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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윤 경 희
수필의 제목을 " 어머니" 로 하지 않고 " 엄마" 라고 막상 자판을 두드리니 가슴이 먹먹해 온다. 지난 2월 11일이 엄마의 기일이었고,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이다
재직중에는 여름 방학, 겨울 방학 중에 꼭 한 번씩, 두 번은 고향의 산소엘 다녀왔는데 퇴직을 한 후엔 ' 더 자주 들르리라' 다짐한 것이 외려 실천이 되지않아 1년에 두 번씩 가 보지를 못했다.
지난 3월 3일 , 문득 생각 나 찾아간 고향,
부모님 산소의 봉분은 아직 그대로 있으나, 그 윗대의 산소들은 벌초와 관리문제로 마을에서 납골당을 만들어 한 곳에 모아서 모셨는데 작년에 가 본 납골당을 못 찾아 동네를 얼마나 헤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물어 겨우 찾아가는 불효를 범했다.
부모님을 부를 때, 아버지는 당연하게 " 아버지" 로 불렀지만, 어머니는 친숙하게 " 엄마" 로 불러왔기에 " 어머니" 란 호칭은 나에게 낯설다.
우리 엄마,
자손이 귀한 외동아들과 결혼하여, 첫 딸을 낳고 두 번째로 아들을 낳았으나, 어렸을 때 실패를 보고 그 이후로 계속 딸을 낳아 마음고생을 엄청 하셨다.
두 번째로 태어난 딸이 바로 나, 그래서 동네에서 부르던 아명이 " 놈이--노미" 다. 내 밑의 여동생은 " 재놈이", 엄마의 가슴앓이는 전혀 모른 채, 산과 들을 뛰어 다니며 천지를 누비고 다녀도, 딸이라고 구박은 받지 않고 귀하게 자랐으며 부모님의 금슬도 좋아서 마을에서 부러움을 샀다.
드디어 네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동네잔치를 하고 , 일하는 언니를 포함하여 득시글 득시글한 여자들 사이에서 발바닥에 흙도 묻히지 않고 자란 남동생의 이름은, "귀한 아들일수록 이름을 천하게 짓는다" 는 속설에 따라 " 뺑이" 라고 지었다. 마을의 장난꾸러기들이 우리 사남매의 이름을 따서--언니의 이름이 창희- 만가의 곡조를 붙여 가며 " 뺑재놈창, 에헤요" 라고 놀리기 일쑤. 그 청승맞은 가락과 놀림이 섞인 노래 때문에 쫓아가서 싸우기도 자주 했지만 지금도 그 가락이 귓가에 살아있다. 몸이 갸날프고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지셔서 아버지가 어쩌다가 시장에 동부인해 나가시면 " 한국 사람 맞느냐? " 고 묻더라는 우리 엄마는 그 이후에도 삼남매를 더 출산을 하셔서 자그마치 8 남매를 낳으셨다
그 중에서, 또 딸 하나를 어릴 때 잃으셔서 결국 딸 셋, 아들 셋---육남매가 성장을 했는데. 그 와중에 친정의 남동생까지 데려다가 고등학교 3년 동안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외할머니, 이모가 자주 집에 들리셨는데 , 나중에 성장을 해서 알고 보니, 친외조모가 일찍 돌아 가셔서 열두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이모가 엄마를 키우다시피 하셨지만 후처로 들어오신 외조모와도 사이가 좋아 외삼촌이 이복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자랐다.
막내 남동생을 가지셨을 때의 연세가 자그마치 마흔 둘,
이웃에 창피하다고 "아이를 지울까?" 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 그래도 아들 욕심에 " 아들이면 낳겠다" 라는 엄마의 말에 태아의 성별은 알리가 없지만, 출산을 장려하려는 의사가 " 아들이 틀림없다" 라는 부추김에 결국 태어 난 막내 남동생,
자라다가 병치레로 병원에 그 동생을 데려 가면 단골인 의사 선생님 왈----" 저 아들은 제 아들입니다. 제 덕분에 태어났으니까요" 라는 농담을 나누시던 그 녀석이 막내 구실하느라 얼마나 엄마에게 살갑게 하는지? 딸인 우리 보다 더 효자노릇을 했다
외로운 집 안에 손자, 손녀가 득실대니 조부모님은 늘상 싱글벙글, 부모님이 들릴 때 마다 짐보따리를 챙겨 보내시고, 처음에는 주는 것을 사양하던 우리 엄마, 얘들이 자라나면서 먹성이 왕성하니 그 다음 부터는 ,
" 어머님, 뭐든지 주이소, 아이들이 얼마나 먹을라 카는지? 마 무서울 정도라요" 하더라고 웃으시며 먹을거리 챙겨 주시던 할머니.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아버지가 남의 집 밥이나 식당 밥을 거의 잡수시지를 않고, 항상 집의 밥을 드셨지만 언제나 즐겁게 가족의 음식을 챙기시고, 보람으로 삼으시던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적은 식구와 편리해 진 가사노동에도 짜증을 내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진다.
어느 봄 날, 할아버지가 오셔서 엄마가 열심히 요리를 준비하여 밥상을 차렸는 데 밥상 위에 빨갛고 화사한, 꽃 같은 음식이 차려져 있다. 궁금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여
"엄마, 저게 뭐꼬? 디기 예뿌고 맛있게 보인다" 라고 하니
" 으--응, 쇠고기 육회, 할아버지가 좋아 하셔서 만들어 봤다" 라는 대답,
쇠고기로 회를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지만, 얼마나 정갈하고 깔끔하게 챠려져 있는지? 요리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러나 삶에 어찌 행복만 있겠는가? 그렇게 귀하게 자란 큰 아들이 대구로 이사를 와서 중학교를 다니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어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못하게 되었다
당신 자신이 외롭게 자라셔서 한없이 자상하신 아버지께서 중학교를 졸업한 남동생을 대구 근교의 아버지 근무지로 진학을 시켜 그 친구들과 결별을 한 후 동생은 착실하게 변하여 공부도 열심히하고 학교의 모범생으로 칭찬을 들었고 걱정이 해소되었는데, 고등학교 3 학년 , 여름 방학 중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더워서 저수지에 목욕을 하러 들어 갔다가 사고로 불행을 당하였다
집 안이 완전히 줄초상이 나게 된 상황,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연로하신 조부모님들과 부모님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남학생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어도 시간은 흐르게 마련....
그런데 그 이후로 엄마가 변하셨다. 치매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치매가 어떤 병인지 ? 어떤 상황으로 진행되는지? 가 잘 알려진 상태가 아니어서 병원에를 다녀도 치료는 되지않고 상황은 악화일로,
치매라는 병이 얼마나 슬픈 병인지?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감히 짐작도 못한다.
60 평생을 같이 살아 온 남편이 "오빠" 로 바뀌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아보시던 나도 " 이웃 집 새댁"이 되어 "목욕을 시켜줘서 고맙다" 고 인사를 하신다.
그 이후로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며, 아버지께서 24 시간을 돌보셨지만 결국 79세의 연세로 밤중에 주무시다가 아버지 옆에서 돌아 가셨다 . 그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두 달 동안을 출, 퇴근시 운전을 하며 울컥울컥 솟는 눈물을 감당못해 차를 세워놓고 울기가 일쑤......결국은 시간에게 해결을 맡길 수밖에...
그 후로도 아버지는 3 년을 더 사셨지만 그 세월이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자식사랑에 끝이 없겠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큰 아들을 비명에 잃고 치매로 삶을 마감한 우리 엄마의 슬픈 마지막....하늘 나라에서 보고 싶던 아들 만나서 잘 지내시라고 기도를 드린다
" 엄마, 엄마가 낳고 길러 주신 우리 5 남매 ,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제 할일 잘 하면서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히 계세요. 뺑이랑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2014. 5. 8
산, 山, 산
윤 경 희
산은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주는 존재이다, 신이 선물한 자연으로서 사람들에게 수 없이 많은 혜택을 베풀고, 정서적으로도 얼마나 후덕한 위안을 주며 개개인들 마다, 산골짜기와 물줄기에 얽힌 사연과 인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첫 번째 산---고향의 산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네 살위의 언니와 같이 아버지 근무지에서 그리 멀지않은 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몸이 약한 어머니가 동생들을 키우시느라 힘이 들어서 시골의 할머니 집으로 와서 4 년 6 개월을 지내다가 4학년 2학기 때, 아버지께서 먼 곳으로 전근을 가시면서 다시 부모님께로 왔지만, 할머니 집에서 자란 4 년여의 시간은 내 평생의 정서적인 자양분이 되었고 아이들에게 자연을 얘기해 줄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
산등성이를 넘어 신작로길에 들어서면 어쩌다 지나가는 시골버스에 돌멩이가 툭툭 튀어도 10 리가 넘는 등,하굣길이 그렇게 즐거웠고 학교를 다녀와서는 책 보따리 집어 던지고 소를 몰고 뒷산으로 달려가서 소는 산에 풀어 놓고, 동네의 아재, 오빠벌의 친구들과 해가 저물도록 무덤앞에 세워진 석상을 중심으로 " 진다마" 라는 뛰어 다니는 놀이를 하고 여자 아이들과는 크기가 비슷한 자갈돌을 줏어와 "깔래(레 ?) " 라고 부르던 공기놀이를 하느라 해가 저무는 줄을 모르고 놀았다.
그러다 배 부르게 풀을 뜯어 먹은 산 만한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 밥 한 그릇 게눈 감추 듯 먹고는 초롱불 아래서 꾸벅꾸벅 졸면서 숙제를 게발새발 하고는 쓰러져서 꿀보다 더 달디단 잠을 잤다.
산과 들을 누비며 돌아다니고 가을에는 들판에 나가 메뚜기를 잡고 산골짜기 흐르는 물에서 가재를 잡던 그 화려한 시절의 고향의 산을 지금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랴.
두 번째 山,----백두산
10 년도 더 이전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을 갔다. 항일운동의 유적지인 동북삼성을 돌아 보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보러 갔는데 중국을 통해서 본 백두산은 가슴 아프게도 백두산이 아니라 장백산이었다. 백두산 산자락 아래에 세워진 큰 호텔앞에 세워진 커다란 돌에 한문자로 새겨 진 산의 이름은 분명히 "장백산" 이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허탈하던지???? 국력의 차이 때문에 수용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속이 상했다. 그런데 중국과 나는 무슨 악연인지? 갈 때마다 문제가 생긴다.
항주, 소주를 갔을 때는 담석증이 발발해 병원에 입원을 했고 이번에는 또 배탈이 나서 밤새도록 설사와 구토를 해서 나중에는 화장실 문턱을 넘을 힘도 없어 방안에서 화장실 안 바닥에다 구토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다니고 다른 동남아 국가도 여러 곳을 다녀도 아무 탈이 없었는데 중국만 가면 이런 일이 생기니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그래서 다른 일행은 산 아래서 장백폭포쪽으로 산행을 해서 올라갔지만 나는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지프차를 타고 북파쪽으로 올라가는 불상사가 생겼다 .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드디어 도착한 백두산 정상, 만세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감격을 표현하다가 ,같이 간 일행 중 한 사람이 태극기를 꺼내서 펼치고 사진을 찍으려 하니 중국 공안원이 다가와 금지를 하고 계속 사진을 찍겠다니 벌금을 물리고 태극기를 압수하려고 해 눈물을 흘리며 후퇴를 할 수밖에.... 三代를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지의 구름이 끼지 않은 밝은 모습을 무슨 복으로 우리는 살피고 감격의 포옹을 나눈 그 때가 이글을 쓰는 지금도 눈 앞에 삼삼하다.
하산하는 길에 본 '북경 올림픽 개최' 를 위해 백두산 산자락을 깎는 공사현장을 보며 가슴이 아팠던 기억은 아직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언제쯤이면 통일된 조국의 떳떳한 백두산으로 세세 만 년 닳지않는 애국가 속의 노랫말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올 날이 있을까?
세 번째 산----금강산
6 년전 쯤 , 학교의 준거집단인 " 우주정보" 소년단 아이들을 인솔해서 금강산을 갔다. 지금은 통행을 못하지만 그 때는 금강산 왕래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TV를 통해서만 보던 DMZ 를 통해 금강산을 우리가 직접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전 날 저녁에는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막상 비무장지대를 통과하고 북한의 경계초소에 이르니 휴대폰을 맡겨야 하고, 영어가 쓰인 옷들은 입고 갈 수가 없단다.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아이들을 인솔하여 금강산을 올라 가는데 얼마쯤 가다보니, 어떤 남자 아이가 북한군 병사에게 붙들려 울고 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가 보니 다행히 내가 인솔한 아이는 아니고, 서울 쪽에서 온 아동인데 점퍼를 입고 가다가 더워서 벗고 T 셔츠 차림이었는데 그 T셔츠에 영어 문자가 쓰여 있어 붙들린 것이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되고 인솔교사에게 연락도 취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고 물으니 " 자술서를 쓰고 벌금을 내야 한다" 는데 방법이 없어 도와주지를 못하고 올라가는 수 밖에..
금강산 골짜기를 따라 줄줄이 흘러 내리는 물줄기--연주담을 지나 드디어 도착한 금강산 , 멀리 신계사가 보이고 조선 산수화에 자주 등장하는 봉우리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아이들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고 노천 온천에 몸을 담고 어릴 때 배웠던 노래-----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 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와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이 노래를 부르니 저절로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내가 금강산에 와서 이렇게 온천욕을 하다니'--정말 감개가 무량했다.
지금은 금강산을 자유롭게 왕래를 못해서 너무 안타깝지만 정세의 변화에 따라 재개가 될 수도 있다고 하니 못 가본 사람들은 그 때를 기다려야 하겠지. 그런데 솔직히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통일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들을 보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많다
남한에 있는 큰 산들도 거진 다 가 봤는데 제주도의 한라산만은 아직 못 가봤다. 오름은 몇 군데 가 보고 성산 일출봉도 두-어번 갔는데, 한라산만 빠져서 금명간에 기회를 마련해서 등정을 해 봐야 하는 큰 숙제가 하나 남아있다
2014 ,5, 28
프로필: 초등교사 정년 퇴임
흥사단 통상단우
내가 걷는 길
윤 경 희
耳順을 맞이하고 정년퇴직을 하고, 이제 치열했던 삶의 현장에서 한 발을 물러나 삶을 관조하고 뒤를 돌아보는 시기가 왔다. 빼어난 능력을 갖추지는 못해도 언제나 최선을 다 하며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의 발자취를 돌아보니 늘 내가 마음에 담아 두었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자’ 라는 약속을 ‘어느 정도는 지켰다.’ 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교만일까?
오늘도 내가 참가하고 있는 단체로 요청이 온 인근 시에 있는 중학교에 “창의인성 동아리” 수업을 하러 왔다. 그런데, 교단의 풍경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메스컴을 통해서 일부 알고들 있겠지만 정말 심각하다.
교사에 대한 존경, 예우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가 없고 집중을 시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안된다. 학기 초--첫 수업 때 하도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라 수업참관을 한 담당교사에게 “내 수업 내용이 좋지 않았느냐? 애들 태도가 왜 이러냐?” 고 물었더니 “정규교과 시간에도 그러하니, 신경쓰지 마세요. 수업내용 좋았습니다“ 라는 대답 .
오늘 수업의 주제는 “진로와 선택” 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내가 서두에 늘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늘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 선생님은 인생에서 두 가지 선택을 아주 잘 했다 고 생각하는 데 첫째는 직업으로 교직을 선택한 것이고 두 번째는 흥사단 이라는 단체에 들어가 50여년 가까이 활동한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
교사로서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지녀야 할
사람의 향기를 전해주고 싶었고, 질곡의 근대사를 통해 나라 사랑과 국가관을 분명하게 심어주고 싶었었다.
사람의 꿈은 시기와 여건에 따라 자주 바뀌지만 나의 원래 꿈은 변호사 였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한다’ 는 명목하에 노력을 했지만 불행하게도 타고 난 성향이 문과 성향이라 문과 과목의 성적은 팽팽 날았으나 수학, 물리, 화학 과목의 성적이 너무 부진해, 고등학교 시절의 사회 선생님께 “ 풍요속의 빈곤” 이라는 어려운 경제용어로 표현된 성적평가를 받았었다. 담임 선생님도 이과계열의 부진한 성적 때문에 안타까워 하셨지만 타고 난 성향 때문에 결국은 궤도를 수정하여 교사의 길을 택했고 지금은 오히려 보람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1966년,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알게 된 흥사단에 들어 가 48년이라는 세월을, 시대상황에 따라 활동의 형태는 변했지만 평생의 업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음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시대의 선각자이셨고 교육자, 사상가, 실천하는 애국자이셨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전기를 통해 ‘건전한 인격’ 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남을 먼저 섬기는 서번트 정신을 본받으려고 애써 왔다.
흥사단은 1913 년 도산선생께서 미국의 센프란시스코에서 조선 8도의 대표들을 모아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세우신 독립애국 단체인데 벌써 101 주년이 되었고 대구 지역에서도 올 해로 50주년을 맞이하여 지금은 여러 가지 시민운동과 학생들을 키우는 아카데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직업으로 선택한 교사의 역할과 정신적인 지주가 된 흥사단 활동을 통하여 퇴직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업을 하러 나가서 얄팍한 지식과 이기심을 앞세우는 “知 ,德 ,體 ” 교육이 아니라 “德, 體, 知” 교육으로 먼저 사람 되기와 건강을 가르치시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힘을 기르라” 시며 마지막으로 지식을 전달하라는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하려 애써 왔다.
퇴직 이후에도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는 나의 봉사활동과 흥사단 생활을 부러워하는 옛 동료들과 후배 교사들을 생각하며, 준비해 간 자료와 영상매체를 통하여 수업을 진행했다. 작은 것이라도 전달하고 싶은 열정으로, “인생의 여정에서 선택의 길이 결국은 삶 자체를 좌우하는 큰 단초가 된다” 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를 하고 “선택에 따르는 책임의 중요성” 을 알려 주며 수업을 끝냈지만, 과연 얼마만한 성과를 거둘지는 영원한 숙제로 남는다.
아이들의 반응과 수업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찌 욕심대로 다 이룰 수가 있겠는가? 건강과 여건이 허락하는 날까지, 나는 “나의 길로 선택했던 교사와 흥사단 단우로서의 길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2014.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