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의 뱃길을 따라서 성철은 1942년 봄 간월암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크게 가두는 일이었다. 작은 암자를 세상으로 알고 1년 동안 정진했다. 경허가 천장암에 숨어든 것처럼 외딴 섬에 자신을 부렸다."』
▲만공 스님은 성철 스님에게 간월암에서의 정진을 적극 권면했다. 1942년 봄, 간월암에 든 성철 스님은 작은 암자를 세상으로 알고 1년 동안 정진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내포지역 산사를 둘러봤다. 가야산, 상왕산, 연암산을 두루 찾아갔다. 특히 자신이 출가한 가야산이 충청도에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가야산(678m)은 서산시 해미· 운산면, 예산군 덕산· 봉산면, 홍성군 갈산면, 당진군 면천면에 걸쳐있었다. 그리고 이곳 가야산이야말로 일찍이 100개가 넘는 절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신라에 남산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가야산이 있었던 것이다. 실로 부처님 땅이었다.
성철은 천장암도 찾아갔다. 연암산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은 이름대로 ‘하늘이 감춘 암자’였다. 바로 근세불교 중흥조 경허선사가 숨어서 공부한 곳이다. 천장암 대웅전 옆에는 정진했던 한 평짜리 방이 붙어있었다. 동학사에서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가 돼야지’라는 한마디를 전해 듣고 홀연 깨친 후 천장암에 들었다. 이 작은 골방에서 경허는 1년 넘게 누더기 옷을 입고 씻지도 눕지도 않았다. 모기가 물고 빈대, 이가 온 몸에 들끓어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때로는 구렁이가 들어와 어깨를 타고 올라갔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경허는 마침내 ‘태평가’라는 깨침의 노래를 불렀다.
“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온 우주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는 비로소 ‘깨달은 소[惺牛]’가 되었다. 동학사에서는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를 찾았고, 천장암에서는 그 소가 바로 자신임을 선언했다. 콧구멍이 없어 고삐를 채울 수 없으니 소는 끌려 다닐 일이 없었다. 영원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 자유는 세상으로 옮겨갔고, 이 한 평의 공간에서 조선 선불교가 다시 태어났다. 성철은 선불교가 발원한 천장암의 골방에서 경허의 깨침을 더듬었다. 이 작은 공간에서 경허는 삼천대천세계를 봤을 것이다.
경허가 수월(1855~1928), 혜월(1861~1937), 만공이 법기임을 알아보고 그들을 불문으로 들어서게 한 곳도 천장암이었다. 세 제자 모두 경허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천장암 오른쪽 능선에는 제비바위가 있다. 경허가 이곳에서 자주 좌선을 했고 제자들에게 법문을 주기도 했다. 제자들에게 어둔 밤을 밝힐 빛을 나눠준 셈이었다. 그것은 경허가 제비바위에서 세 달[月]을 날려 보냄이었다. 그러자 수월은 북녘에서 상현달로, 혜월은 남녘에서 하현달로, 만공은 중천에서 보름달로 떠올랐다.
제비바위에서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서해 바다가 보였다. 내포 일대 산사의 기도와 법문 그리고 간절한 서원은 바다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그 바다 위에도 절집이 있었으니 바로 ‘달을 본다(看月)’는 이름의 간월암이었다. 천수만 북쪽에 붙어있는 간월도, 그 앞에 조그만 섬 하나가 있다. 섬 전체가 절이었다.
성철은 간월암으로 수행처를 옮겨가기로 했다. 보름달인 만공이 간월암에서의 정진을 적극 권면했다. 지금은 밀물 때 섬이었다가 썰물 때는 뭍이 되지만 당시엔 긴 뱃길을 헤쳐가야 닿을 수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암자는 달이 뜨면 달빛을 따라 바다로 나아갔다. 달빛이 떨어진 바다가 곧 경내였다.
간월암은 원래 피안사(彼岸寺)였다. 백제시대부터 그리 불렸다고 한다. 피안사는 사바세계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열반의 땅일 수도 있고,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해 고해(苦海)를 건너는 배[舟]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낮에는 간월도에 붙어있는 새끼 섬이지만, 밤이면 선승들의 깨달음을 싣고 피안을 향해 떠나가는 어미 섬이 되기도 할 것이다.
간월암은 또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비슷하다 해서 연화대(蓮花臺)로 불렸다. 간월암 일대가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인 연화장(蓮華藏)세계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둥실 떠있는 간월암을 보면 바다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구품연지(九品蓮池)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간월암은 이 연지에 곱게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일 것이다.
피안사, 연화대로 불리던 섬이 간월암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무학대사(1327~1405)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려 말(공민왕 2년) 이곳에서 정진하던 중에 달을 보고 문득 깨쳐 간월암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간월암에 내리는 달빛을 특별하게 바라봤다. 작가 최인호는 간월암의 달빛 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해는 이미 바다 밑으로 떨어진 지 오래이고, 하늘 위에 붉게 각혈하여 물들인 핏빛 노을도 어둠의 반점으로 점점 먹혀 들어가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져 갈수록 달빛이 상대적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으며 밤하늘은 맑아 구름 한 점 없는 별밭이었다. 거의 보름달에 가까운 달은 밤이 깊어갈수록 힘껏 눌러 찍었으나 한쪽 부분이 힘이 고르게 가해지지 않아 불완전하게 찍힌 목도장 자국처럼 밤하늘 위에 새겨져 있었다. 만월 때가 되면 자연 밀물의 기세도 절정에 이르는 것일까. 한껏 차올랐던 파도는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길 없는 길’에서)
무학대사가 왕사로 있었기에 한양에서 간월암으로 내려 보낸 후광이 대단했겠지만 그 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간월암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어느 때 어떤 연유로 폐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왕조의 억불정책 앞에 스러졌을 것이다. 고승들의 안광이 빛났던 자리에는 명당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심이 들어찼다. 무너진 절에, 아니 절을 무너뜨리고 무덤들이 들어섰다. 그 무덤 위로 달빛이 내렸다.
지하에 있는 유택을 옮기고, 다시 지상에 부처의 집을 일으켜 세운 것은 만공이었다. 만공은 덕숭산을 나와 수십 리를 걷고, 30리 뱃길을 헤쳐 간월암에 들었다. 만공은 ‘절 짓는 스님’ 명성대로 간월암을 다시 지었다. 중창불사는 1941년에 매듭지었다. 그러니까 성철이 들어가기 1년 전에 회향했던 것이다.
만공은 간월암을 자주 찾았다. 한번은 상좌 혜암과 사미승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배가 움직이자 멀리 보이는 산도 움직였다. 만공이 사미승에게 물었다.
“산이 가느냐, 아님 배가 가느냐?” “산도 가지 않고 배도 가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가느냐?”
사미승은 말이 없었다. 이때 제자 혜암이 나섰다.
“제가 답해도 되겠습니까?”
만공이 이번에는 혜암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래, 산이 가느냐, 아님 배가 가느냐?”
스승이 묻자 혜암이 말없이 손수건을 들어 보였다. 만공이 보름달처럼 환한 표정으로 제자를 봤다.
“자네 살림이 언제부터 그러했는가?” “이리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만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육조 혜능의 법문 ‘비풍비번(非風非幡)’을 떠올리게 한다. 5조 홍인으로부터 의발을 전수받고도 숨어 지내야했던 혜능이 돌아오는 길에 법회에 참석했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찰간(刹竿)에 매달린 깃발이 펄럭였다. 이를 보고 한쪽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다. 이때 혜능이 듣고 있다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이다.”
만공은 바람과 깃발[風幡] 대신 산과 배[山舟]로 제자의 경계를 탐색하고자 했다. 한데 혜암은 손수건을 들어 그간의 공부를 보여주었다. ‘손수건을 들고 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혜암은 때가 벗겨진, 그래서 맑아진 자신의 마음을 내보였을 것이다. 그것을 만공만이 알아챘을 것이다.
만공의 뱃길을 따라서 성철은 1942년 봄 간월암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크게 가두는 일이었다. 작은 암자를 세상으로 알고 1년 동안 정진했다. 경허가 천장암에 숨어든 것처럼 외딴 섬에 자신을 부렸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외딴 사람이 되고자 했다. 따지고 보면 가장 낮고 낮은 곳이 바다였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종래는 낮춘다는 생각 자체도 들지 않을 때 비로소 바다가 되는 것이었다.
성철은 만공이 정진했던 토굴에서 장좌불와 수행을 했다. 그 안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해버리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은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당하는 사람, 살아나가는 길이란 공부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훗날 후학들에게 이른 것처럼 성철은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낙오자로 만들었다. 달이 지면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달이 떴으니 그 빛에 아만을 사르고 살랐다. 바다를 보다가 바다가 되고, 달빛을 보다가 달빛이 되고, 성철은 마침내 손가락 너머의 달을 보았을 것이다.
만공은 성철을 위해 식량을 배에 실어 보냈다. 간월암에 떠오른 달은 부처도 보았던 달이었다. 달마의 달, 혜능의 달, 무학의 달, 경허의 달이었다. 그러나 다시 간월암에는 부처, 달마, 혜능, 무학, 경허의 달은 사라지고 오직 성철의 달이 떠올랐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96호 / 2015년 5월 27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2. 배가 고파도 선방 일화들이 꽃처럼 곱게 피어났다
『"청담이 없는 복천암은 살림이 엉망이었다. 당장에 공양주도 없었다. 이때 조실스님이 나서서 공양주를 자처했다. 그러자 너나없이 공양주를 자처했다. 그래서 결국 돌아가며 보름씩 공양을 책임지기로 했다. 성철은 공양주를 맡은 적이 없음에도, 또 자신은 생식만을 하고 있음에도 공양주 역할을 잘해냈다고 한다."』
▲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간월암을 나와 법주사 복천암에 들었다. 복천암에 들어섰을 때 청담 스님이 달려와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과 청담은 1943년 봄에 만나 함께 정진하자고 약속했다. 성철은 약속대로 간월암을 나와 도반 청담이 머물고 있는 법주사 복천암에 들었다. 법주사 큰 절에서 오른쪽 샛길로 근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복천암은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옛날부터 절 옆 큰 바위에서 나오는 약수가 효험이 뛰어났다고 한다. 물만 마셔도 병이 나았으니 복(福)이 깃든 샘[泉]일 것이다. 또 이곳에 절을 지어 부처님 말씀으로 영혼을 씻었으니 이 역시 복천이었을 것이다. 고로 예부터 이곳에서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헹궜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은 수시로 머물렀고, 극락전에 ‘無量壽(무량수)’라는 친필 편액을 내렸다. 조선시대에도 세종, 세조, 문종 등 여러 왕이 이 작은 절을 챙겼다고 한다. 특히 세조는 병든 몸으로 복천암을 찾았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형제와 수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권력을 잡기 위해 유교의 근간인 충효사상에 피를 뿌렸다. 임금을 죽여 대역죄를 범했고, 단종을 지켜달라는 부왕 세종의 유지를 어긴 대불효자식이었다. 왕으로 13년을 살기 위해 인륜과 천륜을 어겼다. 이로써 왕조의 정통성이 짓밟혔다. 역적을 임금으로 섬겨야했던 백성들은 참담할 뿐이었다.
세조는 말년에 악성 피부병을 얻었다. 백성들은 업보가 달라붙은 천형이라며 한양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종기에서 나오는 피고름은 왕이 죽인 사람들의 피라 믿었다. 세조는 마지막으로 엎드릴 곳을 찾았다. 궁궐을 나와 복천암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복천이 있었고, 또 아끼던 신미대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미대사는 한글창제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조가 험하고 거친 길을 헤쳐 멀고 먼 복천암을 찾아가자 숱한 일화가 생겨났다. 속리산 정이품송 얘기도 그중 하나이다. 세조가 법주사를 향해 가는데 유독 가지가 처진 소나무가 서있었다. 소나무 아래를 막 지날 때였다. 아무래도 가마가 가지에 걸릴 것만 같았다. 왕이 “연(輦)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나무는 제 가지를 위로 들어 가마가 지나가도록 했다. 소나무가 기특해서 세조가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속리산은 소백산맥의 가운데에 있고, 복천암은 속리산의 배꼽[俗離山臍中]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가운데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음이었다. 복천암은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과 함께 당시에는 손에 꼽는 수도처였다. 경허, 동산이 정진했고 1930년에는 전강이 조실을 맡아 선승을 지도했다. 성철은 월현, 경봉, 금포, 현칙, 영천 스님 등과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성철은 속리산 봉우리들이 아직 잔설을 이고 있을 때 복천암에 들어섰다. 도반 청담이 달려 나와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 옆에 청담을 따라 속리산에 들어온 도우가 있었다. 도우는 성철을 복천암에서 처음 봤는데 이후 대승사, 봉암사, 천제굴까지 성철을 따라가 시봉했다.
성철은 복천암에서 생식을 했다. 도우의 증언이다.
“성철 스님은 복천암에 오시자마자 생식을 하셨는데 염분 있는 것은 일체 안 드시기로 하여 부식은 없고 쌀 2홉에 들깨 약간 넣고 맷돌에 갈아서 그것을 물 한 대접에 나눠 잡수셨다. 무나 감자가 생기면 한쪽씩 들깨에 찍어서 먹으니 맛이라고는 없었다.”
성철은 복천암에서 생식과 무염식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소금과 화식을 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특유의 ‘실행 후 말하지 않는’ 성품으로 미루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성철은 무염식은 평생 지속했고, 생식은 스승의 건강을 염려한 제자 법전이 간절히 화식을 권하는 바람에 천제굴 수행 시절에 중단했다.
도우(1922~2005)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13세에 임제응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42년 직지사 천불선원 안거를 시작으로 서울 선학원, 문경 대승사 쌍련선원, 문경 봉암사, 창원 성주사, 합천 해인사 등 여러 선원에서 안거했다. 특히 1947년 봉암사 결사 때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에 참석했고, 1954년 봉암사 주지 때는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다. 부석사와 고운사 주지를 지냈고, 1980년 이후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 주석했다. 도우가 성철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쩌면 ‘가난’ 때문이었다.
절마다 먹을 것이 없었다. 일제의 수탈이 심해져 강산의 생명붙이들은 배가 고팠다. 선승도 먹어야 도를 닦았다. 수행승 도우는 수행 중에 먹을 것이 없어 도토리를 주워 도토리밥을 해먹었다. 그렇게 날마다 도토리를 찾아 산을 뒤지다 옴이 올랐다. 온 몸이 부어올랐지만 약도 구할 수 없었다. 탁발에 나선 도우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서울 선학원이었고, 그곳에 마침 청담이 있었다. 도우는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속리산으로 떠나는 청담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복천암에서 성철을 만난 것이다. 성철의 첫 인상을 도우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밝은 빛이 나고 아는 것도 많으시고 참 명랑하셨습니다.”
이때 도우 나이 22살이었으니 청담과는 스무 살, 성철과는 열 살 차이가 났다. 도우는 평생 성철을 높이 받들었다.
“큰스님은 법에 있어서는 고불고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태고 스님이나 나옹 스님 이후 성철 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법문 하나를 봐도 완전히 불조에 계합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하던 근래의 명안종사로서는 성철 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복천암도 양식이 턱없이 모자랐다. 절에서 내놓는 밥과 찬은 보잘 것이 없었다. 선방에서 소쩍새 울음을 듣고 있으면 배가 더 고팠다. 그럼에도 원주를 맡은 노장이 술을 좋아했다. 큰절에서 양식을 타오면 몰래 복천의 물로 술을 빚었다. 저녁 무렵 복천암에는 노을처럼 술 냄새가 퍼졌다. 배고프면 냄새에 민감했다. 술 냄새만으로도 선방 대중들이 취할 정도였다. 청담이 참다못해 큰절 법주사로 내려가 담판을 지었다. 복천암 원주는 걸망을 져야만 했다.
청담 일행이 선방을 접수하고 얼마 자나지 않아서였다. 정확히 부처님 오신 날에 복천암에 큰일이 났다. 사실상 선방 살림을 끌어가고 있던 청담이 왜경에 잡혀간 것이다. 왜경은 3.1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청담을 요시찰 인물로 줄곧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청담에게 누구와 독립운동을 모의했으며 누구를 숨겨주었는지 캐물었다. 일제의 광기는 깊은 산속까지 스며들었던 것이다.
청담이 없는 복천암은 살림이 엉망이었다. 당장에 공양주도 없었다. 이때 조실스님이 나서서 공양주를 자처했다.
“모인 스님들 면면을 보니 든든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공양을 맡을 테니 여러분은 공부나 하십시오.”
큰 어른이 공양주를 하겠다고 나서자 모두 민망했다. 남의 절에 와서 도리가 아니라는, 그럴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철이 나섰다.
“조실스님의 신심을 들어드립시다. 그래야 어른의 밥 얻어먹는 우리도 더 열심히 공부할 것 아닙니까. 그래도 미안하니 제가 먼저 공양주 노릇을 하겠습니다. 그런 후 조실스님께 부탁드려 보지요.”
그러자 너나없이 공양주를 자처했다. 그래서 결국 돌아가며 보름씩 공양을 책임지기로 했다. 성철은 공양주를 맡은 적이 없음에도, 또 자신은 생식만을 하고 있음에도 공양주 역할을 잘해냈다고 한다. 도우는 성철이 곡식 한 톨도 흘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소임을 해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성철은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복천암 한 철을 조실스님이 해준 공양을 얻어먹고 잘 살았지.”
배가 고파도, 없이 살아도 서로의 공부를 위해 자신을 낮췄던 선방 일화들이 이곳저곳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진정 서로를 아껴주고 남을 위해 나를 비웠던 산사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청담은 상주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왜경은 누구와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누구를 숨겨주었는지 불라고 했다. 청담이 답을 할리 없었다. 왜경은 모진 고문을 가했다. 고문은 두 달간 지속됐고, 짓이겨진 몸뚱이에 이질까지 걸렸다. 청담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죽음이 어른거렸다. 그때서야 병자들을 수용하는 피병사(避病舍)로 청담을 옮기고 복천암에 연락을 주었다. 젊은 도우가 달려가 죽어가는 청담을 지켰고, 속가에서 부인이 찾아와 수발을 들었다. 청담은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그리고 7개월 만에 풀려나 상주포교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철이 찾아왔다. 빼앗긴 산하에 다시 가을이 깃들 때였다. 그 날의 만남과 당시의 대화를 작가 윤청광은 ‘구도소설 청담 큰스님’에서 이렇게 그리고 있다.
“속리산 복천암에 있던 성철, 순호(청담) 스님께 문안드리오.” “내 귀에는 마치 문상드리러 왔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먼 그래, 허허허” “열반에 드셨으면 문상이 될 것이요, 아직 살아계시면 문안이 될 것입니다.”
순호 스님과 성철 스님은 방문을 사이에 두고 농을 건넸다. 순호 스님이 방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허허 이거 부처님의 설산고행도를 스님이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려.” “부처님의 설산고행상을 친견했거든 마땅히 삼천배는 올려야 할 것이오.” “원 참 스님두, 그토록 고행정진을 마치고도 아직도 욕심이 그리 많단 말씀이시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97호 / 2015년 6월 10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3. 범어를 발견하고 한글에 눈뜨다
『“성철은 복천암에서 범어를 새롭게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성철은 한글이 가장 정확하게 범어를 옮길 수 있는 소리글임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천제는 성철이 범어를 원음으로 옮겨서 진언을 제대로 외우도록 가르친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며 스승을 기렸다.”』
▲ 성철 스님은 평소 신도들에게 3000배와 함께 능엄주 독송을 생활화할 것을 당부했다. 사진은 성철 스님이 능엄주를 직접 한문·범어·한글로 풀어쓴 것.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신미대사가 당시에 범어에 능통했고,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고 말씀하셨다. 범어를 모태로 해서 생긴 소리글이 바로 한글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큰스님은 범어를 익혀 능엄신주를 비롯한 선문에서의 진언과 다라니를 직접 음역하여 원음에 가깝게 독송하도록 하셨다. 범어를 모태로 하여 만든 한글로 음역하는 것이 가장 원음에 가깝다고 하시며, 이중 삼중 한문으로 간접 음역한 것을 그대로 입에 올리면 되겠느냐고 하셨다. 반야바라밀다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 스바하’로 소리 내야 옳다고 하셨다. 노장이 60년 전에 정리해서 지적한 부분이다. 놀랍지 않은가.”
맏상좌 천제의 증언이다. 성철은 복천암에 머물 때 한글에 대해서 새롭게 눈이 떴다. 또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으로 알려진 신미대사(1403?~1480?)와 범어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았다고 보여진다. 도대체 신미대사는 누구이며 왜 그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하는가.
‘복천사지(福泉寺誌)’는 ‘세종실록’ ‘세조어제 원문’ ‘영산 김씨 세보’ ‘복천보장’ ‘상원사 중수 권선문’, 또 신미가 지은 문헌을 통해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이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평생 신미대사 행적을 추적해온 복천사 회주 월성 스님의 해석 등을 곁들여서 ‘신미와 한글’에 대해서 살펴보자.
신미대사는 본명이 수성(守省)이고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조선시대 문장가 김수온의 친형이다. 10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했고,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던 이른바 학승이었다. 한문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공부하여 40세 즈음에는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범어(梵語)는 고대 인도어이다. 신미는 한자로 번역된 경전을 보다가 범어 원전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한자는 범어를 옮기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자가 뜻글자였기에 소리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만일 신미가 새 글자를 만들고자 했다면 부처님 말씀을 백성들이 쉽게 전해들을 수 있게 하고, 또 범어를 가장 원음에 가깝게 옮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우리 고유의 말은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사용하여 옮겨 적는 형편이었다.
일부에서는 신미가 범어의 50개 자모음 중에서 28개를 취하여 우리 소리를 글로 옮겼다고 믿는다. 최근에 발견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 1권(전5권)의 사본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이라면 이 책은 세종이 한글 창제를 명했던 시기(1443년, 세종 25)보다 5년이나 먼저 세상에 나온 것이다. 훈민정음처럼 초성과 중성, 종성을 활용함이 훗날의 한글 체계와 같으니 한글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대제학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그 연원과 정밀한 뜻이 묘연해서 신 등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밝힌 것은 당시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이 별로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인지는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보기와 뜻을 들어 보이시면서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꼴을 본뜨되 글자가 옛날의 전자와 비슷하다.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이로 미루어 반포 이전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미 새 글을 연구하여 내놓았으니 그 주역이 누구인가. 바로 ‘원각선종석보’를 펴낸 신미라는 것이다. 여기서 ‘본뜬 글자가 옛날의 전자[古篆]’라 함에는 여러 기원설이 있다. 범자 및 티베트어 기원설, 몽골 파스파문자 기원설, 고대문자기원설, 태극사상기원설 등이 그것이다. 그중 범자에서 따왔다는 설은 가장 오래도록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신미대사와 동시대 인물인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도 ‘한글을 범자에 의지해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수광도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했다. 황윤석 또한 ‘운학본원’에서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여기에 근본하였으되, 결국 범자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에 이미 한글은 집현전 학자들의 창의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글을 아는 사람은 거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볼 때 세종은 이미 새 글이 존재함을 확인하고 그것이 백성의 글, 즉 ‘훈민정음’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 후에 세종은 집현전에 새 글 연구를 지시했다는 얘기이다. 또 일각에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안평과 수양대군, 그리고 신미를 주축으로 학조와 학열대사 등 승려들에게 따로 새 글을 연구하라 일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즘 연구실 격인 창제 공간을 따로 마련해 주었으며 그곳은 바로 경기도에 있는 대자암, 현등사, 진관사, 흥천사, 예빈사, 회암사 등 사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미의 업적은 왜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는 조선이 억불숭유의 시대임을 감안하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사회에서 한글이 승려들의 작품이라 밝히면 결코 이를 반포할 수도, 유통시킬 수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오히려 공적을 감춰 주는 것이 유생들로부터 신미를 보호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글이 창제되고 불과 몇 달 후에 최만리 등 집현전 유학자들이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만일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면 반대할 리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 한글로 번역하는 국책 사업이 불교경전이라는 것도 주목해 봐야 한다고 했다. 왜 가장 먼저 ‘석보상절’ ‘능엄경언해’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었을까. 유교국가에서 쉬운 글을 만들었으면 당연히 ‘논어’ ‘맹자’와 같은 유교경전들을 번역해야지 왜 하필 배척 대상이었던 불경을 번역했겠느냐는 것이다.
또 세종은 인품과 학덕이 뛰어난 인재를 좋아했다. 이러한 문화군주의 성향에 신미는 딱 맞는 승려였다. 세종이 깊은 산 속 작은 절인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하고 원찰로 삼음은 신미의 공적과 법력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일 것이다. 또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아들 문종에게 내리라 유언한 것으로 봐서도 세종의 대사에 대한 경외감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로 볼 때 신미가 범상치 않은 일을 했음은 확실하고, 비상한 시국이 아님에도 승려에게 이런 법호를 내림은 ‘나라 글을 만든’ 큰 일이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글 창제에 신미대사가 관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지 그 역할이 무엇인지는 앞으로 규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월성 스님은 신미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을 세상 사람들이 좀처럼 진지하게 추적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우리가 쏟아낸 말과 글은 우주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설하는 노승의 모국어도 저 우주 어딘가에 저장될 것이다. 우리네 마음과 뜻을 실어 나른 모국어 한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경배했는가. 살펴볼수록 새삼 한글이 위대했다.
성철은 복천암에서 범어를 새롭게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한 철만을 보냈지만 이후 범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성철은 제자 천제가 범어에 능통하길 바랐다. 그래서 영어공부를 시켰다. 당시에는 외국어를 깨치지 않으면 범어를 습득할 길이 없었다. 제자가 범어 원전을 제대로 판독하고, 또 진언이나 다라니를 원음으로 송(誦)하여 그 공덕이 흩어지거나 감소하지 않도록 이끌기를 바랐다. 천제는 스승의 뜻에 따라 범어를 익혔다. 또 범어 연구와 관련된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성철은 한글이 가장 정확하게 범어를 옮길 수 있는 소리글임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천제는 성철이 범어를 원음으로 옮겨서 진언을 제대로 외우도록 가르친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며 스승을 기렸다.
“범어는 문자의 어머니이다. 아라비아 숫자도 범어에서 나왔다. 옛 글자이지만 결코 묵은 글자는 아니다. 이걸 노장께서 아신 것이다. 범어를 깨친 선견지명이 놀라울 따름이다.”
훗날 성철은 조계종단 종정으로 있으면서 불교사에 처음으로 한글법어를 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같은 법어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그것은 복천암의 정진과 또 한글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자에 갇힌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글로 풀어서 전함이니 이는 목마른 자를 ‘복천’으로 안내하는 것 아니겠는가.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4. 김법룡이 일제에 바친 8만원, 도우가 성철에 보낸 10원
『"성철에게는 머물 절도, 따르는 신도도 없었다. 또 시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도우는 향을 사르고 불당을 청소해서 얻은 돈 10원을 스승께 보낸 것이다. 당시 쌀 한 말에 3, 4원이었으니 쌀 서너 말 값이었다. 이렇듯 선승들은 굶주리며 정진했다."』
▲ 구미 도리사 태조선원 전경. 현재 선방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청담을 상주포교당에 남겨두고 다시 선방을 찾아 나섰다. 물이 되어 또 구름이 되어 깃드는 곳이 곧 수행처였다. 청담도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쇠약해진 몸은 걷기에도 힘이 들었다. 성철은 도우와 더불어 문경 사불산 대승사를 찾아갔다. 그곳 쌍련선원에서 겨울을 나려고 했다. 1943년 늦가을, 대승사로 가는 산길은 험했다. 잎 떨군 나무들이 추워보였다. 대승사에서 방부를 들이려하자 원주스님이 좀처럼 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서야 속내를 푸념처럼 내비쳤다.
“먹을 게 없소이다. 먹어야 참선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요. 겨울나기가 막막한 실정이요. 눈이 퍼붓기 전에 다른 곳을 알아보시오.”
겨울을 나려면 입을 줄여야 했다. 도우는 성철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리 깊은 절이래도 어찌 성철을 모를 것인가. 그럼에도 깨달은 선승이 밥 한 술 얻어먹기 어려웠다. 성철은 말없이 산을 내려갔다. 도우가 뒤를 밟았다. 가을 산길은 더없이 쓸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철은 이렇게 홀대받아서는 안 될 선승이었다. 도우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산길은 오를 때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성철과 도우는 ‘눈이 퍼붓기 전에’ 경북 구미 도리사 태조선원을 찾아갔다. 태조선원에는 종수, 장수 스님이 있었다. 그들은 성철을 따뜻하게 맞았다. 겨우 굶지 않고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졌다. 아도화상이 중국 진나라에서 건너와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포교를 하며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이다. 신라는 외래 문물에 배타적이어서 불교도 적극 배척했다. 따라서 불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아도는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지방에 들어와서 모례의 집에 숨어들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사람들을 모아 불법을 전했다. 그러던 아도가 수행처를 찾아다니는데 어느 곳에 이르니 겨울임에도 복숭아[桃]꽃과 오얏[李]꽃이 피어 있었다. 그 곳에 절을 지으니 곧 도리사(桃李寺)였다. 이른바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셈이다.
1977년 경내 석종형 사리탑에서 진신사리와 금동육각사리함을 발견했다. 그러자 도리사는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했다. 아마 성철이 정진하고 있을 당시에는 옛 탑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도리사도 지독한 식량난에 직면했다. 그야말로 겨우 입에 풀칠만 해야 했다. 생식을 하는 성철은 그래도 견딜만했지만 스물세 살 도우는 배가 고팠다. 그럼에도 겨울밤은 길기만 했다. 도우는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환한 볕이라도 실컷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봄이 오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1944년 새해, 설이 지나고 막 동안거를 해제했을 때였다. 주지가 돌연 도리사 선방 문을 닫겠다고 했다. 선객들에게 나가라는 통보였다. 선객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봄은 아직 멀리 있었고, 엄동에 선객을 받아들인 곳은 없었다. 주지는 성철에게만은 계속 남아 있어도 좋다는 뜻을 도우에게 전했다. 주지는 선방의 정진이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성철을 겨울 내내 지켜봤다. 왠지 내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도우는 떠나가야 했다. 까짓 젊은 몸뚱이 눈밭에 굴려도 살아가겠지만 홀로 남을 성철이 걱정되었다. 성철이 곁에 있으면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졌다. 깊은 곳에서 나온 한 마디는 지난날을 감싸기도 하고 또 내일 가야할 길을 밝혀주기도 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기품이 느껴졌다. 성철과 함께 수행하면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 같았다. 성철이 등잔불 밑에서 뚫어진 양말을 꿰매는 모습을 보면 외경심과 신심이 밀려들었다.
‘내가 없으면 성철 스님 심중을 누가 헤아려 모실 것인가.’
도우는 걸망을 지고 도리사를 떠나갔다. 북쪽으로 올라가 신의주 건너편에 있는 단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속가의 형을 만나고 묘향산에 들었다. 묘향산 축성전에서 부전을 보면서 봄 여름을 났다. 축성전은 보현사에 딸린 암자로 상원암 뒤편에 있었다. 도우는 도리사에 머물고 있는 성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성철로부터 답장이 왔다. 도우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만주와 묘향산에 있을 때 성철 스님에게 편지를 하니 열심히 정진하라고 연락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성철 스님의 편지에 도리사에 혼자 있기가 불편하다고 하면서 대승사에 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부전(副殿) 보아 번 돈 10원을 보내드렸지.”
성철에게는 머물 절도, 따르는 신도도 없었다. 또 시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도우는 향을 사르고 불당을 청소해서 얻은 돈 10원을 스승께 보낸 것이다. 당시 쌀 한 말에 3, 4원이었으니 쌀 서너 말 값이었다.
이렇듯 선승들은 굶주리며 정진했다. 깊은 암자에 들어 대처승이 장악하고 있는 큰절에서 근근이 빌어먹고 있었다. 하지만 제도권의 종권을 휘어잡은 친일승들은 큰절을 접수하고 ‘통 크게’ 살고 있었다. 바로 도우가 묘향산 작은 암자 축성전에서 부처님을 씻기고 불당을 청소하고 있을 때 묘향산 큰절 보현사의 주지 김법룡은 말사 주지들을 선동하여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1944년 4월 무려 8만원을 군용기 헌납금으로 일본군에게 바쳤다. 친일승들은 일본이라면 무조건 엎드렸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다시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했다. 대륙의 전쟁은 바다(태평양)의 전쟁으로 번져갔다. 전황은 점점 나빠졌다. 일본은 인력과 물자가 부족하자 조선 전체를 쥐어짰다. 종교계에 비행기 헌납을 강요했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조선불교 조계종 종무원은 재빨리 호응했다. 이종욱 종무총장 주도로 전국 사찰마다에 분담금을 배정하고, 승려와 신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군용기 한 대를 헌납했다. 비행기는 ‘조선불교호’로 명명했다.
‘조선불교호’가 하늘을 날았다. 그러자 통도사 주지 박원창은 독자적으로 모금하여 비행기 1대를 헌납하니 ‘통도사호’였다. 이에 질세라 묘향산 보현사 주지 김법룡이 나서서 ‘보현사호’를 바쳤던 것이다. 자극을 받은 조계종 총본산은 2차 모금을 하여 또 한 대를 헌납했다. 경남지역 사찰들도 다시 헌금을 모아 비행기 한 대를 바쳤다. 이로써 불교계는 태평양전쟁에 군용기 5대를 헌납했다. 조선불교호, 통도사호, 보현사호가 얼마나 용맹스럽게 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얼마나 오랫동안 격추되지 않고 친일승들의 바람대로 황은(皇恩)에 보답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일본은 전쟁물자가 달리고 특히 금속류가 부족하자 조선 강토에서 쇠붙이를 수탈해갔다. 조계종 총본산 친일승들은 재빨리 1942년 3월 태고사(현 조계사)에서 ‘국방자재헌납결의안’을 의결했다. 사찰의 쇠붙이들을 전쟁물자로 징발했다. 범종과 불구들이 용광로에 들어갔다. 이 강산에 아침을 열고 저녁을 불러오며,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길러주던 종들이 끌려나왔다. 전국 사찰에서 실려와 한데 모여진 종들은 서로의 몸을 치며 울었다. 그 맑고 우렁찬 소리로 지옥의 중생까지 제도한다는 범종이 ‘지옥의 무기’로 둔갑했다. 경성 일대에서만 태고사, 안양암, 봉은사, 수종사, 사자암 등이 범종을 떼어 일제에 바쳤다. 저들은 법당에 모신 철불상까지 끌어내 실어갔다.
‘대동아전쟁 때 일본은 군수용철물이 부족하여 당시 해인사의 유기(鍮器), 대소종(大小鐘), 다기, 향로, 철불상 등 무려 1900여점을 트럭 3대에 만재(滿載)하여 가져갔다’ (‘가야산 해인사지’)
불교계 최대 문장가로 알려진 권상로는 일본 구미에 딱 맞는 글을 지어 바쳤다. 그것들은 마설(魔說)이었다. 임혜봉 스님이 밝혀낸 ‘불상의 장행(壯行)’을 보면 권상로는 불상 헌납을 이렇게 찬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감격하며 얼마나 황송하며 얼마나 장쾌하냐. 전승(戰勝)을 위하여 교주의 성상(聖像)까지 내어바친다는 것은 불교가 아니면 없을 것이요 일본이 아니면 없을 것이다. 체적(體積)이 분촌(分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상까지 출동하셨으니 듣기에 얼마나 감격하며, 중량이 치수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상까지 헌납이라니 보기에 얼마나 황송하며, 국가를 위하여서는 불상까지 응소(應召)하다니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장쾌한 바이다.’ (‘신불교’ 제48집)
아무리 나라를 앗겼더라도 이 땅의 백성이 이 정도의 문장에 감응할 리는 없다. 당시의 지적 수준이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권상로와 그의 무리들이 미쳐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참담한 일들은 줄지어 일어났다.
사명당의 사당이 있는 밀양 표충사에서도 범종을 포함하여 각종 불구류를 내놓았다. 지독한 친일승인 표충사 주지는 표충서원 향사제기(享祀祭器)까지 바쳤다. 밀양사 표충서원이 어떤 곳인가. 임진왜란의 대장부 서산·사명·영규대사의 충렬을 기리는 사당이 아니던가. 원래는 떨어져 있었지만 1839년(헌종 5)에 잊지 말고 거룩하게 기리자며 경내로 이건하고, 그래서 절 이름도 표충사라 하지 않았는가.
대사들의 영혼을 우러르고 추모하던 신성한 그릇이 녹아서 무엇이 되었을까. 향사제기들이 무기로 변했으니, 그래서 왜적을 물리친 만고의 충혼이 전장에 나갔으니, 일본의 패망은 이미 정해진 것 아닌가.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5. 쌍련선원의 두 연꽃, 성철과 청담
『"성철과 청담은 대승사에서 총림 구상을 했고, 모든 개혁의 지향점은 ‘부처님 당시처럼’으로 정했다. 훗날 봉암사에서의 수행 전설은 대승사에서 비롯됐음이었다. 성철과 청담은 총림을 해인사에 세우겠다고 못 박고 있다. 해인사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법향(法鄕)으로 여겼던 것이다."』
▲ 성철과 청담. 한국불교의 거목인 두 선지식은 물도 새지 않을 정도로 절친한 평생의 도반이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청담이 성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발신지가 상주가 아닌 문경이었다. 상주포교당에 묶여있던 거주 제한이 풀려 대승사로 옮겼으니 함께 정진하자는 내용이었다. 1944년 가을, 성철은 도리사를 떠나 문경 대승사로 옮겨갔다. 대승사 선원에는 청담 외에도 자운, 홍경, 종수, 정영, 우봉, 도우 등이 모여 있었다. 결기가 시퍼런 젊은 수좌들이 동안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운과는 근 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역시 사람이었다. 지난 가을 그토록 썰렁했던, 방부조차 들일 수 없었던 대승사 쌍련선원은 확연히 달랐다. 절 살림이 크게 나아질 리가 없었지만 눈빛 형형한 선객들이 몰려들자 경내가 꽉 찬 듯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불산 대승사에는 ‘천강사불 지용쌍련(天降四佛 地聳雙蓮)’이란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하늘에서 네 부처님이 내려오고, 땅에서는 연꽃이 짝을 지어 솟았다는 것이다. 즉 587년(진평왕 9) 네 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산 정상에 내려앉았다. 이에 사불산이란 이름이 붙었고, 이 소문을 듣고 왕이 와서 보고 예배드린 후 대승사를 창건했다. 왕은 다시 ‘묘법연화경’을 외는 비구를 청하여 주지로 삼았다. 주지는 사면불을 받들어 살피며 향불이 끊이지 않도록 했다. 주지가 입적하자 무덤에서 쌍련(雙蓮)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쌍련선원은 창건설화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그해 동안거에는 쌍련이란 선원의 이름처럼 두 개의 연꽃이 특별했으니 바로 성철과 청담이었다. 둘은 미래의 한국불교를 생각했다. 함께 종단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해인사에 강원, 선원, 율원을 갖춘 총림을 세우고자 했다. 마침 갓 출가한 청담의 딸 묘엄(속명 이인순)은 이를 생생하게 지켜봤다.
“두 분이 해인사에 가서 총림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영산도를 그리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 이 말법 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속에서 풍기는 것을 남한테 보여줄 수 있는, 말 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이런 중노릇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쌍련선원에 앉아서 하셨어요.”
이로써 성철과 청담은 대승사에서 이미 총림 구상을 했고, 모든 개혁의 지향점은 ‘부처님 당시처럼’으로 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훗날 봉암사에서의 수행 전설은 대승사에서 비롯됐음이었다. 또 성철과 청담은 총림을 해인사에 세우겠다고 못 박고 있다. 수많은 절 중에 해인사를 꼽은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해인사가 팔만대장경을 품은 법보사찰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인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성철은 해인사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법향(法鄕)으로 여겼던 것이다. 묘엄의 구술을 모은 ‘회색 고무신’을 보면 구체적인 역할분담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담이 빠져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총림이 세워지면 전체적인 살림을 도맡아하는 ‘전천후’ 역할이 주어졌음직하다. 강원의 경을 이광수(1892~1950?)에게 맡기겠다는 것도 이채롭다. 하지만 춘원의 행적을 살피면 일견 이해가 된다. 우선 대강백 운허 스님(1892~1980)이 춘원의 육촌 동생이었다. 운허와는 어릴 적부터 함께 공부하며 우애가 돈독했다. 춘원이 잇단 친일 행각을 벌이고 그로 인한 업보에 시달릴 때 그를 ‘법화경’의 세계로 인도했다. 춘원은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같은 불교소설을 썼다. 춘원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참선을 하고 불경을 읽었다고 한다. 성철과 청담이 총림을 구상하던 1944년에는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홀로 남양주군 사릉(思陵)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당시 근처 봉선사에는 운허가 주지로 있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총림의 강원을 맡길 후보에 오른 것 같다는 추정을 해 본다.
성철은 부처님처럼 살기 위해 우선 왜색 승복부터 벗어버리자고 했다. 당시 승려들은 검은색 승복에 붉은 비단 가사를 수했다. 일본식이었다. 성철은 청색, 검은색, 붉은색을 섞어서 만든 괴색 가사를 입자는 의견을 냈다. 생명을 죽여서 만든 비단 옷을 추방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가사를 비구 스스로 만들어 입자고 독려했다. 묘엄의 귀한 증언이다.
“누런 광목 40통을 사서 양잿물에 적셨다가 뙤약볕이 내리쬐는 법당 앞에 널어서 말려가지고 물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성철 스님께서 비구니가 비구 옷을 해주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율장을 딱 펴놓고 ‘봐라, 여기 부처님이 비구니가 비구를 시봉하는 거는 육친관계가 있는 사람 아니면 해주지 마라 했지 않느냐. 그러니까 비구 옷에 손대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구들이 직접 만들었다. 원주와 몇몇 비구가 밤새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노란색, 다음에는 빨간색, 끝으로 파란색 물을 들였다. 몇 번씩 물을 들이고 손으로 주물러서 가마솥에 식초랑 소금을 넣고 삶았다. 그러나 가사 만드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구니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한 스님이 새벽 두시쯤 일꾼을 시켜 지게를 지고 윤필암으로 오셨어요. 그러고는 ‘성철 스님이 알면 난리가 나니까 몰래 살짝 해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질을 해서 그 이튿날 밤에 몰래 갖다드렸지요. 그랬는데! 그게 들통이 나고 말았지요.”
‘그랬는데’에 ‘!’를 붙였다. 큰 일이 난 것이다. 성철은 영산회상을 하자 해 놓고 이 무슨 허물이냐, 가사가 좀 깔끔하지 않아도 그게 무슨 대수냐, 비구끼리 한번 해보자고 했으면 해야 하지 않느냐며 나무랐다. 그리고는 아예 짐을 싸서 산문을 나가 버렸다. 절집이 술렁이고 도반 청담은 어서 성철의 뒤를 밟으라 했다. 며칠 후에서야 가사불사의 책임을 맡았던 청안이 성철을 모시고 돌아왔다. 이런 곡절 끝에 괴색 가사가 탄생했다. 원색을 부쉈으니 치장하여 뽐내겠다는 욕망을 짓이긴 것이었다. 한 점 사치도 몸에 붙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있었다. 바로 부처의 옷이었다. 대승사에서 가사불사 회향 법회가 열렸다. 자운이 법문을 했다. 성철과 청담은 묵언기도 중이었다.
“금빛 날개를 펄럭이며 용을 잡아먹는 금시조(金翅鳥)란 새가 있다. 용들은 다 잡아먹혀 씨가 마를 정도에 이르자 부처님께 살려 달라 애원했다. 부처님이 이를 가엾게 여겨 가사의 실오라기 하나를 뽑아서 지니게 하니 금시조가 감히 용을 잡아먹지 못했다. 그리할진대 가사를 통째로 입고 있는 승려들은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그러니 보아라. 가사를 지어 올리는 공덕은 얼마나 큰 것인가.”
출가 후 묘엄이 들은 첫 법문이었다. 대중 앞의 자운은 그날 많이 떨었다고 한다.
성철은 대승사에서부터 왜색을 물리치고 부처님대로 살아보자는 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가는 청빈한 수행자의 삶을 살자고 했다. 마침내 성철이 불교개혁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성철은 겨울임에도 서늘한 곳을 좋아했다. 아니 서늘한 곳에 있어야 했다.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했기 때문이었다. 잘 때도 좌선을 풀지 않았다. 따뜻한 곳에 있으면 눕고 싶어졌기 때문에 이를 경계했다. 문틈으로 한기가 스며들면 앉은 채로 맞아야 했다. 그래서 한 겨울에는 이불을 있는 대로 쌓아서 찬바람을 막았다. 성철은 겨울 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일제는 전황이 불리하자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했다. 조선인을 자신들의 전장에 세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조선인 학생들까지 학도병으로 전선에 보냈다. 1944년 2월에는 전면 징용제를 강행했고, 8월에는 여성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했다.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을 전선으로 보냈다. 전장의 조선 청년은 총알받이나 대포밥이 되었고, 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은 전쟁의 도구가 되었으며, 정신대원로 끌려간 부녀자들은 일본군위안부가 돼야 했다. 이듬해 동안거가 끝난 직후 외딴 산사 대승사에도 징집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징집 대상은 바로 도우였다. 그렇다고 일본이 벌인 전장으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다시 떠나야 했다. 성철은 대승사 사적비가 있는 곳까지 나와 떠나는 도우를 지켜봤다.
“같이 살 수 있을 것이야. 몸조심 하시게.”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절을 올리는 도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도우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잘 모면하여 해방이 되거든 같이 살자고 하시는데, 앞일을 모르니 눈물이 핑 돌더군요. 지금도 스님과 작별하면서 눈물 흘리며 걸망지고 나오던 일이 생생합니다.”
해방, 그러고 보니 총림을 구성하고 ‘부처님 당시처럼’ 산다는 것은 해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철과 청담은 해방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