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풍영루기尙州風詠樓記
상주(尙州)는 본래 사벌국(沙伐國)이었는데, 신라에 귀속함으로부터 큰 부(府)가 되어 지금까지 천여 년이 되었다. 산천이 수려(秀麗)하고 인문의 번성함이 온 도내 여러 고을 중에서 제일이나, 일찍이 누대(樓臺)와 정사(亭榭) 하나 세운 것이 없으니, 그 지방 민간의 풍속이 순박함을 상상할 수 있다.
홍무(洪武) 경술년(庚戌年)에 목사(牧使) 김공 남득(金公南得)이 해우(廨宇)를 중건(重建)하고, 그 동북쪽에 과원(菓園)을 만들고서 그 안에 정자를 세우니, 우리 좌주(座主) 한산(韓山) 목은(牧隱) 상국(相國)이 ‘풍영루’라 이름하고 따라서 기(記)를 지었고, 해원(解元) 성산(星山)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호)이 시(詩)를 남겼다. 두 분은 모두 당대의 문장(文章) 대가이니, 이 고을의 성가(聲價)가 실로 그 무게를 더하게 되었다.
경신년(庚申年)에 왜구(倭寇)의 침범으로 관청과 민가가 모두 병화(兵禍)를 만났는데, 이듬해 신유년에 반자(半刺 군(郡)의 보좌관) 전군 이(田君理)가 비로소 고을의 성을 쌓고 백성을 불러 모았으며, 옛터에다가 별관(別館)을 창건하여 사명(使命)을 대비(待備)하게 했고, 경오년에 목사 이공 복시(李公復始)가 또한 해사(廨舍)를 창건하였으나 정사(亭榭)는 미처 세우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목사 송공 인(宋公因)과 판관(判官) 한공 암(韓公巖)이 서로 마음을 합쳐 정사를 하여 폐단이 제거되고 복리(福利)를 거두매, 풍교(風敎)가 부흥되고 백성들이 안정하게 되었다.
또한 옛 정자 터를 더욱 확장하여 넓히고 그 위에 누각(樓閣)을 세우고, 또한 목은(牧隱)의 기문과 도은의 시를 써서 걸어, 모두 예전 모습대로 복구하니, 한 고을의 좋은 경치가 더욱 빼어나게 되었다. 고을 사람 전 대호군(大護軍) 김공 겸(金公謙)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본래부터 풍영정(風詠亭)이 있어 당초에 두 대유(大儒)의 훌륭한 글을 받아 정자 안을 빛나게 하였는데, 중간에 타 버리고 다시 세우지 못하여 오랫동안 고을 사람들의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목사께서 정사의 공적이 탁월하여 모든 고을에서 제일인데, 이 누각을 세울 적에 백성에게 폐단 하나 없이, 한 달이 못 되어 완성하였습니다. 사명(使命)이 왕래할 때 올라가 구경하게 되고, 고을 백성들이 늙은이나 어린이할 것 없이 서로들 경축(慶祝)합니다. 목은과 도은은 그대의 사우(師友)이시니, 어찌 한마디 하여 그 뒤에 붙이기를 아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풍영루의 의의는 그 기(記)에 다 설명되었는데, 내가 어찌 군소리할 것 있겠는가. 그 기에 ‘절월(節鉞)과 인부(印符)를 지니고 이 고을을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봄옷이 마련되었을 때에 화기가 넘치듯이 한다면, 상주(尙州) 백성들은 행복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그 사람들에게 기대함이 매우 큰 것이니, 내가 감히 여기에 대하여 거듭 말하려 한다. 공자의 문하(門下)에서 여러 제자들이 각기 자기의 뜻을 말할 적에, 모두들 한다는 말이 세세한 사업에 벗어나지 못했으나, 오직 증점(曾點)은 ‘바람쏘이며 읊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하자, 부자(夫子)가 찬탄하며 허여하였고, 그 뜻을 해설한 분은 ‘요순(堯舜)의 기상이 있다’ 하였으니, 대개 그 장원한 마음이 마치 조물주와 같아서 모든 형태의 물건으로 하여금 각각 제 위치를 얻게 함과 같다. 만일 시행할 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어린이를 풀어 주고 늙은이를 편히 해주어 따라오게 하고 고무시킴으로써 화하게 하는 묘리(妙理)가 있어 화기(和氣)가 흘러 퍼지며,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마치 춘풍(春風) 속에 있는 듯하여, 정치의 공효가 바로 천지의 조화와 함께 운행될 것이니, 요순의 정치도 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을 따진다면, 다만 마음속에 한 점의 사사로운 끌림[私累]도 없는 데서 유래한다. 가령 절월과 인부를 지닌 사신(使臣)들로 하여금 올라와 구경할 즈음에, 진세(塵世)의 번잡을 씻고 세상 근심을 잊게 되어 뜨거운 열기를 샘에 가서 씻을 것도 없이 맑아지고, 번다한 정사를 초야(草野)에 가서 의논할 것도 없이 제대로 되어서, 행동하는 가운데 말없이 풍영(風詠)의 낙을 보아 마음에 체득(體得)하여, 물아(物我)가 동일하다는 이치를 넓힌다면, 그 정치의 공효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 누각(樓閣)의 좋은 경치는 내가 늙었지만 한 번 가서 직접 보며 그 풍경에 임하게 된다면, 마땅히 도은(陶隱)의 뒤를 이어 시를 짓겠다.”
하였다. 영락 6년 가을 7월 일
尙州風詠樓記
尙州本沙伐國。自屬新羅爲大府。迄今千有餘載。山川之秀。人物之繁。爲一道諸州之最。然未嘗有樓臺亭榭之設。其民風之淳朴可想矣。洪武庚戌。牧使金公南得重營廨宇。始置菓園于東北。開亭其中。吾座主韓山牧隱相國名以風詠。仍爲作記。解元星山陶隱留之以詩。二公皆一世文章大手也。此州聲價。實增其重。庚申之歲。倭寇侵犯。官屋民廬盡罹兵燹。明年辛酉。半刺田君理始築州城。招輯遺民。因舊基創別舘。以待使命。庚午。牧使李公復始又創廨舍。而亭榭皆未暇及。今牧使宋公因判官韓公岩協心爲治。弊祛利擧。風敎以興。人民寧謐。於是又就亭之舊址。益闢以廣。起樓其上。且書牧隱之記陶隱之詩。皆復舊觀。一州勝槩爲益增矣。州人前大護軍金公謙來語予曰。吾州自有風詠亭。始得二大儒巨筆以華其光。中遭煨燼。不克復建。久爲州人所羞。今吾牧伯政績卓異。爲諸州冠。其起斯樓。弊不及民。不月而成。使命往來。有所登覽。州民老幼相與慶悅。牧隱,陶隱。予之師友也。何惜一言以繼其後乎。予曰。風詠之義。亭之記盡矣。予奚庸贅。其曰使仗節部符。行過此州者。得如春服旣成之際。和氣洋溢。尙民其幸哉。此其期望於人者甚大。予敢卽此而申言之。孔門諸子各言其志。莫不䂓䂓於事爲之末。曾點獨言風詠而歸。夫子嘆而與之。說者謂有堯舜氣像。盖其胷次悠然。與大靈同體。隨物賦形。各得其所。則其施措之際。必有少懷老安綏來動和之妙。和氣流行。民安耕鑿。皥皥如在春風之中。治效直與大化同運。堯舜之治亦不過此。原其所自。只由胷中無一點私累耳。如使仗節部符之使。登覽之際。洒滌塵煩。消遣世慮。執熱不待濯泉而淸。治繁不待謀野而獲。俯仰之中。酬酢之間。默視風詠之樂而有得於心。以廣物我同然之理。則其治效之效豈不大哉。若其樓中游觀之勝。吾老矣。儻得一往寓目。以臨其風。當爲繼陶隱之後而詠之耳。永樂六年秋七月日。
[주1] 좌주(座主) : 고려 때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그 과거의 시관(試官)을 부르던 말이다.
[주2] 해원(解元) : 향시(鄕試)를 해시(解試)라고도 하는데, 해원이란 해시에서 장원한 사람이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김주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