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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서문학> 2015 작품상 –시
목화꽃 핀 구름밭을 지나며
김순자
목화밭으로 까닭 없이 몸던지는 빛은 눈 시리게 흰 목화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백만 송이의 이동하는 발자국소리 그것은 침묵의 아우성이었다 능청스럽게 눌러앉은 바람은 슬쩍 꼬리를 감춘다 어쩌다 실없는 바람은 바람 속에서 방금 떨어진 목화 꽃잎들의 지워진 흔적을 하늘에 후우 불어대곤 했다
머뭇거리는 길 한 모퉁이 솜으로 빚은 꽃들이 피고 있었다 조금씩 슬퍼하며 흘러가는 것들이 소리를 따라나선다 하늘 속 깊이 올라 뿌리내리고 향기를 철철 흘리며 단맛을 쏟고 있었다
허공 속으로 깊이 번지는 저 소리의 몸짓 구름 위에 걸린 저 환희를 낮달이 지나는 길에 어루만지고 나도 꽃잎에 갇혀버렸다
거듭 피어나는 꽃처럼 남겨두는 말도 없이 어둠에 눈 껌뻑이며 솜이불 속으로 포근하게 켜켜이 쌓이는 시간이 되었다
-2015년 봄호(13호) <한국동서문학> 2015 작품상-시조
화순 적벽
박현덕
봄이 가다말고 저만치 내리는 눈
이마엔 강물소리 얕은 잠에 묻힌 적벽
입덧에 덧난 꽃들이 샛바람에 주춤댄다
하늘이 훤히 뵈는 허름한 술집에서
하나 둘 눈발이나 헤고 있는 이 심사를
새순이 돋는 가지에 눈꽃으로 얹는다
-2015년 가을호(15호) <한국동서문학> 2015 작품상-아동문학(동시)
돌담
정재분
큰 돌만 있다고 예쁜 돌담이 되겠니
그렇다고 작은 돌만 있다고 튼튼한 돌담이 되겠니
큰 돌 작은 돌 손을 잡아 섞여야 바람도 들어오지 못하지
어쩌다 담쟁이 넝쿨이 안아주면 좋고 거기다 나팔꽃도 한 송이 피어 있으면 더 좋겠지
혼자서 혼자서는 안돼 함께 함께라야 힘이 되는 거지.
-2015 가을호(15호) <한국동서문학> 2015 작품상-수필
가혹한 겨울바다
박말애
올해는 1차의 앙장구 가격이 1kg당 6,100원으로 근년에 들어 높게 입찰을 보았다. 그러나 호사다마인지 기쁨도 잠시, 앙장구 수효가 최악의 수준이라 해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기장군 내에 속한 18개 어촌계에서 일어난 공통적인 사례였다. 30여 년 동안 앙장구를 수집하여 일본으로 수출해온 수집원도 전체적인 물량이 이토록 저조한 예는 처음이라고 토로했다. 모든 해산물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 근간 바닷속의 실태이지만 이처럼 감소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우리의 작업장인 대변 앞바다에는 이북 강안과 쌍둥이 바위 앞자리가 마찬가지로 된서리를 맞았다. 매년 그렇듯이 앙장구 채취가 시작되면 1년을 기다려온 바닷속에는 물속 양분인 미세한 물먼지와 잔모래 사이에서 술래잡기하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앙장구들을 만날 수 있다. 알차게 여물어가는 크고 작은 앙장구들이 짧고 예리한 가시들을 바삐 움직이며 바윗돌 위로 올라와 있는 모습은 예사로 보는 풍경이었다. 바위를 뒤덮은 초록색의 길고 가느다란 산자피 속에서 해녀를 유혹하며 생명력을 발산하던 앙장구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바위 밑에 숨어있는 앙장구는 대다수가 검은색의 물과 알이 가득 찬 범앙장구였다. 겉모습만으론 분간이 어려워 함께 채취해 오지만, 알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반으로 쪼개면 매번 실망을 안겨주기 일쑤였다. 약간 검은 색깔의 알을 다 버릴 수가 없어 섞어 담아가기도 하지만 막상 저울에 달기 위해 쇠로 만든 촘촘한 둥근 채 위에 부으면 수집원은 핀셋으로 일일이 검은 알을 골라내어 버린다. 상품 가치성에 따른 당연함이지만 한 눈금이라도 더 보태려고 애를 쓰는 해녀들과의 실랑이는 번번이 피할 수가 없다. 97년만에 몰아친 올겨울의 혹한의 여파는 해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연일 높은 파도를 눈앞에서 바라보며 해녀들은 전전긍긍,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곧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 1차의 비싼 가격이 종결되므로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바다로 뛰어 들었다. 억척스러운 해녀들이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는 것은 다반사이다. 이제껏 앙장구 숫자가 유난히 많았지만 알이 부실했던 이북초소 밑이나 수초가 적은 애지 강안 솔밭 밑의 장소마저 올해는 여의치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청돌 강안이나 불맷 강안으로 물질을 가야 했다. 이곳 역시 수초가 자라지 않는 무겁고 밋밋한 뺏돌만 있는 곳이어서 알이 많이 들지 않지만, 수효는 나은 편이었다. 대변 앞바다는 해안가와 맞닿아 있는 서암, 신암, 월전, 죽성 등 주변 마을에 비해 수심이 깊고 거센 바다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한파가 몰고 오는 파도는 예측을 불허한다.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인 만큼, 겨울 물질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추위와 파도 속에서의 물질은 평소와는 달리 체력 소모가 크다. 상군들을 따라 나도 며칠 동안 물질을 감행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에는 몸살 기운이 역력했지만, 입찰가가 마지막인 날을 놓칠 수가 없어 테왁과 준비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파래장으로 향했다. 바쁜 걸음으로 도착하였지만, 어느새 몇몇 해녀들이 소르방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고무 옷을 입었지만 마뜩하지 않아 가까운 불맷 강안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하면서 오리발과 수경 등 준비물을 빠짐없이 챙겨 들었다. 물가에 다다르자 서두른 마음을 혼자 진정시키며 소슷돌 강안을 사이에 두고 있는 크고 넓은 바위 위에 서서 펼쳐진 바다를 잠깐 바라보았다. 겨울 바다는 매서운 추위에 대항하듯 입을 악문 채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저만치 머뭇거리는 물살마저 끌어당겨 와 더 큰 무리를 짓기 위해 용쓰는 바다의 입가에는 쿠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흰 포말이 뒤엉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 치의 타협마저 용납하지 않으려는 거센 바다가 오늘 따라 나를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아니 어찌면 내 마음이 바다를 밀쳐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질을 하기 위해 꼭 먹어야 하는 ‘뇌선’을 먹고 나섰지만, 몸안에는 찬바람이 돌면서 한기가 느껴졌고 벌써 손발이 시려왔다. 그 속내를 알지 못하고 몸을 휘도는 날 선 바람은 ‘철썩, 처얼썩’ 매몰차게 파도를 일으키며 ‘빨리, 더 빨리’를 재촉했다. 물가에 서 있는 내 발 앞까지 쏴아 하고 밀려온 물살은 흩어진 물자락을 움켜잡고는 다시 길게 늘어져 갔다. 그때의 물살의 위력은 그 무엇으로도 당해낼 수가 없다. 사정없이 쓸려가는 긴 허리의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호미를 바위에 걸어 버둥거려 보아도 어림없었다. 뒤에서 끌어당기듯 막무가내로 휩쓸려가는 강한 위력 앞에서 가끔은 아찔한 순간을 맞기도 한다. 일전에도 바위를 뒤집으려고 물속에서 씨름하던 찰나에 밀어닥치는 물살에 떠밀려 순식간에 수경이 바위에 부딪혔다. 만약 정면으로 부딪쳤다면 유리알이 깨져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움츠러드는 마음을 다잡고 가까스로 뜯어온 마른 쑥을 문질러 수경 안에 침을 뱉어 닦은 후에 귀 안에 밀을 넣고 모자를 썼다. 이렇게 고무 모자와 수경을 쓰고 나면 내 나름의 완성도가 느껴지고 자신감이 붙는다. 파도가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타 나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냉기로 가득 찬 유리알처럼 맑은 물속에는 벌거숭이 바위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며 모여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들추어냈지만 바위 틈새에서 두세 마리의 앙장구들이 살금살금 문밖을 엿보듯 나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나는 오늘 작업의 수확을 가늠하였다. 파도가 높은 굿은 날씨에는 의외로 변수가 생기면서 산돌 밑에서 앙장구들이 밖으로 나온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는 무궁무진한 생명이 살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대자연의 위대한 섭리가 피부에 와 닿았다. 영하의 바깥 날씨와는 달리 물속은 한결 따뜻하다. 곧 음력설을 전후로 물은 더욱 차가워지고 그때부터 앙장구는 알이 부풀면서 산란기에 접어드는 시기가 된다. 나는 여기저기 바삐 자맥질하며 숨 가쁜 호흡을 내뱉기를 반복했다. 금방 체온이 떨어지고 신경과 폐활량이 응축되어가면서 내 뿜는 훗개는 다급해 지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추위 속에서 자맥질로 몸놀림이 빨라지는 겨울철에는 훗개는 짧고 가빠지기 마련이다. 온몸이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창되어 가면서 가쁜 호흡은 가슴 속 깊이까지 채 다다르지 못하고 연거푸 입 밖으로 내뿜어진다.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여 자맥질이 수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시린 바람세勢는 한낮이 되어도 계속되어 갈매기마저 날지 않는 겨울 바다에의 물속에서 내 몸은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전신이 움츠러들면서 아파오고 정신마저 흐릿해왔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물 밖으로 나오고 싶었지만, 이왕 들어온 이상 조금이라도 더 망사리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장소를 옮겨가며 자맥질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사이에 언제부턴가 물살의 흔들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야 주위를 둘러본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돌풍을 앞세운 바다는 천정부지로 날뛰었고,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서둘러 파도가 낮은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어느새 들물이 시작되어 밀려오는 물무리를 업은 파도는 내 몸을 이리저리 끌고 가려고 했다.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있는 힘을 다해 테왁을 밀며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헤엄을 쳐 오는 순간에 언덕 너머 청돌 강안쪽으로 물질을 간 동료 해녀들의 동향이 궁금해졌다. 그쪽은 난 바다여서 파도가 더 심할 것이다. 고개 들어 먼바다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저 멀리 소르방 고개를 헤엄쳐 넘어오는 해녀 한 사람이 언뜻 눈에 띄었다. 거대한 산을 이룬 높은 파도 속에서 그녀는 동그란 한 점이 되어 오르락내리락하며 아슬아슬하게 헤엄쳐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내 가슴속에서 울컥하며 뜨거운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바다는 굶주린 짐승처럼 그 무엇도 집어삼킬 듯이 굵은 목울음을 토해내며 솟구치고 도 솟구쳤다. 그 물 갈피 속에서 저만치 또 한 명의 해녀가 이쪽을 향해 헤엄쳐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일 듯 말 듯 오르내리는 해녀의 모습이 생과 사를 넘나들 듯했다. 그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가뿐히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안전을 교감으로 나누며 늘 그래 왔듯이 파도를 타고 파도 속을 헤쳐 나올 것이다. 오늘따라 너무도 가혹한 겨울 바다를 가까스로 빠져나오면서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힘겹게 뭍으로 오르는 순간, 칼바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나를 휘감아 버렸다.
-2015년 겨울호(제16호)
<심사평>
한국동서문학은 우수 문학지로서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규모의 작품상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한국동서문학지에 좋은 작품을 게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며. 또 하나는 작품상을 통하여 문인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운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올해도 예년과 같이 한국동서문학에 1년동안 게재한 작품을 대상으로 작품상을 선정한다. 심사과정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을 읽고 무기명 1차 투표를 실시하고 타 장르 함께 2차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시 <목화꽃 핀 구름밭을 지나며>는 목화밭을 지나며 그 목화밭과 관련된 기억을 형상화한 시적상상력이 돋보였다. 목화꽃이 피고 지는 선명한 이미지를 삶의 모습에 잘 녹여낸 작품이다. 그리고 동시<돌담>은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돌 하나하나가 모여 돌담이 되듯 큰 힘이 되는 모습과 사물의 고향인 동심이 바탕에 깔려 있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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