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3 주일설교
세기(世紀)의 회담(會談)
(이사야 1:10-20)
결렬(決裂)된 하노이 협상(協商)
지난 주 목요일, 2019년 2월 28일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기(世紀)의 회담(會談)이 진행된 날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것을 두고 일부 신문 기자들은 세기의 회담이라고 불렀습니다.그 동안 김정은은 여러 차례 비핵화를 공언해왔고 미국도 북한을 향한 제재(制裁)를 풀어줄 것처럼 언질을 했기에 이번 회담이 잘 되면 국제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회담 당일, 협상은 결렬(決裂)되었고 ‘하노이 선언’에 크게 기대를 했던 사람들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미국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에는 영변 핵시설 외에도 숨겨놓은 핵 시설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폐기하라고 요구했더니 북한은 당황하며 거부했다고 합니다. 북한은 용도를 다한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며 비핵화 쇼(Show)를 했지만 미국은 북한의 구석구석 다 알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미국의 정보력에 다시 한 번 세계가 놀라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소식을 접하면서 영화 ‘타짜’의 밑장빼기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김정은의 밑장빼기가 타짜인 트럼프에게 통하지 않은 것이죠. 밑장빼기를 하다가 걸리면 영화에서는 손목을 자르던데 국제사회에서는 어떻게 될지 계속해서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화 테이블
설교 시간에 하노이 회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큰 이슈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결렬(決裂)된 협상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화를 하자고 협상 테이블에 초대했습니다. 이는 마치 김정은이 고모부와 친형을 살해하고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며 국제 사회의 평화를 위협해 왔지만 이제라도 핵무기를 포기하고 국제 사회의 어엿한 일원이 되기로 마음을 바꾸면 미국이 나서서 경제 제재도 풀어주고 경제 지원도 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8절에서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홍과 진홍은 죄를 나타내는 색이고 눈과 양털은 정결을 나타내는 색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기보다 사죄를 선언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어 19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먹을 것이요’라는 말과 ‘삼켜지리라’하는 말은 대조적인 표현입니다. 유튜브에서 맹수들이 싸우는 장면을 보면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하시지만 하나님을 거절하고 배반하면 이방 나라에게 먹힐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밑장빼기
이스라엘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제재를 당하며 경고를 받고 있을까요?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무엇이 유닉하뇨’라고 하시는데 히브리어(라마 리)로 ‘왜 나에게’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뭣 하러 가져왔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11절에 나오는 숫양의 번제, 살진 짐승의 기름, 숫염소의 피라는 표현은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를 위해 가장 좋은 제물을 가지고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누가 가지고 오라고 했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13절에서 그런 것은 헛된 제물이라고 하십니다. 14절에서는 월삭과 절기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15절에서는 성도의 기도조차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다고 하십니다. 기도해도 듣지 않을 테니 그만하라는 말씀입니다. 13~15절을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주일마다 예배드리러 나오고 최선을 다해 헌금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헌금도 귀찮고 예배도 괴롭고 기도도 듣기 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의 문제는 무엇이고 또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기도한 것을 형식적으로 대충 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11절의 숫양은 어린양보다 비싼 제물입니다. 화목제물도 살진 짐승 즉 좋은 것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도 어린양 뿐 아니라 황소와 숫염소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들을 헛된 제물이라고 하신 이유는 13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말씀은 15절에서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피는 제물로 드린 짐승의 피와, 약한 사람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불의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제사를 열심히 드려서 손에 피가 가득한데 동시에 불의와 악행의 피도 가득하다는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찬송을 부른 입으로 저주와 비난과 욕설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손 모아 기도하고 성찬식에 동참한 손으로 남을 때리고 훔치고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상대로 밑장빼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자기 수준인 줄 알고 속이려고 덤빈 것입니다. 김정은이 미국을 향해 핵폭탄을 포기하겠다고 하면서 영변보다 더 큰 핵시설을 숨겨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쉽게 속을 나라가 아닙니다.
북한이 미국도 속일 수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합니까? “우리는 제사를 최고로 드립니다. 우리는 절기를 열심히 지킵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복을 주세요.” 그렇게 말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십계명 첫 번째 돌판만 지키고 두 번째 돌판은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결국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은 증거입니다.
다시 협상하자고 부르시는 하나님
미국과 북한의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아직도 대화의 여지는 남았습니다. 김정은이 진짜로 핵을 폐기한다면 미국은 제재를 풀고 베트남처럼 번영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네 가지를 버리고 다섯 가지를 하라고 촉구하십니다. 16절에서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며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악을 그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협상 테이블에 나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자칫하면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신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한국교회가 회복하는 길
오늘날 한국교회는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부흥을 멈추었습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십계명 두 번째 돌판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를 더 많이 드리면 제자가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3:34~35).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나님께는 허브(향채 香菜) 잎사귀까지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사람에게는 정의와 자비와 신뢰를 저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 23:23). 예수님의 비유 중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그것은 만일 그 사람이 죽으면 자신이 부정하게 되어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에게는 사람의 생명보다 제사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만지셨고 세리와 창녀들과 대화하셨습니다.
어떤 성도가 목사님에게 자기가 주일 성수 잘하고 예배 잘 드리고 십일조 잘 하는데 왜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느냐고 물었답니다. 목사님은 기도해보고 다음 주에 대답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어보라고 하던데요. 주일 외에 나머지 날들은 어떻게 사니? 십일조 외의 나머지 돈들을 어떻게 쓰고 있니?”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 민족은 종교적 열심이 특심합니다. 다른 나라에 없는 새벽기도회도 만들고 금요일 철야기도회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 속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가득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부분은 부족합니다. 그 결과 목사들이 물질과 명예를 탐하고 교회들은 서로 경쟁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기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의 말은 거짓말도 믿어 버립니다. 이단이 친절을 베풀면 따라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부흥하는 지름길은 잃어버린 십계명의 둘째판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이며 예배에 걸맞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고 우리가 드릴 영적인 예배입니다(롬 12:1).
우리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귀히 여기지만 세상 사람들이 관심 있는 복음은 ‘내가복음’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음이 될 때 그들은 내가 믿는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믿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었으나 인간관계의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에게 바울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며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고전 13:4~7). 또한 바울이 설명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도 사람을 대하는 덕목들입니다(갈 5:22~23).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결심하고 노력하고 수양해서 착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믿어 구원받고 예배 잘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령님은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9가지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 성령님께 즐겨 순종할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테이블에서 하나님의 대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반자의 자리에 앉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