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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⑧ - 온유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일곱 번째 열매인 충성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충성은 한자에 명기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신명시 6:5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러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려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받아야 될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 내가 존귀하고 사랑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열등감이 있거나 비뚤어진 성향의 사람은 누구를 향하여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역시 누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실현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이 충성을 구체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 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 안에서 각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충성할 수 있습니다. 이 충성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이 마치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복음을 믿고 그 복음대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나 위하여 죽으셨으니 나도 주님을 따르면서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요 주님이 죽음 가운데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나 역시 주님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에 이를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의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 여덟 번째인 온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온유란
영어로는 Meekness, gentle 헬라어로는 프라우스(πραΰς)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미국인들은 서부개척시대에 시작된 로데오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놀이입니다. 들판에서 붙잡은 야생마는 힘이 넘치고, 아무도 올라타지 못할 정도로 날뜁니다. 이 상태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말입니다. 이때 필요한 사람이 조련사인데 전문가에게 길들여진 말은 서서히 사람의 말을 듣고 순종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주인이 원하는 대로 그 힘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희랍어로 '프라우스'라고 하며, 성서에는 '온유'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제멋대로 살기에 바쁘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힘으로 제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조련을 받으면 예전의 기질과 가치관이 온유하게 변합니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양선에 대하여 말씀을 나눴습니다만 양선이 하나님의 관계에서 그 분의 뜻을 헤아려 알고 그 분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라며 온유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하여 평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신 분도 역사상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증거하실 때는 확성기(擴聲器)도 없었을 때였습니다. 광야에서 해변에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 모여 든 청중의 수가 5천명이 넘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겠다고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 들어 귀를 기우린 이유는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의 마음을 깊이 알아주시는 특별함이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7:29에서는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했습니다. 겉도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히브리서 4:12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그런 말씀을 예수님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시듯이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는 매력을 주님은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과의 사이에도 온유한 사람이 인기를 끕니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 공감대를 형성하여 줍니다. 누가 자기 하소연을 하면 그 사람의 감정 속에 들어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 온유는 사람이 노력해서 얻어진 성품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다듬으셔서 만들어 가십니다. 사람을 잘 이해하려면 사람이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나서야 이해심이 생깁니다. 가난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이해 못합니다. 지난 번 어떤 여자 집사님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여 집사님 “공과금을 제 때에 못내니 속상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랬더니 한 여집사가 대뜸 “세상에 공과금을 제 날짜에 못 내면 과태료가 붙는데 그게 만만치 않은 금액이예요. 다음부터는 날짜를 잘 보았다가 제대로 내세요.” 이러는 겁니다. 누구는 몰라서 공과금을 제 때에 못내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그 만한 형편이 있기에 그런 건데 그렇게 말하면 다음부터는 그 사람에게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질까요?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들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4:15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그 분께 나가 “주여!” 외쳐도 “그래 내가 네 마음 다 안다.”그러신 분입니다. 경험해서 아는 것 하고 배워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납니다.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성찰(省察)이 없고 자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는데 누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나의 연약한 부분을 지적하시면서 책망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요한복음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제가 음식점에서 저녁을 식그들과 함께 먹고 나오는데 계산이 내가 치러야 될 액수보다 적었습니다. 순간 제 마음 속에 “에이! 자기 잘못인데 뭐 모른 체하고 달라는 대로 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내 마음 속에 양심을 통하여 성령이 책망하십니다. “이 도둑놈아 돈 몇 푼에 양심을 파냐?” 그 호된 책망을 듣고 계산이 잘못되었다며 정상적으로 돈을 지불한 적이 있습니다. 성령은 기도할 때도 간섭하십니다.
로마서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기도의 제목을 주시고 그 기도의 제목에 소망을 주셔서 간절하게 기도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더불어 여러 가지 환경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며 그 가운데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45:7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하셨습니다. 빛과 평안만 주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둠과 환난을 지나게 하십니다. 그 환난을 통하여 나를 압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게 닥쳐왔는지를 어둠을 지나면서 어둠의 공포와 절망을 압니다.
요즘 대장간이 흔하지 않습니다만 예전에는 동네마다 대장간이 있어 농기구를 만들어 줍니다. 연장을 만들기 위해서 쇠붙이를 시뻘겋게 달아오른 풀무 불에 짚어 넣었다 빼어서는 모루에 얹어 놓고는 큰 망치로 두들깁니다. 그러다 물속에 푹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서 풀무 불에 넣고 또 두드리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단단하고 편리한 좋은 연장이 나옵니다.
대장장이의 명장(明匠)은 자기가 만든 모든 기구들을 최상으로 만들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함을 입은 인간들에게 선별하여 택하시고 그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늘에 속한 생명체로 만들어 가십니다. 일시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빌립보서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생명체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생명체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그렇게 쉬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보석중의 보석이라고 하는 다이아몬드는 연필심으로 사용하는 탄소로 만들어 집니다. 별 볼일 없는 탄소가 지구의 깊숙한 곳 지표 아래 140~190km에서 고온 900~1300도 와 고압(45000~60000바bar)의 조건 속에 생성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런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그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서 다른 사람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 들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행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원대하시고 그 사랑으로 나를 만들어 가심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했습니다. 어는 누구도 함부로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말 보잘 것 없고 자랑할 것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연단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세워질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온전하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소망의 빛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온유의 열매입니다.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이 구약에서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민수기 12:3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하였습니다. 그 사람 모세가 온유하다고 한 이유는 40년 광양의 혹독한 훈련 속에서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석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러합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갖은 모함과 핍박 그리고 비난에도 모세는 저들을 용납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더디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을 통하여 온 백성이 금 고리를 빼어 조각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이 형상은 과거 애급에서 섬겼던 우상입니다. 그 우상을 세워놓고 출애굽기 32:8에서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는 큰 나라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달콤한 제안에 모세의 단호한 어조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12에서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모세의 마음에는 백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에 그의 생명을 내어놓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실 된 마음으로 사람을 용납하고 그를 받아들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스테반집사가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받는 박해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7:57~60에서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자기를 향하여 분노하고 돌로 쳐 죽이는 그들을 향하여 용서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기도대로 행동하는 스테반집사의 모습에서 온유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품어주고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의 사람은 높아진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낮아지고 종의 모습을 가지며 섬기는 자세를 지닌 자가 진정한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종의 자리에 들어가고 나서야 섬기는 자리에 들어서고 나서야 온유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내 삶을 돌이켜 보시십시오! 왜 나를 낮추시는 겁니까? 왜 비천에 속하도록 하시는 겁니까? 그 배후에 나로 하여금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성령의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9:22에서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 하였습니다. 나의 약함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입안에는 치아와 혀가 같이 살고 있는데요. 치아가 강할까, 혀가 강할까요? 물론 단단하기는 치아가 먼저입니다. 그러나 강하기는 혀가 강합니다. 치아는 부러지기도 하고, 병균으로 썩기도 하고, 닳기도 합니다. 혀는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병원도 '치과'는 있어도 '혀과'는 없잖습니까? 치아는 겉으로 단단하다 보니 이렇게 약하고, 혀는 부드럽다 보니 이렇게 강합니다.
마태복음 5:5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시편 37:11에서도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복을 주어도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에 대하여 잠언 25:28에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제 마음에 맞지 않으면 성을 버럭내는 사람입니다. 거꾸로 잘 되면 그 잘 된 것을 자랑하고 뻐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지고 고통스러워도 절대로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잠잠히 참아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형통한 일이 생기고 번창한다 하더라도 온유한 사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분복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지를 찾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기에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도 된다라고 생각하기에 이 사람은 땅에서 잘되고 사람들로부터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성령의 열매 온유를 맺게 하시려고 나의 성품 속에 깃들여 있는 불평과 불만을 제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에게 탓하고 원망하는 고질병에서 벗어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온유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