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참 겨울인데 이상스럽다. 눈이 오다 비가 오고 비가 오다 눈이 오기를 반복한다. 한 낮이 되면 녹아내리고 어두움이 내리기 시작하면 얼어붙는다. 종잡을 수 없는 겨울이 이어지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 보면 음력 정월 언저리에서 매화향을 맡을 것 같은 기대가 모아진다. 아침 방문을 나서자 문서보관용 비닐주머니가 보이고 그 위에 적당한 글씨로 실손보험 청구서란 적혀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느낌이 정리되었다. 제노베파가 외출을 하면서 보험사를 방문하여 접수를 해달라는 의미였다. 이런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도와준 일이기에 익숙한 편이다. 본인이 하는 것보다 내가 해 주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동안 모아 놓은 병원진료와 약제와 관련된 자료를 망라하여 보험사가 요구하는 양식을 작성하고 증거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묶어 제출하면 되는 일이다. 간혹 접수 담당자가 의문이 있는 문제는 핸드폰을 이용하여 제노베파와 연결하여 담당자와 연결해 주면 모든 것이 해소된다. 우선 샤워 후 간단하게 대형컵에 조식 대용으로 먹는 곡물가루를 넣고 더운물을 채웠다. 모락모락 피는 물 익은 기운이 피어오르면서 곡물 특유의 향이 식욕을 끌어올린다. 서너목음으로 갈라 마시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챙긴 후 거리로 나섰다.
요즈음 사나흘 간격으로 내리는 눈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여 양달은 걷기 편하지만 음달은 얼어 있어 조심스럽다. 이 점을 감안하여 신발을 동계전문용으로 선택하였다. 목부근에 털이 달려 있고 바닥에는 등산화 이상으로 엣지가 발달되어 있어 미끄럼방지에 효과적인 신발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하여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데 ㄱ자 모양을 닮은 유리회랑은 꼭 각종 식물들이 전시된 식물원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철마다 바뀌는 나무에는 각종 나무꽃들이 화사하고 특히 매화꽃이 색색으로 피어 특히 인상적인 곳이다. 사철 푸르게 본연의 색을 표현하는 대나무도 심어져 있어 보기가 좋다 특히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대잎이 보기 좋고 눈꽃이 잎과 가지에 일자로 걸려 있는 모습이 청정함을 간접표현하고 있어 겨울에는 이 분위가 덩달아 좋게 느껴지는 곳이다. 매화나무 가지는 메마르지만 빛이 투과되어 가득한 열기는 봄의 나른함을 느끼게 하여 매화가지에 움이트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매년 이맘때 즈음 매화나무 빈가지를 살피다. 가지치기가 꼭 필요한 부분을 탐해 두었다가 작은 전지용 가위를 이용하여 몇 가지 잘라 모 우유회사에서 식음료 병으로 출시한 제품 병에 꽂아두면 철이른 매화향기를 접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은 구정 전후에 해두면 봄기운 맞이 하는데 도움이 된다.
승강장에 서서 천정에 걸려 있는 전철도착 시간표를 보자 5분 후에 도착예정이란 사인이 떴다. 습관대로 7-1 객차 앞에 섰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행운을 최초로 갖겠다는 무언의 욕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이다. 늘 이런 사유의 버릇이지만 결과에 대하여 단 한 번이라도 점검한 적은 없었다. 두 개의 문이 극초의 구분으로 열리고 닫혔다. 문에 들어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오른쪽에 위치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왼쪽으로 잡을 것인가? 우측은 경로석 방향이고 왼쪽은 일반석으로 긴 통로가 있는 곳이다. 가급적 우측을 선호한다. 좌측은 학업이나 직장생활과 가사업무 등등에 집중해야 하는 나이들인데 나잇살 먹은 자가 앞에 턱 버티고 서 있으면 심적인 부담을 줄 것 같다는 생각에 피하게 되는 것이다. 단거리는 상관없지만 1시간 이상 요하는 거리는 상당한 부담을 가질 적이 많다.
사진처럼 아직은 보조용 스틱이 필하지 않지만 장시간 서 있으면 근육 전체가 뻣뻣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근력에 탄력이 많이 줄 었기 때문이다. 근력이 경화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불편 때문에 요즈음 이동하는 방법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는 편이다. 30분 이내에는 상관없지만 1시간 이후 걸리는 거리를 서서 이동할 때는 한번 정도 내려 승강장 대기석 의자에 앉아 15분 정도 책을 읽은 후 다시 타고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하거나 적당한 거리에서 내려 버스를 이용하여 이동하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다. 장시간 걸리는 목적지는 차를 타고 손수 운전하고 이동하지만 서울 내에서 이동하는 방법은 걷고, 지하철, 버스 또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편이다.
보험사와는 10분 거리므로 서서 가는 것으로 정하고 이동하여 보험사 건물 10층을 방문한 후 일건 서류를 바로 제출하였다. 창구로 접근하자 담당자가 책상으로 가서 서류작성한 후 제출하라 권유하였지만 모든 서류는 작성해 갖고 왔다고 하고 증명서와 함께 작성해 놓은 서류를 밀어 넣었다. 뒤적거리며 확인하다 복사기로 가 모든 제출서류를 복사 후 원본은 돌려준다. 그리고 신분증도 복사 후 신청서 표지 위에 클립으로 묶은 후 돌려받았다. 걸린 시간은 약 5분이었다. 10층에서 계단을 이용하여 건물밖으로 이동하여 건물 외부로 빠져 나와 잠시 머뭇거리다 내친김에 광화문 서점으로 가 동안 밀어 놓은 일을 종결하기로 한 후 동선을 그려 보았다. 이곳에서 전철이 있지만 꼬박 광화문까지 서서 가야할 확율이 100%라 동선을 정리해 본 것이다. 결론은 종각역에서 내릴 수 있는 경우를 찾고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면서 작은 언덕길 빌딩 사이를 걸어 넘었다. 힁단보도를 넘어서기 위하여 잠시 멈춰 섰다. 그때 눈에 익은 버스가 휘리릭 지나갔다. 눈여겨보며 정차위치를 확인한 후 길 복판에 있는 정류장으로 다가가 버스를 기다렸다. 10분 후에 도착 예정이었다. 이 버스를 이용한 후 1호선과 연계되는 곳에서 환승하면 최소한 착석이 가능한 시간이 길어진다는 판단이 섰다. 곧 도착한 저상버스는 좌석수가 적은 편이다. 특히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있는 버스는 앞부분엔 좌석이 거의 없다. 승차확인기에 체크한 후 버스 뒤쪽 장의자 구석 창가로 가서 앉았다. 전철의 어두운 터널과 달리 버스창가에 스치는 풍경들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문명의 겉모습들을 시시각각 보여주며 달음질을 하였다. 중앙 버스전용차도를 달리니 생각 외로 빠르게 도착해 주었다. 환승을 하기 위하여 횡단보도 두 곳을 넘어 지하로 내려섰다. 체크인 후 전철을 탑승하지 빈좌석이 많아 여유롭게 종각역까지 갈 수 있었다. 종각역에서 내린 후 계획한 일을 차례차례 처리하였다. 참 홀가분하였다.
겨울 자연은 무채색이다. 다행히 설경이라도 보여주니 견딜만하지 건조한 겨울을 넘긴다는 것은 악몽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럴까? 상고대나 설경을 무척 좋아한다. 강설이 밤새 내리는 날에도 차를 몰고 다가 가 태백산과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설악산을 오른 적이 많았다. 심지어 남해바다를 넘어 한라산도 숱하게 찾아 설경을 원 없이 찍어 본 적도 많았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행장을 꾸리고 나설 수 있지만 용기가 예전처럼 강하지 못한 편이다. 자꾸 움츠려드는 자신을 대할 적이 많아진 것이다. 일심동체가 본연이었지만 지금은 분리되어 점점 간격이 벌어지는 것이 마음과 몸의 간격이 되어버렸다. 집을 나서면서 소형카메라를 손가방에 넣고 나왔다. 예정된 일을 정리한 후 고궁이나 남산자락 겨울 스케치를 할까 하는 생각에서다. 아니면 내가 태어나 사춘기 무렵까지 자란 마을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나의 본적은 서울이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아 온 집 안이다. 지금도 눈을 감고 옛 동무들과 뛰어놀던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동무들의 이름을 대라 하면 전부 외우고 있어 부담 없이 슬슬 외울 것 같다.
보통 내가 속한 나이를 사람들은 황혼이라 부른다. 황혼 하면 서쪽 삼각산 자락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낙조가 떠오른다. 구름이 많이 떠돈다 하여 붙여진 백운대란 이름에 걸맞게 삼각산에 노을이 물들면 정말 장엄하면서도 아주 근사한 핏물 같은 노을이 펼쳐진다. 자연의 폭과 깊이가 남다르던 시기였던 50-60년대에는 그런 노을과 설경이 장관을 이루었는데 문명이 삼각산을 휘감은 이후로는 그러한 설경이나 노을, 별빛은 보기가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워졌다. 산천도 동안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산천도 그러한데 인간이 수명 따라 변화하는 것은 섭리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젠 할 수 없다. 나이 숫자가 늘어가면 자신의 약점도 함께 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 약점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수정 보완해 나가면서 여생을 살아가면 될 일이 아닌가 한다. 고궁이나 내 고향 마을을 찾는 것은 뒤로 미루고 내친김에 청계천 물 길 따라 걸으며 옛 뚝에 있던 염색공장, 헌책방, 기동차 길, 무허가 판자촌 등등 떠 올리며 추억이 현실과 추억 사이를 배회하다 귀가를 정한 후 전철에 올랐다. 마침 좌석 하나가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기쁨으로 웃으며 받아들이며 앉았다. 그리고 내가 내릴 역 일곱 역 전에 일어서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다음칸으로 자리를 옮겨 서서 이동 후 내렸다. 역에 붙어 있는 공원으로 가 산책 길을 걸으며 다리 근력을 풀어주고 조이면 걷다 매향을 그리워하며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