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랑을 믿냐?”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친구는 소주를 가득 채운 첫 잣을 내밀며 물었다.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냐?” 라고 반문하려던 나는 친구의 장난기 없는 표정을 보고 대답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친구 역시 나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주를 입에 털어넣으며 말했다. “나 헤어졌다” 아까 저녁식사를 할 때까지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는데 갑자기 실연했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뭐라고 해야할지 몰랐다. 괜찮아, 잊어버려, 안됐다 정말, 왜?왜? 머릿속으로 할 말을 골라대던 나에게 친구는 또 말했다. “이럴바에야 시작을 하지말걸 그랬어 사랑이라는거....” 그 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 스쳐가는 문구가 있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식당에 다니다보면 5일에 한번 정도는 벽에 붙어있던 것을 볼 수 있는 흔한 문구다. 그리고 친구를 보니 ‘사랑...시작은 핑크였지만 끝은 흙빛이리라’로 바꿔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무슨 위로의 말을 했다기보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슬픔인지 분노인지를 달래주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사랑의 시작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다. 평창올림픽에서 ‘탕’소리와 함께 빙판을 달리던 선수들은 결승점을 통과하며 경기를 끝낸다. 쇼트트랙이든 스피드스케이팅이든 무관하게 경기는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 선수들은 4년 후 열릴 다음 올림픽을 준비하는데 무슨 시작과 끝이 있냐고 화를 내겠지만 2018년의 동계올림픽은 분명 시작과 끝이 있었다. 근데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도 시작! 그리고 이만 끝! 이렇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오늘부터 저 사람을 사랑할거야 라고 마음먹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또는 저 사람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며 주의깊게 보지 않더라도 인연이라는 거미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싫다던 그녀를 수개월을 쫓아다니며 마음을 얻었던 친구였기에 더 힘들어할 수도 있다. 의지대로 시작은 했지만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나 오빠를 좋아하지만 사랑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이제.....” 차라리 메달을 따던 못따던 결승점만 통과하면 끝나는 경기였다면 친구는 힘들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은 다시 열리지 못하게 명확한 끝이 있었지만 친구의 사랑은 끝이라해도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수십 번 상대를 찾아가 끝나버린 사랑을 시작해보려고 망설였을 것이고 둘만의 찬란했던 시간을 되뇌고 떠올리며 웃고 현실로 오면 다시 울었을테니 여전히 그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그냥 잊히고 잊혀서 먼 훗날 헤어졌던 연인을 만나면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 겨우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바비킴이라는 가수의 ‘사랑 그 놈’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제 멋대로 왔다가 자기 맘대로 떠나간다. 왔을 때처럼 아무말도 없이 떠나가도 사랑은 다시 또 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사랑같은 거 하지 않겠다는 친구는 결국 또 자기도 모르게 사랑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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