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한시감상
「산행즉사」 김시습
[ 山行卽事 金時習 ]
兒捕蜻蜓翁補籬(아포청정옹보리) 아이는 잠자리를 잡고 늙은이는 울타리를 고치는데
小溪春水浴鸕鶿(소계춘수욕로자) 작은 시내 봄물에 가마우지가 목욕하네
靑山斷處歸程遠(청산단처귀정원) 푸른 산 끝난 곳에 돌아갈 길은 멀지만
橫擔烏藤一箇枝(횡담오등일개지) 등나무 한 가지 꺾어 비스듬히 메고 가네
〈감상〉
이 시는 산길을 가다 지은 것으로, 김시습의 산수벽(山水癖)과 은자(隱者)로서의 한가로운 정서를 잘 보여 주는 시이다.
산길을 가다 보니 아이는 잠자리 잡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늙은이는 오래되어 허물어진 울타리를 고치는데, 앞개울의 작은 시내에 봄물이 녹은 곳에는 가마우지가 고기를 잡기 위해 자맥질을 하고 있다. 저 멀리 푸른 산이 끝난 곳에 갈 길이 멀리 뻗어 있지만, 방랑벽이 있는 그에겐 그 먼 길이 멀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어서 지팡이 삼고자 등나무 한 가지 꺾어 등에 비스듬히 메고 간다.
김시습(金時習)은 「유감촉사 서정명부(有感觸事 書呈明府, 어떤 일에 느낌이 있어서 시를 지어 사또께 바친다)」라는 시에서 “산수에 벽이 있어 시로 늙었다(벽어산수노어시(癖於山水老於詩)).”라고 한 것처럼, 평생을 산수에서 노닐면서 시를 지었다. 조선에서 산수벽(山水癖)이 가장 깊었던 시인은 전기에는 김시습(金時習), 후기에는 김창흡(金昌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 김시습에 대한 간략한 생평(生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이다. 조금 자라자 말을 더듬어 말은 잘할 수 없었으나, 붓과 먹을 주면 그 생각을 모두 글로 썼다. 세조 때에 세상을 달갑지 않게 여겨 벼슬하지 않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중이 되어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불렀다. 스스로 그의 호(號)를 동봉(東峯)이라 하고 또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환속(還俗)하여 죽었는데, 「매월당력대년기(每月堂歷代年紀)」와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江陵人(강릉인) 字悅卿(자열경) 稍長(초장) 口吃猶不能言(구흘유불능언) 以筆墨與之(이필묵여지) 則皆書其意(칙개서기의) 我光廟朝(아광묘조) 玩世不仕(완세불사) 佯狂出家(양광출가) 號雪岑(호설잠) 自號東峯(자호동봉) 一曰淸寒子(일왈청한자) 一曰碧山淸隱(일왈벽산청은) 晩年還俗而卒(만년환속이졸) 有梅月堂歷代年紀(유매월당력대년기) 金鰲新話行于世(금오신화행우세)).”
〈주석〉
〖山行卽事(산행즉사)〗 『매월당집』에는 「도점(陶店)」이라고 되어 있음. 〖蜻蜓(청정)〗 잠자리. 〖籬〗 울타리 리,
〖鸕鶿(로자)〗 가마우지. 〖擔〗 메다 담, 〖烏藤(오등)〗 등나무 지팡이.
각주
1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 17~1493, 성종 24):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5세 때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아 오세신동(五歲神童)이라 일컬어졌다. 과거준비로 삼각산(三角山) 중흥사(中興寺)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湳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일즉사」 서거정
[ 夏日卽事 徐居正 ]
小晴簾幕日暉暉(소청렴막일휘휘) 잠시 갠 주렴과 휘장에 햇빛은 반짝반짝
短帽輕衫暑氣微(단모경삼서기미) 짧은 모자 홑적삼에 더위가 가시네
解籜有心因雨長(해탁유심인우장) 껍질 벗은 죽순은 유심이 비를 맞아 자라고
落花無力受風飛(낙화무력수풍비) 지는 꽃은 힘없이 바람 따라 날아가네
久拚翰墨藏名姓(구반한묵장명성) 성명을 감추어 둔 문자는 버린 지 오래고
已厭簪纓惹是非(이염잠영야시비) 시비를 일으키는 벼슬도 진작 싫었다네
寶鴨香殘初睡覺(보압향잔초수각) 보압 향 다 타 갈 때 잠이 막 깨니
客曾來少燕頻歸(객증래소연빈귀) 손님은 적게 오고 제비만 자주 나네
〈감상〉
이 시는 초여름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서 지은 작품이다.
초여름 비가 오다가 잠깐 날이 개자 주렴과 휘장에 햇살이 반짝거리고, 긴 관모(官帽)를 벗고 짧은 모자를 쓰고 무거운 관복을 벗고 홑적삼을 입고 있으니 여름인데도 시원하다. 자다 일어나 정원을 바라보니, 비가 온 뒤라 죽순이 부쩍 자라나 있고 초여름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던 꽃잎이 힘없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명성을 떨치던 글도 버린 지 오래고 시비를 일으키는 벼슬살이도 예전부터 싫었다. 무료하고 한가로워 낮잠을 자다 향이 다 타려 할 때 잠에서 깨니, 벗은 오지 않고 제비만 자주 날아갔다 날아온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는 다음과 같이 서거정의 간략한 생평(生平)이 실려 있다.
“본관은 대구(大丘) 달성(達城)으로, 자는 강중(剛仲)이며 옛 자는 자원(子元)이고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세종 갑자년에 급제하고 세조 때에 또 중시(重試)·발영시(拔英試)·등준시(登俊試) 등 세 과에서 발탁되었다. 시문에 아주 민첩하였으며 저술이 많았다. 다섯 임금을 섬겼으며 26년 동안 대제학을 맡았고, 경연에서 시종한 지 45년이었다. 중국 사신 기순(祈順)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갔는데 기순이 그의 재능에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벼슬은 찬성사(賛成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문집이 세상에 전하고 저서로는 『대동시화(大東詩話)』·『필원잡기(筆苑雜記)』·『태평한화활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다(大丘人(대구인) 字剛仲(자강중) 舊字子元(구자자원) 號四佳亭(호사가정) 我英廟甲子登第(아영묘갑자등제) 光廟朝又擢重試拔英試登俊試三科(광묘조우탁중시발영시등준시삼과) 爲詩文贍敏(위시문섬민) 多所著述(다소저술) 歷事五朝(역사오조) 主文衡二十六年(주문형이십륙년) 侍經幄四十五年(시경악사십오년) 詔使祁順東來(조사기순동래) 居正爲遠接使(거정위원접사) 順歎服稱能(순탄복칭능) 官至贊成事(관지찬성사) 謚文忠(익문충) 有集行于世(유집행우세) 所著有大東詩話筆苑雜記太平閑話滑稽傳(소저유대동시화필원잡기태평한화활계)).”
〈주석〉
〖暉〗 빛나다 휘, 〖帽〗 모자 모, 〖衫〗 적삼 삼, 〖籜〗 대껍질 탁, 〖拚〗 버리다 반, 〖翰〗 붓 한,
〖簪纓(잠영)〗 관리가 쓰는 관에 꽂는 비녀와 갓끈으로, 고관(高官)을 일컬음.
〖惹〗 이끌다 야, 〖寶鴨(보압)〗 향로 이름. 〖睡〗 잠 수
각주
1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488, 성종 19):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權近)의 외손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端宗) 폐위와 사육신(死六臣)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金時習)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각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그의 저술서로는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東人詩話)』,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官人)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제천마록후」 이행
[ 題天磨錄後 李荇 ]
卷裏天磨色(권리천마색) 책 속에 천마산 빛이
依依尙眼開(의의상안개) 어렴풋이 여전히 눈앞에 열리네
斯人今已矣(사인금이의) 이 사람 지금 이미 가고 없으니
古道日悠哉(고도일유재) 옛길은 날로 아득해지네
細雨靈通寺(세우령통사) 영통사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斜陽滿月臺(사양만월대) 만월대에는 석양이 비끼었네
死生曾契闊(사생증계활) 죽고 삶에 일찍이 서로 약속했는데
衰白獨徘徊(쇠백독배회) 쇠약한 백발의 몸으로 홀로 배회하노라
〈감상〉
이 시는 박은(朴誾)이 죽고 난 후 함께 천마산을 올랐던 기록인 「천마록」 뒤에 쓴 회고시(懷古詩)이다.
「천마록」을 꺼내 읽어 보니, 책 속에 천마산에서 함께 노닐던 일들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박은은 죽고 없어 함께 걷던 옛길이 나날이 아득해진다. 가랑비 내리는 영통사, 석양이 비껴 있는 만월대를 함께 거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죽고 살자고 약속했는데, 박은은 죽고 쇠약한 백발의 자신만이 홀로 살아남아 배회하고 있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위 시와 관련하여 시(詩)에 지명(地名)을 사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 중국의 지명은 모두 문자로서 시에 들어가면 아름답다. 예를 들면, ‘봄풀 너머 구강이 흐르고, 저녁 배 앞에 삼협이 놓여 있네(진도(陳陶)의 「분성증별(湓城贈別)」)’, ‘물기운은 운몽택을 찌고, 파도는 악양루를 흔드네(맹호연(孟浩然)의 「임동정(臨洞庭)」)’는 지명에 단지 몇 자를 더했을 뿐인데도 시가 빛을 낸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는 지명이 모두 방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용재 이행의 「천마록」에 ······의 구절이나, 소재 노수신의 「한강」에 ‘저자도(뚝섬)에 봄이 깊어 가고, 제천정(보광동 언덕 한강변에 있던 정자 이름)에 달 오르네’가 있는데, 아름답지 않는가?
시의 아름다움은 오직 단련을 오묘하게 하는 데 있을 뿐이지 [중국 지명과 우리나라 지명의 차이에 있지 않다](世謂中國地名(세위중국지명) 皆文字入詩便佳(개문자입시편가) 如九江春草外(여구강춘초외) 三峽暮帆前(삼협모범전) 氣蒸雲夢澤(기증운몽택) 波撼岳陽樓等句(파감악양루등구) 只加數字(지가수자) 而能生色(이능생색) 我東方皆以方言成地名(아동방개이방언성지명) 不合於詩云(불합어시운) 余以爲不然(여이위불연) 李容齋天磨錄詩(이용재천마록시) 細雨靈通寺(세우령통사) 斜陽滿月臺(사양만월대) 蘇齋漢江詩云(소재한강시운) 春深楮子島(춘심저자도) 月出濟川亭詩(월출제천정시) 豈不佳(기불가) 惟在鑪錘之妙而已(유재로추지묘이이)).”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의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이행(李荇)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이몽양(康海·李夢陽, 명(明)의 전칠자(前七子)로 시문(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吾東僻在海隅(오동벽재해우) 唐以上文獻邈如(당이상문헌막여) 雖乙支(수을지), 眞德之詩(진덕지시) 彙在史家(휘재사가)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불감신기과출어기수야) 及羅季(급라계) 孤雲學士始大厥譽(고운학사시대궐예) 以今觀之(이금관지) 文菲以萎(문비이위) 詩粗以弱(시조이약) 使在許鄭間(사재허정간) 亦形其醜(역형기추) 乃欲使盛唐爭其工耶(내욕사성당쟁기공야) 麗代知常(여대지상) 足窺一斑(족규일반) 亦晩李中穠麗者(역만이중농려자) 仁老奎報(인로규보) 或淸或奇(혹청혹기) 陳澕洪侃(진화홍간) 亦腴艶(역유염) 而俱不出長公度內耳(이구불출장공도내이) 及至益齋倡始(급지익재창시) 稼牧繼躅(가목계촉) 圃陶惕(포도척) 爲季葉名家(위계엽명가) 逮國初(체국초) 三峯陽村(삼봉양촌)
獨擅其名(독천기명) 文章至是(문장지시) 始可稱達(시가칭달) 追琢炳烺(추탁병랑) 足曰丕變(족왈비변) 而中興之功(이중흥지공) 文靖爲鉅焉(문정위거언) 中間金文簡得圃(중간김문간득포), 陽之緖(양지서) 人謂大家(인위대가) 只恨文竅之透不高(지한문규지투불고) 其後容齋相詩入神(기후용재상시입신) 申鄭亦瞠乎其後(신정역당호기후) 蘇相又力振之(소상우력진지) 玆數公(자수공) 使生中國(사생중국)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칙거진하어강이이공호) 當今之業(당금지업) 文推崔東皐(문추최동고) 詩推李益之(시추이익지) 俱是千年以來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이제류중여장심완량) 子敏甚淵伉(자민심연항) 此外則不能知也(차외칙불능지야)).”
〈주석〉
〖天磨錄(천마록)〗 이행(李荇)과 박은(朴誾)이 함께 천마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글. 〖依依(의의)〗 흐릿한 모양.
〖悠〗 아득하다 유, 〖契闊(계활)〗 서로 약속함.
각주
1 이행(李荇, 1478, 성종 9~1534, 중종 29): 박은(朴誾)과 함께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고 불렸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叟)·청학도인(靑鶴道人). 김종직의 제자인 이의무(李宜茂)의 아들이다. 1495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전적을 역임했고, 『성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1504년 응교로 있을 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목숨을 잃을 뻔하다가 다행히 살아나 거제도로 가서 염소를 치는 노비가 되어 위리안치 된 생활을 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교리에 등용,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대사헌·대제학·공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펴내는 데 참여했고, 1531년 김안로(金安老)를 논박하여 좌천된 뒤 이듬해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시는 허균(許筠) 등에 의해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 당시(唐詩)의 전통에서 벗어나 기발한 착상과 참신한 표현을 강조하는 기교적인 시를 써서 새로운 시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표현의 격조가 높아진 반면 폭넓은 경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은 없었다. 저서로는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고,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영산가고」 팔수 김시습
[ 詠山家苦 八首 金時習 ]
其六(기육)
一家十口似同廬(일가십구사동려) 한 가구 열 식구 한집에 사는 것 같은데
丁壯終無一日居(정장종무일일거) 장정들 결코 하루도 집에 있질 못하네
國役邑徭牽苦務(국역읍요견고무) 나라와 고을 부역 괴로운 일로 끌려다니니
弱男兒女把春鋤(약남아여파춘서) 약한 남자 아녀자들이 봄 호미를 잡았네
〈주석〉
〖徭〗 부역 요, 〖把〗 잡다 파, 〖鋤〗 호미 서
其七(기칠)
一年風雨幾勞辛(일년풍우기로신) 한 해의 비바람에 몇 번이나 고생해도
租稅輸餘僅入囷(조세수여근입균) 조세 바친 나머지만 겨우 광에 넣네
巫請祀神僧勸善(무청사신승권선) 무당은 신에게 제사 청하고 스님은 시주하라 권하니
費煩還餒翌年春(비번환뇌익년춘) 비용 많아 명년 봄엔 다시 굶게 된다네
〈주석〉
〖囷〗 곳집 균, 〖巫〗 무당 무, 〖還〗 다시 환, 〖餒〗 주리다 뇌, 〖翌〗 다음날 익
〈감상〉
이 시는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수록된 시로, 산속 집에서 겪는 부역과 조세의 고통을 노래한 것이다.
첫 번째 시는 한 가구에 열 명의 식구가 같은 집에서 사는 것 같은데 힘이 센 장정들은 하루도 집안일을 돌보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나라의 부역에다 마을의 부역까지 겹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그렇다. 그러니 봄이 와서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어린 사내아이나 노인인 남자, 아녀자들만이 호미를 잡고 일을 하고 있을 뿐임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시는 한 해 동안 온갖 비바람을 맞으며 힘들여 농사를 지었지만, 추수를 하고 나서 조세로 바치고 나면 남은 약간의 곡식만을 창고에 보관할 수 있다. 그런데다 무당이 신에게 제사 지내야 한다고 곡식을 청하고, 스님은 시주하라고 하니,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아 창고에 있는 조금의 곡식만으로는 내년 봄에는 올해처럼 다시 굶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읊고 있다.
김시습(金時習)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생(民生)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많은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산문인 「애민의(愛民義)」에서, “『서경』에 이르기를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으니, 대저 백성들이 추대하고 그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으로, 비록 임금에게 의지한다 하더라도 임금이 왕위에 올라 부리는 것은 진실로 오직 서민들이다. 민심이 돌아와 붙으면 만세 동안 군주가 될 수 있으나, 민심이 떠나서 흩어지면 하루를 기다리지 않아도 필부가 된다. 군주와 필부의 사이는 약간의 차이가 날 뿐이 아니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곡물창고와 재물창고는 백성의 몸이요, 의상과 관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주식과 마실 것과 반찬은 백성의 기름이요, 궁실과 거마는 백성의 힘이요, 공물과 조세와 도구는 백성의 피다. 백성들이 십분의 일을 내어 위를 받드는 것은 천자로 하여금 그 총명함을 써서 나를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백성들이) 음식을 올리면 백성들이 나와 같이 음식을 먹는가를 생각하고, 옷을 바치면 백성들이 나와 같이 옷을 입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바로 궁실에 거처함에 있어서 백성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생각하며, 수레를 모는 데 있어서 백성의 화목한 경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의 옷과 너의 음식은 백성의 기름이다.’ 하였다.
평상시에 바치는 것도 불쌍히 여기고 민망히 여길 만한데, 어찌 망령되이 무익한 일을 일으키며, 힘써 노력을 번거롭게 시켜 백성들의 때를 빼앗아 원망과 탄식을 일으키고, 조화로운 기운을 상하게 하여 하늘의 재앙을 부르며 흉년에 절박하게 하며, 사랑하는 어버이와 효성스런 자식들로 하여금 서로 보전할 수 없어 유랑하여 흩어지게 하여 도랑에서 엎어져 죽게 할 수 있겠는가? 아! 상고의 성한 때에는 임금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 임금의 힘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노래를 짓기를 ‘우리 많은 백성들이 밥을 먹게 함은 그대의 법이 아님이 없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임금의 법칙에 순종하게 되었네.’라 하였고, 말을 지어 이르기를 ‘해가 나오면 일을 하고 해가 들어가면 쉬는데,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書曰(서왈) 民惟邦本(민유방본) 本固邦寧(본고방녕) 大抵民之推戴而以生者(대저민지추대이이생자) 雖賴於君(수뢰어군) 而君之莅御以使者(이군지리어이사자) 實惟民庶(실유민서) 民心歸附(민심귀부) 則可以萬世而爲君主(칙가이만세이위군주) 民心離散(민심리산) 則不待一夕而爲匹夫(칙불대일석이위필부) 君主匹夫之間(군주필부지간) 不啻豪釐之相隔(불시호리지상격) 可不愼哉(가불신재) 是故倉廩府庫(시고창름부고) 民之體也(민지체야) 衣裳冠履(의상관리) 民之皮也(민지피야) 酒食飮膳(주식음선) 民之膏也(민지고야) 宮室車馬(궁실거마) 民之力也(민지력야) 貢賦器用(공부기용) 民之血也(민지혈야) 民出什一以奉乎上者(민출십일이봉호상자)
欲使元后用其聰明(욕사원후용기총명) 以治乎我也(이치오아야) 故人主進膳(고인주진선) 則思民之得食如我乎(칙사민지득식여아호) 御衣(어의) 則思民之得衣如我乎(칙사민지득의여아호) 乃至居宮室(내지거궁실) 而思萬姓之按堵(이사만성지안도) 御車輿(어거여) 而思萬姓之和慶(이사만성지화경) 故曰(고왈) 爾服爾食(이복이식) 民膏民脂(민고민지) 平常供御(평상공어) 可矜可憫(가긍가민) 豈可妄作無益(개가망작무익) 煩力役(번력역) 奪民時(탈민시) 起怨咨(기원자) 傷和氣(상화기) 召天災(소천재) 迫飢饉(박기근) 使慈親孝子(사자친효자) 不能相保(불능상보) 流離散亡(유리산망) 使顚仆於溝壑乎(사전부어구학호) 嗚呼(오호) 上古盛時(상고성시) 君民一體(군민일체) 不知帝力(부지제력) 則爲之謠曰(칙위지요왈) 粒我蒸民(입아증민) 莫匪爾極(막비이극) 不識不知(불식부지) 順帝之則(순제지칙) 爲之語則曰(위지어칙왈) 日出而作(일축이작) 日入而息(일입이식) 帝力何有於我哉(제력하유어아재))”라고 하여, 애민(愛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각주
1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 17~1493, 성종 24):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5세 때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아 오세신동(五歲神童)이라 일컬어졌다. 과거준비로 삼각산(三角山) 중흥사(中興寺)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湳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임우십일 문무래객 초초유감어회 취구우래금우불래위운 투택지걸화시」 칠수 박은
[ 霖雨十日 門無來客 悄悄有感於懷 取舊雨來今雨不來爲韻 投擇之乞和示 七首 朴誾 ]
其七(기칠)
早歲欲止酒(조세욕지주) 젊을 때에는 술을 끊고자 했고
中年喜把盃(중년희파배) 중년에는 술잔 잡길 좋아했네
此物有何好(차물유하호) 이 물건 대체 무엇이 좋은지
端爲胸崔嵬(단위흉최외) 응당 마음속 응어리 때문이리
山妻朝報我(산처조보아) 산골 아내가 아침에 내게 말하길
小甕潑新醅(소옹발신배) 작은 항아리에 술이 막 익었다네
獨酌不盡興(독작부진흥) 홀로 마셔도 흥이 다하지 않으니
且待吾友來(차대오우래) 우리 벗님이 오시길 기다린다오
〈감상〉
이 시는 열흘 장마가 들어 찾아오는 사람이 없자 근심이 생겨 예전 시의 운자를 가져다 이행(李荇)에게 보내 화운시(和韻詩)를 요청하며 지은 것이다.
박은(朴誾)은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의탁할 수 있었던 대상은 술과 시였을 것이다. 젊은 시절 끊고자 했던 술을 중년에 즐겨 마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슴속의 응어리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이 응어리는 정치권에서 물러남에서 생겼을 것이다. 박은의 시에 술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응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서』 「항전척독(杭傳尺牘)」에서 박은(朴誾)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리고 있다.
“동방의 시(詩)는 신라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고려의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를 대가(大家)라고 하는데, 고운은 바탕이 시상(詩想)보다 나으나 격조(格調)가 고아(古雅)하게 웅건(雄健)하지 못하고, 백운은 어귀를 새롭고 교묘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나, 운취(韻趣)가 끝내 천박(淺薄)하여 모두 편소한 나라의 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본조 이래로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세상에서 동방의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라고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읍취는 운격(韻格, 운취)은 고상하나 포근하게 웅혼한 맛이 적고, 소재는 체재는 힘차지만 초탈하여 쇄락한 기상이 없습니다.
오직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세련되고 정확하여 깊이 소릉(少陵, 두보(杜甫)의 별호(別號))의 여운(餘韻)을 체득하여 울연(蔚然)히 이조 중엽(中葉)의 정종(正宗)이 되나, 고상한 맛은 읍취만 못하고 웅건한 기운은 소재를 따르지 못하며, 여유 있고 담박한 풍도는 또한 국초의 여러 시인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모두 선배들의 정론(定論)입니다
(東方之詩(동방지시) 新羅之崔孤雲(신라지최고운) 高麗之李白雲(고려지이백운) 號爲大家(호위대가) 而孤雲地步優於展拓(이고운지보우어전척) 聲調短於蒼健(성조단어창건) 白雲造語偏喜新巧(백운조어편희신교) 韻趣終是淺薄(운취종시천박) 都不出偏邦圈套(도불출편방권투) 本國以來(본국이래) 如朴挹翠盧蘇齋(여박읍취노소재) 俗稱東方李杜(속칭동방이두) 雖然(수연) 挹翠韻格高爽(읍취운격고상) 而少沈渾之味(이소침혼지미) 蘇齋體裁遒勁(소재체재주경) 而無脫灑之氣(이무탈쇄지기) 惟權石洲之鍊達精確(유권석주지련달정확) 深得乎少陵餘韻(심득호소릉여운) 蔚然爲中葉之正宗(울연위중엽지정종) 而高爽不及挹翠(이고상불급읍취) 遒勁不及蘇齋(주경불급소재) 悠揚簡澹之風(유양간담지풍) 又不能不遜於國初諸人(우불능불손어국초제인) 此皆先輩定論(차개선배정론)).”
〈주석〉
〖霖〗 장마 림(임), 〖悄〗 근심하다 초, 〖端〗 응당 단, 〖崔嵬(최외)〗 마음속의 울적한 불평한 기운. 〖甕〗 단지 옹, 〖潑〗 삶다 발, 〖醅〗 빚다 배
각주
1 박은(朴誾, 1479, 성종 10~1504, 연산군 10):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의 성취와 문장이 남달리 뛰어나 4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8세에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15세가 되어서는 널리 명성을 얻어 당시 대제학이던 신용개(申用漑)의 사위가 되었다. 17세(1495년)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인 1496년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성품이 곧아 옳은 소리를 잘했다. 1501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연산군(燕山君)의 비호를 받던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사사불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실의에 빠져 시와 술만을 즐기며 지냈다. 25세(1503년)에 동갑이던 아내를 잃었다. 이듬해 봄에 지제교로 복직되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음력 6월에 효수되었는데, 성격이 참으로 강직하여 죽음을 앞두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는 예전에 연산군이 밤늦게 사냥한 일을 여러 신하와 연명 상소한 일의 주동자였다는 것이었고, 죄명은 ‘사충자안 신진모장관(詐忠自安 新進侮長官, 거짓 충성으로 제 안일을 구하고 신진이 상관을 업신여김)’이었다. 연산군은 박은을 너무 미워하여 그가 죽은 지 4일 후에 의금부로 하여금 박은의 친구들을 색출하여 곤장을 치게 하고 그들을 유배 보냈으며, 음력 8월에는 전교를 내려 박은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게 한 다음, 봉분 없이 묻게 했다. 1505년에는 음사해인(陰邪害人)이라는 죄목을 추가하였다. 3년 뒤에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도산잡영」 이황
[ 陶山雜詠 李滉 ]
「巖棲軒(암서헌)」
曾氏稱顔實若虛(증씨칭안실약허) 증자는 안자더러 실하면서 허한 듯이라고 일컬었는데
屛山引發晦翁初(병산인발회옹초) 이를 병산이 처음으로 회옹에게 끌어 깨우쳤네
暮年窺得岩棲意(모년규득암서의) 늘그막에야 바위에 사는 재미를 알았으니
博約淵氷恐自疏(박약연빙공자소) 박문약례(博文約禮)·임연리빙(臨淵履氷) 공부 소홀할까 두렵노라
〈감상〉
이 시는 「도산잡영」 중의 하나로, “증자가 안연을 두고 ‘있어도 없는 듯하고, 찼어도 빈 듯하다.’라 일컬었는데, 병산(유자휘(劉子翬)의 호로, 주자(朱子)의 아버지 주송(朱松)과 친구이며, 주송이 죽은 뒤에 주자를 가르쳤다)이 회암의 자를 지어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축하하였다. 회암의 시에 ‘오랫동안 할 수 없음을 스스로 믿었더니, 산속에 깃들어 작은 효험 바라노라.’라 했었는데, (산속에 깃든다는 말을 취해서) 헌의 이름으로 삼고 스스로 힘쓴다(曾子稱顔淵有若無(증자칭안연유약무) 實若虛(실약허) 屛山字晦庵(병산자회암) 以是祝之(이시축지) 晦庵詩(회암시) 自信久未能(자신구미능) 巖棲冀微效(암서기미효) 名軒以自勖(명헌이자욱)).”라는 주(注)가 실려 있다.
증자가 안연에게 한 말을 주자(朱子)의 스승인 병산이 주자에게 이것으로 자(字)를 지어 주었다. 주자는 병산의 뜻을 실현하고자 여산(廬山)의 꼭대기 운곡(雲谷)에서 살았다. 퇴계 또한 주자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의도로 암서헌(巖棲軒)이라 이름 짓고 산속에 살고 있자니, 늘그막에서야 그 의미를 터득하게 되었는데, 박문약례(博文約禮)와 임연리빙(臨淵履氷)하는 공부에 소홀할까 걱정된다.
퇴계는 이 시에서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따르고 증자(曾子)와 안연(顔淵)의 자세를 본받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窺〗 엿보다 규, 〖博約(박약)〗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준말로, 『논어』에 “子曰(자왈) 君子博學於文(군자박학어문) 約之以禮(약지이례) 亦可以弗畔矣夫(역가이불반의부)”라는 구절이 보임.
〖淵氷(연빙)〗 임연리빙(臨淵履氷)의 준말로, 『논어』에 “曾子有疾(증자유질) 召門弟子曰(소문제자왈) 啓予足(계여족) 啓予手(계여수) 詩云(시운) 戰戰兢兢(전전긍긍) 如臨深淵(여림심연) 如履薄氷(여리박빙) 而今而後(이금이후) 吾知免夫(오지면부) 小子(소자)”라는 구절이 보임.
각주
1 이황(李滉, 1501, 연산군 7~1570, 선조 3):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주자의 서간문(書簡文)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理)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氣)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理)라고 파악했다. 이황의 학문·사상은 이후 영남(嶺南)·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를 이어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남인(南人) 실학자(實學者)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한편 이들의 학통계승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각 학파·당파의 정치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전개되는데 이들은 남인 당색하에, 이이의 학문을 사상적 기반으로 기호지방에서 성장한 서인과 치열한 사상투쟁·정치투쟁을 벌이며 조선 후기 사상계·정치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