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돌봄이 아름답습니다
ㅡ김혜숙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2023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내 마음을 곧추세우고 나와 내 주위를 돌아봅니다. 아직도 역병이 우리를 할퀴고, 겨우 간직한 웃음마저 거두어가려는지 경기침체도 나라 안팎에 여전합니다. 무엇보다 황망했던 이태원 참사가 마음을 누릅니다. 우리 모두를 무기력하게 가라앉게 했지요. 하지만 우리네 삶이 온통 순탄하다면 그게 더 어색할 거예요. 삶에 새겨지는 무늬가 어찌 밝고 곱기만 하겠습니까. 삶을 조각해 나가는 기둥이 있어서 희로애락이 촘촘히 각인되는 것이라면, 나를 나답게 하는 건 아무래도 깊고 선명하게 패인 자국이겠지요. 한 뼘이라도 삶이 성장한 순간엔 언제나 좌절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고통에 무너지려 할 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안간 힘을 쏟았던 기억이 어제처럼 선명하네요. 인생 무대에서 하차하는 그 날까지, 슬픔에게 주인공 자릴 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삶의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하고, 눈물샘만 계속 자극하는 스토리는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상실과 고통을 겪어내는 일은 늘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이하는 일만은 되도록 활기차게 해내고 싶었나 봐요. 해돋이 명소를 자주 찾았습니다. 여수 향일암, 강릉 정동진, 동해 추암 촛대바위, 포항 호미곶도 어제인 듯 기억납니다. 바다에서 장엄하게 태양이 솟아오를 때마다 울컥해졌습니다. 그런 강렬한 감각이 없었다면, 고통은 소화되지 않았을 테고 성장을 확인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지리산 천왕봉, 중국 황산의 해돋이 현장에는 또 다른 감동이 있었습니다. 산세의 위용 때문인지, 내 세계가 조금 확장되는 듯했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세상 만물이 새해 새 햇살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축복으로 조금 단단해진 내가, 언젠가, 누구에겐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거라는 상상은 흐뭇하고 달콤했어요.
도움을 주는 사람. 즉시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요. 나의 대모님,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신앙의 어머니입니다. 대모님,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화롯불을 쟁여둔 듯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그분은 돕는 기쁨, 헌신하는 삶을 실천하며 희열에 들떠있습니다. 이 세상 떠날 때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며 가진 것 모두를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베풀고 있습니다. 사후에 당신의 신체마저도 기증했고요. 주일마다 사람들과 함께 꾸려가는 문화 사랑방도 그분이 중심입니다. 함께 노래하며 글도 읽고 아픔도 함께 나눕니다. 문화 사랑방에 오시는 어른 중에는 인지능력이 점점 쇠퇴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분들도 함께 동요, 성가, 가곡, 팝송, 어떤 음악이든 가리지 않고 노래를 부릅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납니다. 음악은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걸 신뢰하게 되는 현장이지요. 그런 일들을 주도하는 그분의 배려와 봉사 그리고 정성은 상상을 아득히 넘어섭니다. 모두를 품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 우리 마음속에 공동체의 작은 등불 하나씩 들고 설 만큼의 용기를 선사하니까요. 그 등불의 온기는 또 도움이 필요한 다른 이에게 옮겨지겠지요. 선한 영향력은 계속 순환하면서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리라 믿습니다. 누군가의 선행이 돌고 돌아 다시 우리 모두에게로 돌아오는 세상. 내가 그려내고 싶은 멋진 세상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을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일도 중요하지요. 한밤중에 보신각 타종 현장으로 향했던 일이 생각나네요. 그곳에서 서른세 번의 종소리를 들으며 내 소망을 쏟아냈습니다. 합격, 건강, 기쁨, 평화, 사랑, 자유, 감사, 지혜… 소용돌이치는 인파 한가운데서 두 손을 합장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지요. 영성을 체험한 듯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는 신비스런 느낌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야를 아름답게 장식하며 흩날렸던 서설은 더욱 뜻깊었습니다. 나의 바람이 이뤄질 듯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었지요. 그날, 귀갓길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속을 비워 멀리까지 소리를 들려주는 ‘종’의 의미를 새기리라 결심했어요. 누구에게나 손잡아주며 가까이 다가가자. 비울수록 나의 삶도 고요와 평화의 울림으로 채워지겠지. 마음을 조금씩 비우니 초연해지기 시작하면서 욕망을 통제하기가 조금 쉬워졌지요. 사과, 배, 감, 복숭아, 자두 같은 과일도 솎아내주면 남아있는 열매가 더욱 실해지지 않던가요. 작은 해탈 속에서 충만함과 풍요로움이 오히려 더해짐을 실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사회가 당면한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잃어가리라 믿습니다. 역병의 터널도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개인의 행과 불행도 선택하기 나름이지요. 나와 차분히 대화하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내가 잘할 때 스스로에게 상찬하면 여유로움이 자리 잡겠지요.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도 갖춰질 테고. 나아가 이웃과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위로는 사람에게 피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 아닐까요.
올해는 토끼의 해입니다. 사람과 교감을 잘하는 토끼의 기운을 받아 모두가 희망을 쏘아 올리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 나루를 지혜롭게 건너가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고통 없는 인생살이, 생채기 하나 없는 이웃을 기대하기보다, 서로서로 아픈 상처 감싸주고 살포시 안아주며 힘을 되찾는 편이 더 좋겠지요. 이제 어두운 감정은 버리고 희망의 새해 새 아침을 맞으러 떠나요. 힘차게.
김혜숙 ajook47@hanmail.net
『한국수필』 등단(1996년). (사)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백미문학회 회장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문학의집‧서울 회원. 수상: 박종화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수필집: 『밥은 먹고 다니냐』, 『밥 장 사주는 남자』 등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