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나는 도올 9화
1. 기승전詩, 중국
우리 조상들은 서로의 진심을 나누기 전에 시(詩)를 통해 풍류와 철학을 나누었다.
2013년 시진핑은 외교석상에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범해(泛海)라는 한시를 인용하기도 했다.
범해(泛海) 바다에 배 띄우니
掛席浮滄海 푸른 바다에 돛달아 배 띄우니
長風萬里通 긴 바람이 만 리에 통하네
乘槎思漢使 뗏목 타니 한(漢)나라 사신 생각나고
採藥憶秦童 불로초 캐려던 진(秦)나라 아이들도 생각나네
日月無何外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乾坤太極中 하늘과 땅은 태극 중에 있네
蓬萊看咫尺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吾且訪仙翁 나는 또 신선을 찾네
중국은 학교에서 시를 외우게 한다.
중국에서 사랑받은 우리나라의 시가 있다. 홍길동전의 저자가 누구인가? 허균이다. 바로 그 허균의 누나인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시가 중국에서 굉장한 인기가 있었다.
조선시선(朝鮮詩選) : 1598년 명나라 사신 오명제(吳明濟)가 우리나라 한시를 소개한 책. 허난설헌의 시 57수 수록
한, 위나라의 제가보다 뛰어나고 성당(盛唐)의 것만 하다.
-서애집-
난설헌은 慧女이자 천인(天人)이다.
- 긍사(亘史)
이역(異域)에 이처럼 출중한 여인이 있었단 말인가
- 희곡가 탕현조
최초의 한류는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이었다.
2. 차이나는 한류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높다. 지전(紙錢)에 한국 배우의 얼굴이 등장하기도 한다.
지전(紙錢) : 중국의 중추절(仲秋節)에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며 태우는 돈 모양의 종이
중국으로 수출된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마는? ‘질투’였다. 1992년 작품으로 1년 뒤 중국에서 방영되었다. 1994년부터 107편의 한국 드라마가 중국에 수출되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문화 공백기가 있다. 하방 세대와 유학 세대 사이에 낀 중년층의 문화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 빈곳을 채워준 게 유교 정서를 가진 한국 드라마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콘텐츠뿐만 아니라 포맷 수출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3. 대륙을 삼킨 아편전쟁
19세기 중국 역사에 있어 가장 거대한 사건은? 아편전쟁이다.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중국, 영국무역상의 아편을 몰수한 것을 빌미로 발생
1840년 6월에 시작된 중국 vs 영국의 전쟁
아편전쟁이 19세기 중국의 가장 거대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0세기 한국의 가장 거대한 사건은 무엇일까? 뭐니뭐니해도 6.25 전쟁이다.
6.25 전쟁 :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으로 사상자 52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3년간의 전쟁으로 농업, 공업, 사회기반시설 대부분 파괴
전쟁은 비극적이면서도 많은 사회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아편 전쟁이 중요하지만, 문화사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한국과 중국에 똑같은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중국의 위상은 G1이었다. 아무도 중국을 함부로 건드릴 생각도 못했다. 독보적 세계 1위였다. 당시 미국은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중국대륙이 섬나라 영국에 무너졌다. 그것은 곧 미국이 쿠바에 점령당해서 미국이 끝난 것과 같다. 실제로 아편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4. 사람이 하늘이다.
그런 세계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에 일어난 사건은 무엇이겠나? 바로 동학(東學)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지배자들은 나라 밖 상황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편전쟁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경주 촌놈인 최수운은 세계 역사의 기운을 감지했다.
최제우(호:수운, 1824~1864) : 조선말기의 대사상가로 외세에 항거 한민족 고유의 사상을 융합, 동학을 창시
“여기서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고, 새로운 천명을 받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망한다!”고 했다.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했다. ‘사람이 곧 하느님이다.’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은 근대 정신의 발현이다.
인내천(人乃天) : 동학의 근본사상으로 인간은 모두 존엄하며 평등함을 의미
그런데 동학운동과 같은 시대에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가?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이다.
그 당시 중국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유출되어 중국 경제에 위기가 왔다. 게다가 자존심은 다 상하고, 전 국민들은 아편으로 병들어가고 있었다.
1830년대말 청나라 내 아편중독자 약500만명
군사적인 침략을 당해 ‘남경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고, 모든 자존심이 짓밟힌 상태에서 무슨 희망이 있었겠나?
남경조약으로 홍콩섬 할양, 5개 항구 개항
5. 홍수전의 태평천국
아편전쟁 패배후 엄청난 배상금 요구
청나라 농민들의 부담 가중
농민, 수공업자 주축으로 태평천국운동 전개
‘청나라 타도하고 평등한 나라 세우자’
태평천국운동의 창시자 홍수전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혁명을 하겠나? 안 한다. 홍수전도 과거시험에 연이은 낙방을 했다.
그러다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데 외국인 선교사가 책 한 권을 주었다. 이것이 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책이다.
“사서오경 읽느라고 지겨운데, 이거나 잃어볼까?” 해서 읽어보니 재미가 쏠쏠했다. 세상을 구원하다고 하고, 상제가 나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거 가지고 장사 해먹을 만하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새로운 국가인 ‘태평천국’을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예수한테 맡기냐? 서양 종교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 땅에 천국을 만들어야지.’
홍수전 이상국가 ‘태평천국’ 선포(1851년)
홍수전이 태평천국을 만들자, 국민들은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낸다. 홍수전은 말솜씨와 글솜씨가 있었다. 그래서 자기 성경을 만들었다.
기존의 여러 편의 글을 엮어 <태평조서(太平詔書)> 펴냄
평등 사회 건설 및 토지 균등 분배로 약 210만명 인민들의 지지
그리고 1851년 1월 11일 ‘태평천국’이라는 국가체제를 선포한다. 남녀 모두 응시 가능한 과거 시험도 본다. 사서오경은 과거 시험 과목에서 빼버린다. 자기가 쓴 성경으로 과거 시험을 보게 한다. 그러면서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고, 군대를 조직한다.
6. 동방의 유대인 객가인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중국 역사를 볼 때, 객가인(客家人)을 알아야 한다.
객가인(客家人) : ‘타향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 원래는 황하 중원지역에 거주. 고향을 떠나 남방으로 이주. 전세계에 8,000만 명 정도 추산
북방에 있던 중국인들이 일찍이 남방으로 내려와 살았는데, 이 사람들은 독특한 문화가 있다.
토루(土樓)라는 곳에 산다. 거대한 아파트인데, 흙집으로 동그랗게 만든다. 그게 아주 특이한 건축양식이다.
토루(土樓) : 객가인의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토벽과 목재로 아파트처럼 층층히 쌓은 형대. 건물을 원형으로 지으며, 수십에서 수백 명씩 집단으로 살면서 거주하는 공동 주택
객가인들의 특징은 보면, 머리가 좋고, 반골기질이 있다. 그리고 문화를 보면, 고유 음식과 고유 언어가 있다.
홍수전은 어느 종족일까? 객가인이었다. 중국의 근세 혁명을 일으킨 가장 위대한 인물로, 공화국을 창시한 손문도 객가인이었다.
개혁개방의 지도자 등소평도 객가인이었다. 싱가포르 제1대 총리 리콴유도 객가인이다. 홍콩의 유명한 영화배우 장국영도 객가인이다. 장개석의 아내이자 정치인이었던 송미령도 객가인이었다.
송미령의 아버지 찰리 송이 손문을 지원한 이유는 같은 객가인이기 때문이었다. 피보다 진한 종족애를 갖고 있다.
그러니깐 중국의 객가인은 동방의 유대인과 같은 느낌이다. 미국에 유대인이 있는 것처럼, 중국에는 객가인이 있다.
6. 도올이 사랑한 남자 이수성
홍수전의 태평천국은 14년간 유지(1851-1864)된다. 약 210만 명의 인민들이 참여했다. 중국 18개 성, 600여 개의 성시에서 태평천국 활동을 하였다.
그 본부가 어디 있었냐? 소주에 가면 졸정원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명나라 때 정원이 있다.
졸정원(拙政園) : 중국 소주(蘇州) 지역의 공원. 명나라 때 설계한 중국 4대 정원 중 하나.
그 옆에 ‘충왕부’라는 것이 있다.
충왕부(忠王府) : 졸정원 서쪽에 위치한 태평천국의 충왕 이수성이 사용하던 건물
이 충왕은 누구냐?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은 일종의 종교적 리더였고, 실제로 태평천국을 이끌어 간 사람은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이라는 탁월한 인물이다.
나는 이수성을 사랑한다. 미남이고, 모든 태평천국의 전쟁을 이끈 사람이다.
그런데 태평천국운동과 제2차 아편전쟁의 시기가 겹친다.
태평천국운동(1851-1864)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막으려고 지방마다 치안 유지를 위한 자체적으로 지방군을 조직한다.
그 중 가장 힘이 셌던 군대가 호남성의 상군이었다.
상군 : 중국 청나라 말 증국번(曾國藩)이 만든 반혁명(反革命) 군대
7. 명장대결, 증국번 vs 이수성
그 상군의 지도자가 증국번이었다.
증국번(曾國藩, 1811~1872) : 상군(湘軍)의 총지휘관 호남사람. 청나라 말기 정치가이자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총지휘관
1864년 6월 3일 난징 함락 전 홍수전은 사망한다.
같은 해인 1864년 이수성은 홍수전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피신을 가다가 도저히 어려워서, 홍수전 아들은 좋은 말을 태워 보내고, 자기는 빈약한 말을 타고 가다가 결국 잡힌다.
증국번의 동생 증국전은 이수성을 잡자마자 그의 팔과 허벅지의 살을 도려낸다.
10여년의 집요한 추적에도 끝까지 잡히지 않았던 백전백승의 태평군 지휘관 이수성은 그렇게 잡힌다.
증국번은 자기 스스로 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토록 이수성을 잡기 어려웠다. 그만큼 이수성은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때 태평천국에 가담했던 30만명의 사람들이 한 명도 변절하지 않고, 투항하지도 않고 다 싸운다. 태평군 30만을 다 몰살한다.
이수성은 완전한 패장이다. 그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끌려나오는데, 연변에 있던 모든 인민들이 촤악 엎드려서 이수성의 마지막 가는 길을 경배하였다.
패장에게 그런 경외감을 표한다는 것은 위대한 리더였다는 증거다.
이수성은 태평천국운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끝까지 인민을 위한 정책을 펼쳤던 민중 지도자였다. 정말로 민주적으로 산 사람이다.
그래서 증국번이 이수성을 만나는 순간 놀란다. ‘너...였냐?’ 너무 여성처럼 호리호리했다. 그러면서 ‘너는 그동안 나를 어떻게 빠져나갔냐?’면서 묻기 시작한다. 그런데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모든 역사를 정리해 볼테냐?’하고 묻는다. 그러자 이수성은 ‘쓰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래서 이수성은 감옥에 ‘태평천국의 시말’을 자술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20일 간 하루에 7,000자씩 썼다고 한다. 태평천국운동의 모든 역사를 기록한다.
그리고 나서 사형장에 끌려갈 때도 30만을 이끈 장군답게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증국번한테 ‘그대는 지금이라도 나와 합심하여 ‘만청’을 무너뜨려야지, 그대와 같은 위대한 학자가 어떻게 나를 죽일 생각만하고 있소?’라고 한다.
이수성은 그렇게 목이 잘려 죽었지만, 역사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충왕 이수성 1864년 8월 7일 사형
이수성이 밑에 있던 장군 한 사람이 나중에 손문을 가르친다. 그래서 신해혁명으로 연결이 된다. 역사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손문이 어릴 때 다닌 서당선생님 결국 신해혁명으로 연결됨. 같은 객가인 홍수전의 진면목을 듣고 자란 손문, ‘나는 커서 제2의 홍수전이 될 거야.’
천하의 사람 모두가 함께 땅을 일구고 음식을 함께 먹고, 옷도 함께 입고 남자와 여자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태평천국이다. - 충왕 이수성
8. 군벌시대의 제왕, 장작림
내가 왜 ‘태평천국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했냐? 바로 장학량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장학량의 아버지은 장작림이라는 사람이다.
장작림(張作霖, 1875~1928) : 중화민국 수립 후 동북 지역의 대원수로 ‘동북왕’으로 불림
근세 중국사를 바라볼 때 가장 문제가 되는 말이 군벌(軍閥)이다. 이것을 Warlord라고 한다.
군벌 : 사병적 군사력을 기반으로 중국정치에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앙, 지방의 실력자 집단
만청은 어떻게 끝나는가?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붕괴되면서 중국은 군벌의 시대가 된다. 또다시 분열이 되는 것이다.
손문의 동맹회를 중심으로 군인들이 무력 봉기한 신해혁명.15개성 독립정권 수립을 시작으로 청왕조가 붕괴되었다.
손문도 크게 보면 군벌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장개석도 군벌이고, 장작림도 군벌이다. 다 군벌이다.
근대의 군벌들의 개념은 바로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했던 상군(湘軍), 회군(淮軍)과 같은 민병대들이다. 이들은 태평천국을 진압한 후에도 유지되어 다양하게 발전하여 군벌이 된다.
그래서 이처럼 전국에 난립되어 있던 군벌을 하나씩 소탕해 가면서 전국의 군벌들을 제압하고, 북경에서 대원수가 된 사람이 바로 장작림이다.
그리고 그 장작림의 아들이 장학량이다.
지금 한국인들은 장학량을 장개석, 모택동에 비하면, 꼽사리도 못 끼는 변방의 인물로 오해를 하고 있다. 역사를 잘 못 보고 있다. 그런 인물이 아니다.
사실 중국 20세기 초반, 최고의 권력자는 장학량이었다.
그때 모택동은 명함도 없었고, 장개석은 장학량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존재였다.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은 아주 독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토비 출신이었다.
토비(土匪) : 지방의 무장 도적 떼를 일컫는 말로 토비, 비적, 도비 등으로 부름
토비는 다른 말로 비적이라고 했다. 비적은 나쁜 뜻은 아니고, 중국에서는 대개 다 비적이다. 나쁘긴 나쁜데, 비적도 함부로 노략질을 하는 게 아니고, 그런대로 먹고 사는 방식이 있었던 거 같다.
많은 비적들 중에서 장작림은 비적을 소탕하는 역할을 했다. 비적이었기 때문에 비적을 잘 알았다.
비적을 소탕하는 초토사로 청나라의 벼슬을 하면서, 만주지역 전역의 비적을 제압한다. 그래서 동북을 관장하는 대관리가 된다.
청나라 비적 → 군벌로 인생역전
9. 동북의 역사, 우리의 역사
동북 3성을 중국에선 보통 똥뻬이라고 한다.
동북 3성 : 중국 동북쪽에 위치한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3성을 통틀어 일컫는 말
여러분들은 동북 3성이라고 하면 중국의 변방으로 아는데, 동북 3성은 변방이 아니다.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다. 가장 하부구조가 탄탄한 지역이다. 농업, 공업, 철공업, 광업 모든 면에서 20세기초 동북이 가장 우세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장작림은 스스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자랐기 때문에, 동북의 인민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열망이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교육은 지도자의 위무!”
당대 중국의 최고 부자였는데, 돈을 벌어서 단 한 푼도 자기 개인을 위해서 쓰지 않았다. 전부 대학을 만들고, 공장을 짓는데 쏟았다.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북대학 건립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병기창 건설
그래서 동북육군강무당이라고 하는 위대한 군관학교를 만들었다.
동북육군강무당(東北陸軍講武堂) : 장작림이 정규군 양성을 위해 만든 육군 군관학교로 중국 4대 사관학교 중 하나
그런데 손문도 군관학교를 만들었다. 손문이 만든 유명한 군관학교가 황포군관학교다.
황포군관학교 : 중국국민혁명에 필요한 군사 간부 양성을 위해 1924년 중국 광저우에 설립
황포군관학교는 엄청났다. 당시 교관으로 중국초대총리인 주은래와 군사위 부주석 엽검영이 있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공산당의 리더들이 이 학교의 선생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전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다.
한국 역사와 중국 역사는 이렇게 얽혀 있다. 서로 밀접하다. 역사를 제대로 알면, 중국 동북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다.
그런데 황포군관학교보다 동북육군강무당은 훨씬 빨리 세워졌다. 보정군관학교라고 북경 근처에 유명한 군관학교가 있고, 운남강무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네 개가 중국 4대 군관학교인데,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것이 동북육군강무당이다.
같은 시기인 1919년 우리나라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사실 3.1운동이 아니라 3.1 민중독립항쟁이다.
사실 3.1운동이라는 말은 좋지 않은 말이다.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정신을 기려 3.1 운동을 3.1 민중 독립 항쟁으로 바꿔야 한다.
10. 장학량을 만든 한 마디
하여튼, 같은 해인 1919년 18세의 장학량이 동북강무당 포병과에 입학한다.
장학량은 어려서부터 탁월했다. 특히 심양에 와서 YMCA같은 기관에서 굉장히 서구적인 교육을 받는다.
심양에서 가정교사 초빙해 한학과 영어 배우고, 기독교 청년회에 참가해 탁구, 정구, 댄스, 수영, 승마를 배우고 자유평등사상을 흡수한 장학량
어려서부터 승마, 사격, 조정 등의 운동을 비롯해서 댄스, 영어 등 완전히 현대식 교육을 받는다.
장학량에게 최초로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 장백령이다. 장백령은 주은래가 다닌 천진의 남개 대학을 만든 사람이다.
장백령(張伯苓, 1876~1951) : 근대시기 중국의 정치가이자 교육자. 컬럼비아대 출신. 천진에 남개대학(남개대학)을 설립해 주은해 총리 등 수많은 지사를 배출. 중국 근대교육의 아버지.
그런데 어느 날 장백령이 똥베이에 와서 집회를 하면서 ‘중국은 내가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강연을 하는데, 장학량이 일어나서 ‘당신이 뭐 길래? 자신이 중국을 구원하겠다고 허풍을 칩니까?’라고 묻는다.
15세 때의 장학량이 그렇게 질문을 했다.
이때 장백령이 유명한 말을 한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바로 ‘너’다! 여러분들이 이 암울한 중국의 현실을 놓고, 내가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중국이 점점 하루하루 미궁에 빠져가고 있지 않느냐! 바로, 너야말로 중국의 미래를 구원할 수가 있다!”
이런 유명한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을 듣고 장학량은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아웃사이더가 되지 말고 바로 동북의 주인이 되어라!”라고 권고를 한다.
11. 장학량의 참 스승 곽송령
그래서 장학량은 동북강무당에 입학한다. 거기서 아주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위대한 스승이 누구냐? 곽송령(郭松齡)이라는 사람이다. 곽송령은 장학량의 인생에 너무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 어린 시절에 모든 기쁨과 슬픔을 안겨준 사람이다.
손문의 삼민주의로 무장된 근대의식의 운동가
엄격한 스승 곽송령
우선, 당시 군대는 아편에 찌들어 있었다. 모택동 군대와 장개석 군대의 차이는 뭐냐? 모택동 군대는 돈이 없어서 아편을 못 피었다. 장개석 군대는 아편을 필 여유가 있었다. 왜 장개석 군대가 패망해야만 했는지 알 수 있다.
아편전쟁으로 시작하는 19세기 역사의 상처는 이렇게 전달되는 것이다.
무신 곽송령은 개인 생활부터 엄격하고 꼿꼿한 위대한 군인이었다. 아편을 일체 금지한다. 이 사람은 북경의 육군군관학교를 나왔는데, 일찍이 손문의 동맹회에 들어가서 완전히 개화사상에 젖은 사람이다.
동맹회(同盟會) : 1905년 8월 손문이 일본 동경에 결성한 혁명 정당
우리나라 1970년대 대학가에서 볼 수 있는 의식화 운동의 주모자와 같은 인간이다. 민주적 신념에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한숙수(韓淑秀, 1891-1925)라는 사람인데, 아름답고 탁월했다. 사진이 남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 한숙수도 지독하게 민주신념에 불타는 급진주의자였다.
이러다보니 이 사람들이 장작림을 좋아하겠나? 당연히 싫어했다. 왜냐하면 장작림은 민주신념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 타락한 노인의 아들 새끼라며, 장학량을 개똥으로 보았다.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장학량이 보니깐, 자기가 배울 사람은 곽송령뿐이었다. 인격적으로 고매하고 실력이 탁월했다. 그리고 수학, 물리학, 포병, 전투, 전법, 손자병법 등 모두에 달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학량은 자꾸 가르쳐 달라고 계속 부탁했다.
그런데 장학량을 겪어보니 애가 순박하고 착했다. 그래서 ‘야~ 요놈을 잘 가르치면 중화민족의 희망이 보이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아주 짙은 사제지정이 형성된다.
12. 백전백승, 장학량의 동북군
그런데 이 장학량은 졸업하면서 바로 장군이 된다. 소장이 된다.
그리고 스승인 곽송령은 장학량 밑에서 참모가 된다.
그 뒤로 엄청난 전쟁을 치른다. 군벌 간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전부 곽송령의 전법으로 승리한다. 그래서 동북군이 확대되어간다.
그런데 곽송령의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건 잘못된 전쟁이다! 군벌이라지만 왜 같은 중국인끼리 싸움을 하냐? 동북군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 저 개같은 왜적놈들이 이 땅을 침범치 못하게 일본군과 싸워야지, 왜 군벌끼리 패권주의만 확대시키고 있는가!’
개 같은 왜적 놈.
출처 : 최제우 <용담유사> 안심가 중
이렇게 군벌 간의 싸움에 엄청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시찰을 간다.
그런데 1925년 일본 시찰 중 놀라운 정보를 얻게 된다. 일본의 관동군과 장작림이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작림의 속내는 일본군의 힘을 빌려 군벌을 모두 초토화시키려 계획하고 있다는 걸 알아낸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의미 없는 전쟁이다. 안 되겠다. 도저히 내가 이 조직에서 이렇게 전쟁을 하고 있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참 복잡한 이야기다. 장작림은 묘한 인물이다. 자기 딴에는 일본군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복잡한 중국의 정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만들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13. 대의를 건 도과
결국 곽송령은 도과(倒戈)를 선언한다.
도과란? 자기 창으로 싸워야 할 적을 찌르는 게 아니라, 자기편을 찌르는 것이다. 이게 우리나라로 치면, 배신, 반란, 항명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만큼 아(我)와 적(敵)의 뒤바뀌는 상태이다.
그래서 1925년 7만여 중국의 가장 정예군인 곽송력 부대가 반란을 일으킨다.
곽송령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내전을 중지하라, 그리하여 이땅에 평화를 가져와라.
조국에 화를 입히고, 일본에 아부하는 장작림을 하야시켜라.
장학량을 수령으로 옹립하여 동북3성을 개혁하라.
옛 고조선의 경계인 난하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장작림이 휘몰리게 된다.
장작림은 자신와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곽송령을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그런데 곽송령이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고 나오니깐, ‘곽송령이 반란을?’이라며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이런 곽송령의 토벌 대장을 누굴 시키느냐? 바로 장학량을 시킨다.
14. 총을 겨눈 스승과 제자
그렇게 장학량은 자기 선생을 토벌하는 대장이 된다. 그래서 장학량은 곽송령한테 가서 ‘제발 이 제자를 한번 만나주십쇼.’라고 한다. 그런데 안 만나준다.
그래서 그때 편지를 쓰는데, 불과 24세 소년의 편지가 이렇게 유려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량(良), 천만 번을 죽더라도 어찌 감히 승명(承命)(어버이의 명을 받들어)하여 천추오역(千秋忤逆)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오리까? 군자는 사람을 덕으로 아낄 줄 알고, 오형은 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데 하필 이렇게 상핍(相逼)하여 대적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자 장학량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하는 편지를 쓰지만 결국은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 자기들이 항상 작전 연습했던 강가인 거류하(巨流河)에서 진짜 격전을 벌이게 된다. 서로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장학량은 이대로 싸우면, 자신이 진다는 걸 안다. 그래서 한 수 높은 수를 쓴다.
비행기로 전단지를 뿌린다. 마음을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반란군들이 누구인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 부하들이었다.
老張家人不打老張家
‘장가 밥 먹은 우리는 절대 장가를 치지 않는다.
‘장가 사람들은 절대 장가 사람을 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병사들이 읽는다.
그 전단지 하나가 결국 도과를 무산시킨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의 장학량이 이렇게 호소를 하시는데, 어떻게 무신을 따라가리오.’ 그러면서 전부 흩어진다.
그래가지고 곽송령은 부인과 더불어 도망을 갔으면 좋았는데, 불행하게도 부인이 말을 못 탔다.
15. 제발, 살아만 있어요!
장학량은 곽송령이 도망쳐서 제발 살아 있기만을 바랐다. 살아만 있으면, 워낙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아니깐, 곽송령 내외를 유학 보내주려고 했다.
곽송령의 반란도 명분이 있었고, 우리 아버지도 일본에 내통한 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살아만 있기 바랐는데, 잡힌다.
양우정(楊宇霆, 1886~1929)
그런데 그 부대 내에서 곽송령을 질시하던, 소위 말해 다른 파가 있었다. 그 파의 괴수인 양우정에게 잡힌다.
양우정은 사관파 vs 곽송령은 육대파
장작림이 전화를 걸어서, ‘곽송령을 죽이지 마라. 내가 심문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심문을 하게 되면 군대 비리가 다 나오게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군대 비리였다. 청렴 깨끗한 곽송령을 심문하게 되면 동북군의 비리가 다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러니깐 양우정이 항명을 하고, 서둘러서 곽송령의 사형을 집행한다. 그리고 곽송령과 한숙수의 시체가 사흘 동안 공개한다.
또 '곽역송령'이라는 쓴 포스터를 제작해서 전국에 뿌린다.
곽역송령(郭逆松齡) : 반역자 곽송령이라는 뜻
16. 장학량의 결단, 서안사변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장학량은 죽을 때까지 스승 곽송령과 한숙수를 그리워한다.
‘이들이 살아있었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 만날 하는 얘기가 그거였다.
‘서안사변’이라고 하는 중국 역사를 움직인 사건의 딥 스트럭쳐(deep structure)가 이미 이 속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당한 명분이 있더라도 인간적인 배신을 해선 안 되겠다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자기 스승을 반추하게 된 것이다.
내가 비록 송미령과 장개석에게 도과를 할지언정, 인간적으로 그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지 않겠다. 그것이 서안사변과의 상통점이 있는 것이다.
1925년 반봉전쟁으로 스승 곽송령을 잃은 장학량.
1936년 서안사변으로 장개석 감금
국민당, 공산당의 내전 중지 요구
장개석을 죽이지 않고 국공합작 조건으로 석방함
“대의는 택했지만 인간적인 슬픔은 주지 않겠다.”
자신은 54년 동안 자진 연금됨.
곽송령을 처단한 이후에, 거기 있던 7만 부대원들은 어떻게 했을까?
장학령은 ‘곽송령 부대원들 단 한 명도 피해주지 마라!’ 그것은 반란이 아니다. 우리 선생의 실수였고,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은 내가 가지고 있다. 절대 동북군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오히려 이들을 격려해 주고 위로해 줘라.’라고 한다.
그래서 동북군을 완전히 장악한다.
한 인간이 어떻게 역사를 변혁시키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어려서부터 실전 속에서 이러한 뼈아픈 기쁨과 슬픔을 같이 체험하면서 크는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들은 함부로 키워지는 게 아니다.
17. 도올의 4.13 총선
질문 : 며칠 전 경천동지할 사건이 있었다. 투표로 헬조선을 극복하라던 선생님이 투표에 대해서 총정리 한 마디만 해 주세요.
도올 : 우리가 시진핑의 등장과 정치를 총정리했는데, 우리가 우리 현실을 총정리 못할 이유가 없다.
이번 선거를 어느 신문에서 ‘2030의 선거반란’이라는 엉뚱한 표현을 썼는데, 이건 선거반란이 아니다. 이것은 선거를 통해 이 땅의 진정한 주체들이 혁명을 한 것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비로소 민의가 반영되는 민주 체제 정착의 결정적 계기가 만들어졌다.
18. 5.18 광주민주항쟁
1980년 5월 18일, 무슨 일이 일어났나?
73만의 도시 광주에 3개 공수여단 10개 대대와 20사단을 합쳐 2만여 명이 넘는 무장 병력을 파견된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느닷없이 애국가가 방송되면서, 일제 사격이 시작된다. 건물의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있던 주동자들을 겨냥해서 사격을 실시한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민들한테도 저격을 한다.
1980년 5월 26일 밤, 도청을 중심으로 항쟁지도부는 마지막 전투조를 편성해서, 최후 항쟁을 한다. 그때는 이미 아무도 거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시민들은 완전히 공포에 휩싸였고, 이때 항쟁 지도부가 가두방송차량 1대를 내보냈다.
1980년 5월 26일 밤 두 여학생이 다음과 같은 가두방송을 한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엄군과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소리를 그날 밤에 들은 73만 광주시민, 어느 누구도 가슴에 피멍이 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곧 죽음이기 때문에.
그리고 조금 있다가 도청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 사람이다. 우리 외가가 금남로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천안문 사건을 통해서도 민주주의를 못 따냈다. 오직 개혁개방이라는 사탕을 따냈다.
이 슬픈 한국 역사의 현실에서, 우리는 광주항쟁을 통해서 민주를 따냈다. 그 어렵게 따낸 민주를, 지금 정치가 개판이 돼서 민주를 다 망가뜨리고 있을 때, 젊은이들이 다시 항쟁에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이 사건을 우리는 반란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이것은 이제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서도 혁명할 수 있다는 새로운 확신, 이제부터 우리 역사가 갈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방향이다.
앞으로 한국의 정치는 젊은이를 위한 정치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19. 차이나는 시청자 퀴즈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의 권위가 크게 훼손되자 당시 중국에서는 청조 타조와 새 왕조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남. 청 말기 홍수전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운동은 무엇일까요? : [태평천국운동]
20. 글귀 선물
장자가 꿈을 꾸어서 나비가 됐는가
그 나비가 다시 꿈을 꾸어서 장자가 된 것인가.
不知周之夢爲胡蝶與胡蝶之夢爲周與
- 장자 제물편 호접지몽
풍부한 학식으로 친구를 모으고,
친구로서 이 세상의 인을 도우라.
以文會友 而友輔仁
- 논어 안연편에서
삼십에 사람은 서고, 사십에 미혹됨이 없다.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 논어 爲政편
오직 인한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
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 논어 리인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