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낸 행복 / 조미숙
“미숙씨 가나(가명)내과 언제 갔어?” 친한 언니의 남편이 복지시설 원장으로 근무하는데 복지사가 3월 19일(금요일)에 그 병원 간 사람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고 했단다. 내가 그날 아들과 그 병원에 다녀 온 며칠 뒤(화요일)에 그 언니와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목포에 첫 왁진자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뒤숭숭한 마음에 집으로 왔는데 전화가 왔다. 그 병원에 다녀간 사람이 확진자라고 했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코로나19에 걸렸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나 때문에 일파만파 커지는 일들이 걱정이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들이 1월 30일에 의경으로 입대했다. 코로나로 입소식은 취소되었고, 그저 차단시설 앞에서 ‘얼른 들어가!’하며 아들을 등 떠밀다시피 하면서 애써 서운한 마음을 감춘 채 돌아섰다. 하루하루가 길기만 한 것이 어디 아들뿐이랴, 이제나저제나 훈련소 퇴소식만 기다렸는데 그것 또한 취소가 되었다. 다시 4주간 경찰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답답했다. 그 이튿날 충남경찰교육대로 갔다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또 한 달 교육이 끝나고 목포 경찰서로 왔다. 주말에 다시 발령지인 가거도로 가야한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아들은 핸드폰도 받아야 하고 피부과 약도 떨어져 섬으로 들어가기 전에 병원에 가야해서 상사에게 허락을 구하고 외출을 나왔던 것이다. 원칙은 외출이 불가하다고 했다. 집이 목포이고 어쩔 수 없는 처지인지라 보내준다고,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저녁 9시까지 들어간다는 조건이었다. 아들이 밀접 접촉자가 되면 경찰서에서 하루 동안 같이 생활한 사람들, 불법으로 외출을 허락한 상사까지 문제가 생긴다. 거기에 아들은 이미 전주 토요일에 가거도에 들어갔다. 가거도에서 같이 생활하는 의경들도 검사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
또 확진자가 나온 그날 오전에 올해 들어 첫수업을 했다. 개학이 연기되어 모든 수업이 취소가 되긴 했지만 긴급 돌봄 아이들만이라도 밀폐된 실내보다는 실외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과 아직 목포에는 확진자가 없다는 안이한 마음이었다. 또 그런 상황에서라도 수업을 해야만 과업량을 마칠 수 있다.또 산림청과 지자체에서 예산을 받아 진행하는 사업인데 마냥 개학이 연기되었다고 놀고 있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복잡 미묘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도 어쩔 수 없었다 . 그리고 그때까지도 산림청에서도 아무런 지침이 없었고, 지자체에서는 수업도 없는데 사업비를 줄 수 없으니 그냥 기다리라는 은근한 압박도 있었다. 그런데 목포에 확진자가 나왔고 내가 그 사람과 동선이 겹친 후에 수업을 했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억지로 수업을 해야 한다고는 안 했지만 원 오히려 숲이 좋지 않느냐고 유도는 했다. 만약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또 공익을 위하는 일에 동참하지도 않아 사회적 공분도 살 일일 것 같았다. 단지 우리 식구들이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거나 확진자가 된다는 문제만이 아닐 것이었다.
올해부터는 산림교육전문업이라는 위탁업체에 들어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기간제이고 적은 월급이지만 오전만 유아숲체험지도사로 일하고 오후에는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어 어느 정도 생활유지에 도움이 되는 돈을 벌 수 있어 지자체에서 일했다. 하지만 늘 똑같은 환경에서 유아 대상으로만 일하다보니 타성에 젖어갔다. 공부도 더 하고 실력도 쌓아 전천후 숲해설가가 되어 더 나이가 들어서도 당당하게 일하고 싶었다.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주변 사람들보다 많이 뒤쳐진다는 생각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위탁업체에 들어가면 하루 종일 일하는 거에 비해 월급이 너무 작아 오후에 하는 다른 일들을 하지 못한다면 수입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그동안은 꺼리고 있었던 일이었다. 다행히 과업량만 채우면 오전만 일해도 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는 대표의 말을 믿기로 했다. 업체 대표가 사업 제안서를 내고 강사가 시연을 해 경쟁업체와 겨뤄서 낙찰이 되어야 일자리가 생기는 불안한 직업을 선택한 건 나에겐 큰 모험이었다. 자칫하면 실직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일자리를 얻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한없이 불안했다.
제일 큰 걱정은 내가 확진자가 된다면 어쩌면 일자리를 영영 잃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자가 격리에 치료 기간에 많은 시간이 들어가야 할 텐데 그동안 일을 못하게 된 것을 누가 보상해 주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내가 치료가 끝나고 완치되었다하더라도 어떤 학부모가 안심하고 보낼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또 나와 위탁업체와의 근로계약서는 아직 작성조차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두로만 계약하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오후에 하는 일들도 학교와 관련이 있는 일이고 아직 구체적으로 일이 잡히지도 않아 수입은 고사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작은딸과 내 생애 첫 해외여행을 시작으로 아들의 군대 입대 기념 눈 쌓인 한라산 등반까지 기쁨을 누리던 행복한 1월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언니는 어쩌면 그렇게 코로나 피해서 잘 다녀왔냐?”며 부러워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일들이 생기는지 신이라도 원망해야 했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아찔했다. 다행히 확진자가 다녀 간 날과 겹치지 않아 한바탕 소란은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걸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연이은 우리 지역 확진자 소식에 촉각을 곤두서야 했다. 목이 조금만 아파도, 몸살기만 있어도 불안은 극도에 달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온 세계가 시끄럽다. 경제적 손실, 인명 피해 등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났다. 나만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을 둘러보면 죄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얼른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 그나마 난 다행히 3월 23일자로 계약서를 써서 근로자가 되었다. 확진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불안감도 좀 사라졌다. 살얼음판 같던 날들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면서 나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공부 핑계 삼아 소수인 회사 식구들과 여기저기 한적한 산을 찾아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시골에서는 마스크가 필요 없었다. 애초에 무분별한 개발에 따른 생태계 파괴가 없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었는지 모른다. 자연이 더욱 소중한 때이다. 그래도 아직 가까운 곳에 안심하고 갈 수 있는 숲이 있어 좋았다. 예쁜 꽃들과 시시각각 초록으로 물드는 숲은 나를 끝없이 유혹한다. 눈이 호강하니 마음도 가볍다. 겨울눈부터 시작해서 새순이 돋아나는 요즘 숲은 온통 공부할 게 천지다. 사진을 찍어 와서 눈이 빠지게 도감을 찾아보거나 관련 책을 읽는다. 자연인이 되어 가끔 나물도 채취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채취본능은 무소의 뿔처럼 나를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고 직진하게 만든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봄나물은 건강한 밥상을 선물했다. 이렇게 행복하고 여유로운 봄날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싶다. 무서운 코로나19의 이면에는 미안하게도 내 행복이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