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MDcs/2060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10장: 유효한 부르심]
새삶 (2012.07.07. 08:27)
1항: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그 모든 사람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력 있게 부르시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해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돌같이 굳은 그들 마음을 제하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그리고 효력 있게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이끄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이 나오게 돼 있으므로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오는 것이다.
2항: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고 특별한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보시고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인간은 완전히 수동이다. 성령으로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된다. 또한 이 부르심 가운데서 제공되며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MDcs/2061
홀리조이 님, 니고데모의 ‘하나님 공경’도 ‘유효한 부르심’ 에 해당됩니까?
새삶 (2012.07.07.09:04)
홀리조이 님, 홀리조이 님은 다음과 같은 댓글을 쓰셨습니다.
holyjoy 2012.07.07.07:25
그리고, 루디아의 하나님 공경을 제가 중생으로 본다는 식 주장도 오해입니다. 왜 그렇게 오해하십니까? 연속적 중생론에서는 ‘중생’ 개념이 이중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한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웨신} [제10장 효과적인 부르심]을 고려한다면, 그 뒤 {웨신} [제11장 칭의]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웨신} [제14장]과 [제15장]에서 믿음과 회개를 설명하는 {웨신}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구조를 고려한다면, 루디아의 “하나님 공경”은 ‘효과적인 부르심’에 해당됩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이 있고 난 뒤에 “마음을 여시는 일”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웨신}의 구조입니다.
라마드 님은 지금 {웨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보마이’라는 단어를 저렇게 연구해 놓고도 그것을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오히려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자료로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
{웨신}은 ‘유효한(효력 있는) 부르심’을 서술할 때 “돌같이 굳은 그들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서술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된다.”고 서술합니다. 홀리조이 님, 그러면 ‘성령으로 소생하고 새롭게 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루디아의 하나님 공경’이 홀리조이 님 주장대로 이런 ‘유효한 (효력 있는) 부르심’에 해당되면, ‘니고데모의 하나님 공경’, 빌립 집사에게 복음 전도를 받기 전 ‘에티오피아 내시의 하나님 공경’, 주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하나님 공경’도 ‘유효한 부르심’에 해당됩니까?
아니면, 그들 ‘하나님 공경’을 택함을 받은 자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에게도 복음을 접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일반) 부르심’ 과정으로 생각해야만 합니까?
바꿔 말하면, 니고데모가 주님께 ‘위로부터 탄생이라는 도리’를 들은 사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현장에서 바울이 ‘스데반 집사가 전하는 복음’을 들은 사건,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 복음’을 읽고 있었던 사건, 이런 사건들을 ‘유효한(효력 있는) 부르심’에 해당하는 사건들로 볼 수 있습니까?
댓글 65
holyjoy 12.07.07. 11:32
부르심에는 두 가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일반적(보편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부르심, 이 둘입니다. 그럴 때, 이 부르심을 효과적인 것이냐 아니면 일반적인 것이냐를 구분 짓는 것은, 그 부르심에 대해서 회심을 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느냐 아니냐에 달렸습니다.
위의 예에서 바울의 경우에는 다메섹도상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섬김을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부르심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심에 찔림을 받아서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것 같은 양심의 괴로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holyjoy 12.07.07. 11:36
이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은, 다메섹도상이었기 때문에 저는 다메섹도상 때부터 효과적인 부르심이 시작되었고 며칠 뒤에 회심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의 경우에는 아직 회심했는지 아닌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내시의 경우는 일반적인 부르심 가운데 있다가, 빌립의 복음 전도를 들으면서 효과적인 부르심이 시작되었고, 그 복음 전도의 시간(복음에 대한 설명 시간)이 얼마인지 분명치가 않지만, 효과적인 부르심과 회심이 상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부르심이 효과적인 부르심이 어떻게 바꿔지는가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holyjoy 12.07.07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반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부르심을 구분하는 것은, 회심에 이르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둔다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holyjoy 12.07.07. 11:41
니고데모가 회심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어디에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회심하였을 것이라는 개연성은 아주 큽니다. 요 19:38-42을 보면 예수님의 시체를 매장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을 보아서 말입니다.
holyjoy 12.07.07. 11:49
정리를 하자면, ‘유효한 부르심’이 시작하자마자 ‘회심’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이 연속적 중생론입니다. 유효한 부르심이 시작하자마자 회심에 이르게 되는 것을 ‘순간적 회심’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순간적 회심까지 포함하면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을 고려해서 주장하는 것이 ‘연속적 중생론’입니다.
holyjoy 12.07.07. 12:03
혹시 {웨신}과 비교하시면서 혼동하시면 안 되는 점은, ‘유효한 부르심’을 설명하는 부분에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성령의 역사하심 자체를 말하는 것이 유효한 부르심이고, 그 부르심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예를 들자면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진다든지 하는 것 등은 그 부르심의 결과입니다. 부르심 자체와 그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혼동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유효한 부르심’이 있자마자 ‘회심’이 뒤따른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lamad 12.07.07. 18:33
{웨스민스터신앙고백}서는 일반적으로 ‘중생’이란 용어를 사용치 않는 대신 ‘유효적 부르심’이란 문구를 사용한다. → 후크마
┗ lamad 12.07.07. 18:35
지금은 바쁘기에 한가한 때 답변하겠습니다.
┗ holyjoy 12.07.08. 06:37
‘중생’이란 용어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면…?
새삶 12.07.08. 00:27
피터 마스터스는 {영혼의 의사}에서 ‘유효한 부르심’을 ‘중생’으로 서술합니다. 그런데 홀리조이 님 답글을 읽고 보니, ‘유효한 부르심이 중생은 아니다.’로 이해됩니다.
┗ 새삶 12.07.08. 00:35
“믿음이 중생에 선행한다.”는 주장은 알미니안 주장이 아닙니까? 그런데 홀리조이 님은 “믿음이 중생에 선행한다고 주장하는 개혁신학자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신학자들 이름을 적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holyjoy 12.07.08. 06:39
‘중생’이란 단어가 이중 의미를 담고 있다면, 전혀 모순이 아닐 것입니다. 피터 마스터스는 “초기중생”이란 말과 “새출생”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새출생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생이고, 유효적 부르심 때에도 ‘중생’이라고 하는데, 유효적 부르심 때의 중생을 “초기중생”이라고 해서,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중으로 사용합니다.
┗ holyjoy 12.07.08. 06:42
더 생산적인 연구를 위해서, 제가 예를 든 성경구절들(요 3:16)을 개혁신학자들이 주석 혹은 해석하고 있는 것을 참고해 보시면 어떨까요? 아마도 광맥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
새삶 12.07.08. 18:58
새출생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생이면,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중생이 새출생입니까?
중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성령의 내주’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내주는 초기 중생 시에 있습니까, 새 출생 시에 있습니까?
┗ 로빈슨 크로소 12.07.08. 19:38
새출생 시지요. 초기중생은 중생의 시작이니까요.
┗ holyjoy 12.07.08. 19:59
로빈슨 크로소 님의 말씀에 엄지손가락을 올립니다^^
새출생 시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나 5장 24절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이 구절들이 이뤄지기 위해서 설교자들이나 전도자들, 혹은 상담자들이 설득하고 권면해서 회심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초기중생을 시작하셨고, 또한 그 초기중생의 열매를 회심으로 맺게 되어지는 것이지요.
열매라고 하면 헷갈립니까? 초기중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생명이 이 새출생에서 처음으로 발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열매가 없으면 회심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지요. 아직은….
┗ 새삶 12.07.08. 20:11
초기 중생은 했는데 새 출생을 못하고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지옥에 가게 됩니까?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0:51
초기중생을 했다면!!!, 새출생하기 전에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구원하시기까지 우리를 보호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을 생각하시면 그 문제는 금방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초기중생을 한 것은 사람이 모릅니다. 이는 성령의 신비하고 비밀스런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새출생을 해야지만 그제서야 ‘아! 내가 초기중생을 했었구나! 그래서 회개와 믿음을 통해 이렇게 새출생을 했구나!’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0:57
중생의 전 과정은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일로서 중생하는 중간에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지 못하다는 소리 밖에 안 된답니다.
또한 중간에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못하신다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께서 사람이 중생하는 중간에 그를 죽이시는 말도 안되는 경우가 일을 과연 하실까요?
하나님의 예정, 구원의 약속을 스스로 깨트리시면서 사람을 구원하시다 말고 죽이실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속성과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지요.
┗ 새삶 12.07.08. 20:57
초기 중생 이후에, 또는 ‘초기 중생과 함께 성도의 견인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나 이 성도의 견인은 성령의 내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군요.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1:01
{웨민신조} ‘견인’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도들의 이러한 견인은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값없이 주시고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택 작정의 불변성에 의한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기도의 효력, 그들 안에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거하심, 은혜 언약의 본질에 의한 것이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실성과 무오성은 또한 이 모든 것에서 기인된다.》
┗ 새삶 12.07.08. 21:14
1) 성령의 내주는 새 출생 시에 있다.
2) 그러므로 새 출생 이후 성도의 견인은 성령의 내주에 의한 견인이다.
3) 그러나 초기 출생과 새 출생 사이에 있는 성도의 견인은 이와는 다른 양상의 견인이다.
4) 즉, 초기 출생 이후 성도의 견인은 성령의 외주에 의한 견인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네요.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1:15
?????
┗ 새삶 12.07.08. 21:17
“?????”라고 적으신 까닭이 이해 안 됩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1:26
다시 설명하자면, 예정하시고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드심 이 견인이라고 합니다.
┗ 새삶 12.07.08. 21:22
저는 “그러면 성령의 내주는 초기 중생 시에 있습니까, 새 출생 시에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로빈슨 크로소 님은 “새출생 시지요. 초기중생은 중생의 시작이니까요.”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 답변은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다는 뜻입니까?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1:38
답변 맞습니다.
그런데 중생의 시작이라는 중생이 따로 있고, 새출생이라는 중생이 따로 있어 중생이 2 개가 아닌 이상 그렇게 이해가 될 수 없을 텐데요.
즉 초기중생이란 중생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고 새출생은 중생된 것이 나타난 상태를 말합니다.
만약 견인이 실제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때를 말한다면 새출생 시부터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이것이 원하시는 답변이셨군요.
그런데 중생은 초기중생과 새출생 둘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초기중생은 중생의 시작이고 새출생은 그 시작된 중생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중생되는 중에 죽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1:33
하나님께서는 택자를 구원하시고자 하실 때에 중생을 시키시고 성화를 시키시려 하시는데, 중생이 시작되었다면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중생을 시작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웨민신조}에서는 효과적인 부르심부터 언급합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1:37
{웨신}[제17장 성도의 견인(堅忍)]<제1항>
1.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초기중생)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꾸준히 인내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빌1:6; 벧후1:10; 요10:28,29; 요일3:9; 벧전1:5,9).
새삶 12.07.08. 21:50
중생은 초기 중생과 새 출생 둘로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내주는 새 출생 시에 이루어지고, 초기 중생 시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 로빈슨 크로소 12.07.08. 22:07
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성령의 내주는 새출생(회심)시에 성령세례를 통해 내주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 새삶 12.07.08. 23:17
‘모태신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 출생은 모태에서 이뤄질 수 없습니까?
┗ 새삶 12.07.08. 23:39
성령세례를 통해 내주하시면, 오순절 사도 베드로 설교 뒤 회개한 약 삼천 명은 오순절 이전에 이미 초기 중생이 있는 상태였습니까?
아니면, 사도행전 2장 38절 말씀,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했다.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는 말씀에 비춰, 회개의 순간을 초기 중생으로 보고, 회개 뒤 (시간의 간격이 있을) 세례 받는 순간을 성령세례를 받는 새 출생, 성령을 선물로 받는 새 출생으로 보면 되겠습니까?
┗ 새삶 12.07.08. 23:41
아니면, 사도행전 2장 37절 말씀,《그들이 듣고 마음에 찔려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라는 부분을 초기 중생으로 보면 됩니까?
┗ 로빈슨 크로소 12.07.09. 00:46
유아나 태아의 구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이미 검색을 하시면 다 전에 올라온 글들이 있습니다.
로빈슨 크로소 12.07.09. 00:50
새삶 님, 혹시 본 게시판 중에 {영혼의 의사} 게시판이나 {연속적 중생관이냐, 순간적 중생관이냐} 게시판의 글들을 읽으실 수 있으신가요? 먼저 그 글을 읽는 것들이 좋을 듯합니다. 이미 예전에 다 길게 설명들이 오고 갔던 내용들이라서.
간단하게 답변하자면,
중생은 성령의 사역인데, 구원하기로 택한 자가 유아나 태아로 죽을 경우 유아나 태아 때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근거로 하여 성령께서 아기들을 중생케(중생 전체를 말함) 합니다. 이 태아의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새삶 12.07.09. 00:51
유아는 아니고, ‘태아 때 새 출생은 이루어질 수 없냐?’는 질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태아 때 성령의 내주는 이뤄질 수 없냐?’는 질문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00:55
태아 때에 성령의 내주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 가능성이 세례요한의 경우 어머니 뱃속에서 배속의 예수님을 만나자 태안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뛰어 놀았다고 하는 것을 근거로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개인적인 추측이고요, 참고만 하세요. 그럴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로빈슨 크로소 12.07.09. 00:53
오순절 때에 내린 성령세례는 개인적인 성령세례라기보다는 교회의 탄생과 합쳐진 성령세례로 구속사적인 해석으로 이해를 대부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 회심하여 중생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는 아직 내리지 않고 있다가 오순절 때에 한꺼번에 단체로 성령세례가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 자리에서 회심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은 사람들도 있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이미 주님께서는 그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가 이미 깨끗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중생됐음’을 말합니다.
로빈슨 크로소 12.07.09. 00:59
그리고 오순절 때 베드로의 설교로 사람들이 마음에 찔렸는데, 그것을 ‘초기 중생의 결과인 죄의 각성이나 회개의 상태’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초기 중생은 비밀스럽게 사람이 언제 초기 중생했는지 모릅니다. 단지 초기 중생한 것을 아는 것은 새출생을 했을 때에만 ‘과거에 자신이 마음에 찔린 것이 초기 중생한 결과로 죄 각성으로 인해 마음이 찔렸었구나.’라고 꺼꾸로 역추적하여 해석하는 것입니다.
┗ 새삶 12.07.09. 01:25
초기 중생은 성령의 내주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중생’,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상태가 아니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의를 얻지 못한 상태’, ‘아직 진노(마귀)의 자식으로 남아 있는 단계’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그리고 새 출생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성령의 내주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중생’으로 이해하면 되겠구요.
아니면, 초기 중생을 ‘중간 단계’,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는 ‘단계’, 또는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져 가고 있는 이른바 “연속적인” 단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 로빈슨 크로소 12.07.09. 01:36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고요. 성령의 내주인 성령세례는 성자의 사역입니다.
성령의 내주 없이도 성령으로 인해 중생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바로 성령의 내주 없이 중생한 경우들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완성되어야지만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주인의 구속사역 이후 새출생할 때에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01:43
중생의 시작과 완성인 새출생은 성령의 내주와 상관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중생을 완성시키는 새출생 때에 성자께서 성도에게 약속한 성령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생시키는 사역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고, 중생된 자 즉 새출생한 자에게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자가 하시는 일입니다.
새삶 12.07.09. 07:22
“성령의 내주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완성돼야만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어서 “구약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내주가 없었다.”고 한다면, 다음 구절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다음 구절들은 제가 ‘구약 성도에게도 성령의 내주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구절들, ‘오순절 이전 성도에게도 성령의 내주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구절들입니다.
┗ 새삶 12.07.09. 07:24
1) 베드로전서 1장 10절~11절: 이 구원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연구했다. 그들은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과 이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 그 영이 무엇을 가리키며 어느 때를 가리키고 있는지 살펴봤다.
2) 누가복음 1장 15절: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켤코 마시지 않을 것이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다.
3) 야고보서 4장 5절: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시기할 정도로 사모한다.”고 하신 성경 말씀을 헛된 것으로 생각하느냐?
┗ 새삶 12.07.09. 07:35
야고보서 4장 5절에 적힌 “성경 말씀”은 ‘구약성경을 뜻하지 않고 신약성경을 뜻한다.’면, 이 구절은 제외합니다.
“구약 성도들은 오실 구주를 바라봤다.”는 말은 “신약 성도들은 오신 구주를 바라본다.”는 말과 이어지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저는 ‘구약 성도들은 오실 구주의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 로빈슨 크로소 12.07.09. 08:27
그 부분은 전에 오고갔던 덧글로 답하겠습니다.
…(인용 시작)….
holyjoy 06.12.02. 07:22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성령님이 임하시기는 했었어도 성도 안에 내주하시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다윗의 시편 51편에 보면, 자기에게 주의 영이 떠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임하였다가 떠나시곤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성도 안에서 영원히 내주하시게 되는 것이 신구약간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 성령이 성도에게 임하였다가 떠난다고 해서, 구원받은이가 구원받지 않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똑같은 구원이며 중생이고 회심이어도, 그 구속의 경영역사에 신고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보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
윤영상
오순절 이전 제자들이 거듭났다는 것을 거부한다면 오순절의 성령의 내주는 ‘거듭남’을 위한 내주로만 생각할 수 있겠군요. 아마 옛날에 조용기 목사가 주장했던 내용으로 일부 기억납니다.
전에 어떤 분이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이 ‘거듭남’을 위함이라고 주장했었는데, 그렇다면 오순절 이전의 모든 역사 속에 살았던 인물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문제가 되었지요. 즉 오순절의 성령의 내주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하는 그 개념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물론 오순절 당시 거듭났던 사람들도 간혹 있었겠지요? 거듭나는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으니
제 기억으로는 ‘옛날 총신의 어느 교수가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왔다 갔다 했고, 오순절 이후에는 한번 오시면 절대 떠나시지 않는다.’고 그것이 다른 점이라고 했습니다. 이 성령의 오심이 왜 오심인가??? 이것을 한 번 알아보심이????
1) 복합적인가?(구원과 동시에 성령의 능력)
2) 더 강하게 오시는 것인가?(구약: 거듭남과 성령의 능력 중 성령의 능력만 떠남. 신약: 성령의 능력이 교회를 위해 더 강하게 오심.. 그리고 그 능력이 떠나지 않음)
3) 새로운 목적?으로 성령이 오시는가?(주님의 성령세례인가???)
4) 기타 등등.
음, 말이 이상하네. 저는 ‘오순절의 성령의 내주가 주님의 성령세례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는 때를 성경이 주장하고 있기에 구약에는 주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의 세례는 없지요?
열매 06.12.02. 23:34
총신의 어느 교수가 그런 말을 했었군요.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왔다갔다.”, “오순절 이후에는 한번 오시면 절대 떠나시지 않는 것이 다른 점이다.”
좋은 정보네요. 글구, “성령의 오심의 목적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 새겨 놓겠습니다. (저두 윤 목사님의 마지막 하신 말씀, 오순절의 성령의 내주가 주님의 성령으로의 세례와 관련이 있다고 하신 말씀에 동의합니다.)
열매 2006.12.02. 08:45
http://cafe.daum.net/yangmoorivillage/4RLk/161?
《신약시대에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파악하고 그것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구약시대에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역사하신 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구약에서 개개 신자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분명한 구절들이 아주 적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 시대에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고, 신약 시대에는 개개 신자 속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식으로 신구약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릇된 이론이다,
가령 다윗의 기도를 보면 두 요소가 다 겹쳐 있으나 개인적인 내주 측면이 더 강조되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시편 51편의 문맥은 죄와 회개와 사죄와 구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서려 있는 문맥이고, 이런 관심은 분명히 다윗의 심층심부에서 우러나온 관심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의 기도는 신정국가의 특권과 세력을 상실해서 나온 기도라기보다 그 이상의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나온 기도인 것이 분명하다.
“구약 신자인 다윗은 그렇게 기도했지만 성령선물을 받은 신약 신자들은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반응은 히브리서 저자의 경고와 권면의 어조를 깨닫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급하고도 불길하리만큼 심각한 어조로 교회에 경고하고 권면하기를 “타락하지 말라.”고 했다(3:12~13; 4:1). 또한 이상과 같은 반응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공통요소로서 신구약 신자들의 경험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지 못한데서 나오는 것이다(엡 4:30; 사63:10).
더 나아가서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온갖 경험들, 가령 아브라함의 대표적인 신앙이나 시편의 경건과 기도 등은 신약성경이 분명히 교훈하는 대로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사 마음속을 새롭게 하시고 인격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의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당시의 표본이었고, 지금 신약시대에도 역시 표본인 것이다.》
1) 구약시대에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개개 신자 속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식으로 신구약의 차이점을 말하는 견해는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왜 그렇게 보는가? 만일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면, 신구약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 윗 글에서 개인적인 내주 측면이 더 강조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가지 질문을 덧붙인다면, 윗 글에서 “그 당시의 표본이었고 지금 신약에도 역시 표본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holyjoy 06.12.02. 19:34
1) “구약에서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개개신자 속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윗분이 지적한 것처럼, 잘못된 견해입니다. 잘못은 잘 지적하신 것 같은데, 해법 제시는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신구약의 차이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도 구약은 외적인 임재나 임시적인 임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내적인 임재나 지속적인 임재가 병합된 것이다.’고 볼 수 있고, 윤 목사님의 지적처럼, ‘구약성경에는 없었던 성령세례가 신약성경에서 등장한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다고 한다면, 신약에서는 메시야왕국에 성령을 주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신정국가의 운영은 외적이고 임시적이고, 메시야왕국의 운영은 내적이고 지속적이라고 한다.’면, 제 앞 설명이 이해되실 줄로 생각합니다.
2) 다윗의 기도는 ‘성신이 떠날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 나온 기도입니다. 윗글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라도 다윗과 같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께서 신약성도 안에서 내주하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할 때에는 성령께서 떠나셨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내주 측면이 더 강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다윗이 자신의 내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느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의 내적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내주 측면이 강조되었던 것보다도 비록 내적인 역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내적인 역사는, 성령의 강권적인 외적 역사가 내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과의 관계는, 환경과 의식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그렇게 어렵지가 않을 것입니다. 사단이 신약성도에게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성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구약의 성령께서 외적으로 역사하신다고 하더라도 구약성도의 내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한 성령의 외적 역사에 의한 내적 영향을 입는 것을, 신약성도가 성령의 지속적인 내주를 통해서 성령의 영향 속에 있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때가 되매” 이루신 구속사역과 성령의 오심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열매 06.12.02. 23:14
그렇군요. 다윗의 경우는 성령의 외적 역사에 의한 내적 영향을 입은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구약의 차이는 구약은 성령의 임재가 있어도 외적인 임재나 임시적인 임재였을 뿐이지만, 신약에선 내적인 임재나 지속적인 임재라는 것. 그리고 윤 목사님 지적하신 때가 차매 구약성경에는 없었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오순절 성령으로의 세례. 이제야 조금 의문이 풀린 느낌입니다. 그리고 손 목사님 마지막 지적하신 부분, 성령의 외적 역사에 의한 내적 영향을 입는 것을 신약성도가 성령의 지속적인 내주를 통해서 성령의 영향 속에 있는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은 구속역사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은 아주 좋은 지적인 듯 보입니다.
…(인용 끝)…
새삶 12.07.09. 08:43
제가 제시한 구절들은 모두 임시적인 임재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 로빈슨 크로소 12.07.09. 09:11
저는 여기까지만 답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카페 검색 창도 활용해 주세요~!
새삶 12.07.09. 09:07
이사야 63장 10절: 그들이 반역해 그분의 성령을 근심케 했으므로, 그분께서 돌이켜 그들의 원수가 되시고 친히 그들과 싸우셨으므로
11절: 그가 오랜 옛적 모세와 그 백성의 때를 기억해 자기 양 떼의 목자들과 함께 그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분이 어디 계시냐? 자기 성령을 그들 가운데 두신 분이 어디 계시냐?
┗ 새삶 12.07.09. 09:08
12절: 자기의 영광스런 팔로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자신의 영원한 이름을 위해 그들 앞에서 물을 가르시고,
13절: 그들을 깊은 물 가운데로 인도하시면서 광야의 말처럼 넘어지지 않게 하신 분이 누구시냐?
14절: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쉬게 하시니, 이와 같이 주께서 주님의 백성을 인도하셔서 주님의 이름을 스스로 영화롭게 하셨다.
============
로빈슨 크로소(윤영상 목사) 님이 과거 토론을 인용한 글에서 열매 님이 링크한 글, 링크해 인용한 글은 리차드 개핀 목사님 글이다. 즉,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권성수 역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3)’ 42쪽에서 옮긴 글이다. ‘리처드 개핀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김김귀탁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으로는 55쪽~56쪽이다.
또한 “옛날 총신의 어느 교수”는 총신신대원에서 “구약 시대에는 성부에 의한 중생, 주님 공생애 시대에는 성자에 의한 중생, 오순절 성령 강림 뒤 성령(신약) 시대에는 성령에 의한 중생”이라는 세대주의적 중생론을 가르치신 서철원 목사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