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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미적 체제 안에서의 예술의 정치는, 또는 그것의 메타 정치는 이 근원이 되는 역설에 의해 결정된다. 즉, 이 체제 안에서 예술은 예술이지만 동시에 비예술이기도 하고 예술이 아닌 다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에 의한 해방에 대한 모더니스트의 큰 모험에 종지부를 찍는 모더니티의 비참한 종말이나 포스트모더니티의 즐거운 폭발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포스트모던의 단절은 없다. 근원적이고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모순이 있는 것이다. 작품의 고독은 해방의 약속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약속의 완수는 분리^된 현실로서의 예술의 제거이고, 삶의 형태로의 예술의 변형이다.(불편70-71)
예술작품은 미적 체제 개념 없이도 다양한 관점에서 대상화된다. 예컨대 경제적, 과학적, 윤리적, 정치적, 미적 관점에서 고가인지 저렴한지,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퇴폐적인지 건전한지,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 추한지 아름다운지 판단할 수 있다.
예술작품이 비예술적인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다양하게 기능한다는 것도 상식이다. 모더니티의 비참한 종말이나 포스트모더니티의 즐거운 폭발 혹은 포스트모던의 단절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동의할 수 있다.
자율적 예술의 해방 약속과 무기력 사이의 악순환은 현실을 모순구조로 보아온 변증법적 사유의 퇴화, 예컨대 총체적 지배관계, 관리되는 사회, 일차원적 사회, 옥외감옥 등의 서구적 과장을 근거로 한다. 지배관계, 특히 지배권력을 불가피한 연루 속에서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저항운동에 가담함으로써 그러한 딜레마는 원칙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이 경우 연루로 인한 장애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별도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
따라서 미적 ‘교육’은 동일한 근본적 핵에서부터 두 개의 형상으로 분리된다. 철학자가 축하하는 추상적 작품의 숭고한 나체와 예술가나 현대 전시회의 기획자들이 제안한 새롭고 상호작용적인 관계들이 그것들에 대해 증언한다. 한편으로 미적 혁명의 기획이 있다. 거기에서 예술은 예술로서의 자신의 다른 점을 제거하면서 삶의 형태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작품의 저항하는 형상이 있다. 거기에서 정치적 약속은 부정적으로 보호된다. 즉, 예술적 형태와 삶의 다른 형태들 사이의 분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이 형태에 내재된 모순에 의해서 말이다.(불편71)
좀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저항의 형상은 없는가? 리얼리즘은 이제 금기인가? 상부구조라는 척도로 볼 때 위의 두 가지 유형에 한정되지 않는, 현실인식과 당파적 감각⋅욕구를 부추기는 강렬한 작품들을 기대하면 왜 안 되겠는가?
미적 혁명의 시나리오는 지배관계들의 미적 중지를 지배 없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원칙으로 변형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은 혁명을 혁명과 대립시킨다. 즉, 사실 인간 집단들의 분리를 다시 가져오는 국가적 혁명으로 고안된 정치적 혁명에 맞서 이 제안은 감각 공동체의 형성으로서의 혁명을 대립시킨다. 이것이 바로 헤겔, 쉘링, 횔더린(Hölderlin)이 공동으로 작성한 「독일 관념주의의 체계적인 보다 오래된 프로그램」에서 요약된 모태적 수식이다. 이 프로그램은 국가의 죽은 메커니즘에 맞서 공동체의 살아 있는 힘을 대립시킨다. 그 힘은 공동체 사상의 감각적 구현으로부터 양분을 받는다.(불편71)
국가적 혁명/ 정치적 혁명과 감각 공동체 형성으로서의 혁명은 대립관계이어야 하는가? 양자의 실질적인 유기적 관계를 밝히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단순 대립관계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정치적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의 의식만 아니라 감각⋅욕구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의 우선성이나 근본성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것과 산 것 사이의 너무 단순한 대립은 사실 이중의 제거를 실행한다. 한편으로 그 대립은 정치적 이견성(dissensualité)의 실천행위인 정치의 ‘미학’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 대신에 ‘공감각의’ 공동체의 형성을, 다시 말해 모두가 동의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감각의 공동체로서 실현된 공동체의 형성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놀이’를 그것의 정반대 활동으로, 즉 미적 외형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정복적 정신의 활동으로 변형시키기도 해야 한다. 모든 감각적 외형을 그것의 고유한 자율성의 표명으로 변형시키면서 말이다. 「보다 오래된 프로그램」이 권장한 ‘미적 교육’의 임무는 생각을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으로 고대 신화를 대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엘리트와 인민에 의해 분할된 공동의 경험들과 신앙들의 살아 있는 조직이다. ‘미적’ 프로그램은 따라서 메타 정치의 프로그램이다. 정치가 외형과 형태의 질서 안에서만 완수할 수 있는 임무를 그것은 감각의 질서 안에서 진실로 수행하고자 한다.(불편71-72)
정치의 ‘미학’: 정치적 이견성의 실천행위를 대신하는 ‘공감각의’ 공동체 형성이, 왜 자유로운 놀이를 정복적 정신의 활동으로 변형해야 하는가? 미의 정신화? 이념의 감각적 가상? 헤겔이 언제까지 미적 교육으로 현실정치를 대신하고자 했던가? 프로이센 국가주의는 그와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예술-종교-철학으로 나아가는 절대정신의 전개과정은? 셸링의 경우에는 예술을 철학 위에 놓는가? 지적 직관 개념에 대해 검토할 필요 있다.
이 프로그램이 미적 혁명에 대한 생각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자체에 대한 생각도 규정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잊혀진 초고를 읽을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맑스(Marx)는 반세기 후에 그것을 정확히 정치적 혁명이 아닌 인간적 혁명의 시나리오 안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 이 혁명은 철학을 제거하면서 철학을 완수해야 했고, 인간에게 그가 외형^만을 가졌던 것의 소유권을 줘야 했다. 그래서 맑스는 미적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새로운 식별법을 제안했다. 그것은 사물들과 사물들이 생산된 사회관계들을 동시에 생산하는 생산자 인간이다. 바로 이 식별법을 기초로 해서 맑스주의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1920년대경에 서로 만날 수 있었고, 동일한 프로그램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생활형태들과 구성물들의 건설 안에서 정치적 이견성과 미적 이질성을 같이 제거하는 것이다.(불편72-73)
정치적 혁명이 아닌 인간적 혁명의 시나리오는 [경철초고]에서부터 맑스가 제기하는 공산주의, 사적소유의 폐지, 프롤레타리아독재 등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사물들과 사물들이 생산된 사회관계들을 동시에 생산하는 생산자 인간’이라는 것이 미적 인간의 식별법이 되는 이유는? 맑스주의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1920년대 만나는 것이 맑스의 그러한 식별법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경우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이 왜 정치적 이견성과 미적 이질성을 제거하는가? 매우 어설프고 비약적인 정식화 아닌가?
그렇지만 미적 혁명의 이러한 형상을 ‘유토피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재앙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너무 단순한 것이다. ‘삶의 형태가 된 예술’의 기획은 예술의 ‘제거’ 프로그램에, 구성주의 기술자들과 소비에트 혁명의 절대주의나 미래주의 예술가들이 부르짖은 단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의 미적 체제와 동체이다. 그것은 이미 수공업적이고 공동체적인 중세의 꿈을 통해 미술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것은 당시에는 ‘사회적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주목을 받은 장식 예술 운동의 수공예자들과 예술가들, 베르크분트(Werkbund)나 바우하우스(Bauhaus)의 기술자들이나 건축가들에게서도 계속된다. 그리고 후에 상황주의 도시계획가들의 유토피아적 기획들이나 요^세프 보이스의 ‘사회적 조형예술’ 안에서 꽃피웠다.(불편73-74)
‘전체주의적인’ 재앙 운운을 거부하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 ‘삶의 형태가 된 예술’의 문제점이 명시되지 않고 있다. 지배관계, 상부구조 개념이 희석된 결과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혁명적 기획들로부터 겉보기에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주변도 맴돌고 있다. ‘순수’ 시인 말라르메와 베르크분트의 기술자들은 민주적 형식주의의 외형들로부터 마침내 빠져나온 공동체의 구체적 형태들을 예술의 독특함을 제거하면서 생산할 수 있는 예술에 대한 생각을 먼 거리에서 분할한다.(Notwithstanding their differences, the ‘pure’ poet Mallarmé and the engineers of the Werkbund share the idea of an art which, by suppressing its singularity, is able to produce the concrete forms of a community that has finally dispensed with the appearances of democratic formalism) 여기에는 어떤 전체주의적 유혹의 소리도 없다. 단지 미적 ‘작품’의 지위 자체 안에, 아무 일 않는 외형의 독특함과 외형을 현실로 변형시키는 행위 사이에 연루된 근원적 매듭 안에 뿌리내린 메타 정치의 고유한 모순의 표명만이 있을 뿐이다.(불편74)
전체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대신해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한 평가를 생략한 채 청산주의에 불을 붙이는 특정 시기, 협소한 메타 정치의 이름으로 현실 정치를 밀어내고 있는 것 아닌가?
미적 메타 정치는 미적 중지 안에서 발견되는 진리의 약속을 실현할 수 있으려면 이 중지를 취소하고 형태를 삶의 형태로 변형시켜야만 한다. 그 약속은 말레비치(Malevitch)가 1918년에 박물관의 작품들과 대립시킨 소비에트의 건립일 수 있다. 그것은 회화와 조각이 더 이상 분리된 대상들로서 나타나지 않고 삶 안에 직접 투사되는, 그렇게 해서 ‘진정한 조형적 현실인 우리의 주변 환경과 구분되는 사물’로서의 예술을 제거하는 통합된 공간의 제작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기 드보르(Guy Debord)가 만능 스펙터클의 형태 하에서 소외된 삶−자본주의적이거나 소비에트적인−의 총체성에 대립시킨 도시의 표류와 놀이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자유로운 형태의 정치는 그것이 실현될 것을 요구한다. 즉, 행위 안에서 스스로를 제거할 것을, 미적 약속을 만든 이 감각적 이질성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불편74-75)
무엇을 위해 이 감각적 이질성을 제거하라는 것인가? 형식적 민주주의?
행위 안에서의 형태의 이러한 제거는 바로 예술의 미적 체제에 고유한 ‘정치’의 또 다른 커다란 형상이, 즉 저항하는 형태의 정치가 거부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형태는 평범한 세계에 대한 모든 개입형태로부터 멀어지면서 자신의 정치성을 확언한다. 예술은 삶의 형태가 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예술 안에서 형태를 취하는 것이 바로 삶이다. 쉴러의 여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약속을 담고 있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사회적 기능을 갖지 않는 것이다”라고 아도르노는 말할 것이다. 평등주의적 약속은 작품의 자기충족성 안에, 모든 특수한 정치적 기획에 대한 무관심 안에, 그리고 평범한 세계를 장식하는 데 대한 모든 참여를 거부하는 것 안에 갇혀 있다. 바로 이런 무관심 때문에 19세기 중반에 탐미주의자 플로베르(Flaubert)의 어떤 것에도 기반하지 않는 작품, “자기 자신에게 기대는” 작품은 위계질서의 당시 옹호자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표명으로 즉각적으로 지각됐다.(불편75)
저항하는 형태의 정치든 삶의 형태가 되는 예술의 정치든 자본주의 내부의 자족적으로 구획된 영역 속에서, 그러나 자본과의 노골적이거나 세련된 교감을 바탕으로, 뭔가 있어 보이지만 뭔지 알기 어려운 전문용어들의 휘장을 두르고 자본권력에 대한 인식을 흐려가면서 실질적으로 대중의 탈정치화를 돕는 것 아닌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작품, 관점이 없는 작품,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반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는 작품은 모든 선호와 모든 위계를 중지하는 이 무관심 자체에 의해 ‘평등주의적’이다. 후속 세대들은 그것이 예술의 감각중추를 미화된 일상생활의 감각중추로부터 완전히 분리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전복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순수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정치적인 예술이 예술로서의 자신을 제거하면서 정치를 하는 예술에 맞서 대립한다.(불편75-76)
모든 선호와 모든 위계가 중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각에 빠질 뿐 아닌가? 공허한 평등주의 내지 자본권력에 대한 투항을 전복으로 포장하는 가짜 혁명의 수사법 아닌가? 정치 개입의 유효적절한 방법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고심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고심을 쉽게 면제시켜주는 논리 아닌가?
아방가르드의 정치적 전통이 내면화한 것이 바로 작품의 무관심 자체에 연결된 이 정치성이다. 아방가르드의 정치적 전통은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아방가르드를 바로 그들 사이의 간격 자체를 통해 일치하도록 만드는 데 적용됐다. 그것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된다. 예술의 자율성의 핵심이 되는, ‘따라서’ 예술의 해방 잠재력의 핵심이 되는 이질적 감성을 구하라. 그것을 메타 정치적 행위로의 변형 또는 미화된 삶의 형태들로의 동화라는 이중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라. 아도르노의 미학이 요약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요구이다. 작품의 정치적 잠재력은 미화된 상품의, 그리고 관리된 세계의 형태들로부터의 전면적 분리와 연결돼 있다. 그러나 이 잠재력은 작품의 단순한 고독 안에 있지 않으며, 예술적 자기 확언의 급진성 안에도 있지 않다. 이 고독이 허용하는 순수함은 내적 모순의, 부조화의 순수함이다. 그 모순을 통해 작품은^ 화해되지 않은 세계에 대해 증언한다.(불편76-77)
아도르노의 미학은 현실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자 모두에 대한 양비론이기는 해도 지배관계에 대한 감각은 부단히 살아서 작동한다. 그리고 비판적 논의의 비중은 자본주의 쪽에 더 놓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총체적 지배를 전제하고 상부구조, 반영론, 리얼리즘 등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는(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반영론적인) 논의방식의 정치적 한계를 부인할 수는 없다.
아도르노에 의해 개념화된 쇤베르크(Schönberg) 작품의 자율성은 사실은 이중의 타율성이다. 노동의 자본주의적 분리와 상품의 미화를 더 잘 고발하기 위해 그것은 대중의 자본주의적 소비의 생산물들보다 더 기계적이고 더 ‘비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인간성은 억압된 것의 임무를 나타나게 만든다. 억압된 것은 작품을 만든 것−노동과 향유의 자본주의적 분리−을 환기시키면서 자율적 작품의 기술적 배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불편77)
‘자율적 작품의 기술적 배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러한 논리 안에서 해방의 약속은 화해의 모든 형태를 거부함으로써, 작품의 이견적(dissensuelle) 형태와 일상적 경험의 형태들 사이의 간격을 유지함으로써만 지켜질 수 있다. 작품의 정치성에 대한 이런 시각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약속의 수호자인 미적 차이−감성의 두 가지 형태들 사이의 일종의 볼테르적인 대립을 재구성하는−를 작품의 감각적 재질 안에 놓도록 강제한다. 19세기의 살롱들을 매료시킨 감7화음은 아도르노에 따르면 ‘모든 것이 속임수가 되지 않는 한’ 더 이상 들릴 수 없다. 우리의 귀가 그 화음을 아직도 기쁘게 듣는다면 미적 약속, 해방의 약속은 오류를 확신한다.(불편77)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화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명백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화폭 위에서 추상적인 소재들에 뒤섞인 구상적 소재들을 ‘볼 수’ 있다. 또 일상생활의 물건들을 빌리고 다시 전시하면서 예술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이름을 가진 전면적 단절의 흔적을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라는 개념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적대적인 요소들을 지나치게 마구 던져넣는다. 이들 적대적 요소들 사이의 긴장이 예술의 미적 체제 전반을 움직인다. 예술의 미적 체제는 항상 상반되는 것들 사이의 긴장을 겪었다. 자율적 현실로서의 예술 개념을 만든 미적 경험의 자율성은 예술의 영역과 비예술의 영역을, 작품의 고독과 집단적 삶의 형태들을 나누는 모든 실용적 기준의 제거를 동반한다. 포스트모던의 단절은 없다. 그러나 ‘비정치적으로 정치적인’ 작품의 변증법은 있다. 그리고 그것의 기획 자체가 폐기되는 한계가 있다.(불편77-78)
숭고에 대한 리요타르의 미학이 증언하는 것은 바로 모든 정치적 의지와의 거리두기 자체를 통한 정치적인, 자율적/타율적 작품의 이 한계이다.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예술작품들과 상업문화의 산물들을 숭고하게 나누는 경계선을 그리는 임무를 아직 맡고 있다. 그러나 이 그려진 선의 방향 자체는 역전돼 있다. 예술가가 기입하는 것은 약속을 담은 모순, 노동의 모순 그리고 향유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타자성(altérnité)의 힘으로 정신의 소외를 확인해 주는 ‘아이스테톤(aistheton)’의 충격이다. 작품의 감각적 이질성은 더 이상 해방의 약속을 보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정신에 깃든 타자에 대한 정신의 돌이킬 수 없는 의존에 대해 증언하면서 이 종류의 모든 약속을 무효화한다. 세계의 모순을 기입하던 작품의 수수께끼는 이 타자의 힘에 대한 순수한 증언이 된다.(불편78-79)
저항하는 형태의 메타 정치는 따라서 두 입장 사이를 오가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세상 일−수입을 내야 하는 산업활동이 되는 대중전시와 문화상품의 교역, 예술에 대해 이방인이었던 사회집단들을 예술에 다가가도록 하기 위한 교육, 사회적⋅민족적⋅성적 집단들에 결부된 문화들로 다양하게 나눠진 ‘문화’ 안으로의 예술의 통합−속에서 작품의 물질적 차이를 훼손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한 투쟁에 이 저항을 동화시킨다. 문화에 맞선 예술의 투쟁은 ‘사회’에 맞선 ‘세계’의 방어, 문화상품에 맞선 작품의 방어, 이미지에 맞선 사물의 방어, 기호에 맞선 이미지의 방어, 시뮬라크르에 맞선 기호의 방어를 같은 편에 두는 전선을 형성한다. 이러한 고발은 지식들, 행동들, 가치들의 민주적 해체에 맞서 공화적 교육의 복구를 요구하는 정치적 태도들에 기꺼이 연결된다. 그리고 이 고발은 예술과 삶의, 기호와 사물의 경계선을 흩뜨리는 일을 하는 현대의 소란스러움에 대해 전^체적인 부정적 평가를 한다.(불편79-80)
그러나 동시에 조심스럽게 보존된 이 예술은 타자의 힘에 대한, 그리고 그의 망각에 의해 계속 촉발되는 재앙에 대한 증언으로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 아방가르드의 정찰병은 희생자들을 감시하고 재앙의 기억을 유지하는 보초병이 된다. 저항하는 형태의 정치는 따라서 그 자신이 폐기되는 지점에 다다른다. 그 일은 감각적 세계의 혁명의 메타 정치 안에서가 아니라 예술의 작품을 증언의 윤리적 임무와 동일시하는 것 안에서 이뤄진다. 그 안에서 예술과 정치는 다시 함께 폐기된다. 미적 이질성의 이러한 윤리적 해체는 그 자체가 정치적 이견성을 예외의 최고 정치 안에서 해체하고 지배와 해방의 모든 형태를 존재론적 재앙−신만이 이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다−의 전체성으로 환원시키는 모든 현대 사조와 짝을 이룬다.(불편80)
아도르노 미학 류에 거리 두기. ‘지배와 해방의 모든 형태를 존재론적 재앙의 전체성으로 환원시키는’ 사조가 아니라도, 자본권력과의 구체적 전쟁과 관계 맺기 어렵다면, ‘예술의 삶-되기의 정치’ 역시 공허한 놀이나 사업이 될 수 있다.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선적인 시나리오 아래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과 참여예술 사이의 교과서적 대립 아래에서처럼 우리는 미학의 두 개의 커다란 정치들−예술의 삶-되기의 정치와 저항적 형태의 정치−사이의 근원적이고 질긴 긴장을 알아차려야 한다. 예술의 삶-되기의 정치는 미적 경험의 형태들을 다른 삶의 형태들과 동일시한다. 그것은 공동 삶의 새로운 형태들의 구성을, 따라서 분리된 현실로서의 그것의 자동제거를 예술의 목적으로 제공한다. 저항적 형태의 정치는^ 반대로 미적 경험의 정치적 약속을 예술의 분리 자체 안에, 삶의 형태로의 모든 변형에 대한 그것의 형태의 저항 안에 가둬둔다.(불변80-81)
이 긴장은 예술과 정치 사이의 불행한 타협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정치들’은 실제로 형태들 자체에 연루돼 있다. 그 형태들에 따라 우리는 예술을 특수한 경험의 대상으로 식별한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부터 ‘미학’에 의한 예술의 운명적 포획이라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을 예술로서 식별하는 가시성과 담론성의 특수한 형태가 없다면 예술은 없다. 또한 예술을 정치의 특정한 형태와 연결시키는 감성의 특정한 분할이 없다면 예술은 없다. 미학은 그러한 분할이다.(불편81)
두 정치들 사이의 간장은 예술의 미적 체제를 위협한다. 그러나 그 체제를 기능하게 만드는 것도 그 긴장이다. 따라서 이 상반된 논리들을 드러내고 이 둘이 서로를 제거하는 극단적 지점을 드러낸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정치나 역사나 유토피아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처럼 우리가 미학의 종말을 선언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에 대한 설명이나 세계의 현 모습과 세계의 가능한 모습 사이의 충돌을 작품의 형태 안에 넣는 ‘비판적’ 예술의 겉으로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 기획에 가해지는 역설적 구속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불편81)
현대 부르주아 예술론의 양대 방향을 적절히 요약정리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연조건으로 전제되어 있다. 계급론은 전체주의의 하위변수 수준으로 소멸되어 있다. 해방과 평등을 지향하는 메타 정치론은 실질적 해방운동이나 현실적 평등의 조건에 접근하는 노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