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초고가 완성되면, 그 다음 과정은 고등어 다듬듯 하면 된다. 도마에 올려놓고, 쓸데없는 비늘 벗겨내고, 꼬리 짜르고, 지느라미 짜르고, 내장 뽑아낸다. 생선으로 구울 것인지 짭짜롬한 냄비찌개 만들 것인지 결정 한다. 구울 것은 칼집 내고, 소금 치고, 어떤 불에 어느 정도 노릿노릿하게 굽는 것이 좋을까 궁리한다. 찌개꺼리는 고추 후추 양념도 칠 준비한다.
간을 어떻게 맞출지도 생각한다. 파도 넣고 생강도 넣어본다. 포도주도 좀 쳐야 잡냄새 없을 것이다. 양념 잘 쳐서 부드럽고 매콤한 요리 만들까, 살짝 쳐서 담백한 맛이 나게 할까, 그것은 각자 맘이다.
다음 과정은 과메기 말리듯 기다리는 과정이다. 건조대에 걸어놓고 해풍도 쐬고 눈도 맞혀서 몇번 얼였다 녹였다 두어둔다. 시간을 보낸다. 술 빚는 양조과정처럼 적당한 숙성이나 증류 또는 여과과정 거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시간이 약이다.
문장은 항상 며칠 뒤에 보면,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할 부분이 보인다.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전체 배열이 자연스러운지 보아야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글은 죽은 글이다.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울어난 글이 좋은 글이다. 글이 길다 싶으면 짜르고, 짧다 싶으면 보태야 한다.
우물쭈물 주제 불분명한 글은 그 부분 때문에 글 전체를 죽인다. 옛날 사람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다. 주제 불분명하고 우물쭈물 미사여구로 덮은 글은 문장의 독소다. 반드시 짤라내야 한다. 너무 딱딱하다 싶으면 몇대목 서정적인 표현도 넣어야 한다. 흔히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한다.
산책은 마음이 자유롭고 산뜻해야 좋은 산책이다. 산책 나가서 공연히 어려운 소리 한다던가, 자기 자랑 한다던가, 품격없이 시장바닥 이야기 하면 낙제다. 그런 데이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런 수정 과정은 많이 거칠수록 좋다. 그래야 묵은 김치처럼, 오래된 포도주처럼 된다. 감칠 맛, 부드러운 향기가 생긴다.
이 공정 거치면 마지막 옥을 다듬는 공정으로 가야 한다. 문장을 거친 끌로 파내어 다듬고, 부드러운 페이퍼로 갈아주고, 가죽으로 반질반질 광을 내며 다듬어야 한다. 흔히 글 만드는 작업은 뼈를 깍는 작업이라 한다.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고쳤는데,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는 적벽부(赤壁賦)를 지을 때, 그 글 초고가 수레 석대에 가득 했다고 한다. 두보는 시를 쓸 때, '나의 시가 감동을 주지못하면 나는 죽어서도 쉬지 않겠노라(語不驚人 死不休)'고 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수필을 쓸 때, 고양이처럼 잡고, 암탉처럼 품고, 고등어처럼 요리하고, 과메기처럼 말리고, 옥처럼 광을 내라는 요구는 실로 간단한 요구일 것이다.
세상에 글 만드는 일만 어려운 것 아니다. 부인들 장 담그는 일도 어렵다. 좋은 콩 사오고, 장작불에 삶고, 메주 만들고, 곰팡이 피우고, 장독 소독하고, 빨간 고추 숯 넣은 소금물 붓고, 햇볕 잘 드는 장독대에 올리는 일도 일곱번의 과정 거치지 않던가.
끝으로 사족 하나만 단다면, 수필은 음주와 비슷하다. 취한 후에 노래가 나온다. 취해야 우물쭈물 하지않고 쉽게 무대에 올라가 한 곡 때릴 수 있다. 심지어 불러서 즐겁고 들어서 괴로운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수필을 멀쩡한 생정신으로 노래 할려니 어렵고, 곡목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곡목은 사람마다 십팔번 있지 않은가. 뽕짝도, 샹숑도, 크라식도 있다. 십팔번은 남이 정해주는 것 아니다. 자기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르면 그만이다. 그걸 개성이라 한다. 수필은 온갖 경험과 사색과 정서를 믹스한 폭탄주를 자주 마셔야 잘 나온다. 흔히 이렇게 취하는 사람을 작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