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의 참상; 철원의 조선노동당사와 교회
노 종 해(CM리서치)
<수정입력;rch-2019.6.23. 18:25>
*철원의 노동당사와 안내판-1946년12월, 소련식으로 건축(이하 사진은 2019,5,22일 촬영)
철원은 1945년8월15일 해방 직후 3.8선을 경계로 북조선 지역이며, 조선로동당사는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전략적 최전방 요새요 정책 지휘본부였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소련, 중공 연합군과 국군, 유엔군이 점령과 퇴각을 교차 번복하는 가운데, 철저히 파괴 되고 초토화 된 곳이 철원이었다. 종전 이후 철원은 남한 지역이 되었고, “철원 조선노동당사”와 철원감리교회“는 처참하게 파괴 된 몰골로 500m 거리로 나란히 그 잔해가 오늘까지도 남아 있고, 정부로부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철원의 노동당사를 방문하고-필자
북조선 노동당사와 공산체제 확립 과정
소련은 미국보다 먼저 발 빠르게 북한지역 점령군으로 1945년8월24일, 20만의 소련군들이 3만의 훈련 된 한국인을 포함하여, 소련군25군으로 평양에 진입하였다. 소련점령 군정은 조만식 등 기독교와 천도교 등의 토착 민족세력들을 제거하고, 소련군 대위 복장으로 9월19일 입국한 김일성(33세)을 한 달만에 장군으로 둔갑시켜, "김일성장군 평양시민환영대회"(1945.10.10)를 개최하고 공식 등장시켰으며, 이 때부터 김일성을 내세워 소련공산체제의 강력한 공산정부를 설립하려는 전략을 펼쳐 나갔다.(참조-김성보 외, 38쪽 이하)
f
*김일성 장군 평양시민환영대회(1945.10.10-13.)-중앙에서, 레베데프 소장(25군), 김일성, 조만식.
소련점령군은 간접통치로 “평양 인민위원회”(위원장; 조만식)를 조직하여 출발하였으나, 곧 김일성을 내세워 “인민정치위원회”로 재조직하고, 이어서 북한5도에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행정권을 행사토록 하였다. 소련군정은 다시 북한5도 인민위원회를 “임시인민위원회”로 통합하고 소련식 공산화 치제를 촉진시켜 나갔다.
즉 1945년10월13일 “조선노동당 북조선 분국”을 설립하였고, 17명으로 구성 된 간부회의를 설치하였다. 12월17일에는 “확대집행위원회의”로 소련계와 연안계를 통합하고,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취임토록 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49년 동안 정상에서 떠난 적이 없다. 참조: 이정식, 103쪽 이하. 김계동, 83쪽 이하)
*철원의 노동당사-농지개혁과 노동법령, 교육개혁법령 등 공산화 기지였다.
1946년 들어서서 김일성은 정권장악 뿐 아니라 법령제정으로 모든 부분에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이를 위해 2월8일, 김일성은 평양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발족시키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한반도를 공산체제로 토지개혁 법령(3월), 검찰과 재판소 등 사법체제개혁(3월), 8시간 노동제, 기본임금 등 노동법령(6월), 남녀평등법령(7월), 산업국유화법령(8월), 교육제도개혁(12월) 등을 법령을 제정 공포하고 실시해 나갔다.
*철원의 노동당사, 처참한 폭파와 총탄 흔적들-지주대로 받치고 있다.
1946년5월에는 모든 단체를 통합하여 독립을 목표로, “북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로 개칭하고, 서울 중앙공산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7월22일에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8월30일에는 “북조선로동당”이 건립하고, “조선의 민주주의적 완전독립을 하루바삐 촉성한다”고 선언하였다.(창립대회 회의록, 63쪽)
*철원의 노동당사 앞 도로 안내판-노동당 삼거리
1946년11월부터 각 도.시.군의 대표를 선정하는“인민위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듬해 1947년2월17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가 모여, 입법기관인 “북조선 인민회의”의 의원237명을 선출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장으로 취임하여 정식 정부가 설립되었음을 선언하였다. 1948년 2월4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설치되었으며, 1948년2월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발표 되었고, 7월10일 헌법실행을 선포하고, 헌법에 기초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 준비에 들어가, 8월25일 북조선과 남한 지하에서 선거가 치러졌다.(참조-강만길, 고쳐쓴 한국현대사, 207쪽 이하)
이로써 1948년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을 선언 하였으며, 북한 헌법에 수도를 “서울”로 하여 전쟁이 불가피함을 보여주고 있다.(와다 하루끼, 70쪽 이하)
미군정은 196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 되자, 하지 장군은 미군정의 임무종료를 선언하고, 미군철수가 1948년9월15일부터 시작되었다. 여수.순천반란사건으로 지체 되었다가, 1949년6월30일 치안유지 정도의 무기만 남겨두고, 철수완료 하였다. 탱크 등 모든 무기를 일본으로 옮기고 철수하였다. 당시 남한에는 전차 한 대도 없었다.(참조, 이정식, 117쪽. 와다 하루기, 96-98.)
*노동당 거리 앞-땅굴과 백마고지로 향하고 있다.
1949년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되었고, 1950년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원조를 앞당겨 청구하여 소련무기를 확충하였으며, 북조선공산군은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였다. 전쟁시 중공군의 파견을 약속도 받았다. 김일성은 1950년6월23일 인민군에 공격명령을 내리고, 6월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대규모 공격으로 남침을 감행하였다.
철원의 조선공산당사는 1946년12월 조선로동당이 결성 되던 해에 건립 되었고, 북한의 최전방 한반도 공산화 전략 요충지가 되었다. 또한 소련 무기로 무장 된 북한군의 탱크 등 집결지였다.
*필자는 철원의 "노동당사 매점"을 드나들어- 음료수를 샀지요!
철원과 기독교, 철원제일감리교회
*철원 평야-철원 특급미, "오대쌀"로 유명하였다
철원은 고구려시대 철원군이었으며, 901년에는 궁예가 나라를 세우고 “마진”(摩震)이라 하였고, 911년에는 “태봉”(泰封)으로 개칭하였으나, 왕건의 반란으로 “태봉국”은 멸망하였다. 왕건은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송도(松都)라 하였으며, 철원을 “동주”(東州), “철원부"(鐵原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라 하였으며, 1895년에는 강원도 철원군이 되었다. 철원은 문화와 산업, 교통으로 풍요롭고 번화한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리사업과 철원평야 개발로 특급미 "오대쌀" 생산으로 유명하였고, 1914년 경원선 개통으로 서울-의정부-포천-철원-금강산-원산을 거쳐 함흥 등 남북을 잇고, 만주로 진출하는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산업과 교통으로 번잡한 도시를 이루었다.
*철원제일감리교회 3층 석조건물 건축봉헌(1937년9월30일)
철원은 1885년부터 초기 선교사들의 기독교 선교지로서 복음이 전파 되었고, 특히 원산의 하디(R.A. Hardie, 河鯉泳) 선교사가 1900년부터 철원의 지경터(地境里)에 복음 전도하여, 1901년3월31일에 15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강원도에 첫 신앙공동체인 “철원감리교회”가 세워졌다. 1903년에는 철원 지경터 지방회가 조직 되었으며, 1907년에는 선교지 분할로 철원은 감리교선교 구역이 되었고, 감리교 선교부가 설립되어 복음전도, 교육, 의료선교 등 활발히 펼쳐 나갔다. 1912년에는 “지경터 지방회”에서 “강원서 지방”으로 확대 되었고, 철원은 춘천과 함께 강원도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참조: 김천욱 편, 14쪽 이하)
*철원제일감리교회-폭파 된 잔재, 교회 입구, 등록문화재 간판도 보인다.
철원읍교회는 1920년5월에 붉은 벽돌예배당으로 건축봉헌 되었고, 유시국, 박연서 목사 등이 시무하였으며, 의료선교사인 앤더슨(E.W. Anderson) 박사부부와 어윈(C. Erwin) 선교사가 주재하며 활동하였다.
*철원제일감리교회-폭파 된 잔재, 교회 전경
1919년3월 철원만세운동이 철원에서 거듭 열열히 일어났으며,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철원읍교회 청년들이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어서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여 상해임시정부와 연통활동 하다 일경에 체포 되어 해산되기도 하였다.(철원 애국단사건)
*폭파 된 철원제일감리교회
1936년에는 더욱 부흥 성장하여 “철원제일감리교회”로 개명하고 건축 기공식 하였으며, 1937년7월 석조 3층 건물로 예배당, 교육관, 주방까지 갖추고, 스팀난방 반지하실 보일러실도 갖춘 최신식 건물로 준공하고, 9월30일 감격적인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36년에 부임한 담임목사인 강근종 목사는, 1940년9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사상범으로 검거되어 철원경찰서에 구금 되었고, 1941년10월9일, 치안유지법으로 징역1년6개월 선교 받아 독방에서 복역하는 중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하였으나 결국 1942년6월3일 순교하였다.
*폭파 된 철원게일교회-강단부분에서
8.15해방 당시 윤태헌 목사님이 담임하셨고, 장남 윤성범 선생은 철원중학교 영어선생이며 교회에서는 청년들을 지도 하였다. 윤태헌 목사님은 공산당국의 박해로 견디다 못해 월남하였고, 임시 유득신 목사님이 담임하셨다.
유득신 목사님은 항일독립 투사로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신 분이며, 옥고를 치른 후 만주에서 목회하셨다. 해방 후 입국하여 함북 청진감리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공산치하에서 박해로 월남하기 위해 철원으로 오신 분이셨다. 교인들이 이를 알고 간청하여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하신 것이다.
*폭파 된 철원제일교회-강단부분에서
1950년 6.25 전쟁 때 북조선은 전시 총동원령을 내리고, 철원제일교회를 인민군 병원으로 사용한다고 점거하였다. 교회는 빼앗겼고, 교인들은 집에서 임시 예배 장소로 은밀히 옮겨 다녔다. 10월10일 국군이 철원으로 진주하였고, 유득신 목사님은 “철원군 자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시였으나, 12월24일 중공군 남하로 공산치하에서 피신하다가 병이 악화 되어 운명하시었다.
또한 전도사 이복희 선생은 민족운동 중심지인 만주 용정의 명신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해방이 되어 1946년 초에 “청진여자상업학교” 교사로 이임하여 봉직하셨다. 그러나 공산화가 진행 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로, 월남키 위해 우선 “철원여중“ 교사로 청원하였고, 1948년 철원여중으로 청빙 받아 부임하여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이복희 선생은 학생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철원교회에서 소년부(청년부)를 지도하였음으로 청년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공산화로 조여 오는 시국에서 교사직을 사임하고, 철원제일교회 전도사로 전념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청년들의 반공청년단 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총격과 포탄으로 얼룩진 파괴 된 잔해
조선공산당은 사회단체 대표로 이복희 선생을 지목하여, 철원군 대의원으로 당선 되, 평양의 전국대회에 참석하게 되었으며, 대의원 활동이 조선로동당의 꼭두각시로 선전용에 불과 함을 견딜 수 없어 월남을 시도하다 실패하기도 하였다. 북한실정을 증언하지 못해 고심하면서 공산당 통치와 전쟁 통에 이리저리 피신하며, 피난 못간 교인들을 은밀히 돌보며 예배인도하시다가, 1951년6월11일 유엔군의 철원군민 소개정책에 따라 월남하였다. 이후 수원 종로교회, 인천 창영감리교회 전도사(1951.11.)로 시무하셨고, 서울 평동감리교회 전도사(1954.3.)로 활동하시다가, 1956년5월1일 별세하셨다.
*철원의 노동당사 옆-유엔 16개국 참전국 깃발
철원 노동당사와 철원제일교회는 500m사이로 나란히 잔혹한 전쟁의 폭격으로 무수한 총탄, 폭격의 상처를 간직한 채 파괴 되어 잔해가 음흉스럽게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5월31일에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 하였고, 근대문화유적지로 개방하고 있으며, 감리교회는 “철원제일교회”를 파괴 된 잔해 곁에 2013년10월29일 신축봉헌 하였고,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
*폭파 된 철원제일교회 안에서- 복원 된 교회도 보인다
*철원제일감리교회 복원 기념 판
나가며
철원은 기독교 성황 지역으로, 기독교인들이 지도력을 지니고 있으며, 항일지사들이 왕래하던 지역이었다. 남북한 저명한 목회자들이 드나들며 목회하였고, 특히 만주 용정 등 한인 지사들도 왕래하던 곳으로 항일 독립투쟁 정신도 강한 지역이었다. 철원의 “노동당사”와 “철원제일교회”는 6.25전쟁의 참혹한 참상을 증언해 주고 있다. 대한민국 중앙정부는 철원일대를 “세계평화공원”으로 조성하고 있으며, 철원군도 평화통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철원은 세계평화공원으로 전국은 물론, 평화를 애원하는 세계인들의 행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철원 고석정, 평화의 꽃밭(개장; 2019.5.18.)-우측 산 넘어는 지척의 북한 땅이다!
한국전쟁 백마고지 전투 등 참혹한 철원의 참화지역은, 오늘날 고석정에 평화의 꽃밭조성 되어 유채꽃 공원으로 개방 되어(2019.5.18.) 만발하고 있었으며, 필자는 아픈 마음을 간직하고, 전통 “철원막국수” 집에서 수육과 빈대떡, 메밀국수의 깊은 맛을 음미 하였다. 하루 밤을 지낸 이른 아침에 인근 군부대에서 발포훈련으로 포성이 펑! 펑! 펑! 울려 와 전쟁을 실감케 하였으며, 철원의 한탄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rch)
*전통의 철원 막국수 점-수육과 빈대떡, 메밀국수가 깊은 맛이였다!
*철원군 고석정 꽃 밭과 두루미 상-평화통일을 바라보며
*폭파 된 교회 전해 강단에 서서!-복원 된 철원제일감리교회도 보인다!
(필자는 2019년5월21일-22일에 철원노동당사와 철원제일교회 현장을 방문하였고, 스마트폰으로 사진 촬영하였으며, 철원군 내를 둘러보았다.)
--------------------
<참고도서>
洪鍾赫: 韓國分斷의 歷史的 考察, 서울, 人文出版社 1974.
이정식(김성환 역): 조선노동당사 略史, 이론과 실천, 1986.
서울대 한국현대사 연구회: 해방정국과 민족통일전선, 세계 1987.
김계동: 한반도 분단, 누구의 책임인가?, 명인문화사 2012.
와다 하루키(서동만 역): 북조선, 돌베개 2002.
와다 하루키(남기정 역): 북한 현대사, 창비 2014.
강만길: 고쳐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김성보 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 지식하우스 2014.
김진수: 신사참배 거부 순교자 강종근, 진흥 2013.
김천욱(편): 철원제일감리교회를 지키던 이들의 이야기, 좋은땅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