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서(族譜序)
남씨(南氏)가 성을 얻은 것은 처음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唐)나라 천보(天寶) 14년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파천하였는데, 이때 수행하던 신하 김공(金公) 휘 충(忠)이 안렴사(按廉使)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의 예주(禮州)에 이르니, 바로 지금의 영해(寧海)이다. 공은 말하기를, “중국과 외국이 똑같은 천하이니, 황제의 땅 아님이 없다. 이곳에 살기를 원한다.” 하니, 경덕왕(景德王)은 천자에게 아뢰고 공이 우리나라에 살려는 소원을 허락해 주었으며, 중국의 여남(汝南) 사람이라 하여 남씨(南氏)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였는데, 영양(英陽)에 거처를 정하여 그대로 본적(本籍)을 받았다고 한다.
뒤에 고려조에 이르러 삼 형제가 있었으니, 군기시 주부동정(軍器寺主簿同正) 휘 홍보(洪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휘 군보(君甫), 고성군(固城君) 휘 광보(匡甫)이다. 홍보는 그대로 영양을 관향으로 삼았고 군보는 의령(宜寧)으로 관향을 옮겼으며 광보는 고성(固城)으로 관향을 옮겨서 족보가 비로소 셋으로 나누어졌다. 군보의 후손 휘 재(在)는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을 보좌하여 개국 공신이 되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으로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로부터 의령 남씨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현달한 자들은 대부분 그 후손이다.
구보(舊譜)와 신보(新譜) 두 족보가 있는데, 연대가 아득히 멀어서 기재한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고(故) 판서 선(銑)이 자료를 모으고 수정하였으나 또한 미비한 점이 많았는데, 지난번에 고 참판 익훈(益熏)이 여러 종인(宗人)들에게 묻고 보태어서 권질(卷帙)을 만든 다음 북도(北道 함경도 )의 관찰사가 되어 목판에 새겨서 널리 인쇄하여 집안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먼 후손과 미천한 후손들로 하여금 모두 성씨를 얻게 된 유래와 파가 나뉜 까닭을 알게 하였으니,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과 종족을 수합하는 정의(情誼)가 부지런하고 또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 족보에 기록된 것을 보면 본적을 받은 뒤로부터 관향을 옮길 때까지가 500여 년이 되는데 보첩(譜牒)에 기록된 것은 겨우 6대뿐이니, 유실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천보 연간에 현종이 촉으로 파천할 때에 수행한 신하로서 사명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에 온 사실은 《당서(唐書)》와 우리나라 역사책에 모두 기록된 것이 없으며 안렴사라는 직함은 또 천보 연간에 있었던 벼슬이 아니니, 이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을 들은 대로 기록하여 고증할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밀직공(密直公) 이상은 의심스러운 내용을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밀직공 이하는 믿을 만한 내용을 사실대로 전할 뿐이다.
민마보(閔馬父)가 《시경(詩經)》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일컫기를 ‘옛날부터〔自古〕’라고 하였고, 옛날을 ‘재석(在昔)’이라 하였고, 예전을 ‘선민(先民)’이라 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이제 의심스러운 것과 믿을 수 있는 것이 유래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감히 사실을 없앨 수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성주(成周)의 제도에 성(姓)을 받은 것을 관장하기 위하여 사상(司商)이라는 관직이 있었고, 세계(世系)를 정하기 위하여 소사(小史)라는 직책이 있었으니, 성씨와 세계가 국가의 정치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관청을 만들고 관직을 세우기를 이와 같이 거듭하고 또 많이 하였단 말인가.
내가 짐작건대 천하는 한 나라를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나라는 한 집안을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집안은 한 사람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지금 한 사람의 몸이 성씨가 있어 그 적(籍)을 나타내고, 집안이 있어 그 종(宗)을 세우고, 족보가 있어 그 대수(代數)를 기록하여, 계통이 후세에 밝아져서 유풍이 그대로 보존되고, 친애하는 마음이 먼 선조에까지 미쳐서 남긴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교화가 한 집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이르러 교화가 점점 이루어짐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니,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성씨와 세계를 소중히 여긴 것이 어찌 아무 이유가 없겠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족보를 만들어서 뿌리를 상고하고 계파를 분별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이는 선조의 덕을 높이고 어짊을 본받아서 낳아 주신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영의공(英毅公)은 타국에서 온 나그네 신하로 몸을 삼가 후손을 도와서 끝내 해동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을 이루었고, 충경공(忠景公)은 나라가 혼란할 때를 당해서 개국하는 시기에 경륜하여 마침내 대려(帶礪)의 훌륭한 공신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후손들이 그 공렬(功烈)을 잇고 그 발자취를 계승해서 무궁한 후세에 이르도록 실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만약 단지 세차(世次)를 드러내고 벼슬과 지위를 기록해서 집안의 높고 낮음을 비교하고 가문의 갑을(甲乙)을 정하려고만 한다면 어찌 오늘날 이 족보를 편찬하는 본의이겠는가.
익훈(益熏)의 중씨(仲氏) 치훈(致熏)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바닷길로 이 목판본을 수송해 갔고, 해임하여 돌아오게 되자 또 밀직부군(密直府君)의 묘소가 있는 의령으로 판본을 옮겨 왔으며, 막내인 지훈(至熏)은 현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으면서 판각을 보관할 집을 경영하여 오래도록 보관할 계획을 하고 있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주갑(周甲)이 되는 정축년(1697, 숙종 23) 8월에 후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구만(九萬)은 삼가 쓰다.
族譜序
南氏得姓。始自新羅。傳以爲唐天寶十四載。玄宗幸蜀。從臣金公諱忠。以按廉使奉使日本。漂到新羅禮州。卽今之寧海也。公曰中外一天下。莫非王土。願居之。景德王奏天子。許其攸居之願。以其中國汝南人。賜姓南。改名敏。封英毅公。卜居英陽。仍受籍云。後至麗朝。有兄弟三人。軍器注簿同正諱洪甫。樞密院直副使諱君甫。固城君諱匡甫也。洪甫仍貫英陽。君甫移貫宜寧。匡甫移貫固城。譜始三分。君甫後孫諱在。佐我太祖。爲開國功臣。封宜寧府院君。領議政贈諡忠景。配享太祖廟庭。宜寧之南始大。今之顯者多其後也。有舊新二譜。而年代遙遠。記載甚疏。故判書銑裒聚修正。而亦多未備。頃者故參判益熏訪問諸宗。添加成帙。按節北關。登木廣印。頒遺族人。使遐苗微裔。咸知得姓之所自來。泒流之所由分。其追遠之誠。收族之誼。可謂勤且厚矣。今觀譜中所記。自受籍至移貫。爲五百餘年。而書牒者僅六代。其多遺失可知。天寶幸蜀時。從臣之奉使日。本漂到新羅。唐書
東史俱無所紀。按廉之職。又非天寶時所嘗置。此皆後人口語相傳。隨聞以錄。無可考證者也。其及今唯當於密直以上。疑以傳疑。密直以下。信以傳信而已。閔馬父引詩之言云稱曰自古。古曰在昔。昔曰先民。不敢專也。今其疑其信。所自來久矣。安敢沒也。蓋聞成周之制。掌受姓有司商之官。奠繫世有小史之職。姓氏族世。何與於邦國之治。而設職建官如是其重且複乎。余意天下者一國之推也。一國者一族之推也。一族者一人之推也。今自一人之身。有姓而著其籍。有族而立其宗。有譜而紀其世。使其統緖明於後。而流風猶存。親愛及於遠而遺敎不泯。則是一人之化成於一族也。夫然則自族而國。自國而天下。其化之漸成。猶反手也。聖王之治。所以爲重。夫豈徒然哉。惟其如是。故所貴乎修譜。而稽其本源。辨其系泒者。爲其崇德象賢。無忝其所生也。英毅公以羈旅之臣。禔躬燾後。終成海東之盛族。忠景公當板蕩之時。經綸草昧。遂爲帶礪之功宗。此實後孫所當襲其烈繩其武。罔墜於無窮者也。今若但爲著世次紀官位。欲以較高卑定甲乙。則豈今日所以修譜之本意哉。益熏之仲致熏尹慶州。自海路運致刊板。及其解歸。又移送宜寧密直府君墓下。其季至熏方牧晉州。將經紀藏板之室。以爲久遠之圖云。時崇禎紀元周甲後丁丑八月。後孫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九萬謹序。
[주1] 민마보(閔馬父)가 …… 하였다 : 민마보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大夫)로 민자마(閔子馬)라고 칭하기도 하며 선민(先民)은 옛날의 성인(聖人)을 이른다. 《시경(詩經)》 상송(商頌) 나(那)에 “예로부터 옛적에 선민들이 공경한 일을 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하여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였다.〔自古在昔 先民有作 溫恭朝夕 執事有恪〕” 하였는바, 민마보는 이 시를 인용하여 옛 성인들은 이 공경하는 도를 자신이 처음으로 했다고 하지 않고 ‘자고(自古)’니 ‘재석(在昔)’이니 ‘선민(先民)’이라고 하여 반드시 옛날에 근본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國語 卷5 魯語》
[주2] 대려(帶礪) : 나라와 함께 복록을 누릴 공신이란 뜻으로 흔히 개국 공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들을 봉작(封爵)하면서 맹세하기를,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도 나라가 길이 보존되어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겠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寧 爰及苗裔〕”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성백효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