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현의 명수필 산책(5) 서정범 수필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서정범 수필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최원현
nulsaem@hanmail.net
한국 수필문단이 형성된 것은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되면서라 볼 수 있다. 1971년 2월 조경희 초대회장으로 시작된 한국수필가협회는 그해 4월 『수필문예』 창간으로 더욱 활성화를 가져왔는데 경희대 국문과 서정범 교수의 힘이 컸다. 학자이기 전에 한국 수필문학이 이만큼 위치를 확보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수고를 하신 분이다. 협회 기관지인『한국수필』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한국수필 문단의 위상을 강화해 온 분이다.
서정범(徐廷範) 교수는 국문학자·수필가·민속학자·무속연구가로 1926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자유문학》에 평론 <은어(隱語)와 문학>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1960년『현대문학』에 <샤머니즘에서 본 한국문학>을 발표하는 등 한국적인 정서와 샤머니즘의 세계를 추구하는 글쓰기를 했다. 1966년부터 수필을 발표했는데 <병상기(病床記)> <미리내> 등 동심(童心) 세계를 추구하는 수필을 다수 발표했다.
수필집으로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74)를 시작으로 ≪겨울 무지개≫(’77) ≪무녀의 사랑 이야기≫(’79) ≪그 생명의 고향≫(’81) ≪사랑과 죽음의 마술사≫(’82) ≪영계의 사랑과 그 빛≫(’85) ≪품봐, 품봐≫(’92) 등 그의 수필집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특히 첫 수필집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는 20판을 찍는 등 수필의 저변확대 및 수필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1971년 4월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1985년부터 대학가의 유행어 등을 모아 펴낸 ‘별곡 시리즈’는 해마다의 관심사, 대표적인 사건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하여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참새 시리즈’ 등은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1981년 한국문학상, 1993년 펜문학상, 2000년 수필문학상, 2004년 제8회 동숭학술상 공로상을 받았다. 1996년 12월 한국어원학회 초대회장을 했고, 2002년에는『한국무속인열전』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7월 14일 오후 83세로 별세했다.
첫 수필집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는 서정범 수필의 전형을 보여준 수필집이다. 그만의 독특한 구성과 해학이 담겨있으며 한 작품 속에 여러 개의 에피소드를 넣어 그것을 하나의 주제로 의미화하되 독자가 끝까지 다 읽을 때까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모르게 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수필을 끌고 갔다.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에도 네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가 있다. 두 사람의 낚시 이야기, 여선생의 꿈 이야기, 제자의 꿈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의 낚시 이야기다. 이 네 개의 이야기들이 독립적으로 스토리를 만들다가 마지막은 놓친 열차 이야기로 묶어진다. 내 개의 이야기가 모두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런데 그 놓쳐버림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다.
수필을 왜 안 읽느냐고 하면 재미가 없어서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수필가 1만명이 넘는 시대에 쏟아져 나온 수필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읽어보면 하나같이 그게 그거고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살아온 시대가 같으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이란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로 독자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러고 보면 옛 수필들에 오히려 공감이 가는 작품들이 많다. 우선 읽고 나면 상쾌함이 있다. 촌철살인(寸鐵殺人),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무언가가 있다. 소재도 다양하다. 한데 요즘 수필들은 그런 독특한 소재도 재미난 이야기도 아닌 너무 평범한 것들로 지면을 채운다. 못내 아쉽고 선배 선인들께 죄송할 따름이다.
서정범 수필에선 소재와 주제들이 적나라하게 원시의 나성(裸性) 그대로 독자 앞에 선다. 그래서 그의 수필들은 소박하다. 그런데 그것이 또 독자를 매료시키는 마력을 갖게 한다. 추리소설처럼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렇지만 독자는 그의 ‘계획된 음모’(원형갑)에 의해 작품 속에 빠져들지만 그런 음모의 낌새나 냄새는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한다. 결국 수필 한 편을 다 읽은 후에서야 비로소 한숨과 함께 아 그랬었구나 하고 그 계획된 음모에서 풀려나는 것이 바로 서정범 수필이다.
서정범 수필의 또 다른 매력은 간결 명료하고 정확한 문장 표현과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문장의 흐름이다. 아주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풀어나가기 때문에 독자는 아무런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전개는 경쾌하고 긴장감이 돌게 함축적이다.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는 1972년 3월호『수필문학』(발행인 김승우) 창간호에 실린 작품이다. 이 작품이 수록된『놓친 열차는 아름답다』(‘74.범우사)의 초판본은 내게 없고 76년 6판본이 있다. 책 케이스까지 있는 305쪽의 양장본이다. 사람은 가도 그 이름은 남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책으로 남겨진 서정범 교수님의 수필을 읽다보니 1987년 봄 경희대 연구실에서 내 천료작 수필의 지도를 받던 일이 생각난다. 정신없게 널려진 연구실 침대 위의 책을 내가 정리하려 하자 놀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놓아진 채로 있어야 찾을 수 있다며 손도 못 대게 하셨다. 그러고보면 요즘 나도 그렇다. 아내는 책 좀 버리던가 정리하라고 하지만 그대로 있어야 나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가진지 10년도 넘어버렸다. 첫 수필집『놓친 열차는 아름답다』를 가슴에 품어본다. 만년엔 향기롭지 못한 일도 떠돌았지만 늘 다정다감하시고 유머가 넘치시던 선생님의 수필을 읽으며 그리움에 젖어본다. 선생님, 금년이 한국수필 창립 50주년입니다. 계간 리더스에세이 2021.5.봄호(통권 제20호)
최원현 nulsaem@hanmail.net
『한국수필』로 수필, 『조선문학』에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겸 월간 『한국수필』 발행인. 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외,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그냥》 《어떤 숲의 전설》 등 20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및 고등학교 《문학 상》, 중국 동북3성 《중학생 작문》 등과 여러 교재에 작품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