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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2일
선한 목자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0:1-15절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많은 표적을 행하셨죠.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 표적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표적 기록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원자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요한복음에는 “ἐγώ(에고) είμι(에이미)” 나는 누구다 라는 7대 선언’이 나옵니다. 이 선언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 계시해 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양의 문’이며 ‘선한 목자’ 가 되실까요?
양의 이름을 아시는 예수님(1-6)
1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는 ‘아멘 아멘 레고’로 ‘아멘’은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 ‘아멘’ 아멘 하시며 강조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양과 도둑의 차이입니다. 문을 통해 양우리(sheepfold)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입니다. 반면 다른 곳으로 담을 넘어가는 자가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3-6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밤 동안 양은 우리(fold) 안에서 잠을 자죠? 날이 밝으면 목자들이 양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넌 점이 많으니 “점박이” 야 너는 까칠하니 “까칠이” 넌 말을 잘 들으니 “순둥이” 이렇게 목자가 양의 이름을 지어주고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듣고 우리 밖으로 나가 풀을 뜯습니다. 요즘은 가축에 꼬리표를 붙이죠? 하지만, 당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냈습니다. 양도 자신을 기르는 목자의 음성을 잘 압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만 들어도 금방 자신을 부르는 줄 알죠? 이처럼 양의 이름을 아는 자가 목자입니다.
누가볶음 12:6,7절에 “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 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 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 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 보다 더 귀하니라”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신 예수님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십니다. 나의 성격 나의 기질 나의 생각 나의 고민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다 아십니다. 또 어떻게 하면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도 다 아십니다. 나의 목자는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2. 양의 문이신 예수님(7-9)
비유 말씀을 이해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어떤 분으로 계시 하십니까?
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께서 한번더 ‘아멘 아멘 레고’ 하시며 ‘나는 양의 문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양우리’는 ‘하나님의 집’이죠?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 예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천국의 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죠? 왜 그렇죠? 딤전 2: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기 때문“ 입니다. 또 행 4:12절에 ”하나님은 예수님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절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먼저 온 자’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죠? 예수님의 가르침 보다 앞선 가르침을 말합니다. 즉 거짓 메시아와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여기에 해당 되지요. 따라서 양들이 그들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죠? 그들이 양들에게 온 목적은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려는 것뿐입니다. 바래새인들은 율법 정신은 배제한채 형식적인 율법만 가르쳐 사람을 얽어매 죽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둑과 반대로 양을 살리러 오신 목자이십니다. 양이 양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안전하죠? 또한 목자를 따라 ‘우리(fold)’ 밖으로 나가면 무엇이 펼쳐집니까? 푸른 초장에서 풍성한 꼴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쉴만한 물가에서 시원한 생수를 마음껏 마실수 있습니다. 이로 양은 풍족함을 누립니다. 우리 역시 천국의 문이신 예수님을 따라 갈 때 풍족한 삶을 누리며 구원을 받습니다.
양의 문 되신 예수님께 들고 나며 양들이 받는 복이 무엇일까요?
먼저, 구원의 복입니다. 9a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사람이 많은 것을 소유 할지라도 죽으면 뉘것이 될까요 롬 6:23절 죄의 삯은 사망이며 히 9:27절에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고 계21:8절에 그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영원히 던져지는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 이외에 구원의 문이 있는 줄 알고 이곳저곳을 기웃 거리죠. 그러다 사나운 이리에게 찢기고 상처만 받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날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양의 문이십니다.
다음, 들고 나며 풍성한 생명의 꼴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자입니다. 또 예수님으로 부터 언제든지 풍성한 생명의 꼴을 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푸른 초장에서 꼴을 풍족히 뜯고 쉬만한 물가에서 풍족히 생수를 마신 양은 살이 포동포동하게 찌죠? 따라서 목자는 양들을 어디가 푸른 초장인지 어디가 쉴만한 물가인기 알고 양을 그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양무리를 인도하는 목자가 가장 감당해야 할 우선 순위도 양들이 풍성하게 먹을 “말씀의 꼴”을 준비하고 흡족하게 마실 “성령의 생수”를 마련하여 공급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문을 들며 나며 의지하는 자는 주님만이 우리에게 주실수 있는 평안과 생명이 말씀으로 말미암는 영적 풍요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3. 선한 목자 예수님(10-18)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천국 문이 되시며 유일한 중보자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먼저,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란 단순히 착하고 성품이 좋은 목자라는 뜻은 아니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께서만 양이신 우리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타인이 나를 위해 간이나 신장 하나만 떼어주어도 생명의 은인이라며 고마워 합니다. 하물며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몽땅 죄인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 주신 사랑의 목자이십니다.
여기 ‘버리거니와’의 원문은 능동형으로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반면 12절에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삯꾼은 돈받고 일하는 고용인이죠. 따라서 양을 돌보는 목적은 삯입니다. 삯군도 겉 모양으로는 양을 돌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목자의 마음이 없습니다.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 갑니다. 아니 이리가 양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멀리서 이리가 오는 것만 봐도 삯군은 양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그가 도망가는 이유는 양을 위해 죽을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양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을 포함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아무리 겉으로 헌신한다 말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면 삯꾼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어떻게 양무리를 돌보셨나요?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노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이 선한 목자이십니다.
몇 년전 유럽 국제 수양회를 섬기러 갔다가 파송 선교사님을 만나러 체코 수도 프라하를 찾았습니다. 선교사님과 만나 반가운 교제를 나눈뒤 선교사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유럽 젊은이들이 다시 가보픈 여행지 단연 1위로 꼽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저는 파리 에펠탑 아님 런던 박물관 아닐까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고개를 흔들며 체코 수도 프라하를 관통하고 있는 불타바 강 위에 세워진 카를교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여기가 거기라는 것입니다.
거기 성인의 발자취를 새긴 2개의 부조가 있었습니다. 왼쪽은 네포무크에게 고해하는 왕비와 바츨로프 4세 조각과 오른쪽은 거꾸로 매달려 봍타강으로 떨어지는 네포모크의 모습이 새겨져 있더라구요. 카를교는 네포무크 동상에 새져진 동판을 만지며 사람들은 ’소원을 비는 곳‘으로 유명하답니다. 선교사님은 이 다리에 얽힌 사연을 이렇게 들려 주었습니다. 바츨라프 4세가 그의 아내 요안나를 의심하여 네포무크 요한 신부에게 고해 성사한 내용을 캐물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모진 고문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목자로서 황후의 비밀을 지켜준 것이지요. 마침내 분노한 왕이 네포무크를 볼타강에 내 던져 버렸습니다. 카를교는 네포무크가 순교한 다리로 유명합니다.
그후 사람들은 이 카를교 난간에 십자가와 네포무크 동상을 세웠습니다. 이런 연유로 서양의 젊은이들 네포무크를 기리며 다시 찾아 오는 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 10: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을 본받아 손양원 목사님이나 네포무크처럼 양을 위해 죽을 수 잇는 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또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선한 목자를 압니다. 어떻게 양인지 염소인지 알까요?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아는 사람이 양이고 모르는 이는 염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아는 이가 양이고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실 때 부르시는 이에게 달려가는 이가 양입니다. 마음과 머리에 선한 목자 음성이 입력된 이가 양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릴 때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양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서로 앎으로 온전한 일체를 이루셨죠? 그처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인 성도가 서로 알 때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 집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는데 어찌 서로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fold)에 있지 않는 다른 양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을 받아 들이고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 안에서 모두 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다시 얻기 위함이십니다. 또 이 일을 성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다시 얻는 다는 말은 죽음 이후 부활을 뜻합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나 다시 살아나 죄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그리고 그 목숨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양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십니다. 이 땅에 양으로서 죽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때가 되면 다시 살려 주십니다.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이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집에 거합니다.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때를 따라 꼴을 먹으며 주님 안에서 평안과 풍족한 삶을 누립니다. 오늘 하루 ‘양의 문’이시며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꼴을 먹으며 평안의 풍족함을 누리며 고난 중에 위로를 얻으며 사시는 복된 성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