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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 씨불 진화론
차주일
평생 멈춰 서서 흔들림을 독경하던 나무가
한순간 쓰러져 멈춤을 독경하던 나무가
불꽃을 버리고 있다. 진신 다비처럼
멈춤으로 흔들림을 떠나보낸 숯이
네발짐승 골격처럼 웅크리고 있다.
모색을 드러낸 숯 앞에
늙은 종부가 비손하며 예를 바친다.
떡잎처럼 벌어지는 불완전 합장으로
몇 대 묵은 치성을 대물림할 수 있었음은
네발짐승처럼 땅을 짚고 살아온 손이
수령(樹齡)보다 많은 죽음을 갖고 있기 때문.
수분을 다 소진하고 아사에 이른 열매가
씨눈 자리에 합장한 떡잎을 새겨 넣고 씨앗이 되듯
죽어 본 숯이 아니었다면
천 년 넘도록 꺼지지 않은 씨불이 존재나 했겠는가.
불이 씨에 이르고자 함인지
씨가 불에 이르고자 함인지
숯에 입김을 불면
신화에서 깨어나는 불꽃 한 마리
맨 처음 직립보행했다는 웅녀의 두 손을 빼닮았다.
인분체(人糞體)
평생 제 얼굴을 찾아 떠돌던 소작농의 이름이
지방 신문 사회면에서 발견되었다.
이름과 얼굴이 마주할 때
성씨와 사지와 몸통이 종적을 감추었다.
열매를 처음 따던 첫 손처럼 떨던 문맹의 손이
붓으로 쓴 제 이름자 “분이”
효부라며 인쇄된 제 얼굴 사진 옆에서 난분분하다.
제가 쓴 제 이름보다 더한 악필이 있을까.
지성을 다해도 서예가 되지 못하는 습자는
큰 숨 들이켜야 읽히는 글자여서
성씨가 사라진 이름은
코를 찡그려야 읽히는 글자여서
향기가 되지 못한 글자를 인분체라 명명한다.
똥내가 사람의 코를 찾아 떠도는 획순을 생각하면
직립보행으로 진화한 짐승이
왜 열매를 채취하려 떠돌았는지
왜 생존보다 짧은 과육만 섭취하고
왜 사후보다 긴 씨앗은 버렸는지 알게 된다.
몸에 들 때 향기였으나 악취가 되어 벼려진 똥에는
짐승이 사람으로 종적을 감춘 정착이 있다.
이 오리무중을 독해하면 똥은 어미와 같다.
이름을 감추어서 더욱 분명한 신분; 어미의
얼굴과 이름이 열매와 손처럼 마주하고 있다.
제 얼굴을 승인하는 제 이름에는
조우처럼 낯선 대면이 필요한 것인지
얼굴을 수확하지 못하는 먹빛 이름이 엷어지고 있다.
익숙한 미로
엉킨 골목에 묶인 노인이 쪼그려 앉아 있다.
탯줄에 매달린 사람의 처음 같다.
자신을 자신의 팔다리로 껴안아 준 매듭은
시작이거나 끝이거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살았노라 자부하던 사람이
자신을 회고하는 모습은 얼마나 복잡다단한가.
익숙한 미로를 좀체 벗어나지 못함은
자신만의 길에 다른 길들이 뒤엉켜 있다는 말.
자신을 찾아 자신을 헤맨 일생이
타인들의 노정과 판박이였으므로
자신을 회고하는 제자리를 완주라 말해도 되겠다.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타인이라 말해도 되겠다.
자신과 타인의 중간을 출구라 말해도 되겠다.
기우는 동그라미
달력 곳곳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를 이리저리 연결하면
새로운 별자리 하나 생겨날 것도 같고
한 가문을 지켜주는 부적도 그려지겠다.
동그라미마다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그 둥근 선을 들여다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등 굽혀 머릴 맞대고 앉았다.
모성 쪽으로 기운다는 동그라미를 바라보자니
할머니의 기일을 묻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재가를 구하고 있다.
달력에서는 모성이 가장이다.
어머니에게 가부장권을 넘겨준 음력이
양력을 앞 새우고 뒤따라가고 있다.
동그라미 속 날짜를 읽는
어머니의 눈까풀도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내게는 그저 숫자로만 보이는 날짜인데, 어머니는
한쪽으로 닳는 인감도장 테두리 속 이름으로
정화수 그릇 속 얼굴로 읽는 것이다.
나도 어머니 흉내를 내며
새끼들 생일에 동그라미를 쳐둔 적 있지만
그저 사야 할 양초 개수만 보일 뿐이어서
촛불 밝기를 믿는 나는 양력으로 앞서 나가고
사연을 짐 진 어머니는 그믐처럼 뒤따라오고 있다.
음력으로만 기록되는 사연이 얼마나 무거운지
어머니 안짱다리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팬티 빤쓰 구멍론
구멍은 보이는 모습대로 보이지 않게 한다.
마음자리에 들인 심안처럼
실체를 무형으로 굴절시킨다.
가운데에 구멍을 들인 돌아올 回자가 원형으로 읽힌다.
굽을 曲자에는 여러 차례 돌아온 흔적이 있다.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처럼 구멍을 기르는 형상엔
풍파를 걸어낸 수행자처럼 닳고 닳은 모서리가 있다.
모서리가 없어 외곽이 열린 형상엔
떠났던 무형들이 돌아와 기숙하는지
빨래로 널어놓은 팬티에 오래도록 마음이 머문다.
구멍 난 팬티는 정독해도 빤쓰로 읽힌다.
팬티 속 처녀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무리 외설스런 생각을 하려고 해도
좀체 젊은 나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심안에 사랑이 들어 출가한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나는 이 형상의 음훈을 모르겠다.
구멍을 가진 외모는 그대로 읽으면
정확한 오독이란 것만 짐작할 뿐.
할머니가 돌아와 빤쓰 속으로 들어가면
할머니 몸속이라 보이지 않던 처녀는 주격이 되어
지난날을 미래로 오독할 거란 걸 짐작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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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바다 2016년 가을 차주일 신작소시집
견고한 여유로 미로에서 출구 찾기
김종훈
시에서 어른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대체로 비판적인 견해라 여기기 쉽다. 늘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지각의 영역을 확장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세상에서 확인하려는 태도, 어떤 일이건 원래 그렇다며 맥락과 개별성을 무시하는 태도 등이 흔히 어른의 태도로 인식된다. 시는 이와 반대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속도를 늦추어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에 질문을 달게 한다. 시인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시선을 유지하라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과 처음 마주하는 최초의 시간을 기억하고 그때 느꼈던 다사다난한 감정을 표현하라는 뜻이다. 어른의 강고한 신념은 그 감정에서 비롯한 수많은 질문을 자동화된 답변으로 대치한다. 이때 사라지는 것은 불안과 동시에 떨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주일의 시에서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린다. 몇 가지 지점에서 그러한데, 적어도 그 안에 모든 질문에 통용되는 정답을 제시하는 태도는 없다. 그의 말에 묻은 오랜 시간의 흔적은 폐쇄된 체계가 아니라 개방된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모티프가 단순해 보일지라도 복잡한 결론에 이르게 되고, 단순하게 보였던 모습들 이면에 “다른 길들이 뒤엉켜 있다”(「익숙한 미로」). 다만 그 복잡다단한 이면에 이르는 통로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었다는 면에서 어른의 목소리를 추정하는 것이다.
그가 지닌 사유의 통로를 거치면 확실해 보이던 것도 뜻을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가령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시 「불씨 씨불 진화론」에서, 숯 앞에서 비손하는 늙은 종부의 손은 수령보다 많은 죽음을 갖고 있으며, 천 년 넘도록 꺼지지 않는 씨불은 숯과 연관된다. 눈앞의 현상 이면에 쉽게 인식하지 못했던 뜻이 포개져 이해의 속도가 지연되는 것인데, 그에게 나무는 단순히 나무가 아니라 평생 수련한 수도승이며, 숯은 단순한 숯이 아니라 씨를 내포한 새로운 생명이다.
모색을 드러낸 숯 앞에
늙은 종부가 비손하며 예를 바친다.
떡잎처럼 벌어지는 불완전 합장으로
몇 대 묵은 치성을 대물림할 수 있었음은
네발짐승처럼 땅을 짚고 살아온 손이
수령(樹齡)보다 많은 죽음을 갖고 있기 때문.
수분을 다 소진하고 아사에 이른 열매가
씨눈 자리에 합장한 떡잎을 새겨 넣고 씨앗이 되듯
죽어 본 숯이 아니었다면
천 년 넘도록 꺼지지 않은 씨불이 존재나 했겠는가.
불이 씨에 이르고자 함인지
씨가 불에 이르고자 함인지
숯에 입김을 불면
신화에서 깨어나는 불꽃 한 마리
맨 처음 직립보행했다는 웅녀의 두 손을 빼닮았다.
- 「불씨 씨불 진화론」 부분
늙은 종부가 숯 앞에서 예를 바친 다음 구절들의 짜임에 주목해 보자. 대물림하는 치성과 수많은 죽음, 꺼지지 않는 씨불과 죽어 본 숯, 이들은 느슨하게 병치되었다기보다는 견고한 인과성의 연결고리로 묶였다. 즉 치성의 대물림은 수많은 죽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꺼지지 않는 씨불은 죽어 본 숯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른의 목소리라는 표현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해서 겸손한 어른의 목소리라 부연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비켜서는 판단이다. 그가 의미를 덧씌우는 과정은 단호하다.
인과성을 띤 구문 구조가 시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예들을 우리는 많이 기억한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내리고, 그믐달에서 임의 눈썹을 떠올리자 무서운 새가 그걸 알고 비껴 난다. 서로 연고가 없는 것들이 관계를 맺고, 우연한 일들이 필연적이 된다. 시에서 인과성은 합리적 인식을 뒷받침하기보다는 거기에 타격을 주는 것으로 시적인 의미를 생성한다. 차주일의 시 또한 그러하다. 멀리 있던 것들이 연결고리에 의해서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된다. 그런데 그가 맺어주는 쌍들은 일정한 성향을 띤다. 그것들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던 것들이다. 씨불과 숯이, 치성과 죽음이 그러하듯 이들 중 하나는 다른 하나의 이전 모습이거나 미래의 모습이다. 이 둘이 겹치자 제목의 ‘진화론’도 직선의 시간관이 아니라 원형의 시간관을 품게 된다.
한편, 차주일의 시에서 보이는 유머는 그의 시적 개성으로 꼽을 만하다. 어떠한 사태에도 능숙하게 대처하는 여유로운 어른이 시를 관장한다. “불이 씨에 이르고자 함인지/씨가 불에 이르고자 함인지”는 그럴듯한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아마 연상의 기원은 욕설을 환기하는 ‘씨불’에 있을 것이다. 그는 종말 속에서 씨앗의 기미를 보듯, 속된 표현 속에서 묵중한 의미를 찾아낸다. 배설물을 떠올리게 하는 「인분체(人糞體)」는 어떠한가.
열매를 처음 따던 첫 손처럼 떨던 문맹의 손이
붓으로 쓴 제 이름자 “분이”
효부라며 인쇄된 제 얼굴 사진 옆에서 난분분하다.
제가 쓴 제 이름보다 더한 악필이 있을까.
지성을 다해도 서예가 되지 못하는 습자는
큰 숨 들이켜야 읽히는 글자여서
성씨가 사라진 이름은
코를 찡그려야 읽히는 글자여서
향기가 되지 못한 글자를 인분체라 명명한다.
똥내가 사람의 코를 찾아 떠도는 획순을 생각하면
직립보행으로 진화한 짐승이
왜 열매를 채취하려 떠돌았는지
왜 생존보다 짧은 과육만 섭취하고
왜 사후보다 긴 씨앗은 버렸는지 알게 된다.
몸에 들 때 향기였으나 악취가 되어 벼려진 똥에는
짐승이 사람으로 종적을 감춘 정착이 있다.
이 오리무중을 독해하면 똥은 어미와 같다.
- 「인분체(人糞體)」 부분
열매를 따는 것은 야생의 일이고 이름을 쓰는 것은 문명의 일이다. 말을 하고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동물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진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여성이 효부로 기사화된 에피소드에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하필이면 그녀가 쓴 자신의 이름이 배설물을 뜻하는 ‘분이’이다. 동물과 인간의 구분은 여기에서 부질없다.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진화’는 실패로 귀결되고, 한 뜻으로 확정하기 힘든 아이러니의 상황이 지속된다. 여기에 열매는 씨앗과, 이름은 성과, 사지는 얼굴과, 서예는 습자와, 짐승은 사람과, 몸은 똥과 대립하며 긴장 상태를 강화한다.
이들 중 대립하는 한 쪽은 개별적이면서 유한한 것으로, 다른 한 쪽은 무한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가령 예술적 향기를 뿜으며 가치를 오래 인정받을 수 있는 서예는 무한한 것의 항목에 속한다. 이와 짝을 이룬 ‘인분체’의 경우 완성체가 아니라 습자와 같아서 앞의 항목에 속한다. 그러나 냄새를 뿜는 인분체는, 바로 그 무가치의 특성으로 다음 생을 예비한다. “이 오리무중을 독해하면 똥은 어미와 같다.”의 진술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살아서 누릴 영예와는 거리가 있으나 악취로 다음 생을 이어나간다는 시인의 인식은 기존의 인식을 뒤집을 뿐만 아니라 곰곰이 생각할 만한 화두를 독자에게 안겨준다. 하필이면 ‘인분’에서 비롯한 인식이 이와 같다. 차주일 시의 유머는 이렇듯 여유로운 어른의 모습을 뚜렷이 하면서 동시에 긴장된 국면에 숨통을 틔운다.
상반된 자질들이 일으키는 긴장의 국면은 그의 유머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자 시적 개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제이다. 이는 「인분체」뿐만 아니라 다른 시에서도 두루 나타난다. 진화론과 순환론, 씨와 종말, 늙음과 젊음, 할머니와 처녀, 노인과 탯줄, 시작과 끝, 자신과 타인, 양력과 음력, 실체와 무형 등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주로 시간의 축을 따라 설정된 반대말들이 서로 의미를 주고받으며 긴장의 국면을 조성한다. 그러나 반대말의 조합이 의미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경우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생각이 모호한 상태로 변할 수는 있어도, 세계에 대한 인식의 폭이 그로 인해 넓어질 수 있을까.
시적인 것의 소명 중 하나가 다른 세계의 제시일 것이다. 이 세계에 불려온 다른 세계는 이 세계가 전부라는 인식을 흔들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전망을 보여준다. 일상 지각의 영역에 균열을 내고 그 영역을 확장한다는 뜻을 지닌 예술의 부정성도, 다른 세계를 제시하여 일상 지각의 영역을 절대적 세계로 인식하는 태도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저 반대말의 조합은 일상지각의 영역 내에서도 이미 반대말들이었다. 가령 ‘출발’에 복합적인 뜻을 지니게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쉽게 떠오르는 반대말 ‘도착’을 포개놓는 경우 기존의 뜻이 혼란스럽게 될 수는 있어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뜻까지 자연스럽게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지각의 확장은 지각의 균열을 전제로 하지만 지각의 균열이 지각의 확장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전망은 보이지 않고 대치 국면은 지속되고 혼란은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차주일의 시는 팬티에서 “모서리가 없어 외곽이 열린 형상”(「팬티 빤쓰 구멍론」)을 발견하는 독특한 유머로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한다.
구멍 난 팬티는 정독해도 빤쓰로 읽힌다.
팬티 속 처녀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무리 외설스런 생각을 하려고 해도
좀체 젊은 나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심안에 사랑이 들어 출가한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나는 이 형상의 음훈을 모르겠다.
구멍을 가진 외모는 그대로 읽으면
정확한 오독이란 것만 짐작할 뿐.
할머니가 돌아와 빤쓰 속으로 들어가면
할머니 몸속이라 보이지 않던 처녀는 주격이 되어
지난날을 미래로 오독할 거란 걸 짐작할 뿐.
- 「팬티 빤쓰 구멍론」 부분
구멍을 심안, 즉 마음의 눈으로 인식한 화자는 거기에서 비가시적 세계의 흔적을 인지한다. 인용하지 않은 도입부에서 그는 구멍을 환기하는 여러 대상들, 가령 구[口]자가 들어 있는 한자나 속이 빈 대나무에서, 즉 이차원의 평면이나 삼차원의 입체에서 사차원의 다른 시간을 감지한다. “구멍을 가진 외모는 그대로 읽으면/정확한 오독이란 것”도 다른 세계의 존재를 인정해야 이 세계를 바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형상과 무형, 할머니와 처녀 같은 반대말이 만든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매개는 제목이 일러주듯, 팬티, 혹은 빤쓰에 난 구멍이다. “빨래로 널어놓은 팬티에 오래도록 마음이 머문다.”는 말을 듣고 웃어야할지 심각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간에 다른 시간을 초대하는 주인공은 유머이다.
“팬티 속 처녀는 어디로 사라졌는가.”의 질문은 이 세계에 그가 불러온 시간이 환상의 시간이 아니라 체험의 시간이며 망각의 시간이라는 것을 일러준다. 눈앞의 일들에 급급한 나머지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단호하지만 여유로운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초대된다. 그것을 통해 할머니의 노년은 처녀 시절과 겹치고, 현재는 “지난날”과 “미래”를 확보하게 된다. 그의 웃음은 긴장된 국면을 이완시키며 이 세계를 두텁게 하는 데 기여한다.
자신을 찾아 자신을 헤맨 일생이
타인들의 노정과 판박이였으므로
자신을 회고하는 제자리를 완주라 말해도 되겠다.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타인이라 말해도 되겠다.
자신과 타인의 중간을 출구라 말해도 되겠다.
- 「익숙한 미로」
「익숙한 미로」의 인용 부분은 마치 웃음기를 뺀 채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집약한 말 같다. “자신을 찾”는 일은 “자신을 헤맨 일생”과 겹치고, 자신의 일생이 타인의 노정과 “판박이”가 된다. 그러므로 제자리걸음은 완주이고, 자신은 곧 타인이다. 상반된 자질들이 충돌하는 긴장 상태를 누그러뜨릴 실마리는 다음 부분에 있다. 그는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은 타인이라” 했다. 자신을 벗어나야 자신이 된다는 것인가. 그는 온전한 자신도 온전한 타인도 곱게 보지 않는다. 자신과 타인의 중간 지점에 출구를 상정함으로써 시는 소통과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출구는 그러므로 유머의 변형이다. 우리는 출구를 통해 자신과 당신 사이에 펼쳐진 여러 가능성을 맞이하게 된다.
견고한 사유와 웃음의 여유는 차주일의 시에서 어른의 목소리를 들리게 했다. 견고한 사유는 완강한 현실에 균열이 나도록 이끌었고, 웃음의 여유는 다른 세계의 진입 가능성을 열어 지각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모든 현상에 적용되는 해답을 가진 경직된 어른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 이면의 세계를 찾는 호기심 많은 어른이 시를 들려주었다. 다른 시간은 현상과 이면의 시차가 구축한 통로를 통해 이 시간으로 유입된다. 우리는 여유롭지만 견고한 목소리의 안내를 받으며 시적 의미가 생성되는 장소에 왔다. 우리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자리가 그곳이다.
‣ 김종훈 : 2006년 창작과비평 등단. 저서 한국 근대 서정시의 기원과 형성 미래의 서정에게, 정밀한 시 읽기 등. <젊은평론가상> 수상.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첫댓글 평론의 방에 불을 밝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익숙한 미로에 서서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도록, 그리고 웃음을 동반한 여유가 깊어지도록
낯선 곳으로 초대 받은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