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가 절에 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기도와 염불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잃어버린 시심(詩心)과 낭만을 되찾는 공간의 절이 돼야 한다. 기도와 염불이 어떤 종교적인 목적을 갖는 유의(有爲)의 행위라면, 시심의 솟구침이나 감미로운 낭만은 신명 나는 무위(無爲)의 행위이다.
원래 원시사회에서는 일과 노는 것이 하나였다. 요즘은 일은 쓸모가 있고, 노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식으로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람은 잘 쉬어야 맑은 정신으로 일을 잘 할 수 있다. 이웃과 더불어 잘 쉴 줄 알고,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또 그런 환경을 만들어가는 국가가 일류국가인 것이다.
절에는 정신의 유희라고 할 수 있는 시(詩)가 있다. 절은 한 권의 시집(詩集)이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시(詩)자는 말씀 언(言)자와 절 사(寺)가 결합된 것이다. 욕심을 털어버린 불자의 말이나, 수행자의 탈속한 말은 곧 시가 되는 이치다. 불립문자라 하여 시문을 경원시하는 스님이 더러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삼국유사> 제 5권 피은편(避隱篇) 포산 이성(包山二聖), 즉 포산의 두 성인을 얘기하는 부분에 나온다. ‘신라 흥덕왕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란 두 스님이 포산에 숨어 살고 있었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는데 서로의 거리는 10리쯤 되었다. 두 스님은 달이 뜨는 밤이면 구름길을 헤치고 노래하면서 서로 오갔다.
두 스님의 마음을 산 속의 나무들이 전해 주었다. 도성이 관기를 만나고 싶어 하면 비슬산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관기가 사는 쪽으로 굽혀 주었고, 관기가 도성을 만나고 싶어 하면 그 반대로 움직여 주었다.
유가사 입구에 이르니 일연스님의 시비(詩碑)가 먼저 반겼다. 바위 앞면과 뒷면에 각 한 편씩 새겨져 있는데, 두 편 모두 관기와 도성의 얘기를 듣고 쓴 일연스님의 시로서 빼어난 절창이었다.
산나물 풀뿌리로 배를 채우고
나뭇잎 옷으로 몸을 가리우니
누에 치고 베 짜지 않았네
찬 솔 나무 돌너덜에 소슬바람 불어
해 저문 숲엔 나무꾼도 돌아가고
깊은 밤 달 아래 앉아 선정에 들어
이윽고 부는 바람 따라 반쯤 날았도다
해진 삿자리에 가로누워 잠이 들어도
꿈속에서라도 혼은, 속세에 이르지 않았으니
구름이 놀다 간 두 암자 터에
산 사슴 마구 뛰놀고 인적은 드물구나.
같은 바위 다른 면에 새겨진 시도 역시 속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 오고 가며 구름 샘에 노닐던
두 스님 풍류는 몇 백 년이나 흘렀던가
안개 자욱한 골짜기엔 고목만 남아 있어
고개숙인 그림자 아직도 서로 맞이하는 듯.
相過踏月弄雲泉(상과답월롱운천)
二老風流幾百年(이로풍류기백년)
滿壑煙霞餘古木( 만학연하여고목)
偃昻寒影尙如迎 (언앙한영상여영)
특히 이 시에서는 두 번째 행의 풍류(風流)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풍류란 음주가무가 아니라 관기와 도성처럼 바람이 흐르는 것을 보고, 서로의 마음을 읽는 ‘절정의 낭만’인 것이다. 우리 한국인만의 멋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 풍류이다. 처마 밑을 스치는 바람에 귀를 맡겨보고, 절 마당가에 선 나뭇잎의 흔들림을 보고서 시심에 젖어보는 그런 낭만이 바로 풍류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최치원은 풍류를 유불도 삼교가 포함된 우리나라 고유의 그윽하고 현묘한 도(玄妙之道)라고 했다. 풍류도의 핵심은 하늘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되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도(道)라고 말했다.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정신, 삶의 방법, 고상한 낭만이란 뜻이다. 풍류도 일종의 노는 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의미가 자못 깊다. 우리 민족은 널리 모든 만물을 유익하게 하는 분으로 믿어왔다.[弘益人間].
일하는 것만 가치 있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시를 읊조리는 것과 같이 풍류 차원의 노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공자는 말했다. "시를 읽으면 품성(品性)이 맑게 되고 언어가 세련되며 물정(物情)을 통달 하니 수양과 사교 및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다.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은 마치 바람벽을 대하는 것과 같다."
출처 : 정찬주 불교 이야기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