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자로 정통 영미문학의 대가이며
현대 해학문학의 명장(名匠)인 수필가 공덕룡 교수
최원현
수필이란 무엇일까?
원로 수필가 선생님들을 만나 뵈면서 갈수록 어려운 화두(話頭) 앞에 선다.
수필을 붓가는대로 쓰는 글이라고 했지만 수필은 붓으로 쓰는 글이 아니었다. 수필은 온 몸으로 쓰는 글이요, 타는 가슴으로 쓰는 글이다. 북극성 보다 빛나는 정신, 얼음바다 속에서도 생명을 키우는 어머니의 그런 뜨거운 모성애같은 사랑으로 쓰는 글이었다. 그래서 한 편의 수필 속에서 우주를, 사상을, 그리고 깊고 깊은 땅 속에서 물줄을 다스리며 꽃을 피워내고 나무를 키워내는 생명을 본다. 모든 예술은 감동을 끌어내는 것이지만 특히 수필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또 다른 자기를 암시하고 내면의 자기를 감동 시키는 문학이 아닐까. 우리는 수필을 얘기 하면서 촬스 램을, 베이컨을,그렇게 영국 에세이를 말한다. 왜일까. 그만큼 영국 에세이가 우리에게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그 영국 에세이들을 생각하면서 한 분을 찾아 뵙기로 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뚫고 수필가이시며, 영문학자로 영국 에세이 연구의 대가이신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공덕룡 박사님 댁을 찾아 들었다. 분당의 이매동 아름마을, 색깔은 변했어도 비에 젖어 싱싱해 보이는 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룬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니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댁은 알맞게 전망이 트여 있었는데 드세게 부딪혀 오는 빗방울도 9층 아파트의 창에선 힘을 못 쓰겠는지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만다. 화분에 심어진 사철초들이 실한 모습으로 베란다를 지키고 있는 교수님 댁은 ㄷ 자형으로 놓여진 소파가 응접실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한 면엔 꽤 큰 흑백의 사진 액자와 힘있는 글씨가 1점씩 걸려 있는데 다른 면은 작은 책장이 하나 놓여 있으며, 또 한 면엔 동양화 한 폭이 집안 분위기를 동양적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마침 사모님께선 외출중이신지라 교수님께서 손수 챙겨 내오신 음료수를 마시며 오랜만에 조용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교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교수님께선 1923년 7월 29일 평남 덕천(德川)에서 공탁(孔濯)님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단다. 당시 덕천 고을살이를 하시던 선친께선 고을 이름에서 덕(德)자를 따서 아드님의 이름을 지으실 정도로 고향을 사랑하셨다고 한다.
대한 말엽 영광군수를 끝으로 관직생활을 청산 하시고 원적지인 춘천으로 솔가 낙향 하셨다는데 당시 일본인 지사(知事)와 뜻이 맞지 않아 사표를 내신 것 같다고 했다.
공교수님은 춘천에서 초등학교와 구제 5년제 춘천중학교를 마친후 청운의 뜻을 품고 도일(渡日)을 했는데 도꾜의 첫 폭격(1943.4)을 눈앞에서 보고는 허둥지둥 귀국선을 타셨단다.
해방 후에 경성대학 부설 중등교원 양성소 국어과를 졸업했고, 고려대 영문과
및 뉴욕 주립대 대학원을 거쳐 단국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단국대에서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계시다고 한다.
뉴욕 주립대(62-63)와 나폴리 동양학대(83-84)에서 우리 어문학 강의도 하셨지만 박사학위 논문이 < ESSAY에 관한 연구>인 것처럼 영.미 에세이에 관한 한 현존하는 분으로서 교수님을 능가할 분은 없으리라 여겨진다.
말씀을 나누는 동안 빗줄기가 가늘어 졌는지 차창에 부딪히는 비의 세기가 그새 많이 약해져 있었다. 어린 날 문만 열면 처마 밑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손에 잡히고 그 빗방울에 패이곤 하던 처마밑 땅을 무슨 큰 볼거리라도 되는 양 바라보던 것이 생각 나는데 그런 것 조차도 콘크리트 문화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 이제는 소리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차단의 세계에서 짐짓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제는 아주 오래전이 되어버렸지만 교수님께선 처음에 어떻게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셨으며, 언제부터 수필을 쓰게 되셨고, 그 동기나 영향을 받으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쭤 보았다.
" 중학시절부터 우리의 현대시와 소설, 일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서구문학의 번역판을 마구잡이로 탐독 했지요.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영문학에 뜻을 두게 되면서 소설과 에세이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후일 단국대에서 '영미수필'을 맡게 되어 에세이를 나의 전공으로 삼게된 계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위 논문도 로 정하셨나요?
" 그래요. 논문 내용은 첫째 영미 에세이를 축으로 역사적 고찰을 하고, 둘째 동양 즉 한국,일본.중국 수필과 비교문학적 견지에서 상사성(相似性), 이질성(異質性)을 규명해 보았어요. 시도적인 고찰에 끝나긴 했지만 이 분야의 개척적 의미가 있었다고 자위하는 바입니다.
영국의 에세이는 나같은 수필학도에겐 보고(寶庫)라 할 수 있었어요. 문학수필이라 할 에세이를 추려내어 시대별로 정리해서 각 시대의 대표적 에세이스트의 대표적 작품들만을 모아 두 권의 책으로 묶어 해설을 붙이고 주석을 달고 번역도 했습니다. 곧 와 란 책입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영문학도에 꽤 널리 채택 되어 교재로 이용되고 있답니다."
그러면 영국 에세이를 많이 접하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필도 쓰게 되셨는가요?
" 좋은 글은 독자의 내재하는 창작욕을 눈뜨게 한다 했던가요? 나도 내 글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우리 말로요. 사람은 특별히 입기에 편한 옷이 있듯이 수필은 나에게 쓰기 편한 글이었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읽어온 영.미 에세이가 나에게 동기유발을 하고 그 가능성을 시사 하였다고나 할까요.
첫 작품의 제목은 '분뇨담'(糞尿譚)이었습니다. 외지(外誌)에 보도된 '하니 보트(honey-boat. 분뇨 운반선)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우선 '꿀배'(蜜船/밀선)란
그 호칭이 참 재미 있었습니다. 전후(戰後) 일본에서 해양 투기(投棄)라는 방법으
로 분뇨를 처리 하였었는데 황금 덩어리 같은 분뇨가 해류를 타고 하와이 쪽으로 흘러 간다는 외지 보도에 착안한 것입니다. 이것을 황화론(黃禍論)에 빗대 보았지요. 태평양 전쟁에 패망한 일본이 이런 방법으로 앙갚음을 하였다고 암시적인 비약을 하면서요.
또 50년대 서울의 달동네 화장실 풍경, 그러니까 아침마다 손에 손에 열쇠를 들고 나가는 품이 마치 배설이란 역시 '인생의 키'다 라는 점으로 시사해 보았던 것입니다.
이 치기어린 수필이 1957년 <자유문학>에 채택되어 등단을 하게 되었고, 그 후 수필집으로 <서울에 고향 없다>('74), <귓불을 비비며>('85), <웃음의 묘약>('91), <수필이 뭐길래>('95)를 내었으며 번역으로 <영국 명 수필선> 외 10여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정년퇴임 후라 시간적 여유가 있으셔서일까. 오랜만에 문학 얘기를 펼쳐 내시는 노 교수님의 얼굴은 상기라도 된듯 약간 붉은 빛을 띤 채 쉬지도 않으시고 말씀을 이어 주셨다.
교수님께선 33세에야 박연희(朴姸姬) 사모님과 늦은 결혼을 하셨는데 슬하에는 지원(志遠), 지양(志陽) 두 아들을 두고 계신다 했다. 고향 춘천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로는 '고향은 멀리서 생각하는 곳'(수필집 '웃음의 묘약' 중의 수필제목)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자주 가지지도 않지만 어쩌다 돌아가 보면 산천도 의구하지 않고 인걸도 많이 바뀌어 옛 고향의 정겨움이 느껴지지가 않으시더란다.
그래도 고향을 말씀 하시는 교수님의 얼굴엔 어딘지 쓸쓸한 기색이 감도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얼른 교수님께서 살아오시며 특별히 기억 되시는 행복했던 순간이나 추억 되시는 일을 말씀해 주시라고 했다.
" 내 꿈은 미국 유학이었어요. 50년대말, 미국의 장학재단 돈으로 유학을 가기란 얼마나 어려웠던지.. 한.미 공동 선발위원회 시험에 두 번 응시해서 두 번을 낙방 했어요. 삼 세번이라더니 풀브라이트 시니어(senior)급에 두 사람중 한 사람으로 내가 뽑혔어요. 뉴욕주 플래쯔버그에 도착해서 첫 두 주분의 장학금을 받았는데 금액은 350불이었어요. 잠자리에 들어서 세어보고, 또 세어보고, 온 밤내 그 돈을 세어봤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교수님께선 그 때를 생각만 해도 흐뭇해 지시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시더니 벽에 걸려있는 큰 흑백의 사진을 가리키신다. 교수님의 수필집에 게재되었던 사진을 본 적이 있는 나로써도 그 사진이 고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란걸 아는 터였다. 어쩌면 미국생활을 추억하실 때마다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교수님께서 그렇게 함께 사진을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으니 어쩌면 공식적인 사진으로는 그 사진이 마지막 사진일 지도 모른다며 한껏 사진의 가치를 암시 하신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교수님의 전공 영역이랄 수 있는 영.미 문학 속의 수필과 우리 수필 그리고 우리 수필이 지향해 가야 할 목표 같은 것에 대해 영문학자이며 수필가로써 한 말씀 주시길 부탁 드렸다.
"영국문학사에서 '에세이'라고 하는 장르가 자리잡은 것은 17세기로 소설(18C)보다 앞섭니다. 미국의 에세이는 영국보다 두 세기쯤 뒤지지요. 이 시기 한국에서는 한문수필이 주종을 이루었어요. 1930년을 현대수필의 태동기라고 보면 그 전에는 서구의 에세이와는 별로 접촉이 없었습니다. 우리 수필은 '음풍영월'(吟風詠月)식 서정수필이 대접을 받아 왔는데 앞으로는 그 영역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 수필의 '국제화'라 할까요?"
그럴 것이다. 어쩌면 수필의 대중화는 이미 이루어진 상태이고, 이제는 뭐니뭐니 해도 작품의 수준이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어 우리 수필도 세계화 내지 국제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나라, 결코 그만한 작품이 없어서가 아닐터인데 아직까지 그 문을 열지 못한 것도 우리의 문학작품들이 교수님이 말씀 하시는 그런 국제화에 우리의 노력이 집결되지 못해서일 것이다.
작품활동을 하다보면 유난히 애착이 가는 작품들이 있다. 예로부터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귀여워 한다 했는데 작품의 수준을 떠나서 어느 작품이라고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작품이 있으련만 그런 중에도 유난히 아끼는 작품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교수님이야 한 편 한 편이 다 수작이시지만 그래도 그 많은 작품들 중 특별히 아끼시거나 대표작으로 추천 하실 수 있는 작품을 부탁 드렸더니 모두 도토리 키재기일텐데 무슨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겠느냐고 하시면서도 97년도에 월간 <수필문학>지에서 추린 것이 있다면서 '나라꽃', '칼집', '모택동 이름풀이', '고독이 좋다지만', '수필이 뭐길래' 등 5편을 소개 하신다. 말씀하신 작품들은 나도 이미 다 읽어봤던 작품들인지라 동감하는 바이지만 데뷰작인 '분뇨담' 또한 적잖이 애착을 가지시는 작품일거란 생각을 내 속으로만 해봤다.
이제 수필문학은 문학 시장(?)에서 가장 시장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그것을 꼭 좋은 면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우리 수필이 문학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문학 쪽에서 수필문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지 교수님의 주관적인 입장이 되겠지만 의견을 말씀해 주십사 부탁 드렸다.
"수필의 비중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입니다. 수필이야말로 저널리즘의 요구를 가장 잘 채워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각종 신문, 잡지의 규격에 맞추어 그 길이를 조정할 수 있고, 편집계획을 십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수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좋은 수필이란 한마디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수필입니다. 즉 첫째 정서적 즐거움, 둘째 지적 즐거움, 셋째 심미적 즐거움, 넷째 깨달음의 즐거움, 다섯째 유머와 위트의 즐거움, 여섯째 수사학적 즐거움 중에서 하나 혹은 두 가지 즐거움만 담겨진 수필이라고 하면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수필적 소재를 수필답게 구성한 수필이 좋은 수필이라고요."
교수님의 문학세계를 스스로 평하신다면 인본주의 문학관이라 해 두자고 하신다. 자연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관찰하는 시야나 각도에 따라 자연은 평가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시는 교수님. 김우종 교수님께서 공교수님의 수필집 평에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 공교수의 수필을 읽으면서 우리가 얻게 되는 큰 소득은 우리들의 삶에 대한 애정이다. 비판적 지성이 번득이고 있지만 모가 나는 데가 없이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 가난한 삶의 고통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유머가 있다. 이것은 어떤 사물 앞에서도 작자가 근본적으로 애정을 잃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별히 김우종교수님의 평이 아니더라도 공교수님의 수필은 지극한 삶에의 애정이며, 편편 마다 유머가 넘쳐나고 있음은 누구나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리라.
마지막으로 한국수필문학의 방향과 우리 수필문학 발전을 위한 문제점이나 조언, 그리고 독자를 위하여, 또 수필을 쓰고자 하는 수필가 지망자들을 위해서 권해주고 싶은 작품을 말씀해 주십사 했다.
" 우리 수필은 이제 제재의 폭을 넓혀야 할 것이며,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것이며, 상상의 세계를 가미해야 할 것입니다. 즉 수필에서도 독자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허구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좋은 수필들이 많이 있지만 영.미 문학을 오랜동안 공부하고 가르쳐온 사람으로써 영국 에세이스트라면 찰즈 램의 <엘리야 수필>을 꼽겠습니다. 이 수필집 가운데 있는 '꿈 속의 어린이', '굴뚝 청소부 예찬', '오래된 도자기', '돼지구이론'' '만우절' 등은 읽을수록 맛이 당기는 작품들입니다."
교수님께선 57년 등단 후 40년 이상을 수필을 써오신 만큼 그동안 수필문학에 끼치신 공로 또한 크신 분으로 상도 많이 받으신 분이시다. 전쟁문학상. 단국문학 특별상(공로상). 한글문학상. 수필문학 대상. 등 수필과 관련한 큰 상을 두루 받으셨을 뿐 아니라 케임브리지 세계 지식인 인명사전사로 부터 편찬 공로상('90)을 받으셨으며, 국민훈장 모란장도 수상('88.8) 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고 계시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수필에 대한 열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토요일 오후 세 시간 넘게 교수님과 단 둘이서 보낸 시간, 그동안 쉬지 않고 말씀을 하셔서인지 목이 칼칼하다고 하시며 밖에 나가 생맥주로 딱 한 잔만 하자고 하신다.
일어 서려는데 마침 사모님께서 들어 오셨다. 해서 두 분의 다정하신 모습을 하나쯤 남겨두고 싶어 기념 사진을 찰깍 찍어 드리고 그냥 가서 어떡 하느냐고 하시는 사모님을 뒤로 한 채 교수님과 문을 나섰다. 빗줄기는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 우산을 펼 필요도 없었다.
수필은 '끊임없이 번쩍이는 사상, 한결같이 웅변적인 문체, 꿰뚫어 보는 통찰의 눈, 정서로 깊이를 바닥까지 밝혀주는 것'이라는 미국 문학자 '에드워드 뉴턴'
과 '장미야 무엇이라고 부르건 향기를 발한다. 가시가 돋쳐 찌르기도 하지만 꽃은 화사하고 힘차게 번진다. 사색하는 사람에겐 꼭 배출구가 있어야 하는 법, 희.노.애.락에다 우(愚)까지 곁들인 온갖 경험을 해야 하고 희망과 욕구가 치솟다가 실패의 잔을 들이켜야 하고, 세상 잡다한 풍경, 음향, 냄새를 경험해야 하는데 이 온갖 잡동사니를 에세이 말고 어디다 담을 수 있겠는가' 하던 일본의 '하야시 다쯔오'(林達夫)의 말과 같이 수필처럼 사람의 갖가지 냄새를 진솔하게 품겨내는 글이 또 어디 있을 수 있으랴.
문득 생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아 계시는 노 교수님의 모습에서 40년 넘는 수필의 삶과 75년의 평생 삶이 가을걷이 과일들을 쌓아놓고 그 풍성함 앞에서 마냥 좋아하는 농부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처럼 마음이 밝아오는 것은 지나오신 삶이 그만큼 넉넉해 보이심이고, 또한 아직도 지칠줄 모르고 펜을 드시는 교수님에 대한 더 큰 바램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 같다.
잔을 드시는 교수님께 아무쪼록 남은 모든 날들이 더욱 알차고 풍성한 건강한 삶의 나날들이 되시길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해으름 저녁의 싸아한 한기가 게절을 알려주고 있다. < 수필과 비평> 1998. 11.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