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랴오닝 성/요령성[1]
중국어: 辽宁省(간체)/遼寧省(정체)
영어: Liaoning Province


개요
랴오닝 성은 중국 동북부의 성급 행정구역이다. 성도는 선양(沈阳/瀋陽)시. 한자 그대로 읽어 심양이라고도 부른다. 행정상 간칭은 요(辽).
인구는 43,900,000명, 면적은 145,900 km2로 남한보다는 넓으나 이것은 중국 내에서 비교적 작은 편이다(...) 서쪽은 허베이 성, 북쪽은 내몽골 자치구, 동쪽으로는 지린 성, 남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한다.
동북 3성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고 성의 중심부를 우리나라에서는 요하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랴오허(遼河)가 관통한다. 요하를 기준으로 서쪽을 요서(遼西)라 부르고 동쪽을 요동(遼東,랴오둥)이라 부른다. 요하 하구에 위치해있다 보니 광활한 평야를 지니고 있고[2] 대도시도 엄청나게 많다. 이 성의 인구만 4,000만이 넘는다...[3] 하지만 인구가 많다고는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부터는 출산율이 매우 낮아져서 1000명당 출생률은 6명대이고[4] 출생아수는 27만명대에 머물고있다.
인구의 84%가 한족이고, 만주족은 인구의 13%에 달한다. 그외에 몽골족이 2%, 조선족과 후이족은 각각 0.6%이다. 특히 만주족 비율은 랴오닝 성 동부 산지 쪽에서 높게 나타나며, 랴오닝 성 동부에 6개 자치현이 있다.
랴오닝 성은 지린 성,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처럼 여행유의 지역이다. 북한 국경지대이기 때문. 이 곳은 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납북의 위험성이 있다.
산업
중국에서 공업이 굉장히 발달한 지역이다. 이 곳의 대도시들은 대부분 중공업 중심으로 성장한 도시들이고 이들 공업 지대는 중국 제 1의 중화학 공업 지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첨단 산업은 남쪽의 따뜻한 대도시들 몫이고 이 곳은 첨단 산업 불모지. 중국 정부가 노력을 하긴 하는데 춥고 오지라서 아직 타 지역에 비해 진전이 느린 편이다. 흔히 말하는 유해 공업들이 밀집해 있다.
랴오닝성의 농업도 발달했는데주로 밭농사로,재배하는 것은 옥수수와 밀, 콩 등. 여름에는 이 곳도 푹푹 찌기 때문에 구한말 진출한 조선인,지금의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족들도 벼농사를 한다.
2017년 2월 랴오닝 성의 작년 gdp가 전년 대비 23%감소하여 경제규모 조작이 드러났다. 대공황?중국 지방정부의 경제통계 상향조작 일면을 볼 수 있다.
선양 시(瀋陽市; 심양시, 중국어 간체자: 沈阳市, 정체자: 瀋陽市, 병음: Shěnyáng Shì)는 중국 랴오닝 성의 성도이다. 둥베이 3성에서 제일 큰 도시로서 경제, 문화, 교통, 군사의 중심지이다. 펑톈(奉天)은 선양의 옛 이름이다. 국가역사문화명성(國家歷史文化名城)에 선정된 관광 도시로, 만주족은 묵던(만주어: ᠮᡠᡴ᠋ᡩᡝ᠋ᠨ Mukden)이라고 부르고, 유럽에서도 묵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북방 지역의 알자스
선양-펑톈 등의 지명 변화는 마치 유럽 알자스 지방의 역사나 정치적 사항과 유사한 점이 있다.
펑톈은 1657년 청나라가 명나라 지명인 선양(瀋陽)을 펑톈으로 개명한 것이다. 또한 1929년에 한족의 군벌 장쉐량이 모처럼 선양으로 회복하였으나, 1931년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으로 선양을 강점한 후 다시 펑톈으로 개명되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펑톈이라는 지명은 외세의 영향으로 두 번이나 외세에 의하여 개명되었던 호칭인 셈이다. 대부분의 한족들이 만주 사변을 '918 사변'이라고도 부르며 9월 18일을 국치일로 생각한다. 비록 '선양'이라는 이름은 원(元)나라에서부터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선양이라고 불려오다가 만주족의 청나라가 펑톈이라고 개명한 후, 일제조차도 펑톈이라고 불렀기에 현대의 중국은 펑톈이라는 (외세가 작명한) 지명에 감정적으로 우호적이지 못한 면이 강하다.
그러나, 장쉐량이 1929년에 펑톈을 선양으로 개명한 실제적 이유를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내세운 초기 삼민주의 강령에는 '만주족 축출'이 포함되어 있는 등 당시의 중국 내부의 혁명은 소수 민족을 배제한 한족 중심의 혁명이었다. 또한 실제적으로 그 기원이 청나라의 군대였다는 태생적 약점을 가지고 있던 한족 봉계군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 군벌이 만주족의 태생적 기원을 버리고 바야흐로 한족의 세력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주족의 펑톈을 한족의 선양이라는 지명으로 정치적 필요상 복귀시킨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더욱이 선양이든 펑톈이든, 실제로는 청나라가 들어서기 이전까지는 '장성 밖 지역'으로 간단히 치부되어었으며 토착민인 만주족은 '묵던'이라고 하며 행정 구역상의 지명과는 별도로 불려오던 곳이고, 비록 명나라가 선양이라고 지칭하기는 하였으나 토착민들은 이에 상관 없이 고유의 지명으로 불러오던 곳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토착민이자 도시 건설자였던 만주족과 여타 북방 민족의 입장에서 보는 이러한 한족 중심 사고는 지역 사회의 역사적 근본을 교묘히 바꿔버리는 책략의 일환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펑톈에서 살아온 북방 민족의 입장에서보면 입장은 반대가 된다. 요동 지역은 원래 한족의 지역이 아닌 북방 민족의 땅이었으며, 몽골족이 선양이라고 지명하고 만주족이 묵던(Mukden)이라고 부르던 곳을 1600년 대 이후로 행정상의 편의로서 펑톈이라고 공식 표기하여서 20세기 초까지 사용하여 온 것이다. 실제로 1929년에 펑톈이 선양으로 개명되었을 때에 많은 만주족들이 분개하였으나, 군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한족 군벌들에게 눌려서 탄압을 받았을 뿐이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가 만주국을 건설한 후 만주족의 땅이라는 의미로 한족의 선양을 다시 만주국 펑톈으로 개명한 정치적인 사건은 만주족이나 북방민족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양을 펑톈으로 개명한 일은 비록 그 주체가 일제라 하더라도, 한족에게 탄압과 압력을 받던 만주족과 기타 소수 민족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던 작은 사건이었다.
실제로 전통적으로는 '장성 밖의 지역'이라고 보아야 할 이 곳의 지명을 군벌과 공산당 정부가(묵던이라는 토착 지명이 존재하며, 원나라의 지명이 기원이라는 것을 크게 밝히지 않고, 단지 명나라 당시에는 한족들끼리만 통용되던 장성 밖 지역의 제한적 행정 지명이라는 것을 덮어두면서) 구태여 명나라 지명으로 바꾼 것은 토착 세력을 견제하면서 현재의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 한족계열의 중국인이라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