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김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가 지난 해 5월 21일 우리나라 최초의 존엄사 판결의 주인공이 되었고, 6월 23일 인공호흡기 제거로 온 사회의 관심을 모았던 그 김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인공호흡기 제거 후 몇 시간 안에 돌아가실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과 달리 할머니는 자가호흡을 계속했고, 인공호흡기 제거 6개월이 지나 201일만인 지난 1월 10일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평소 가족들에게 '기계에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하셨던 할머니가 직접 겪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에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과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불러일으켰기에 참으로 소중한 일을 하고 가셨다고 생각한다. 그 자녀들 또한 깊은 고민 속에서 무거운 짐을 감당해 주었기에 존엄한 죽음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한 발짝 진전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여기, 서른 세 살 여자 권투선수 '매기'가 경기 중 입은 부상으로 척추신경이 손상돼 꼼짝 못하고 누워있다. 24시간 산소호흡기을 끼고 있어야 한다. 생각은 할 수 있고 보고 듣고 말하는 것 또한 할 수 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 누워 있으니 욕창이 생겨 다리 한 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매기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매기 옆에는 매기의 그다지 길지 않은 권투 인생을 함께 한 늙은 권투 트레이너 '프랭키'가 있다. 프랭키는 연락이 끊긴 딸에게 늘 편지를 쓴다. 하지만 편지는 늘 되돌아온다. 세상 모든 것에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프랭키 앞에 매기가 나타났던 것.
가르침을 거부하는 프랭키, 가르쳐 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매기. 그리고 두 사람 옆에는 그들을 지켜보는, 프랭키만큼 늙은 체육관 관리인 '스크랩'이 있다. 스크랩이 권투선수였을 때 프랭키는 그의 트레이너였다.
만만찮은 두 사람의 고집 싸움에서 결국 매기가 이기고, 매기는 권투선수로 새롭게 태어난다. 가족과의 결별로 어느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지만 속내는 또 그렇지 않았는지, 프랭키는 다른 사람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게일어(아일랜드어) 단어인 '모쿠슈라'라고 매기를 부르고, 그 이름은 권투선수 매기의 애칭이 된다.
매기는 가족이 있지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링에 올라 번 돈으로 집을 사주어도 불평 뿐이고, 중상을 입고 누워있어도 그들은 매기의 돈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니 혈육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픈 매기를 더 아프게 할 뿐이다.
오히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프랭키와 매기가 가족이다. 프랭키는 매기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매기가 프랭키에게 말한다. "이대로 살 순 없어요!"
'나는 해냈고, 세상을 봤다'는 매기의 이야기 속에는 더 이상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어렵게 이루었던 것들 마저 다 잃어버리고 떠나게 될 게 뻔한 무의미한 생명 연장은 싫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건 안 된다고, 그럴 순 없다는 프랭키. 매기는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하고, 병원에서는 반복되는 자살 시도를 막기 위해 진정제를 주사한다. 의식이 몽롱한 매기를 지켜보며 깊은 고민에 빠지는 프랭키.
|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한 장면
|
프랭키를 알고 매기를 아는 스크랩은 매기가 '여한이 없을 것...'이란 말을 들려준다. 그 말에는 무수히 많은 뜻이 담겨있다.
결국 프랭키는 매기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내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주사를 놓아준다. 그러면서 '모쿠슈라'는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는 뜻이라고 매기의 귀에 속삭인다. 매기의 눈가로 흘러내리는 눈물 한 줄기...
지난 해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직후 김할머니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고 언론에서 보도들을 했지만 병원 쪽에서는 '의미 없는 조건 반사'였다고 말했다. 김할머니의 눈물에 대해 당시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호흡기 떼어낸 게 슬퍼서가 아니라, 고마워서 흘린 눈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복잡하고 무겁다고 피할 일이 아니다. 환자의 고통은 외면한 채, 가족들의 어려움은 나 몰라라 하면서 생명존중만을 외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각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자유롭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되고, 서두르지 않는 가운데 최대한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어르신들 앞에서 존엄한 마무리를 이야기하면 불효이며 돈만 아는 사람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살릴 수 있는 생명이지만 돈이 없어서 존엄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끝내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경제적인 지원 체계와 윤리 원칙을 만들어 놓아야 함은 당연하다.
앞으로도 존엄한 죽음과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단에 관해서는 갈 길이 멀 것이다. 힘들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나와 뜻이 다르다고 서로 미워하고 등 돌리지 말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죽음에 대해, 그 죽음의 올바른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일은 성숙한 삶, 성숙한 사회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