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록語錄
문인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언제나 웃옷을 입고 갓을 쓰고 지냈는데, 하루는 평상복 차림으로 걸어서 시냇가로 가시기에 내가 따라갔더니, 선생 말씀이, “노친老親의 반찬이 없어서 자식을 시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한다.” 하였다. 그때 선생의 막내아들 김익련金益煉이 작은 그물과 낚싯대를 들고 곁에 있었다.
선생이 서제庶弟와 함께 노선생을 모시고 있었는데, 서제가 참봉 윤재尹材에게 답서를 쓰면서 ‘존형尊兄’이라고 칭하자 선생이, “세상 풍속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그가 고쳐쓸 때까지 온화한 말로 반복해서 타일렀는데, 노선생은 그것을 보시고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선생은 정성定省할 때 노선생이 이미 잠자리에 드셨어도 절을 하였다. 노선생께서, “부형父兄이 누워 있으면 절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셨지만, 선생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신묘년(1651, 효종 2)에 가 뵈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평소 그대를 그다지 허술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데, 기축년(1649, 인조 27) 이후로 그대에게도 객기客氣가 있고 태지泰之 이유태李惟泰는 더욱 더하다는 것을 알았네. 차후로는 소명召命이 있으면 사은謝恩만 하고 말게나. 나는 늙어서 사은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지금 같은 시절에 그대 같은 사람들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충효忠孝의 실질만 있다면야 학문한다는 이름만 있고 내용은 없는 그런 자들에 비할 것인가.” 하였다. - 이것은 이 정李正ㆍ송 태복宋太僕의 향사享事 관계를 논하면서 한 말이다.
언젠가 이장移葬 후의 우제虞祭에 관해 여쭈었더니, 답하기를, “주자朱子는 전奠을 차릴 뿐이라고 했고, 구씨丘氏는 주자의 설을 바꾸어 우제사를 한 번 모신다고 했는데, 그대는 지금 그 둘을 합쳐서 하나로 만드는 식이다. 예를 그렇게 자세하지 못하게 다루고 있으니, 탄식할 일이로군.” 하였다.
언젠가 윤희중尹希仲 윤휴尹鑴의 사람됨을 논하면서, 명보明甫 송준길宋浚吉와 비교하여 어떠냐고 선생이 묻기에, 그가 재주는 낫다고 대답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지금 후생들 중에서 명보를 따라가기가 그리 쉽지 않지.” 하였다.
“지금은 학문하는 사람만 선묘宣廟 시대를 못 따를 뿐 아니라, 의약ㆍ복서ㆍ글씨ㆍ그림 등까지도 그 시대를 따라갈 수 없으니, 인재도 시대와 함께 점점 수준이 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승지 이덕수李德洙 어른이 연산連山에 정배되어 있을 때 그의 처남인 조속趙涑이 임피 현령臨陂縣令으로서 술과 안주를 싣고 승지 어른을 찾아와 선생의 왕림을 청했다. 선생이 가시려고 하는 참에 이생 유겸李生惟謙이 뵈러 왔으므로, 선생은 사람을 시켜 승지 어른에게 사과하기를, “꼭 가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먼 곳에서 손이 와 그를 두고 갈 수가 없게 됐다.”고 하고는, 이생과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