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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팔결(八結)
정의
조선후기 향촌에서 결세를 징수할 때 8결의 농지를 한 단위로 해서 부(夫)를 만든 다음 각 부에 책정된 결세를 호수로 하여금 수납하게 한 제도.
개설
조선후기 대부분의 농민은 50부(負) 이하의 농지를 소유한 소농·빈농층이었다. 1결은 100부였다. 이 때문에 수령이 수십 부의 농지를 소유한 농민에게 일일이 결세를 징수하는 것보다 토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징수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결세가 현물이었으므로 농민들도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적으로 현물을 납부하기보다는 공동으로 납부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이에 정부는 여러 개의 농지를 8결(結) 단위로 묶어 부(夫)라 하고, 부마다 중간 수납자로 호수(戶首)를 뽑아 부에 책정된 결세를 수납하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에 공물을 비롯한 요역(徭役)·군역(軍役) 등의 국가적 수취는 국가가 직접 개별 민호(民戶)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군현을 단위로 상납의 책임을 맡겼다. 다만 각 군현에서 상납해야 할 공물과 역을 군현의 민호에게 수취하는 방식은 작부(作夫)를 통한 윤회분정의 방식을 택하였다.
1471년(성종 2) 3월, 민호에 역을 부과하는 기준을 정한 역민식(役民式)에는 모든 수세전(收稅田)에서 8결마다 1명의 역부(役夫)를 징발하여 역(役)을 담당하게 한다고 규정되었다. 또한 역사의 규모가 커서 더 동원할 경우에는 6결에서 역부를 차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역민식은 『경국대전』에 이르러 “8결마다 1명의 역부를 징발하되[田八結出一夫]” 1년에 6일 이상을 역사시킬 수 없다는 규정으로 법문화되었다. 요역이 그러하였듯이 공물도 역민식으로 규정되어 8결 단위로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운영되었다.
그 운영에 대해서는 1475년(성종 6) 7월 호조에서 아뢴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먼저, 한 읍에서 경작할 수 있는 소경전(所耕田)의 면적을 헤아려 ‘역민부(役民簿)’를 작성하였다. 역부를 차출하는 것은 반드시 이에 의거하되 제읍(諸邑)의 수세전 내에서 경작지 8결을 소유한 자는 1명의 역부를 내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8결 단위로 묶어 1명의 역부를 내도록 하였다.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공물 수취와 관련하여 ‘주비(注非)’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주비는 『만기요람』 「재용편(財用篇)」에서도 확인되는데, 8결의 토지를 의미하였다. 이 단어는 ‘떼’, ‘무리’ 등의 의미를 지니는 조선 고유의 토속어로, 하나의 ‘전토의 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팔결작부(八結作夫)의 ‘부(夫)’가 주비와 같은 의미로, 8결의 토지를 하나로 묶는 단위였다. 8결은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을 망라한 것이었다.
팔결작부는 백성의 소경전 면적에 따라 부과되었으므로 전결(田結)을 소유한 자라면 당연히 이를 부담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적 규정에 불과하였고, 그 운영의 실제는 사회적 세력의 강약에 따라 좌우되는 실정이었다. 가령 8결에서 역부를 차정할 때에는 1결을 가진 소농민이 7결을 가진 힘 있는 양반이 소유한 토지분의 요역까지 전담하는 경우가 있었다.
공물(貢物) 역시 요역 부과와 마찬가지로 8결 단위로 묶어 운영하였는데, 이러한 공물 운영 방식을 ‘팔결작공제(八結作貢制)’라고 하였다. 팔결작공제는 토지 소유의 규모에 따라 세액의 많고 적음이 있을 뿐이고, 표면상으로는 부담의 불평등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물 부과의 실상에 있어서는 군현 대소에 따른 지역적 불균형과 신분에 따른 불평등으로 그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일찍부터 공물이 소경전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균일하게 부과되었는지의 여부를 조사·보고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각 군현에 공물이 고르게 부과되려면 반드시 각 군현의 전결 규모에 비례해서 공물이 부과되어야 했다. 전결 규모야말로 각 군현이 공물을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공물을 부과할 때 각 군현 전결 규모의 상대적 차이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군현의 크기에 관계없이 큰 차이 없는 양으로 공물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작은 군현이 큰 군현에 비하여 단위 전결당 부담이 무거워지고 윤회의 횟수도 늘어났다.
국가는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작부(作夫)하는 전결 규모를 축소시켜 공물 부담을 소농에게 전가시키는 폐단을 개선하는 안을 모색하였다. 이로 인하여 세력 있는 양반[勢家兩班]이나 권세 있는 관원[豪强品官]이 대동법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변천
8결 단위의 부는 19세기에 들어 결세를 돈으로 내는 전납화(錢納化)가 이루어지면서 촌락을 단위로 결세를 징수하게 되어 그 의미가 없어졌다. 갑오개혁 때에는 개별 납세자 단위로 세금을 내는 전부자납(佃夫自納)의 원칙이 규정되었다. 1906년에는 통감부가 관세관제(管稅官制)를 시행하여 지방관의 징세권을 일체 몰수하였다. 각 지방에는 세무관(稅務官) 혹은 세무주사(稅務主事)를 두어 납세 고지서를 발부한 다음 납세자가 직접 결세를 납부하게 하였고, 이로써 8결 단위의 작부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默齋日記』
『萬機要覽』
박도식, 『조선 전기 공납제 연구』, 혜안, 2011.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박도식, 「조선 전기 8결작공제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89, 1995.
이성임, 「16세기 지방 군현의 공물 분정(貢物分定)과 수취: 경상도 성주(星州)를 대상으로」, 『역사와 현실』72, 2009.
이영훈, 「조선 후기 팔결작부제에 대한 연구」, 『한국사연구』29, 1980.
이정철, 「조선시대 공물 분정 방식의 변화와 대동의 어의(語義)」, 『한국사학보』34, 2009.
풍저창공인(豊儲倉貢人)
정의
조선시대에 쌀, 콩, 초둔(草芚) 등의 물품을 출납하던 풍저창 소속 공물주인.
개설
풍저창(豊儲倉)은 고려 문종대에 개경에 설치한 좌창(左倉)·우창(右倉) 중 우창을 1308년(충렬왕 34)에 풍저창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1392년(태조 1년)에 문무백관의 관제를 개편할 당시 풍저창은 중앙 재원의 세입·세출을 전반적으로 관장하는 아문으로 출범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조선전기 풍저창은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사도시(司䆃寺)·광흥창(廣興倉) 등과 함께 전세(田稅)를 나누어 거두어들이는 한편, 전세조로 공물을 거두어들여 중앙 관서의 용도에 따라 지출하였다. 본창은 한성부 북부 의통방에 설립하였고 한강 주변의 송현·서강에도 분풍저창(分豐儲倉)을 세워 중앙으로 상납되는 전세를 비축하고 출납을 관리하였다. 광흥창과 함께 정4품아문으로 운영되다가 1637년(인조 15) 무렵 장흥고(長興庫)에 병합되었다[『인조실록』 15년 3월 8일]. 그러나 풍저창은 장흥고에 통합된 이후 선혜청(宣惠廳)에서 공물가를 받아 쌀, 콩, 짚 등을 엮어 만든 뜸[草芚], 종이 등의 물건을 관장하는 공물아문으로 기능하였으며, 풍저창공인(豊儲倉貢人) 또한 고종대까지 활동하였다[『고종실록』 19년 1월 8일].
담당 직무
조선초 풍저창의 주된 기능은 국용(國用)으로 쓰일 세곡(稅穀)을 출납하는 것이었다. 국용에는 국가의 제사와 연향,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데 드는 경비뿐 아니라 백성을 국역(國役)에 동원하는 비용과 기근 시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진휼곡(賑恤穀)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1637년(인조 15) 무렵 풍저창은 돗자리·유둔·종이 등의 물품을 조달하던 장흥고에 병합되어 국용을 관장하던 재정기구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풍저창은 장흥고와 더불어 공물아문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운영 경비 역시 다른 공물아문과 마찬가지로 선혜청에서 지급받았다.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확대하여 시행하면서 풍저창에서 전세조 공물을 현물로 직접 받는 대신,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를 받는 풍저창공인으로 하여금 대신 조달하게 한 것이다.
풍저창공인은 풍저창이 장흥고에 병합된 후로도 조달역을 계속 수행하였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1807년 무렵 풍저창공인은 선혜청으로부터 원공물가로 1,974석 13두의 쌀을 받아 초주지·상품도련지·하품도련지·저상주지·도련저주지 등을 시중에서 구입하여 풍저창에 진배하였다.
변천
풍저창공인은 갑오개혁기에 호조로 재정기구를 단일화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공폐(貢弊)』
『만기요람(萬機要覽)』
송수환, 『朝鮮前期 王室財政硏究』, 집문당, 2000.
이혜옥, 「朝鮮時代의 豊儲倉」, 『역사문화연구』 12, 2000.
최주희, 「조선후기 왕실·정부기구의 재편과 서울의 공간구조」, 『서울학연구』 49, 2012.
실록연계
『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인조실록』 15년 3월 8일
『고종실록』 19년 1월 8일
호급둔전(戶給屯田)
정의
조선 태종대 토지 분급 없이 봄에 종자(種子)만 지급하고 가을에 수확의 일부를 받았던 둔전 운영 방식.
개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둔전제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왕조 정부는 고려말 이래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선군(船軍)의 역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이들의 잡역 일체를 폐지해 주는 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선군의 군역 활동에 소비되는 군량을 마련하는 것은 여전히 문젯거리였다. 1407년(태종 7) 의정부는 둔전·사원전· 황무지 등에 일반민을 동원하여 경작하고 여기서 나는 수확물을 선군의 양식으로 조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토지의 확보는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파종할 수 있는 종자를 지급하고 수확의 일부를 둔전세로 납부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호급둔전은 폐지되었다가, 1409년(태종 9) 다시 부활하였다. 진휼이나 군량미의 확보를 명분으로 실시된 이때의 호급둔전은 호적에 편제된 농민[編戶]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 이를 바탕으로 종자 지급량에 차등을 두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호급둔전의 수탈적 성격은 여전하였고 결국 1414년(태종 14) 폐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과 변천
고려후기에 접어들어 둔전은 권력층이 겸병하여 수세하는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둔전제는 붕괴되어 갔다. 고려 정부는 이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단지 세원을 색출하는 데에만 주력하였다. 그것은 가호둔전(家戶屯田)이라는 형태로 농민에게 종자만 지급하고 그 몇 배를 추수 때 징수하는 방식이었다. 충순왕 무렵 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호둔전은 농사의 풍흉이나 토지의 비옥도와 무관하게 수탈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어 이로 인하여 농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결국 1375년(우왕 원년)에 철회되었다.
둔전제에 대한 개혁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이루어졌다. 1392년(태조 원년) 이성계는 음죽 지역을 제외하고 국둔전(國屯田)을 모조리 폐지하였다. 이때 포(浦)·진(鎭)에 설치되었던 둔수군(屯戍軍)의 둔전이 함께 폐지되었으나 얼마 후 다시 복구되었다. 특히 고려말 이래 왜구 격퇴에 큰 공로를 세운 선군들은 왜구의 침입이 잦아들자 본래의 군무(軍務) 이외에 온갖 잡역에 동원되고 있었다. 왕조 정부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선군의 잡역 일체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였으나 여기에는 이들의 군량 확보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1406년(태종 6) 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고려말의 가호둔전법을 호급둔전이라는 형태로 부활시켜 해결하려 하였다. 정부는 호급둔전을 통하여 선군의 군량 확보는 물론 주현과 포진의 둔전 경영에서 발생하는 폐해를 제거하려는 의도도 가지고(깔려) 있었다. 이듬해인 1407년(태종 7) 정월 의정부는 폐지된 각급 관청과 포진의 둔전, 혁파된 사원전, 개간 가능한 황무지 등 일반 사유지가 아닌 일체의 토지를 일반민을 동원하여 경작하고 그 수확을 선군의 양식으로 지급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토지가 지급된다는 점에서 고려말의 가호둔전과는 차이가 있지만, 군무가 있을 때는 군사로, 없을 때는 토지경작에 동원하는[且戰且耕] 원칙이 폐기되고 민을 동원하여 경작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호급둔전은 시행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특히 10호당 50복씩 토지를 지급하기로 한 애초의 계획은 계속해서 장벽에 부딪혔고 결국 애초의 계획은 포기되고 50복의 토지에 파종할 수 있는 종자 약 10두를 분급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태종실록』 7년 7월 2일]. 농민들은 종자만 지급받고 그 수확을 둔전세로 납부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원래 경작하는 토지 외에 새로운 농지를 개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농민들의 극심한 저항은 예정된 일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도 왕과 관료간의 논란이 계속되었다.
결국 같은 해 6월 사간원의 상소를 계기로 태종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호급둔전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1409년(태종 9) 호조의 제안에 따라 호급둔전은 다시 부활하였다. 진휼이나 군량미의 확보를 명목으로 실시된 이때의 호급둔전은 각호(各戶)를 편제하여 종자 지급량에 차등을 두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호급둔전을 ‘편호영전(編戶營田)’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각호는 토지 소유와 노동력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등급이 매겨졌고 호등(戶等)에 따라 종자 분급량은 차이가 있었다[『태종실록』 6년 11월 17일]. 이는 개별 호의 사정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하여 운영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분급하는 종자에 대비해 수취액은 5배에 달하여 그 수탈성은 여전히 치명적인 문제였다. 농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논의 경우는 수확량의 반을, 밭의 경우는 거의 전량을 납부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농민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저항도 격렬하였다[『태종실록』 9년 12월 21일]. 결국 이듬해인 1410년(태종 10)부터 지역별로 호급둔전의 실시가 중지되기 시작하였고 1414년(태종 14) 마침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이경식, 『조선전기토지제도연구』 (2), 지식산업사, 1998.
이종영, 『조선전기사회경제사연구』, 혜안, 2003.
호남청(湖南廳)
정의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난 후 호남에서 올라오는 대동세의 출납 업무를 맡아 보던 선혜청의 부속 관청.
개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경기선혜법을 시작으로 대동법·상정법을 한 세기에 걸쳐 강원과 호서·호남·영남·해서 지역에 확대 시행하였다. 전라도는 삼남 중에서도 토지결수가 가장 많고 충청도와 함께 연해(沿海) 조창(漕倉)을 통하여 세곡을 수송하는 조운 체계가 조선전기부터 정비되어 중앙정부의 세입 의존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이에 현물 공납을 토지세로 전환시킨 대동법을 시행할 때에도 정부 관료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도민들의 반발이 두드러져 논의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는 다른 도와 달리 1658년(효종 9) 호남 연해읍에 대동법을 먼저 시행하다가, 1662년(현종 3) 가을에 이르러서야 내륙 산읍까지 확대 시행하였다. 대동법을 이처럼 연해읍과 내륙 산읍에 나누어 시행하면서 대동세의 출납을 관장하는 호남청도 1658년(효종 9)에 처음 설치하였고, 1662년(현종 3)에 증설하였다. 청사는 설립 초기에는 경기선혜청·강원청·호서청과 함께 숭례문 안쪽에 합설하였다가, 대동법을 다른 도에 확대 시행하면서 소의문 안쪽 별청과 주자동의 남창에도 청사를 설립하였으며, 한강변에도 세곡 보관 창고를 18세기까지 증설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 김육(金堉)이 대동법 논의를 재개하였을 때만 해도 대동법은 호서뿐 아니라 호남 지역까지 확대 시행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였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1651년(효종 2) 우의정 한흥일(韓興一) 역시 삼남 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효종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는 민원이 올라오고, 대동법을 시행하는 대신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민역(民役)이 균일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자는 신료들의 반대 의견으로 인하여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당해 8월 호서 지역에만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1656년(효종 7) 무렵 영돈령부사 김육이 호남의 전·병선이 못 쓰게 되어 고을민들이 50~60필(匹)의 역포(役布)를 내기에 이르자, 재차 대동법 시행을 청하며 1결에 10두의 쌀을 걷어 과중한 역 부담을 덜어 주자는 안을 내놓았다[『효종실록』 7년 9월 15일]. 이에 효종은 대동법 시행에 대한 전라도의 민심을 조사하게 하고, 중앙에서 공물주인을 통하여 조달해 쓸 경비 물자의 수량을 산출하여 과세 기준을 마련하게 하였다.
1658년(효종 9) 2월 여전히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산읍(山邑)보다 역 부담이 큰 연해 27읍에 한정하여 결당 13두를 과세하는 것으로 절목을 제정하였다[『효종실록』 9년 2월 9일 1번째사][『효종실록』 9년 7월 25일].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송시열은 효종이 죽기 전 호남 산군(山群)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도록 하였음을 상기시켰다. 이후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와 김육의 아들인 공조 참판 김좌명(金左明)도 대동법 시행을 지속적으로 요청함으로써 1662년(현종 3)부터 호남 산군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대동세는 당초 연해 고을에서는 13두로 거두었다가 1666년(현종 7)부터는 1두를 줄여 호남 전 고을에 결당 12두의 대동세를 거두었다[『현종실록』 7년 11월 6일]. 이처럼 호남의 연해읍과 산간읍에 대동법을 점진적으로 시행해 가는 과정에서 호남청도 내청(內廳)과 강창(江倉)을 증설하였다.
조직 및 역할
현존하는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살펴보면, 호남청은 선혜청에 합설하고, 제반 절목은 호서의 예에 따르게 하였다. 직제는 도제조와 제조가 경기·강원·호서청과 겸하게 하고, 낭청도 충청도의 소관낭청이 겸찰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산원은 강원청의 산원과 겸찰하고 서리 4명, 내외창고지기 3명, 사령 3명 역시 호서청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대동법을 6도에 시행하고 난 후 『속대전』에 기재된 선혜청의 직제를 살펴보면, 도제조 3명과 제조 3명(호조 판서 1명 예겸) 아래 낭청 4원을 두어서 낭청 1원이 각기 ①경기청과 영남청, ②강원청과 호남청, ③호서청, ④해서청·진휼청과 상평청의 회계 업무를 겸찰하도록 하였다. 1753년(영조 29) 이후로는 균역청까지 선혜청에 합설하여 선혜청 낭청과 상진청 서리 일부가 균역청의 업무를 겸하였다. 이처럼 선혜청은 18세기 중반 이후 각 선혜청과 상평청·진휼청·균역청을 합설한 거대 재정기구로 성장해 갔다.
변천
갑오개혁 당시 호조로 재정기구를 단일화하기 이전까지 호남청은 선혜청의 산하 기구로서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대동세의 출납 업무를 맡았다. 호남청은 다른 청과 마찬가지로 내청과 강창 모두 곳간이 독립되어 있었고, 회계 문서도 별도로 작성·처리하였다. 다만 필요할 경우 다른 청에 재원을 옮겨 줌[移劃]으로써 선혜청 내부에서 재정 운영의 효율성을 꾀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선혜청에서 호조로 재원을 옮겨 주는 경향이 확대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선혜청의 재정 운영에도 여러 문제가 야기되었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
『호남청사례(湖南廳事例)』
이정철,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한영국,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 1: 湖西大同法의 比較 및 添補」, 『역사학보』 15, 1961.
한영국,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 2: 湖西大同法과의 比較 및 添補」, 『역사학보』 20, 1963.
한영국,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 3: 湖西大同法과의 比較 및 添補」, 『역사학보』 21, 1963.
한영국,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 4: 湖西大同法과의 比較 및 添補」, 『역사학보』 24, 1964.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실록연계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효종실록』 7년 9월 15일
『효종실록』 9년 7월 25일
『현종실록』 7년 11월 6일
호서청(湖西廳)
정의
호서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대동세를 관리하던 선혜청의 부속 관서.
개설
대동법은 흔히 방납(防納)의 폐단과 민역(民役)의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시행한 공납제 개혁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시행한 경기선혜법은 왕릉을 조성하는 데 동원되는 산릉역(山陵役)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따른 조사역(朝使役)에 시달리던 경기민들의 역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하여 시행한 측면이 강하다.
1623년(인조 1년)에 시행된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도 1618년(광해군 10) 이후 후금의 성장으로 모문룡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마련된 군량미 서량(西糧) 등 군량미를 마련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중앙의 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공물작미(貢物作米)의 일환으로 시행한 측면이 컸다.
삼도대동법은 1625년(인조 3) 이후 지역민의 반발로 인하여 결국 폐지되었으며, 병자호란이 종식되고 대내외 정세가 안정되자 인조대 말엽부터 대동법 시행 논의가 재개되었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이던 김육(金堉)이 도내 결부수를 계산하여 결당 면포 1필과 쌀 2말씩을 내면 공물(貢物)의 값과 본도의 잡역인 전선(戰船), 쇄마(刷馬), 기타 관청 소비 물품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도 오히려 남는 것이 수만이라고 하면서 호서대동법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였다[『인조실록』 16년 9월 27일]. 그러나 당시에는 시행되지 못하고 1649년(효종 즉위년)에 김육이 재차 호서와 호남 지역에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가[『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결국 1651년(효종 2)에 호서 지역에 먼저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그 시행 관서인 호서청이 경기청과 강원청에 합설되었다[『효종실록』 2년 8월 24일].
설립 경위 및 목적
1651년(효종 2) 호서대동법을 제정하였다는 기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공법(貢法)이 무너져 서울에 있는 간교한 무리들이 경주인(京主人)이라고 칭하면서 각 도에서 공납하는 물품을 방납하고 그 값을 본읍(本邑)에서 배로 징수한다. (중략) 또 임진왜란 이후로 공안(貢案)이 더욱 문란해져서 계해년(1623년, 인조 1)에 강정(講定)하였으나 다과가 균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그래서 60년 이래로 의논한 자들이 대부분 속히 개정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중략) 영의정 김육이 대동법을 극력(있는 힘껏) 주장하였고, 또 충청도는 공법이 더욱 고르지 못하다고 하여 먼저 시험할 것을 청하였다.”는 내용으로 호서대동법 시행 취지를 밝히고 있다.
호서대동법의 의의는 방납의 폐단을 개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특징은 유치미(留置米)에서 찾을 수 있다. 대동세의 일부를 지방에 유치미로 보관해 두고 지방관수(地方官需)로 활용하도록 한 것이다.
현존하는 『호서대동사목』을 살펴보면, 임진년 수조안(收租案)을 근거로 충청도의 실결수를 총 124,746결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데 여기서 매 1결당 미 10두(斗)를 거두면 총 83,164석가량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중 서울로 올려 보내는 쌀[京上納米]은 운송비[船馬價] 3,962석은 별도인 48,280석으로, 본도에 유치해 두는 쌀[本道留置米]은 30,922석으로 책정해 놓은 것은 이전의 경기·강원 지역의 대동법과 비교할 때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호서청도 경기·강원청과 마찬가지로 삼공(三公)이 도제조(都提調)를 예겸하고 제조(提調) 3명 중 호조 판서 1원이 제조를 예겸하도록 하였다. 또 낭청 4원을 두어 출납 업무를 분담시키되, 경기청과 상평청을 낭청 2원이 상호 겸찰하고, 호서청과 강원청도 낭청 2원이 상호 겸찰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산원과 서리·고직·사령을 두어 회계 처리와 문서 행정, 곡식 출납 및 보관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대동법을 다른 도에 확대 시행하고 청사를 새로 합설하면서 낭청 이하 산원·서리 등이 겸찰하는 업무는 계속 조정되어 갔다. 또한 초기에 결당 10두로 거두던 대동세도 1673년(현종 14) 이후 12두로 상향 조정되었다.
변천
『호서대동사목』 작성 당시 호서청은 경기·강원청을 합설하여 삼도선혜청으로 출범하였다. 이후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각 도의 대동세를 관장하는 경기·강원·호서·호남·영남·해서청이 청사 내에 별도의 공간을 갖고 회계 업무도 독자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합설기구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강원청사례(江原廳事例)』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이정철,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六反田豊, 『朝鮮王朝の國家と財政』, 산천출판사, 2013.
문광균, 「영남대동법 시행 이후 대동세 배분방식의 변화와 儲置米 운영」, 『역사학보』 225, 2015.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실록연계
『인조실록』 16년 9월 27일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효종실록』 2년 8월 24일
호조공인(戶曹貢人)
정의
호조에 상납되는 세곡을 운송하고 이를 대가로 공물가를 지급받는 공인.
개설
호조공인은 대동법 시행 이후 호조로부터 별무가(別貿價)를 지급받던 공인들을 칭하기도 하지만, 특별히 호조에 상납되는 세곡(稅穀)의 운송역가(運送役價)를 공물로 설정하여 이를 지급받아 생활하던 자들을 가리켰다. 1753년(영조 29)에 작성된 『공폐(貢弊)』를 살펴보면 ‘저희들의 공물(貢物)은 본래 역가(役價)에서 나온 공물입니다. 그러므로 호조에 장세(匠稅)·무세(巫稅)·염세(鹽稅)·선세(船稅)·노비공(奴婢貢) 등의 세를 납부하고, 원공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각자 역가를 받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호조공인은 호조의 세곡을 운송하던 역인층임을 알 수 있다.
담당 직무
호조공인은 각 군현에서 호조의 세곡을 실어 보낼 때 함께 바치는 역가(役價)를 공물가로 거두어들이던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곡선(稅穀船)이 도중에 침수 사고를 겪게 되면 호조공인들은 난파한 조운선에서 건져내어 말린 쌀 증열미(拯劣米)가 올라올 때까지 한정 없이 기다려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 균역법이 시행된 이후로는 호조에 상납되던 어염세(魚鹽稅)·선세(船稅)가 균역청으로 이속되면서 세곡 운송가의 일부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조공인들은 사대부가의 연회나 혼례(婚禮)·상례(喪禮)가 있을 때 공물아문에서 빌린 물품을 운반해 주고 당상(堂上)이 각 능(陵)에 제관(祭官)으로 차정될 때 타고 갈 말을 마련해 주는 등 비공식적인 운송 역에 무상으로 차출되었다. 이에 호조공인들은 이러한 폐단을 해소하고 역가를 안정적으로 지급받기 위하여 비변사에 문제점을 호소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이 『공폐』에 자세히 실려 있다.
한편, 1798년(정조 22) 경상도에 흉년이 들자 호조공인이 가지고 온 곡식을 영읍(營邑)에서 사들여 진휼에 대비하도록 한 기사가 있는데[『정조실록』 22년 6월 14일], 이때의 호조공인은 별무가를 지급받던 공인들로 보인다.
변천
균역법 시행 이후 어염세·선세가 균역청에 이속되어 호조공인의 일부가 역가를 잃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었지만, 호조의 세곡 운송과 정부관서의 제반 차역을 담당함으로써 19세기까지 호조공인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변사등록』과 『승정원일기』을 살펴보면, 호조공인은 1816년(순조 16)까지 「공시인폐막별단(貢市人弊瘼別單)」에 등장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공폐(貢弊)』
오미일, 「18·19세기 貢物政策의 변화와 貢人層의 변동」, 『한국사론』 14, 1986.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가경전(加耕田)
정의
새로 기경한 전지.
내용
모든 전지(田地)는 원칙적으로 20년마다 다시 양전(量田)하고, 이에 따라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을 수정하여 해당 전지가 위치한 본읍(本邑)과 본도(本道), 그리고 호조(戶曹)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다. 이때 등재된 전지를 원전(原田)이라 하고, 그 뒤에 새로 등재되는 전지를 가경전이라 불렀다. 가경전이 계속해서 경작되는 경우에는 정전(正田)의 예에 따라 등급을 정하였다.
용례
議政府據戶曹呈啓 (중략) 其元籍所載水田旱田 後雖互相反耕 改量之前 勿許更審 皆從元籍收租 加耕之田 亦使守令每歲親審 續錄田籍 無故二年全陳者 許入陳告折給 如有陳損川反 審驗不實 加耕之田 不時續錄 則當該守令糾之以法 (중략) 從之 [『세종실록』 18년 10월 5일]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가사기지(家舍基地)
정의
집터.
내용
가사(家舍)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의미로, 가사기지(家舍基地)는 ‘집터’로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전통 사회에서 신분에 따라 가옥의 규모에 차등을 두어 일정하게 제한하였는데,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1431년(세종 13) 대·소 신민(臣民)의 가옥제도를 정하였는데, 대군은 60칸, 친자·친형제인 왕자와 공주는 50칸,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으로 하고, 서민은 10칸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춧돌을 제외하고는 다듬은 돌[熟石]을 쓰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화공(花拱)과 진채(眞彩)·단청(丹靑)을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다만 사당(祠堂)이나 부모가 물려준 가옥, 사들인 가옥과 외방에 세운 가옥은 이 제한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1449년(세종 31)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침(正寢)·익랑(翼廊)·서청(西廳)·내루·내고(內庫) 등 가옥 내부 구조의 규모를 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준수되지 못하여 1478년(성종 9)에 다시 가옥의 규모를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에는 서울 안의 집 지을 땅은 한성부가 사람들의 신청[狀告]을 받아 비어 있는 땅[空地] 및 만 2년이 되도록 집을 짓지 않은 땅을 나누어 주되, 만약 사신(使臣)으로 나가거나 지방관이 되거나 상(喪)을 당하여 집을 짓지 못한 경우에는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집터의 면적은 대군과 공주는 30부(負), 왕자군(王子君)·옹주는 25부, 1·2품은 15부, 3·4품은 10부, 5·6품은 8부, 7품 이하 및 유음자손(有蔭子孫)은 4부, 서인(庶人)은 2부를 주도록 규정하였다.
용례
戶曹啓量田事目 (중략) 私處家舍基地及苧楮莞田菓園漆林竹林等凡有利益處 以他田之例量之 若公處及寺院基地 毋令幷量 [『세종실록』 25년 11월 14일]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가속군자전(假屬軍資田)
정의
임시로 군자전에 소속된 전지.
내용
1412년(태종 12) 이후 사망한 사람의 과전(科田) 중 일부를 가속군자전(假屬軍資田)으로 소속시키기 시작하였다. 또한 장(杖) 이상의 죄를 지은 사람의 과전을 모두 가속군자전으로 소속시켰으며, 비록 특지(特旨)로 그 과전을 돌려줄 때에도 원래 절급받았던 과전의 1/3을 넘기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416년(태종 16) 전액 지급으로 환원되었다. 한편 혁파된 인리위전(人吏位田)도 가속군자전으로 소속시켰는데, 그중 일부를 본궁(本宮)에 소속시키거나 공신전(功臣田)으로 절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속군자전의 설치는 전지(田地)와 농민에 대한 국가의 직접 지배력을 보다 강화시키고자 하였던 고려말 전제개혁론자(田制改革論者)들의 의도가 일관되게 구현된 결과였다.
용례
戶曹上議政府六曹臺諫同議備糧餉條件 (중략) 一 身故者 喪葬畢後 子孫以其科分給 餘田假屬軍資 迨其加官 科準折給 其餘屬軍資 一 有子息妻守信田 給三分之二 以其餘田假屬軍資 待其子孫年壯 依科折給 如上項例 (중략) 一 犯罪人田 杖以上皆屬軍資 雖蒙恩宥特旨還給 不過三分之一 (중략) 從之 [『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참고문헌
이장우, 「조선초기 군자전에 대한 일고찰」, 『역사학보』 118, 1988.
각사위전(各司位田)
정의
중앙의 각 관사가 담당 업무를 수행하는 데 드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분급받은 전지(田地).
개설
각사위전은 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뿐만 아니라 군자감(軍資監)을 포함한 전곡출납 담당 관사[有錢穀各司]의 전세(田稅) 수입원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풍저창위전(豊儲倉位田)과 광흥창위전(廣興倉位田)을 제외한 나머지를 각사위전이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田制改革)에서 풍저창위전·광흥창위전을 비롯한 모든 각사위전을 국용전(國用田)으로 통합하여 운용하기 시작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이러한 각사위전은 민전(民田) 위에 설정된 국가 수세지(收稅地)로, 전세로 거두어들이는 물품의 목록은 쌀과 콩을 비롯한 곡물류, 베[布]·유밀(油蜜) 등과 같은 각종 현물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각사의 1년 소요 경비를 고려하여 호조(戶曹)의 급전사(給田司)에서 각사위전과 공해전(公廨田)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지만 중앙의 모든 관사가 각사위전과 공해전을 지급받았던 것은 아니다. 해당 관사가 담당 업무를 수행하는 데 많은 경비가 드는, 국가 재정에서 중요한 관청에 한하여 각사위전을 지급하였다. 이러한 관사를 ‘전곡이 있는 관사 또는 아문[有錢穀各司, 有錢穀衙門][『세종실록』 5년 6월 5일]’, ‘전곡을 담당하는 관사[掌錢穀各司][『세종실록』 19년 5월 20일]’, ‘전곡을 출납하는 관사[出納錢穀之司]’라고 불렀다[『세종실록』 6년 7월 14일].
내용
각사위전을 지급받은 관사는 풍저창·광흥창·군자감을 비롯하여 호조·공조(工曹)·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승녕부(承寧府)·공안부(恭安府)·경승부(敬承府)·인수부(仁壽府)·인순부(仁順府)·공정고(供正庫, 導官署, 司導寺)·상의원(尙衣院)·제용감(濟用監)·봉상시(奉常寺)·예빈시(禮賓寺)·양현고(養賢庫)·군기감(軍器監)·의영고(義盈庫)·선공감(繕工監)·침장고(沈藏庫)·소격전(昭格殿) 등이었다. 이처럼 각사위전은 풍저창·광흥창뿐만 아니라 군자감까지 포함한 ‘전곡이 있는 관사’에 절급된 전세 수입원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풍저창위전과 광흥창위전을 제외한 나머지를 각사위전이라 하기도 했다.
1427년(세종 9)부터 전품(田品)과 전세 수취율을 재조정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와 개정을 거쳐서, 마침내 1444년(세종 26)에 공법(貢法)이 제정되었다. 이로써 이전의 답험손실(踏驗損實)에 의거한 수손급손(隨損給損)에서 벗어나 전분6등(田分六等)과 연분9등(年分九等)에 따른 일종의 정액수세법(定額收稅法)이 마련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세 수입원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이었다. 이 전제를 개혁할 때 풍저창위전·광흥창위전을 비롯한 모든 각사위전을 하나의 전세목(田稅目), 즉 국용전으로 통합하여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각사위전은 수납하는 전세의 물품 목록에 따라 수미전(收米田)·수포전(收布田)·수유전(收油田)·수밀전(收蜜田) 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각사위전 가운데 군자감·광흥창·풍저창은 거두어들인 전세를 대규모의 조운(漕運)을 통해 일괄적으로 운반하여 각각의 창고에 보관·지출하였다. 반면에 나머지 각사는 자신들의 위전(位田)이 있는 고을[官]에서 직접 해당 관사로 상납을 받았다. 각사는 이렇게 받아들인 전세를 업무 수행에 필요한 비용으로 지출하였다.
참고문헌
박정자, 「이조 초기 공전: 민전의 재정 절차에 대하여」, 『숙대사론』 6, 1971.
오정섭, 「고려 말·조선 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 재정」, 『한국사론』 27, 1992.
이장우, 「세종 27년(1445) 7월의 전제 개혁 분석: 조선 초기 전세 제도와 국가 재정의 일원화 추구와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92, 2000.
각자수세(各自收稅)
정의
전지를 절급받은 개인이나 기관이 개별적으로 전세를 수취하는 것.
내용
각자수세(各自收稅)는 국역(國役)에 종사하는 대가로 전지(田地)를 절급받은 사람이나 기관이 개별적으로 전세(田稅)를 거둔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러한 각자수세의 대상이 되는 전지는 1445년(세종 27) 7월을 전제개혁을 거치면서 대대적으로 혁파·축소되었고, 세조대에는 개별적으로 직접 전세를 수취하던 각종 공해전(公廨田)도 혁파되면서, 크게 감소되었다.
마침내 성종대에 이르면 각자수세가 적용되는 전지는 사전(寺田)·아록전(衙祿田)·공수전(公須田)·도전(渡田)·숭의전전(崇義殿田)·수부전(水夫田)·장전(長田)·부장전(副長田)·급주전(急走田)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각자수세의 대상이 되는 전지는 모두 민전(民田)에 설정되었다. 민전은 원래 국가에서 전세를 수취해야 했지만, 각자수세가 적용되면 해당 전지를 절급받은 사람들에게 전세를 납부해야 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간착(間錯)
정의
규정된 액수보다 줄여서 거두는 일.
내용
1440년(세종 22) 우찬성 하연(河演)의 주장에 따르면, 하우(夏禹)의 공법(貢法)에서 전지(田地)를 9등급으로 만들어 해마다 공부(貢賦)를 일정한 수량으로 거두어들였으나, 풍년과 흉년, 토지의 생산력의 차이 등으로 인해 수확량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착(間錯)하는 법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주자(朱子)의 해석에 의하면, 일정한 수량을 내는 것을 ‘정(正)’이라 하였고, 일정한 수량에서 줄여서 내는 것은 ‘착(錯)’이라고 하였다.
용례
議政府各陳貢法便宜 (중략) 右贊成河演曰 臣謹按禹貢分別土地 奠爲九等之田 歲入貢賦之常數 然地力有上下 年分有豐歉 故又制爲間錯之法 (중략) 朱子云 常出者爲正 間出者爲錯 賦有九等 此乃計九州歲入多寡 相較以爲之等 非科定取民也 賦入旣有常數 而又有錯出他等之時者 歲有豐凶 不能如是其常 故有錯法以通之 雖夏法亦未嘗不通也 [『세종실록』 22년 7월 13일]
검전(檢田)
정의
풍흉에 따라 전지의 수확 정도를 조사하는 일.
내용
조선시대에 해마다 농사 작황의 정도를 직접 조사하여 그 손실(損實)에 따라 전세(田稅)를 부과하는 수손급손(隨損給損)의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답험손실(踏驗損實)이라 하였다. 이를 위하여 중앙정부에서는 매년 수확기에 손실경차관(損實敬差官)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다가 세종대 공법(貢法)이 실시되면서 점차 수손급손(隨損給損)에서 연분등제(年分等第)로 바뀌었으며, 그것에 따라 손실경차관도 점차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이나 연분경차관(年分敬差官)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세기 이후부터 이러한 연분등제를 조사하는 일을 ‘검전(檢田)’이라고 하였다.
용례
都提調李頣命曰 去年癘荒已極 今年癘疫無前 或有全家歿死者 近日時氣失常 癘疫復熾 三南農事 又將不登 藩閫巡歷 敬差官檢田 俱在一時 還上大同身布之納 竝在秋冬 飢疫萬死之民 侵擾多端 而又加以量田大役 則其勞費怨若 在所必至 姑待年豐民安 更爲擧行 恐爲得宜[『숙종실록』 44년 10월 13일]
결(結)
정의
농경지의 면적을 세던 단위.
개설
수확을 할 때 한 손으로 쥐는 분량을 한 움큼[把]이라 하고, 열 움큼을 한 묶음[束], 열 묶음을 한 짐[負], 100짐을 1결(結)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작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실제 면적이 달랐다. 고려시대부터 조선건국 초기까지는 1결의 면적을 3등급으로 구분하였지만, 1444년(세종 26)부터 공법(貢法)이 시행되면서 토질의 비옥하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 6등급으로 세분되었다[田品六等][『세종실록』 26년 1월 10일]. 『경국대전』에 따르면, 1등전 1결은 38무(畝), 2등전은 44무 7푼(分), 3등전은 54무 2푼, 4등전은 69무, 5등전은 95무, 6등전은 152무에 준하였다.
내용
고려시대의 제도에 따르면, 6촌(寸)을 1푼, 10푼을 1척(尺), 6척을 1보(步)로 하였다. 그리고 둘레 33보를 1결로 정하였다. 농부의 뼘[手幅]을 주척(周尺)으로 계산하면 약 6촌인데 이것을 1푼으로 해서 이렇게 계산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손으로 쥐는 분량을 한 움큼이라 하고, 열 움큼을 한 묶음, 열 묶음을 한 짐, 100짐을 1결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경작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실제 면적이 달랐고, 비옥한 땅은 같은 1결이라도 면적이 더 적었다.
한편, 결이 농가 한 가구에 나누어 주기 위한 면적이었기 때문에 ‘몫’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문종 때까지 1결의 면적은 성인 남자[丁]의 가운뎃손가락[中指] 10개의 길이인 지척(指尺)으로 사방 640척(15,447.5㎡)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건국 초기까지는 1결의 면적을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하였으며, 전지(田地)를 측량하는 시기에 따라 1결의 면적은 조금씩 달랐다. 1405년(태종 5) 무렵에는 1결의 면적이 사방 33보, 즉 3만9204평방척이었다. 그렇지만 1428년(세종 10)의 양전에서 상전(上田)의 양전척(量田尺)은 20지(指), 중전(中田)은 25지, 하전(下田)은 36지를 각각 사용하였다. 그 결과 상전 1결은 15만 2,568평방척, 중전은 23만9414평방척, 하전은 34만5744평방척이 되었다.
그러다가 1444년부터 공법이 시행되면서 토질의 비옥하고 메마른 정도에 따라 상상·상하·중상·중하·하상·하하의 6등급으로 세분되었다. 그리고 양전(量田)에 사용하는 잣대[田尺]의 길이도 토질의 등급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적용하였다. 이렇게 개정된 전품양전(田品量田) 방식은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등전의 양전척은 주척으로 4척 7촌 7푼 5리이었으며, 2등전은 5척 1촌 7푼 9리, 3등전은 5척 7촌 3리, 4등전은 6척 4촌 3푼 4리, 5등전은 7척 5촌 5푼, 6등전은 9척 5촌 5푼이었다. 이처럼 6등전까지 내려올수록 양전척의 길이는 길어졌다. 이를 경무법(頃畝法)으로 환산하면 1등전 1결은 38무, 2등전은 44무 7푼, 3등전은 54무 2푼, 4등전은 69무, 5등전은 95무, 6등전은 152무에 준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1865년(고종 2) 『대전회통』이 편찬될 때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박시형, 「이조 전세 제도의 성립 과정」, 『진단학보』 14, 1941.
박흥수, 「신라 및 고려의 양전법에 관하여」, 『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과학편』11, 1972.
박흥수, 「이조 척도에 관한 연구」, 『대동문화연구』 4, 1967.
결부(結負)
정의
논밭에서 수확한 곡식의 양을 기준으로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
개설
전근대사회에서 토지의 면적을 측정하는 방식으로는 절대면적을 기준으로 하는 경무법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결부법이 있다. 경무법이 주로 중국에서 많이 이용되었다면 한국에서는 결부법을 주로 이용하였다. 1결(結)은 100부(負), 1,000속(束), 10,000파(把)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근대사회에서 부세의 확보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국가는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이들의 안정된 경제활동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이러한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부세 수취를 주로 인구(人口)와 토지(土地)를 기준으로 하여 부과하였다. 이 과정에서 토지의 측량은 정부에서 부세액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결부제(結負制)는 국가의 토지세 수취를 목적으로 토지의 양을 파악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로 마련되었다.
내용
결부제의 전형이 갖추어진 것은 세종 연간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우선 토지 1결당 수확량을 800두(斗)로 기준을 정하였다. 다음으로 800두를 생산할 토지의 규모를 따지기 위해서는 각 토지의 비옥도를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조정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개 등급으로 구분하고 이에 따라 양전척(量田尺)의 크기를 달리하여 토지의 면적을 측정하였다. 세종 당시 정해진 양전척을 살펴보면 1등전 95.5㎝, 2등전 103.6㎝, 3등전 114.1㎝, 4등전 128.7㎝, 5등전 151㎝, 6등전 191㎝ 등이었다. 이에 따른 토지 실면적은 1결당 1등전 9,104㎡, 2등전 1만 712.5㎡, 3등전 1만 2,990㎡, 4등전 1만 6,533.5㎡, 5등전 2만 2,766.5㎡, 6등전 3만 6,426.1㎡ 정도였다.
조선후기에는 양전제도가 조금 변화하였다. 우선 양전척의 길이가 증가하였다. 1등전의 양전척은 100㎝ 정도로 이전보다 대략 5㎝ 정도 변화하였다. 이 결과 1결당 토지 실면적의 크기도 점차 증가하였다. 1결당 1등전의 면적은 9,984.8㎡, 2등전 1만 1,745.5㎡, 3등전 1만 4,241.7㎡, 4등전 1만 8,131.2㎡, 5등전 2만 4,962.1㎡ 6등전 3만 9,939.4㎡ 정도였다. 다음으로 양전의 방식이 변화하였다. 조선전기 양전척의 길이를 각 등급에 따라 다르게 설정한 것을 1등전의 양전척을 단일척으로 설정하였다. 이 양전척을 바탕으로 1등전 1결에 해당하는 면적을 측정하였다. 그리고 동일한 면적의 토지를 6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여기에 따라 결부의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측정하였다. 예를 들어 1등전에서는 9,984.8㎡ 정도의 토지를 1결로 확정하였다면 2등전에서는 동일면적의 토지가 0.85결, 즉 85부로 책정되었다. 3등전 70부, 4등전 55부, 5등전 40부, 6등전 25부 등이었다.
변천
조선전기 토지제도는 세종 연간 공법(貢法)의 실행과 함께 정비되었다. 결부제는 당시 토지의 비옥도가 고르지 않고 도량제도가 발전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균세를 위한 조정의 노력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이후 결부제는 토지의 생산력을 중시하던 경향에서 벗어나 점차 토지의 면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향으로 점점 나아가게 되었다. 각 등급마다 양전척을 다르게 설정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점차 토지의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결부를 책정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방안은 광무양안에서 실현되었다.
참고문헌
김용섭, 『한국중세농업사연구』, 지식산업사, 2000.
한국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조선후기 경자양전 연구』, 혜안, 2008.
겸병(兼竝)
정의
국역을 수행하는 대가로 전지를 지급받은 사람이 이를 국가에 반납하지 않은 채 다른 명목의 전지를 함께 차지하는 행위.
개설
고려후기 국역(國役) 담당자들에게 전지(田地)를 지급하고 회수하는 법이 무너지면서 겸병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역분전(役分田)을 지급받은 사람이 이를 국가에 반납하지 않은 채 다시 한인전(閑人田)이나 군전(軍田)을 지급받아 수조권을 행사하거나, 심지어 해당 전지의 소유권까지 불법적으로 차지하였다. 겸병의 주체는 주로 권문세족을 비롯한 중앙의 관리들이었다. 겸병으로 대규모의 토지 집중이 늘어나자, 국가 재정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였다. 이러한 겸병의 문제는 고려말 전제개혁(田制改革)에서 사전(私田)이 개혁됨으로써 상당히 해소되었다. 그렇지만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여전히 겸병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내용 및 특징
고려후기로 접어들면서 전시과제도가 제 기능을 상실하자, 국역 담당자들에게 전지를 지급하고 회수하는[授田收田] 법이 무너지면서 겸병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겸병의 주체는 주로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奸猾]”으로 묘사되었는데, 권문세족을 비롯한 중앙의 관리들을 지칭하였다.
겸병의 대상이 되었던 전지는 왕실과 직접·간접으로 관련된 어분전(御分田)·종실전(宗室田)·궁원전(宮院田), 중앙에서 온갖 종류의 직역(職役)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지급된 공신전·역분전·한인전·군인전(軍人田), 지방에서 국역을 수행하는 사람과 그 자제로서 기인(其人)으로 차출된 사람에게 지급한 외역전(外役田)·기인전(其人田), 그리고 진전(津田)·역전(驛田)·원전(院田)·관전(館田) 등 다양하였다. 이러한 전지들은 대부분 개인에게 지급된 수조지(收租地)로서의 사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겸병한 전지의 소유권까지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겸병이 성행하면서 국가 재정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역을 수행하는 관리·향리·군인 등에게 지급해 줄 사전이 당연히 부족하게 되었다. 특히 문·무 관리들보다 사회·경제적 처지가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향리·군인 등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에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민생의 안정과 국용(國用)·군수(軍需)의 확보 등을 명분으로 전제개혁을 추진하면서, 겸병이 심각했던 사전도 개혁하였다. 1390년(공양왕 2) 9월에 이전의 각종 공전(公田)과 사전의 분배와 회수를 기록한 문서대장[公私田籍]을 시가(市街)에서 불태운 다음, 이듬해 5월에는 마침내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과전법(科田法)을 제정·공포하였다.
이처럼 고려말 전제개혁으로 수조지로서의 전지를 분급하고 회수하는 새로운 규정이 시행되면서 겸병의 폐단은 일단 해소되었다. 이에 따라 겸병의 수혜자였던 권문세족의 경제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반대로 고려말 전제개혁론자로 대표되던 신진 관리들의 입지는 강화되었다. 아울러 겸병의 가장 커다란 피해자였던 농민들의 처지도 다소 개선될 수 있었다.
변천
고려말 전제개혁으로 겸병의 문제가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지만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하여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겸병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중종실록』 12년 7월 29일]. 다만 고려후기에 문제가 되었던 겸병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권력자들의 지나친 토지 소유로 인한 폐해를 겸병으로 인식하였다[『인종실록』 1년 4월 11일].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각해져 겸병 문제를 해결하고자 균전법을 시행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될 정도였다[『정조실록』 3년 11월 27일]. 또한 전지의 지나친 소유만 겸병으로 인식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떤 물품을 독점하는 도고(都賈)도 겸병으로 인식하였다[『정조실록』 5년 11월 1일].
참고문헌
『익재난고(益齋亂藁)』
『고려사(高麗史)』
이숙경, 『고려 말 조선 초 사패전 연구』, 일조각, 2007.
김태영, 「19세기 전기 궁가사령의 확대에 대하여」, 『경희사학』 3, 1972.
이병희, 「고려 말 토지겸병과 신진사대부의 동향」, 『역사비평』 계간24호 통권26호, 1994.
이정철, 「반계 유형원의 전제(田制) 개혁론과 그 함의」, 『역사와 현실』 74, 2009.
홍승기, 「고려 말 겸병에 대하여」, 『사학연구』 39, 1987.
경계(經界)
정의
토지의 등급을 매기고, 등급에 따른 넓이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인 양안에 등록하는 국가의 대(對) 토지 파악 업무를 총칭하는 말.
개설
경계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국가가 토지를 파악하는 양전(量田) 업무를 원활히 수행함을 의미한다. 공정한 양전은 국가의 조세수입을 늘리고 또한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민원을 없게 한다. 따라서 경계를 바르게 하는 것은 국가행정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내용 및 특징
경계는, 『맹자』에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를 바로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라는 구절에서 연원한 말이다. 이는 맹자가 주나라의 토지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을 언급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정전법은 토지를 우물 정(井)자로 구획하여 가운데는 공전으로 삼고, 나머지 8필지는 사전으로 삼아 국가의 세금을 충당하는 한편 백성들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즉 맹자가 말한 경계란 토지의 구획 자체를 말하며, 경계를 바로 한다는 것은 토지를 구획하여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유학적 소양을 가진 조선의 지배층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조선에서의 경계란 의미는 『맹자』에서 쓰인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실제로 토지를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행위가 아니라, 국가가 수세 대상이 되는 토지를 정당한 등급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 실제 면적을 정확히 산출하여 파악하는 행위를 ‘경계를 바로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더불어 관원이나 국가에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정한 원칙에 따라 수조권을 분급하는 행위 역시 경계를 바로 하는 것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미 차이는 고대 중국과 중세 한반도에서의 토지에 대한 인식과 권리가 달랐던 데서 유래한다. 즉 한반도에서는 이미 조선시대 이전부터 각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발달되어 있었고, 그러한 소유권은 국가권력도 자의적으로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이 각자 가진 토지를 정당한 가치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 균등히 세금을 매기며, 또 국가 운영에 일정한 기여를 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보상으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을 분급하는 것이 바로 국가가 할 수 있는 ‘경계를 바로 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의 지배층들이 경계를 바르게 하여 부세를 균등히 하는 것이 정치에서의 급선무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의미였다[『태종실록』 5년 9월 5일].
구체적으로 경계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결국 양전사업을 공정하고 원활하게 수행하는 것을 지칭한다. 조선은 토지 비옥도의 등급에 따라 면적 측정의 기준척을 달리 적용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토지 등급을 판정하여 면적을 계산하는 양전작업의 결과에 따라 백성의 수세 부담이 크게 달라졌다. 이에 부세 불균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바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제기되었다.
변천
조선은 몇 차례 대규모 양전을 시행하였지만, 숙종대 경자양전을 끝으로 전국적인 양전은 시행된 바가 없었다. 그러나 경계를 바로잡는 것은 국가의 재정업무의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많은 양전 논의가 제기되는 바탕이 되었다. 경계를 바로 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란 인식은 대한제국기 광무양전 실시 과정에서도 제기되었다[『고종실록』 35년 4월 16일].
참고문헌
『맹자집주(孟子集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