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장령공 묘갈 음기〔先祖掌令公墓碣陰記〕
우리 장령(掌令) 선조의 묘갈(墓碣)은 바로 태학사 허백당(虛白堂) 성공 현(成公俔)이 짓고, 성균 진사 홍공 언국(洪公彥國)이 글씨를 써서 정덕(正德) 16년 신사년(1521)에 세웠으니, 바로 우리 중종 대왕 16년의 일이다. 금상 20년 경진년(1820)과는 3백 년의 세월이 흘러 비갈(碑碣)과 귀부(龜趺)가 오래됨에 따라 이지러진 곳이 있었는데, 올봄에 큰 바람에 꺾이고 말았다. 후손 김이재(金履載)가 이때 본도(本道 경상도)의 관찰사로 있었기에 이에 대구(大邱)에서 돌을 캐서 장차 다시 세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옛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이지러져 모사할 수 없었으므로 후손 중에 귀하고 현달한 자를 시켜 글씨를 쓰게 하자고 논의하였다. 이때 마침 후손 김병관(金炳觀)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행서로 쓴 이 비갈명 및 선조비(先祖妣) 숙인(淑人) 김씨(金氏)의 행장과 승지공(承旨公 김태(金兌))의 비갈명(碑碣銘)을 합한 두루마리 하나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김병관의 선조 대에 퇴계 선생의 문인이었던 사람이 있어서 선생께 글씨를 청하여 집안에 전해온 것이었다.
관찰사가 그 두루마리를 가져다 서울의 여러 종인(宗人)에게 보내고 후손의 글씨와 선생의 글씨 중에 어느 것을 쓰는 것이 나은지 두루 자문하였다. 불초한 내가 말하기를 “선생의 글씨가 본디 좋습니다. 후손이 비록 귀하고 현달해도 선생 같은 대현(大賢)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선생의 글씨로 새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종인들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인(工人)으로 하여금 공손히 모사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오호라! 지난날 종인(宗人)이 선생께 글씨를 청하고, 선생이 그를 위해 글씨를 쓴 것이 어찌 반드시 오늘이 있을 줄 먼저 알았서였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본다면 참으로 오늘의 일을 기다림이 있는 듯하니, 본래 우연이 아니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물며 수백 년 동안에 전란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도 이 두루마리가 여전히 탈이 없었던 것은 또한 선생의 덕화(德化)가 문인에게 끼침이 깊어 한 글자나 작은 종이조차도 사람들이 모두 목숨처럼 보존한 것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지금 선생의 글씨로 거듭 비갈을 세우게 되니, 어찌 우리 선조의 성대한 덕을 더욱 빛나게 하지 않겠는가.
선생께서 두루마리에 비갈명을 쓴 뒤에 또 “비갈의 글 중에 ‘서북일도(西北一道)’의 ‘일(一)’은 아마 ‘일(馹)’이 되어야 할 듯하니, ‘일(馹)’과 ‘일(一)’은 음이 같아서 잘못하여 ‘일(一)’로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로(驛路)의 폐단에 대해 주로 말하면서 서북방의 일도(一道)라고 범범하게 일컫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선생의 이 변석은 또 명확하고 마땅하여 의심할 것이 없으므로 지금 글씨를 새기면서 ‘일도(一道)’의 ‘일(一)’을 삼가 ‘일(馹)’로 바꾸어 선생의 말씀을 따랐다고 한다.
[주1] 선조 …… 음기 : 1819년(순조19) 전후에 지은 글로, 안동에 있는 선조 김영수(金永銖, 1446~1502)의 묘갈이 부서져 다시 세우게 된 내력을 서술한 음기이다. 묘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역골에 있다. 김영수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적옹(積翁)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판관을 지낸 김계권(金係權)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제평공(齊平公) 권맹손(權孟孫)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숙하여 음보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내직으로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 상주 판관(尙州判官), 영덕 현령(盈德縣令), 영천 군수(榮川郡守) 등을 지냈다. 성품이 민첩하고 사무에 숙달되어 옥사를 잘 다스렸다고 한다.
[주2] 김이재(金履載) : 1818년(순조18) 11월 3일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1820년 10월 2일까지 재임하였다.
先祖掌令公墓碣陰記
我掌令先祖墓碣。卽大學士虛白成公俔撰。成均進士洪公彥國書。竪於正德十六年辛巳。寔我中宗大王十六年也。距今上二十年庚辰。爲三百年。碣趺年久有缺。是春爲大風所擠折。後孫履載時觀察本道。乃採石于大邱。將改竪而舊刻字漫。不可摹。議使後孫中貴顯者。書之。適後孫炳觀。藏退溪李先生行書此碣銘及先祖妣淑人金氏行狀。承旨公碣銘共一卷。蓋炳觀先世。有爲先生門人者。請先生書以傳家也。觀察取其卷。送于京師諸宗。且詢用後孫書與先生書孰勝。不肖祖淳曰。先生書固善。後孫雖貴顯。孰有如先生之大賢者乎。請以先生書爲刻。宗人僉曰。然。遂使工敬摹而刻之。嗚呼。昔宗人之請先生書。先生之爲之書。豈必有先知於今日。然自今日觀之。眞若有待於今日事。固有不偶然而然。况數百年間屢經兵燹。此卷猶無㺊者。亦可見先生德化門人之深。隻字片幅。人皆以性命保之也。今以先生之書。重竪爲碣。豈不增光我先祖之盛德也哉。先生書卷後。又題曰。碣文中西北一道之一。疑當作馹。馹與一音同。而誤作一也。不然。不應言主於驛路之弊。而泛稱西北方一道也。先生此辨。又的當無疑。故今刻一道之一。謹改爲馹。以從先生之言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