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기(西村記)
팔선대(八仙臺)로부터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바위산과 수석(水石)의 빼어난 경관이 있는데, 양쪽의 산이 둘러싸 협곡(峽谷)을 이루고 길은 벼랑을 따라서 높았다 낮았다 넓었다 좁았다 하며, 협곡이 다하면 땅이 차츰 넓어져 언덕이 되고 들판이 된다. 이렇게 점점 멀리 가다 보면 민가가 줄지어 있는데 모두 배산 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취하고 있으며,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지고 수목이 울창하고 곡식이 무성하여 매우 좋다.
골짜기는 갈라져 세 가닥이 되는데, 그중 하나는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백암산(白巖山) 기슭에서 끝나고, 그중 하나는 조금 남쪽으로 완만히 휘어져 선암사(仙巖寺) 뒤에서 끝나고, 그중 하나는 조금 북쪽으로 멀리 가서 주령(珠嶺) 아래에 다다른다. 이 세 골짜기를 모두 서촌(西村)이라 이름하는데, 주령 아래가 산이 더욱 기이하고 물이 더욱 맑고 골이 더욱 깊어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문득 은거하고픈 생각이 들게 한다.
아, 기성(箕城)은 바닷가 고을이라, 독한 장기(瘴氣)가 피어오르고 역한 비린내가 풍기므로, 서울 사람들은 이곳을 마치 중국 남방의 미개한 지방들인 조주(潮州), 월주(越州), 담주(儋州), 애주(崖州) 등과 같이 낮추어 보는데도 산수가 이토록 빼어나니, 내륙의 청숙(淸淑)한 지역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천지의 너른 품 안에 산은 겹겹이고 물은 굽이굽이이니 그중에 이름나고 빼어난 경관이 어느 곳인들 없으랴마는, 어느 한 사람 티끌 세상의 속박을 떨치고서 초연히 은거한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세상 사람들이 취몽(醉夢) 속에 혼곤하고 명리(名利)의 길에 골몰하여, 겨우 하나의 자급(資級)이라도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슬퍼하느라 형벌에 저촉되고도 뉘우치지 않고 늙어 죽음에 이르러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 아름답고 빼어난 산수를 적막한 곳에 버려두어 원숭이와 학은 주인이 없고 구름과 안개는 속절없이 늙어가게 만들고 마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취몽 중의 한 사람이라, 기왕의 잘못을 슬퍼하고 깨달음이 더딤을 부끄러워하여, 이에 길게 탄식하고 이렇게 기(記)를 쓰노라.
西村記
自八仙臺而西數十里。有巖巒水石之勝。兩山擁而成峽。路緣崖而轉。或高或低。或寬或狹。峽盡而地稍曠。爲原爲野。行漸遠。民居相望。皆背山臨水。泉之甘。土之沃。樹木之鬱密。禾穀之茂盛。甚可喜也。洞岐而爲三。其一。直而前盡於白巖山麓。其一。稍南而迂窮於仙巖寺後。其一。稍北而遠達於珠嶺之下。三者皆以西村名。而珠嶺之下。山益奇。水益潔。洞益邃。望之令人有掛冠之思焉。噫。箕。海鄕也。瘴癘之所薰蒸。魚蟹之所腥膻。京師之人。視之如潮越儋崖。而山水之勝有如此。況中州淸淑之地乎。乾坤納納也。山之重重也。水之回回也。名區勝境。何地無之。而未聞有一人擺脫塵累。超然長往者。何哉。此由世之人。昏昏於醉夢之中。役役於名利之途。一資一級。得之則以爲喜。失之則以爲戚。觸刑辟而不悔。抵老死而不悟。使佳山勝水虛棄於寂寞之濱。而猿鶴無主。雲煙空老。寧不爲之慨然乎。余亦醉夢中之一人也。悼旣往之非。而愧覺之之晩也。遂喟然而爲之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