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 19세>
두 가지 의미 속에서
나의 19살은 낭랑하다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낭랑하다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의 뜻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소리가 맑고 또랑 하다. 빛이 매우 밝다이고, 두 번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눈물이 거침없이 흐르다는 뜻이 있다. 낭랑하다는 단어 뒤에 19세라는 말을 덧붙이게 되면 긍정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보편적으로 쓰이는 '낭랑하다'라는 단어의 뜻은 첫 번째의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떠오른 나의 의문이 있다. 과연 나의 낭랑 19세도 이러한 보편적인 뜻으로 긍정적이게 사용되고 있을까? 만약 그렇게 사용되고 있더다도 지금 나에게 그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 깊게 생각해 보았다.
내 생각에 현재 고등학교 3학년에게 낭랑하다는 말은 두 번째 의미가 더 적합한 것 같다. 고3은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었는데, 벌써 내가 그 고3이 되었다는 것을 체감할 시기도 없이 벌써 5월이 되었다.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학교에서 해야할 일은 너무나도 많은데 그것을 그저 무기력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낭랑하다는 말의 뜻 중 정처없이 돌아다닌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감이 든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능동적인 나의 노력은 없었을까? 하고 과거를 떠올려 생각해보면 아예 없진 않은 것 같다. 내 나름대로 성적 관리를 위해 밤을 새우기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가서 밤늦게 집에 귀가하는 일들이 나의 능동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능동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기에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학교와 학과를 아직까지 정하지 못한 것이 고등학교 내내 나 자신에 대한 탐색이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나의 꿈은 아주 어릴적부터 교사였다. 그 꿈을 가지게 된 이유는 어떻게 보면 가장 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그것이 내가 교사가 되고 싶은 큰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친척 동생이나 사촌 동생을 돌보아 주는 것이 좋았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항상 행복하고 사람들과 교류할 때 에너지를 얻는다고 느꼈다. 그러한 나에게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가질 수 있는 내 선망은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그 선망이 내 목표가 되었고 나는 아직도 그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과연 교사가 갖춰야할 자질이 있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게 되었다.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좋은 품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이러한 고민을 통해 나의 목표에 대해 나아갈 것이다. 나의 낭랑하다는 단어가 정처없이 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닌 빛이 매우 밝다라는 뜻으로 쓰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탐색하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가장 잘 알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 3학년에게 낭랑하다는 단어는 각자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의미가 충돌하고, 지배하고, 공존하는 것이 나의 19살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그저 밝게 놀고, 때로는 힘듦에 눈물이 거침없이 흐르는 날도 있을 텐데 이를 즐기면서 나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찰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나의 낭랑 19세에 대해 내린 정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