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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은 새 부대에
2013. 3. 10(교회설립주일) 마가복음 2:18-22
얄미운 여자 시리즈란 유머가 있다.
10대에 얄미운 여자는 얼굴이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에 얄미운 여자는 똑같이 성형했는데 티가 안 나는 여자
30대에 얄미운 여자는 실컷 놀고도 시집은 잘 가는 여자
40대에 얄미운 여자는 잘 쏘다녀도 자녀들이 공부만 잘하는 여자
50대에 얄미운 여자는 실컷 먹는데 배가 안 나오는 여자
60대에 얄미운 여자는 남편이 돈 많이 벌어놓고 죽은 여자
요즘 세대를 잘 반영하는 유머이다. 현대인들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이론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삶 속에서는 칭찬과 격려보다는 남이 나보다 잘되고 편안해 보이면 그것을 얄밉게만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칭찬을 얼마나 잘하는가? 오늘은 우리교회가 34주년이 되는 날이다.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 은혜로 교회를 섬긴 칭찬받아야 할 분들이 많이 있다. 오늘은 그런 분들이 모두 칭찬과 격려를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옆의 분과 인사 / 칭찬합니다. 격려합니다.
16세기 네덜란드에는 메노 시몬스 사제를 통하여 메노나이트라는 교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되어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비폭력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메노나이트는 역사 안에서 많은 핍박 앞에서 순교하면서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말씀대로 따라는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메노나이트 교파가 17세기에 분열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진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왜 분열하였겠는가? 그것은 단추때문이었다. 옛날에 단추가 발명되기 전에 사람들은 옷고름을 만들어서 옷을 입었다. 그 후 단추가 발명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리한 단추를 옷에 달아서 입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오면서 단추를 단 옷을 입었다. 그때 단추가 반짝 거리므로 그것은 사치스러운 모습이다고 입으면 안된다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옷을 편안하게 입기 위하여 단추를 달았는데 왜 그 옷을 입을 수 없단 말인가? 하고 반기를 들게 되었다. 그래서 메노나이트교파는 예배를 드리러 올 때 단추를 단 옷을 입어도 된다는 단추파와 단추단 옷은 사치이기 때문에 옷고름을 해야 한다는 옷고름파로 나뉘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분 생각에는 옷고름파가 옳은가? 단추파가 옳은가? 우리가 보기에는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메노나이트교도들에게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여서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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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강직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형제를 사랑하라, 용서하라, 화합하라는 하나님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말씀은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왜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는가?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는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금식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구약시대 금식은 괴로움이나 참회할 때 행한 의식이었다. 그래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후에 그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또 레위기 16장을 보면 속죄일에 금식하는 규례가 있었다. 이렇게 죄악의 고통가운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사모하며 행한 것이 금식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달랐다. 그들은 금식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내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고 기도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금식의 모습이었다. 구약시대 금식은 하나님 앞에 참회하며 긍휼을 사모하며 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금식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방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왜 이렇게 토로하고 있는가? 금식은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관례가 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례를 따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관습으로 비평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관습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단코 변화와 성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성장을 가르치는 어느 목사님의 칼럼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목사님은 자동차 공장을 비유로 이렇게 설명하셨다. 자동차공장에는 차를 만들기 위한 레인이 있다. 그런데 티코를 만드는 레인에는 아무리 훌륭한 기술자가 많이 붙어서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그 레인에는 티코밖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그랜저 레인에는 당연히 그랜저만이 출고가 되는 것이다.
내가 실력이 있느냐? 내가 성실하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더 나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관례에 빠져 변화할 수 없다면 더 나은 삶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삶에만 매여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막 2: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지금 60-70년대를 지난 분들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어릴 때 옷은 설날이나 추석에 한번 샀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형님이 입던 것을 물려서 입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랬을 것이다. 특히 저같은 경우에 형님은 체구가 좀 있는 편이었다. 거기에 비하여 저는 키는 크지만 살은 없는 체형이었다. 그런데 형님이 입던 옷을 입으면 허리에 맞추면 길이가 짧고, 길이에 맞추면 허리가 커서 늘 바지가 반쯤 내려가 있었다.
이렇게 옷이 제 체형에 맞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제가 별난 아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형님이 입던 옷을 제가 입으니 무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새옷을 사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무릎에 새로운 천을 대어서 기워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이다. 저의 어머니는 옷을 살 때 딱 맞는 옷을 사지 않는다. 항상 한치수에서 두치수 이상 큰 옷을 산다. 그래서 그 옷이 딱맞고 작아지면 저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옷은 벌써 형님이 2-3년을 입은 옷이다. 그리고 제가 입어서 1-2년을 입었다. 그러니 무릎은 이미 낡을 때로 낡아 있다. 그런데 거기에 어머니가 꼼꼼하게 새로운 천을 대어서 기워주면 실밥부분이 터져서 다시 기워야 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제 무릎은 새로운 퀼트와 같이 무릎에 천을 대고 또 대는 패션이 형성되는 것이다.
새포도주도 마찬가지이다. 포도주는 발효식품이다. 그러므로 새가죽부대에 넣으면 가죽부대가 탄력성이 있어서 포도주가 부풀어 올라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낡은 가죽부대에 새포도주를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되어서 부피가 커져갈 때 결국은 터져서 포도주마저 못쓰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잘못된 관습에 얽매여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지는 종교적인 관습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때때로는 종교적 관습이나 전통을 가지고 우리는 신앙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으로는 예수님의 참된 구원의 진리를 담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통과 관습에 얽매여 있는 그 시대에 12명의 제자를 부르셨다. 그런데 이 12명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한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였다. 그때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하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 결과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많은 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자라 어부가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바다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비하여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잡는 것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더 나은 것이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고기를 잡는 방법과 경험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의지하여 순종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관습이나 전통을 통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관습이나 전통을 깨뜨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간증하는 분이 바로 개그우먼 이성미집사이다. 이성미집사는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았다. 그런 이성미집사가 자녀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이성미집사의 가장 큰 고통은 아들이었다. 새벽기도에서 이성미집사님은 하나님 정말 제가 낳은 아들이 맞습니까? 애가 바뀐 것은 아니예요. 애를 바꾸어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집에가서 아들을 보면 아들은 하나도 바뀌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면 화가 나서 아들을 깨우면서 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새벽기도 후에 자는 아들을 깨우면서 온갖 욕을 다하며 아들을 깨웠다. 그리고 돌아섰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해 줄까! 하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성미집사에게 두려움이 생겼다. 만약 이성미집사가 말한대로 아들에게 이루어주었다면 아들은 피를 흘리며 죽었어야 하고, 정신이 나가서 바깥에서 개가 되어져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성미집사님은 아들에게 밥을 먹으라고 하고 방에 들어가서 철저히 회개를 하였다. 그 후 이성미집사는 아들에게 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들이 어머니가 욕을 하지 않으니 불안해 하며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아들은 엄마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데 하면서 왜 욕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성미집사님은 일주일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랬더니 아들은 왜 하나님은 17년동안 가만 있다가 그날 이야기 하시는 거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면서 여동생에게 좋겠다 너희들은 욕안먹고 커서 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저녁에 오빠를 데리고 오라고 시켰더니 딸이 놀라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이성미집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엄마 큰일 났어! 오빠가 지금 공부를 해!
이성미집사는 아들이 변화되기를 기도하였지만, 결국 자신이 변화될 때 아들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간증은 여기서 끝을 맺지 않는다. 이성미집사의 아들은 운동을 잘한다. 학교에 가면 운동장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편에서는 하키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축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키를 하는 아이들이 깐족거리는 것에 화가 나서 축구공으로 한 아이에게 찼는데, 그 캐나다 학생이 뒤로 돌아 얼굴에 정면으로 공을 맞은 것이다. 그래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블레이드를 타고 있었던 캐나디언이 뒤로 넘어지면서 순간적인 내진탕으로 혀가 말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아들은 그 캐나디언 아이의 혀를 꺼내었던 것이다.
그 사건으로 엠블란스와 경찰이 학교에 들어왔고, 아들은 교장실에 갇히게 되었다. 연락을 받고 학교에 갔더니 아들이 교장실에서 바깥을 보고 있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하나님 내가 저 아이를 저렇게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하고 아픈 가슴으로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당신은 행운아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3명의 증인이 아들이 때린 것이라, 밀친 것이다고 증언을 해 주어서 나라에서는 처벌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내진탕으로 병원에 간 캐나디언이 전화를 해서 처벌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밝혀 주었다. 그래서 형사처벌은 받지 않고, 학교에서 14일 정학을 받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이성미집사는 아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다.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가 그동안 너를 많이 미워했었다. 엄마가 사랑없이 너를 키웠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것같다. 내가 지금 용서를 받고 싶다.
이렇게 말을 하자 아들이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엄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엄마 언제 나를 칭찬해 본 적 있어! 엄마는 잘하는 것은 당연하고 못하는 것만 가지고 야단을 쳤쟎아! 한번만 칭찬을 했어도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쟎아!
그렇게 둘이서 부동켜 안고 소리 내어서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성미집사가 새벽기도를 나가는데 시커먼 것이 따라 나왔다. 깜짝 놀라서 보니 아들이었다. 나도 새벽기도 따라갈려고? 왜! 하나님 살아계셔 그게 뭔 소리야
엄마 바뀐 것을 보니 하나님 살아계셔!
이성미집사님은 자신이 변화되므로 결국 아들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구원의 열매를 보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성미집사님의 가정에 기적이 임하였다. 그런데 그 기적은 이성미집사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이 변화될 때 가정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적이 우리 자여교회에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하여 앞으로 더 많은 부분을 말씀앞에서 변화되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작년 초에 코닥이 파산을 하였다. 1900년대에 카메라이라고 하면 코닥이었다. 그런데 코닥은 세상이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만을 고집하였다고 망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을 최초를 발명한 사람은 코닥의 엔지니어였다고 한다. 1975년 디지털 카메라를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력업종을 스스로 잡아먹는 신제품을 개발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 기술을 사장시킨 것이다. 그 결과 132년된 기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노키아도 마찬가지이다. 핸드폰이라고 하면 노키아였다. 노키아는 필란드 전체 수출액의 25%를 차지하는 국민기업이었다. 이 거대한 노키아의 현재 모습은 처참하여 200불하던 주식이 지금은 3불에 불과하다. 굳이 스마트폰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안이한 판단을 하였는데 그 틈새를 삼성과 애플이 파고 들었던 것이다.
노키아는 우리는 변하지 않아도 1등 할 수 있어! 하는 기업을 경영하였고, 삼성은 마누라와 자식빼고 다 바꾸라는 변화를 외쳤다. 그 결과 변화된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현대는 기업도 변화하지 않으면 문을 닫는 시대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떠한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전통이나 관습에 얽매여 있으면 더 이상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전통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앞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를 이끄는 것이 전통인지 관습인지를 분별하며 늘 말씀 앞에 서 있기 위하여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교회는 34년 동안 말씀 앞에 서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34년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교회, 말씀에 순종하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여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