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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율법과 복음에 대하여
<의외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사람들은 외곡하거나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잘 모르면 성경 전체는 물론 내가 새롭게 의도하는 “만유회복”을 잘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을 몇 차례 보완 후 뒤편을 쓰기로 하였다. 율법과 복음을 보강하고 구분하는 의미있는 시간들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1. 율법은 구약을, 복음은 신약을 기초로 한다.
율법은 구약을 기초로 하고, 복음은 신약을 기초로 한다. 신구약 성경은 율법과 복음에 관한 내용을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이의 이해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율법은 구약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고, 복음 곧 예수를 증거하는 증거는 신약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보다 범위를 넓히면 구약은 율법과 선지자로 이루어져 있고, 신약은 예수와 복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은 복음의 보물창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 전체를 복음으로 조명할 만큼 웅장하고 거대하다. 마11:11-14절을 보면 주님께서 모세보다 세례자 요한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선지자로 택함을 받아 태어나서 선지자로 살다가 선지자로 죽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자기 뜻대로, 욕심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선지자가 되었다. 특히 어느 선지자도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고, 우리는 죄 가운데서 구원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영으로 거듭나서, 곧 위로부터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구약의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므로 하늘에서는 아무리 작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세례자 요한 보다는 크다고 하셨다. 요한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자 요한까지이다. 세례자 요한 이후로부터 신약은 예수와 복음으로 말미암는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선지자는 죄사함을 받을 소망을 갖게 하며, 예수는 예언에 따라 오셔서 죄사함을 이루시고 복음은 예수를 증거한다. 구약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로 절망할 수 밖에 없으니 바로 율법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소망을 전했으므로 곧 구약의 복음이다.
신약은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요, 복음은 예수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예수와 복음은 떨어질 수가 없다. 구약은 율법과 선지자로 신약은 예수와 복음으로 되어 있다. 율법은 율례와 법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에서는 선악과 계명을 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는 십계명을 주셨다. 이 십계명은 약 천 여 가지 법을 이루는 근본이다.
십계명 중 제 1 계명에서 제 4 계명까지는 신본주의 계명으로 이를 어겼을 시 죄(罪)라고 한다. 이를 이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범하는 죄가 된다. 십계명 중 제 5 계명부터 제 10 계명까지는 인본주의 계명으로 이를 어겼을 시는 악(惡)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에게 범하는 악이다. 죄악이란 하나님께 범하는 죄와 인간에게 범하는 악을 말하는 것이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아우를 죽였다고 했다(요일3:12). 세상 기준으로 죄란 심사언행, 이 네 가지가 잘못되면 죄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향한 네 가지 계명을 범할 때 죄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죄인이요, 이웃에게 대하여는 악한 자이다. 율법은 십계명을 기초로 전개된다. 율법의 용무는 정죄이다.
율법의 정의는 의인이 없다는 것이다. 마귀는 율법을 악용한다. 마귀는 밤낮 참소하는 자(계12:10)요,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 사이에게 이간하는 자(욥1:5-12)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귀는 욥의 소유물, 몸, 친구, 아내까지 거두어 갔다. 마귀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욥을 이간하는 자이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할 뿐 인간을 의롭게 할 요소가 없고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율법을 품는 것은 저주를 품는 것이요,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저주 아래로 끌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법)를 두시고 비추어 죄인이라면 심판하시고 처벌하실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심은 율법을 지켜서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율법으로 의로워질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하고 한다. 살인하지 않으면 의인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니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미워하지 않으면 의인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무관심한 것은 살인이라고 한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께 자신이 아우를 지키는 자냐고 반문했다.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 살인이라고 말한다(요일3:10-16). 또한 사랑은 목숨을 버리기까지, 목숨을 내놓고, 목숨을 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목숨을 줄 수 없다면 사랑이 아니요 역시 살인이라고 말한다(고전13:1-3; 요15:12).
목숨을 주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목숨을 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의 목숨은 다 자기 죄로 인해 목숨이 팔렸다. 그러므로 목숨을 내놓고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인간은 살인하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다. 목숨을 대속물로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죄 없는 그분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목숨을 내어 주어도 자기 죄로 인해 팔렸으므로 저기 죄로 죽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도 자기 목숨을 가지고 있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뿐이다.
마5:16-20절은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글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 1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 다 성취되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가장 작은 이 명령들 중의 하나를 어기고 또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리되 누구든지 그것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 곧 그는 하늘의 왕국에서 큰 자라 불리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결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한다는 것은 헬라어의 의미로 강화하고 보강하여 해석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이다. 곧 율법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육체의 예법은 되어도 본질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비록 간음하지 않게 할지라도 마음의 음욕은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7장은 산상수훈으로서 예수의 율법에 대한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이 아니라 예수의 율법이요 율법에 대한 주장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율법을 강화하셨다. 율법으로 외식은 가능해도 본질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 율법의 용무, 의무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받아내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고백하게 하는 법이다. 바리새인은 외식자란 뜻이 아니다. “바리새”란 거룩, 구별이라는 뜻이다. 바리새인은 훈련을 통하여 거룩해진다. 바로 훈련을 통하여 의롭게 되려는 것이다. 곧 바리새인은 행위를 통하여 의롭게 되려는 노력을 펼쳤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신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지 않으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필요가 없게 되고, 그들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외식만 하는 그들에게 율법을 강화하여 정죄하심으로 그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걸리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나 예수님의 율법대로라면 빠져나올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의 용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요, 복음의 정의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찾으시고 믿음을 갖게 하신다. 율법의 강령, 근본, 본질은 사랑이다(눅10:25-28). 율법은 거룩한 법이요(롬7:12), 선한 법이며(롬7:16), 신령하고(롬7:14), 의로운 법(롬7:12)이다.
율법대로 살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고 신령하게 살아야 한다. 율법은 자체로는 흠이 없다. 하나님은 율법을 흠잡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에게 율법이 약점이 있는 법이 되는 것은 율법대로 다 준행한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약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으나 율법으로 신령했다. 율법을 절대 준행하면 신령해진다. 또한 의로워지고 선해지며 거룩해진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대로 다 준행해도 구원받지 못하므로 결국은 절망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율법은 흠이 없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율법 자체를 폐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구원받을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애당초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복음에는 용서가 있다. 그러므로 용서가 복음이다. 용서받는 자격은 회개이다. 구약에는 회개가 없다. 율법은 회개가 없고 심판만 있을 뿐이다. 율법을 다 준행하면 상을 받으나 구원받지는 못한다. 천하 영광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복음에는 용서가 있다. 곧 회개하면 죄사함을 얻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지성소에서 속죄가 이루어진 후 양에게 죄를 옮겨 광야로 보내야 한다(대속죄일). 이는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졌으니 이제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이미 죄가 사해졌으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려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
복음은 율법에 회개를 더한 것이요, 복음에서 회개를 제하면 율법과 같다. 선지자의 예언을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들이 절망하지 말라고 선포하고, 회개할 수 있는 날이 곧 이를 것이라고 증거했기 때문이다. 용서가 없으면, 곧 회개가 없으면 복음이 아니다. 용서는 이루어졌으니 회개해야 한다. 복음은 율법에 회개와 그리스도의 공로, 곧 용서가 더한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공로(용서)를 더해 회개케 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유익한 것이요, 회개가 없다면 복음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법으로서 잘못된 법이 아니다. 다만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예수는 이미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다. 그가 피를 흘리심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함이다. 이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다. 우리는 이 땅에 있을 때 회개해야 한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축복이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할 뿐 인간을 의롭게 할 요소가 없고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율법을 품는 것은 저주를 품는 것이요,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것은 자기를 스스로 저주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심은 아무든지 예수를 사모하게 하려 하심이요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일을 속히 포기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는 모두가 죄인임을 알게 하신다. 예수는 죄인을 찾아 오셨다.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법으로서 잘못된 법이 아니다. 다만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신약과 구약을 구별해주셨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