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과 검정고무신]
기적소리가 호젓한 마을 앞을 종종 가로질렀다 신작로 넘어로 철길이 있고
그 너머로 들판을 지나 내(川)가 흐르는 그림같은 마을 경북상주 내가 자란 곳이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이었다.어머니와 함께 선산 외갓댁을 가기위해 이른 아침 일찍 서둘러 상주역으로 나갔다.
사람들 틈에끼어 기차표를 사들고 멀리 바라만 보던 꿈같은 기차에 드디어 몸을 실었다
큰 집채만한 기차안에는 여기 저기 가족끼리 혹은 한명씩 쪼그리고 앉은 모습으로 보아 분명 여객실이 아닌 화물칸 이었다. 바닥은 나무판자로 석탄을 옮겨나른 흔적이 있었고 군데 군데 지저분한곳을 피하여 사람들이 웅크리고 앉아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또 어렴풋이 기억나는 기차 여행이 있었다.중학교때 여름 방학 무렵으로 객차안에는 콩나물 시루처럼 많은 사람들로 시골의 장날이 아니였는가 하는 생각이든다 짐보따리와 가방을 둘러멘
시골사람들의 시끌벅적한 기차안에는 사람만큼이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도 많았다
어떤 시골 할머니는 화장실을 가기위해서 옆자리의 일행에게 자리와 보따리를 신신당부하고는 객차와 객차가 연결되는 끝부분에 있는 화장실로 가고. 장사꾼과 더불어 가족끼리 친지를 찾는 그런 여행을 하는 풍경속에 모양으로 보아서는 농사꾼임이 분명한 그들은 재수(運) 좋게도 마주보는 의자(bench)에 네식구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여섯살 정도와 열살 정도로 보아서 그 애비와 애미는 대략 서른살의 전후로 보아진다.내가 화물객차를 타고 외가댁에 갈때처럼 그 아이도 세상부러운 것이 없을 정도로 신나고 즐거웠을 것이다. 어린 동생은 사내아이고 그 위는 여자아이 였는데. 동생과 달리 누나는 제법 어른스러울 정도로 아이답지 않았다. 어린 사내 아이는 첨 타보는 기차여행에 어쩔줄을 모르고 앉았다 일어섰다. 절로 신바람이 나는지 깡충 깡충 뛰면서 어찌할줄을 모르고 있는데...
누나가 나서서 "야" 그만뛰어 "신발 다 닳잖아" 그 애는 연거퍼 두번이나 말하는데 그 애비와 아낙은 어쩔줄 몰라하며 얼굴이 붉혀진다.
지금은 모든 공산품이 풍부하여 믿기지 안는 사실일지 몰라도 그 당시는 어느집이나 검정고무신이 제일이였다 오십년의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시골장터에 고무신은 살수 있지만 신고 다니기에는 불편하여 옛추억으로만 보여진다고무신이 닳아서 마음놓고 뛰어다니기도 부담스러웠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하다.
그런 추억이 있기에 지금 내가 힘들고 고통스럽다해도 그때에 비하면 풍족한 생활이 아닌가. 그토록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도 지나고 나면 가슴저리도록 그리움으로만 남는 추억이 되듯이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인가 보다.
첫댓글 생각 해 보니 기차를 탄 기억이 꽤 오래전의 일이네요.
기차안의 풍경이 흑백사진을 보는 것 처럼 아련하게 느껴지면서도 훈훈합니다.
덕분에 옛추억도 그려지고 ~~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문우님중에 서미숙이사님도 사투리가 매력있는 고향이 상주랍니다.
타향에서 고향분을 만난다는것은 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는것과 같습니다,
모임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추석 날 아침 새바지 입고 호주머니 쓱쓱 올리며 친구 집에 가서 부르던 날도 있었는데~~
새 고무신만 신어도 어깨가 으쓱했던 지난 시절이 그립습니다.
우리 오빠는 새 고무신이 신고싶어서 냇가 평평한 돌에 열심히 문지르던데...ㅎㅎ
흙길을 걸을 땐 고무신만한 것이 없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