때 나이 45세였다. 아 늦었도다! 공은 담박하고 조용하였으며 어지럽고 변화무쌍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약용이 어렸을 때였다. 공이 한창 장자 소요유와 제물론을 읽고 있었는데, 약용은 공의 글 읽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여 책상 곁에 모시고 있었으면서 돌아가 내 책을 읽는 것조차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우리 선비 윤숙인께서는 공을 자신이 낳은 아들처럼 보살피셨고 공도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잘 섬겼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약용이 어렸을 때였다. 연천현의 관아에서 지낼 때 윤숙 인께서 공과 형수 이 씨를 불러 앞에 앉히고 쌍륙 놀이를 하게 했는데 그 즐거움이 화기애애하였다.
신유년(1801. 순조 1 51세)의 화란에 우리 형제 세 사람이 모두 혹독한 화란에 걸려들어 한 사람은 죽고 두 사람은 귀양 갔다. 그러나 공은 조용히 여론의 구설수에 말려들지 않아 우리 가문을 보전하고 집안의 제사를 이어 갔다. 이 또한 어려운 일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그러나 일명의 벼슬에도 이르지 못하고 끝내 쓸쓸히 돌아가셨다. 아, 애석하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건륭(乾隆) 임자년 1792.12. 42세) 여름에 공이 정약전, 정약용과 더불어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급보를 듣고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을 때 부음(訃音)을 듣고 진주로 달려갔다. 충중의 선영으로 반장(返葬)하고 돌아와 열수의 여막에서 곡하였다. 공이 곡을 할 때마다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적삼 소매에서 불그스름한 것이 보여 살펴보았더니 피눈물이었다. 복을 다 마치고도 여전히 사모하는 정이 간절하여 정자를 짓고서 망하 정(望荷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이는 하담(荷潭)이 동남쪽에 있어 이 방향으로 아버지 묘소가 있는 선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자가례에 최장방으로 신주를 옮겨 간다 라는 문구가 있다. 이것은 주자 송나라 주희가 초년에 기록한 것이고. 주자의 만년에 이 요 경, 오백량, 심한 등에게 답한 여러 편지에서는 모두 조거 하는 것을 정례로 삼았다. 성호선생 이익 및 순암 안정복도 모두 주자의 만년의 뜻을 따랐다 그래서 공은 또 종족이 쇠잔해져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중부 옥예법을 없애고, 마침내 조거 하는 것을 가법으로 삼았다. 중년에는 자호를 부연(鬴淵)이라 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시고(詩稿) 3권이 있다. 도광(道光, 천선종의 연호) 신사년 1821, 순조 21,71세) 가을에 유행병이 갑자기 퍼져 9월 4일에 옛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71세였다.
첫 번째 부인은 경주 이 씨(이벽의 누님)로 아버지 이 부 만인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할아버지는 이달인데 호남 병마사를 지냈으며, 부제학 이정형의 후손이다.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정진홍은 젖먹이 때 요절하였다. 큰딸은 황시복(황사영)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지금 정언으로 있는 홍영관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홍재영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부인은 의성 김 씨로 아버지는 김주의 이고 할아버지는 김응렴인데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학봉 김성일의 후손이다. 3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정학수로 사람됨이 복되고 착하며 문예가 일찍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가들고 나서 요절하였다. 다음은 정만수로 이를 갈기도 전에 요절하였다. 다음은 정학순인데 지금 제사를 받들고 있다. 큰딸은 정협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권진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김성추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목인표에게 시집갔다. 홍영관은 2남 1녀를 두었고, 나머지도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첫째 부인 이 씨는 경자년 91780. 정조 4, 30세)에 예천에서 죽으니 묘는 충주의 하담 선고 진주공의 무덤 동쪽에 있다. 공이 죽었을 때는 하담이 멀어서 그곳에 가서 묻히지 못하고, 의논 끝에 집 동산의 기슭에 묏자리로 쓸 만한 혈이 있으므로 달을 넘겨 장사 지내되 간방 북동쪽을 등진 언덕에 무덤을 만드니, 뒷날 김 씨(두 번째 부인)를 곁에 묻으려는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훼손과 상함이 없는 뒤 에야 그분의 온전함을 알겠고
재앙과 피해가 없은 뒤 에야 그분의 어짊을 알겠네.
온통 무너졌지만 홀로 서니 그분의 꿋꿋함을 알겠고
모두 잃어버리되 홀로 지키니 그 끊이지 않고 이어짐 알겠네
여기는 우리 큰 형님이 묻히신 곳이니 향당 종족 이곳 지나면 공경하지 않을 이 없으리
정약용이 찬한 큰형 약현의 묘지명에서 밝혔듯이
부친 정재원은 남 씨와 혼인하여 약현을 낳는다. 이후 약현의 모친은 이듬해에 사망하여 약현은 외가로 가 유모손에 성장한다, 성인이 된 약현은 이벽의 누나 경주 이 씨와 혼인하여 1남 3녀를 낳는다. 아들 정진홍은 젖먹이 때 요절하고 큰딸 정명련은 황사영에게 시집가서 황경환을 낳고 황사영이 백서사건의 당사자로서 역죄로 능지처참 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자 시댁어른과 식솔들은 노비로 전락하고 본인도 노비신분으로 제주도로 향하면서 추자도에 어린 아들 황경환을 갯바위에 올려놓고 제주도 대정현으로 가 노비생활로 생을 마감하고 그곳에 묻힙니다. 둘째 딸은 홍영관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 정조이는 홍재영에게 시집가 홍봉주를 낳습니다. 만 온 가족이 기유박해와 병인박해로 순교하게 됩니다. 약현은 의성 김 씨와 재혼하여 3남 4녀를 낳는다. 큰아들 정학수는 장가들어 요절하고 둘째 아들 정만수는 이를 갈기 전 요절하고 만다. 셋째 아들은 정학순입니다. 큰딸은 정협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권진에게 셋째는 김성주에게 넷째는 목표인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약용의 부친 정재원은 남씨와 사별 후 해남 윤 씨 가문 윤소온과 혼인하여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 형제와 딸을 낳 는다. 그 딸이 바로 한국최초의 천주교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이다.
정약종은 이 씨 부인과 혼인하여 정철상 낳고 부인이 사망하자 유 씨 부인과 재혼하여 딸 정정혜를 낳은 후 아들 정하상을 얻지만 정약종을 비롯하여 온 가족이 순교합니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온 가족의 순교사입니다. 정약용은 홍 씨 부인과 혼인하여 아들 정학연과 정학유를 얻습니다. 둘째 였던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해양생물학을 집대성한 자산어보와 국가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 문순득의 표류기인 표해시말을 저술한고 사촌서당을 만들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16년을 유배생활을 견디다 그곳에서 운명합니다 이에 반해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외가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에 머물며 18년의 유배생활을 보내면서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고 제자들을 받아 가르칩니다 해금되어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 여유당에 머물며 남은 여생을 보내다 죽어 여유당 북쪽 양지바른 곳에 묻힙니다. 약용은 1882년 회갑을 맞아 자신의 묘지명을 쓰게 됩니다.
자찬 약용 묘지명
이것은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이다. 아버지성함은 재원(載遠)이며, 음직으로 진주 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숙인 해남윤 씨(海南 尹氏)인데 영종 임오년(1762년, 영조 38년) 6월 16일에 열수(洌水)강가 마현에서 약용을 낳았다.
약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했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했다. 22세(1783년, 정조 7년)에 초시에 이어 회시에 합격해 진사가 된 뒤 변려문을 오로지 연마해 28세(1789년, 정조 13년)에 갑과 2등으로 급제했다. 대신들의 선발에 의해 규장각에 배속돼 월과문신(月課文臣)으로 있었다. 얼마 안 가 한림원에 뽑혀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어 승진해서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 성균관 직강, 비변사 난관을 지냈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1795년, 정조 19년) 봄에 경모궁에 시호를 올리는 도감의 낭관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사간으로 발탁된 뒤 통정대부로서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았다. 또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
가경(嘉慶) 정사년(1797년, 정조 21년)에 곡산 도호부사로 나가서 은혜로운 정치를 많이 베풀었다. 기미년(1799년, 정조 23년)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돼 억울한 옥사를 처리했다. 경신년(1800년, 정조 24년) 6월에 임금으로부터 ‘한서선(漢書選)’을 하사 받았다. 이달에 정종대왕이 승하하시니 이에 양화가 일어났다.
15세(1776년, 영조 52년)에 풍산 홍씨(豐山 洪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무과를 통해 승지 벼슬을 지낸 홍화보의 딸이다. 장가든 뒤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이 순수하고 독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성호 선생이 남긴 저술을 보게 돼 이때부터 경학의 서적에 마음을 두게 됐다.
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간 뒤 이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책을 보았다. 정미년(1787년, 정조 11년)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년, 정조 15년)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서교에 대한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1795년, 정조 19년)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들어와 나라 안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이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보임돼 나가 왕명을 받들어 서교에 젖은 지방민들을 달래고 단속했다.
신유년(1801년, 순조 1년) 봄에 대신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의 일을 빌미로 임금께 조사할 것을 요청함으로써 이가환ㆍ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됐다. 얼마 뒤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함께 체포돼 한 사람은 살아남았다. 모든 대신들이 무죄로 판명돼 풀어주자는 주장 했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워 약용은 장기현으로, 약전은 신지도로 각각 유배됐다.
그 해)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약용을 죽이려고 모의해 임금의 허락을 얻어냄으로써 약용과 약전은 또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조사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이뤄지지 않았다. 태비(太妃)께서 감안하여 처분해주시는 바람에 약용은 강진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계해년(1803년, 순조 3년) 겨울에 태비가 약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셨지만, 정승 서용보가 이를 막았다. 경오년(1810년, 순조 10년)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고향으로 쫓아 보내라고 명하였으나, 당시 사헌부에서 죄가 여전히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의금부가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년, 순조 18년) 가을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묘년(1819년, 순조 19년) 겨울에 조정에서 다시 약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했다. 약용은 유배돼 있던 18년 동안 경전 연구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에 관한 저술이 모두 230권이다.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우쳐 성인이 말씀하신 근본적 뜻을 제대로 파악했다. 시문집으로 엮은 것이 모두 70권인데 조정에 있을 때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하는 일, 옥사를 다스리는 일, 무력을 갖춰 방비하는 일, 국토의 강역에 관한 일, 의약에 관한 사항, 문자의 분석 등에 관해 편찬한 것이 거의 200권이다. 모두 성인의 경전에 근본을 두면서, 시의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더러 인용해서 쓸 내용이 있을 것이다.
약용은 벼슬하기 전부터 임금께서 알아주시는 은혜를 입었다. 정종대왕께서 총애하고 예뻐하고 칭찬하신 것이 동료들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간 하사해주신 책, 말, 호랑이 가죽, 그리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하도 많아서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국가 기밀에 참여할 때 의견이 있으면 글로 적어 진술하도록 허락하시어, 모두 들어주시고 따르겠다고 하셨다. 일찍이 규장각에서 서적을 교정할 때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맛있는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게 해 주셨다. 궁중 안에 비장돼 있는 모든 책을 규장각의 감독을 통해 언제든지 열람을 청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모두가 남다른 대우였다.
약용의 사람됨은 착한 일을 즐겨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과감히 실천하고 행동했다.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마음속에 원망과 후회가 가득 쌓였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년,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말하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마침내 긴 요치 않은 일을 씻어버린 뒤 밤낮으로 자기 성찰에 힘써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회복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어그러짐이 없길 바란다.
정 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선왕조가 열린 이후 마침내 서울에서 살았다. 처음 벼슬한 조상은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판서를 지낸 옥형(玉亨), 좌찬성을 지낸 응두(應斗), 대사헌을 지낸 윤복(胤福), 관찰사를 지낸 호선(好善), 교리를 지낸 언벽(彦璧), 병조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이 모두 홍문관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절의 운수가 안 맞아 마현으로 옮겨 살았는데 고조부 증조부 조부 3대 모두 벼슬을 지내지 않고 돌아가셨다. 고조의 성함은 도태(道泰), 증조의 성함은 항신(恒愼), 조부의 성함은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부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아내 홍 씨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6명이 요절하고 오직 2남 1녀만 제대로 컸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시집갔다. 약용의 무덤은 집 뒤란에 있는 자자의 언덕으로 정했다. 부디 바라던 대로 되었으면 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 한 몸에 안고 / 荷主之寵
궁궐에 들어가 곁에서 모셨네 / 入居宥密
임금의 심복이 되어 / 爲之腹心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 朝夕以昵
하늘의 총애 한 몸에 받아 / 荷天之寵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쳤네 / 牖其愚衷
육경(六經)을 정밀하게 연구해 / 精硏六經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네 / 妙解微通
간사한 무리들이 기세를 떨쳤지만 / 憸人旣張
하늘이 너를 사랑해 쓰셨으니 / 天用玉汝
잘 거두어 간직하면 / 斂而藏之
정약용 형제들의 초기 천주교에서의 역할
신분적으로는 양반, 인격적으로는 사대부라 불렸던 나주 정 씨에 속한 정약용 형제들은 명문가의 자손들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부친 정재원은 조상들의 은덕인 음직으로 지방관리로 채용되어 오랜 시간 근무하면서 진주목사로 재직하던 중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합니다. 움직이란 과거시험 없이 조상들이 나라에 끼친 여러 가지 공로에 대한 대가로 왕이 내리는 관직입니다. 그의 두 번째 부인 해남 윤 씨 약전, 약종, 약용의 어머니는 숙인이란 칭호를 받았는데 숙인 또는 숙부인이라 함은 문무관 정 3품·종 3품 당하관의 처에게 주는 작호입니다
1. 이러한 배경을 지닌 정 씨 형제들은 정치적으로는 남인 당파에 속하였으며
2. 학문적으로는 성호 이익학파이며 이를 계승한 권철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녹암계 학파가 이기도 하였습니다.
3. 같은 당파와 같은 학파에서 정치적 세력과 학문을 익혀 온 그들은 혼맥을 이어 나갔습니다.
서학을 중심으로 천주교리까지 스스로 공부하며 천주교를 태동시켰던 경주 이 씨 가문의 이벽에 누나가 정약용의 이복형 정약현과 혼인을 맺고 정약전을 스승으로 공부를 한 황사영은 역시 정약전에게 학문을 배운 정약현의 큰딸 정명련과 혼인을 맺습니다.
그리고 약현의 세 째 딸 정조이는 홍낙민의 아들 홍재형과 혼인하여 홍봉주를 낳습니다.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 오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는 그의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는 그의 아들입니다. 홍봉주의 처는 바로 심조이입니다. 심조이(沈召史)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 토마스와 혼인하였습니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 루카는 그녀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1840년에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 오는 그녀의 시아버지였습니다. 남편 홍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심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하려는 마음 또한 열렬하였다고 합니다.
정약용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남 씨와 사별 후 해남 윤 씨 소온과 재혼하여 약전, 약종, 딸 정 씨, 약용을 낳았는데 딸 정 씨가 이승훈 가 혼인을 맺습니다. 이승훈은 이벽과 교우관계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갈 때 이벽에 요청에 의하여 세례를 받은 후 서책과 성물을 갖고 귀국한 후 이벽과 상의하여 이벽, 권일신, 권철신, 김범우, 유항검, 이존창 등에게 세례를 주며 한국 천주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약전과 약용은 부친의 간곡한 만류에 뒤로 물러 서지만 약종은 달랐습니다. 원래 도교에 심취해 있던 그에게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전념하게 됩니다. 특히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면서 당국에 체포되었을 때 훗날을 대비하기 위하여 1799년 설립한 명도회 초대회장을 지내면서 교리연구 및 회원들의 전교활동을 관리하고 회원들의 신공 성과 등을 주신부님에게 보고하연서 보다 쉽게 교리에 대하여 배울 수 있도록 주교요지를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은 큰 아들 정철상과 순교를 하고 부인과 딸 특히 아들 정하상은 천주교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한국 천주교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정약용의 형제들과 그 집안과 혼맥을 이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정파, 학파, 혼맥이 조선사회에서 기득권자로서 얼마든지 가문을 키우고 그 세를 늘릴 수 있었지만 이벽의 누나 제사로 정약용형제와 이벽은 한강 물 길을 오고 가기 위하여 두미협곡을 지나면서 이벽은 조십스럽게 천주실의에 관련된 이야기를 정 씨 형제들에게 전해 줍니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와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책을 빌려 보고 함께 강학을 하고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종교로 빠져듭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색이 다른 반대파들과 그리고 같은 남인에 속하면서 이들 형제를 시기하던 이들에 의하여 갖은 고난을 겪으며 순교와 유배 등으로 가문은 멸문되어 가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겪지만 약현의 노력과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약용에 의하여 멸문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마재 남쪽으로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면 천주교의 물 길이 보입니다.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양근 감호가 보이고 두미협으로 합수되는 경안천을 거슬러 가면 앵자산 강학터를 만나게 되고 남인들이 몰려 살던 경안이 나옵니다. 두미협을 지나 한강물과 같이 흘러가다 보면 수표교와 명례방, 약현, 새남터, 절두산 형장을 만나게 되고 멀리 있는 충남 내포와 전라도 전주 곳곳도 물 길로 만날 수 있습니다. 물 따라 흐르듯 순교라는 무겁고 힘든 장벽도 무너트리며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성리학에 반하는 역도들의 행진을 멈추려 칼을 휘들러 믿는 자들을 목숨을 끊었지만 순교자들이 뿌리는 피는 오히려 이곳저곳으로 날아가 새로운 신앙의 뿌리가 되어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고작 그들의 저항은 형장으로 끌려가며 외우는 예수 마리아가 전부였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를 딛고 우뚝 선 한국 천주교는 세계적으로 그러한 전례를 찾기 힘든 순교사입니다.
새해 들어 순교의 역사적 시간에 맞춰 천천히 성지를 찾으며 묵상과 미사 참례를 통해 자신에 신앙의 여정은 어디 즈음까지 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사유의 시간을 갖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은 아무래도 마재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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