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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과 기원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 119:2, 7~8).”
한 주간 동안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시고
거룩한 주의 전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장하사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화평하게 하는 자
마태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누구에게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말 하나님 아들 같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자기 품을 떠나 이미 원수가 되어 버린
인류를 친히 찾아 오셔서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자기와 화목하자고 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시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하나님의 이미지를
문 밖에 서서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묘사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자신이 그런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만들 때도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 인간은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과 똑같이
더불어 함께 사랑하면서
교제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등 돌리고
원수 짓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려고 한
본래 인간의 실존이 아닙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과 같은 모습의 인간을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평화를 깨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수지게 만들고,
서로 상처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하고는 닮은 데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사탄의 아들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이 원래 하는 짓이
가르고 나누고 미워하고 원수 짓게 하고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우리 조상을 유혹한 후에
하나님과 원수 지게 만든 것이 누굽니까?
사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하와로 하여금
900년이 넘도록
갈등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900년 이상씩 살았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에덴 동산에서
그렇게 밀월의 단 꿈을 꾸면서
행복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에덴 동산 밖으로 쫓겨 나와,
땅을 파면서 더위와 싸우고 추위와 싸우며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고
원망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마귀가 계속 마음을
충동질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담이 부인을 향해
이렇게 짜증내고 원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선악과는 따먹어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키나?
자기만 고생하면 모르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까지 못 살게 하나?'
그러면 아내가 가만히 있었을리 없지요.
'아니, 당신은 남편이 되어 가지고
내가 선악과 먹을 때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요?
막았으면
이런 일이 없을 것 아니예요?'
그 당시는
사람이 900년 이상 살았기 때문에
아마 오래오래 싸웠을 겁니다.
그 집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사탄이 가인을 또 충동질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동생을 질투하여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비극이
그 땅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사탄은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닫고
등을 돌리고
서로 원수 지면서 살고 있는가
한번 보십시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한 것 같습니다.
부부 사이가 더 한 것 같고,
형제 사이가 더 한 것 같고,
오랫동안 사귀었다는 친구 사이가
더 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수록
이상하게 점점 마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자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기가
너무너무 부끄러울 정도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 대법관을 지낸 워랜 버거라고 하는 분이
탄식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갈수록 소송을
이렇게 많이 하는가?'
판사들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소송 건수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원인이 어디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나서
자기 나름대로 답을 얻었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그 기능을 잃어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교회가 제 구실을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는
웬만한 충돌이나 웬만한 갈등이 있어도,
혹은 이해 관계가 얽혀도
서로 양보하고 용서하면서
풀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자기들끼리 해결하려고 했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기도하면서
해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정에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와 같은 도덕적인 힘을 잃고
더 이상 사람들의 심성을 떠 받쳐 주지 못하자
결국 문제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스스로 감당을 못하고
모든 분쟁을 다 법원으로 끌고 가서
전부 다 고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소송건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미국만 그렇습니까?
우리나라는 안 그런가요?
사람들이 점점 마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사탄의 아들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피스 메이커가 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형틀을 보면
수평과 수직이 있듯이,
복음을 전하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화목하게 되고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사랑으로 함께 이어집니다.
이것이 십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면
그 진리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과 원수된 자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비로소 옆에 있는 형제들을
껴안을 수가 있는
피스 메이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는 원수된 관계를 소멸시킵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십자가의 복음,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원수의 담을 헐어 버리고,
먼 데 있는 자나 가까운 데 있는 자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화목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원수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피스 메이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담대히 전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을 닮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려면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한번 금이 간 사이는
피차 용서하지 않고는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어떤 이유 때문에
마음에 서로 갈등이 생기고
갈리게 되면
지체하지 말고 피차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물론 잘못한 쪽이 먼저 와서
용서를 빌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목하기를 힘써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엄청난 경제적인 피해를 주고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잘못했다는 소리 한 마디 하지 않는,
정말로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가 먼저 찾아가서
그를 먼저 용서해 주고
서로가 마음의 담이 높이 쌓이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큰 용서를 받은 우리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 보다
더 많은 용서를 해야 합니다.
용서는 단순히 시간과 함께 잊어버리는
망각의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나도 용서해 주려는 모방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결단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용서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7번 정도면 됩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유명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평생을 뼈가 부스러지도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어떤 신하가
왕에게 가서 그 모든 빚을
탕감 받는 비유였습니다.
결론이 이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마치 빚을 탕감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빚을 탕감해 준다는 것은
돈을 날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을 못 받기 때문에
날리는 것이 아닙니까?
재정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라고 말합니다.
용서는 손해 보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가 받을 것을 못 받는 것입니다.
용서는 나에게 있는 좋은 것을
날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푼도 손해 보지 않고
한 마디의 말도
불쾌한 것은 듣지 않겠다는 계산으로는
아무도 용서하지 못하고,
아무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내가 희생을 감수할 때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용서로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담을 허는 것과 같습니다.
담이 무너지고 장벽이 무너지면
그 다음에는 그 부서진
많은 벽돌 조각들을 치워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했다고 서로 말은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앙금은 남아 있습니다.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서먹서먹합니다.
여전히 상한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싸맬 수 있는
후속조치가 따라와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피차 용서한 다음에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묶는 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용서를 했으면
용서했다는 그것으로 머물지 말고
더 자주 만나서 위로하고,
더 가까이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서로의 상처를 싸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후속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피스 메이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셋째로, 화평을 깨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다른 말로 하면
좋은 관계가 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써 지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푸다조(spoudazo)'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피에 굶주린 군중들이
원형극장에 모여 검투사들이 싸우다가
어느 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괴성을 지르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잔인한 문화였습니까?
자기 순번이 돌아와
손에 칼이나 창을 들고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검투사에게
그를 훈련시킨 조교가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푸다조.'
'죽지 않으려면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라.'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에베소서 4장 3절에
그대로 인용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깨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는 유리 그릇과 같습니다.
조금만 잘못 다치면 깨져 버립니다.
금이 가 버립니다.
한 몸이라고 부르는 부부 사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1분이면 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잘해 주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원수된 사람이
어디 한두 명입니까?
인간관계가 얼마나 예민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이것이 깨어지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이 노력이 없으면
우리가 피스 메이커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 이하를 보시면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굉장히 중요한 말씀 하나가 나옵니다.
형제에게 나도 모르게 '라가'라고 욕을 했습니다.
형제에게 나도 모르게
미련한 놈이라고 저주를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가까운 형제기 때문에
그냥 욕을 한 것이고
저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전에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데
갑자기 형제에게 저주하고 욕한 것이
생각이 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제사를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것을 중단하고
그 형제를 찾아가서 잘못 했다고 사과하고
화목하고 용서를 받은 후 돌아와서
제사를 다시 지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한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나중에는 그것이 악화될 때
어떤 피해와 고통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막으라는 것입니다.
깨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하겠지만,
깨어지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은
더 중요하고 더 보람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함부로 인간관계를 깰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나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정성을 다해서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잘 압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지만
동시에 본 받아야 할 피스 메이커입니다.
그에게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두 가정이 점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재산이 늘어났습니다.
그 당시의 재산이라면
가축을 의미합니다.
양쪽 집에서 다 가축이 늘어나자
초장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밑에 있는 목자들이 서로 다툽니다.
자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히
아브라함과 롯 사이도 불편해졌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조카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서로 친족간인데
싸우면 안 된다. 싸우지 말자.
싸우지 않기 위해서
네가 동으로 가면 내가 서로 가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우리가 갈라서자.'
제의를 했습니다.
롯은 그 말을 듣고 잘됐다 싶어
좋은 땅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롯이 좋은 땅을 선택해서 옮기자
자연적으로 아브라함은
반대쪽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반대쪽은 목축하기가
그렇게 썩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갖고 있던
좋은 조건을 다 포기해 버리고
그 쪽으로 옮겼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이렇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평화가 재산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형제와 형제가 우애하고 사랑하는 것이
돈을 모아 놓는 것보다도
더 보람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손해보고
자기의 재산이 좀 축이 나도
형제 사이가 잘못 되지 않기를
그는 바랬던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조금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 영토를
다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스 메이커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것 저것 양보하고
서로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애를 쓰다가도
돈 문제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켭니다.
절대 양보 안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마귀의 아들 같습니다.
돈 하면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자기를 닮은 데가 있어야
귀여워 해 주실 텐데
마귀를 닮은 데가 더 많은 사람을
어떻게 축복하시겠느냐 그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 살고 싶습니까?
피스 메이커가 됩시다.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을 전합시다.
서로 용서합시다.
그리고 힘써 우리의 평화를 지킵시다.
여러분, 가정을 돌아보십시오.
오늘 당장 가서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야 될
사람들이 없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일하는 현장으로 가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교회 안에서
구석구석을 돌아보십시오.
서로 담을 쌓고
1년, 2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
그대로 방치하면 안됩니다.
그대로 방치하면서도 날마다 기도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여
서로가 손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에게 화해자의 모습,
화해자의 겸손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서 나가서
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는
사람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예물을 성별하옵소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드리게 하시옵소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드리는 손길에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내려주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며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축도
우리를 모든 죄와 허물에서 구속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성령님의 임재가
주의 전에 나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고 돌아가는
사랑하는 교우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