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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 해설 1. 고난과 역경의 오아시스 ‘교회’ 에베소서는 A.D. 60년대 초에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다(참조. 엡 3:1; 4:1). 학자들은 이 서신서에 매우 흥미로운 별칭들을 붙여주고 있다. 도드 (C.H. Dodd)는 이 서신서를 가리켜 “바울사상의 왕관”(the crown of Paulinism”이라고 하고, 멕카이(J.A. Mackay)는 “가장 권위 있는 기독교 신앙 개요”(the most authoritative compendium of Christian faith), 브루스(F.F. Bruce)는 “바울사상의 진수”(the quintessence of Paulinism), 굿스피드(E.J. Goodspeed)는 “주석가들의 워터루”(the Waterloo of commentators), 바르트(M. Barth)는 “현관 앞의 낯선 손님”(a stranger at the door)이라고 한다. 이 별칭들은 에베소서의 높은 진가(眞價)를 묘사해 줄 뿐 아니라, 해석상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지에 대해서도 암시를 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서신서가 그만큼 보배로운 내용을 함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풀기 어려운 신학 난제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찾는 심정으로 이 서신서를 읽을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저자의 마음속을 캐듯 본문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수많은 학자들이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권을 부인하지만 필자는 본 서신서의 신학사상, 어휘, 문체, 범교회적 특징, 골로새서와의 유사점 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바울의 저작권을 옹호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에베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장은 교리적 부분이고 4-6장은 실천적 부분이다. 그렇다고 하여 전자에 후자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거나, 후자에 전자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바울은 교리를 말할 때도 실천을 염두에 두고 있고, 실천을 말할 때도 교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양자를 분리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에베소서는 전체적으로 교회론을 강조하는 서신서다. 이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연구가들 사이에 의견일치가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정작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교회”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뚜렷이 교회를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은 에베소서 독자가 겪는 거의 공통된 경험으로서 그 이유는 이 서신서가 바울의 방대한 신학사상을 압축형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의 헬라어 원문은 어려운 문장이 너무 많고, 단어 하나하나, 어구 하나하나 그 의미를 알기가 매우 까다롭다. 따라서 독자들은 본 서신서에 대한 문법적-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적, 신학적 이해를 시도할 때 그 표피 밑에 숨어 있는 교회론적 통찰들을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까지 가기 위해서는 정확한 본문 분석과 문맥의 흐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각 단위 본문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먼저 인사말을 한다. 그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수신자들을 위해 축복의 말을 한다. 지금 그는 사도로서 자신을 복음 증거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인식하고 있다. 내가 나를 누구로 인식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삶이 바로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지금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바울은 수신자를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지칭한다. “성도들”이란 거룩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믿는 사람들은 영적 차원에서 이미 죄 씻음 받고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들 속에는 세상 사람들과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 양자를 구분해 주는 결정적 요소는 “하나님의 의”다. 즉 믿는 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의” 가 있다. 물론 믿는 사람들도 죄를 짓는 일이 많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는 자들이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독소를 제거 받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과연 나는 세상에서 얼마나 구별된 모습을 나타내며 살고 있는가? 내게서 나는 냄새가 과연 그리스도의 향기인가, 아니면 사탄의 악취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역시 믿는 자들의 특징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살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기적 공동체 안에서 신실함이 없이는 존재의의(存在 意義)를 발견할 수 없다. 몸에 붙은 수많은 지체들이 각자의 기능을 신실히 수행할 때 몸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론적 관점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가? 보편교회 또는 개교회 안에서 나의 기능은 무엇인가? 과연 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인가? 셋째,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다. 이것은 “은혜”라고 하는 전형적인 헬라식 인사를 기독교적 개념으로 바꾸어 거기에 전형적인 히브리식 인사인 “평강”이라는 개념을 첨가한 말이다. 헬라인들에게 “은혜”는 단순히 “안녕”(hello)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으나, 바울은 이 단어를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사유의 은총”이란 뜻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평강”은 본래 전쟁이 그친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이나 복과 번영이라고 하는 적극적 의미를 함의하기도 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개념은 구속의 은총을 받은 자에게 오는 내적 평안을 가리킨다. 따라서 “은혜”와 “평강,” 이 두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간구할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한다. 모든 믿는 자들은 죄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패한 인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때로 너무도 매정하고 무서운 존재처럼 여겨져 거부해야 할 대상, 미워해야 할 대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인 그분은 회초리 이면에 뜨거운 사랑을 품고 계신 분이시다. 그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언제든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하게 맞아 줄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시다. 그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의 방을 마련해 놓고 언제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영원히 은닉된 미궁의 “뜻”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구현되는 가시적 실재(reality)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와”라는 등위접속사가 암시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시다. 그는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위해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만유의 주재이시다. 모든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구원을 설계하시고 그것을 구체화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100% 이해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주시는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께 은혜와 평강을 구하자. 2. 찬송이 터져 나오다 1) 하나님의 예정(엡1:3-6) 수신자들에 대한 인사에 이어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찬미로 그의 서신을 시작한다. 화산이 폭발하듯 바울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영혼의 탄성을 터뜨린다(3절). 삼위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그 근원에서부터 생각할 때 그는 찬미의 함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찬송하리로다”는 형용사 율로게토스(Euvloghto,j)의 번역으로 동사 율로게오(euvloge,w)에서 온 것이다. 이 단어의 뜻은 “찬미/찬양하다, 축복하다, 복/은혜를 베풀다”이다. 우리는 고린도후서1:3, 베드로전서1:3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볼 수 있다. 바울이 그토록 찬미의 탄성을 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 특히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체적으로 시행하실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유효적으로 성취하는 분이심을 생각할 때 감탄사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내용을 에베소서1:3-14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읽으며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에 진술된 내용이 바울의 교회론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변적 언어로 진술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믿는 자들(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본문(엡 1:3-6)은 주로 성부 하나님의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 분]”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찬양하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맘모니즘(mammonism)의 노예가 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돈, 명예, 권세, 건강, 출세, 성공, 향락 등 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로는 이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육신으로는 부인하고 싶어한다. 어떤 불의한 자들은 세상을 좀 시끄럽게 하고 수치를 당하더라도, 그래서 감옥에 간다 할지라도 한몫 크게 챙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물질로는 메울 길이 없는 큰 허공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 허공이 채워질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정상을 회복할 수 있고, 그가 소유한 물질도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에 매몰된 사람들은 허무감과 빈곤감 같은 것이 영적 기갈로부터 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피폐가 물질적 빈곤에 기인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물질로 영적 빈곤을 해소해 보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패배감, 좌절감을 이기지 못한 채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복”을 추구하지 않으니 불행의 선로(線路)를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설교자는 적극적 위치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전달하는 사역자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확신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사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그는 청중에게 천만금의 물질을 안겨주지 못하는 것으로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 생명의 말씀을 더 풍성하게 증언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한다. 아모스 선지자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한국교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촉촉해진 대지 위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만한 상태인가? 아니면 여전히 심각한 기갈인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시대의 지도자인 양 열연(熱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참조. 딤전 1:7). 성경은 여기저기서 교훈의 기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성숙단계로 나아가라고 가르치지 않는가?(히 6:1-2). 어린아이 상태를 벗고 진정한 어른이 되라고 호소하지 않는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당부하건만, 우리는 과연 명쾌히 간증할 것을 준비하고 있는가? 초보 수준도 안 되는 것을, 그것도 부정확한 언어로 반복 또 반복하고 있으니 무슨 준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제 단지 성경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의 언어와 문맥, 교훈과 메시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성경 진리에 자신을 믿음으로 결합시켜야 한다(히 4:2).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된 일이라고 짚어 준다. 에베소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공식구가 장소적 의미를 갖든 또는 수단적 의미를 갖든, “안에서”라는 전치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신령한 복을 베풀어 주신 조건을 가리킨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조건이 아니고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기대할 수 없다. 그럼 정작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무엇인가? 바울은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관심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많은 물질을 받아 부자가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아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는가이다. 사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예리한 구분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모든 물질세계도 영(靈)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양자(兩者)는 신비적으로 결합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에게 어떤 복을 가져왔는가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결정적으로 베풀어 주신 신령한 복은 “선택과 예정”이다(4-5절). 이 두 개념은 각기 다른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실재에 대한 두 표현이다. 양자 간에 차이가 있다면 “선택”은 수량적 국면을, “예정”은 시간적 국면을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택은 수많은 인류 중에 선별하였다는 것이고, 예정은 미리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우선 선택사상은 바울신학에서 매우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딤후2:10; 딛1:1도 참조할 것).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하여 이에서 제외된, 유기(遺棄)된 자들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는 것이냐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따지는 것은 주제 넘는 행위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소환하여 근원적 문제들에 대해 이유를 대라고 윽박지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 사이에, 모세와 바로 사이에 선택적 의지를 행사하실 권한이 없는 분이신가?(롬9:7-18).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이나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는 것인가?(롬9:21; 참조. 사29:16; 45:9).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 사랑과 공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그리고 거룩하심과 영원하심을 믿어야 할 뿐이다. 그리고 유기의 치명적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 예정사상은 바울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 중의 하나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영원 시간계가 무엇이며, 피조 시간계가 무엇이며, 또한 이 두 시간계의 결합의 비밀이 무엇인지 이해할 때 비로소 약간의 답을 얻을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바울의 가슴을 쾅 하고 울린 것은 하나님의 창세 전의 예정 이 양자(養子) 신분 획득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비교. 롬8:14-15).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양자(養子)됨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하고, 포괄적으로는 구원받음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숙명론 또는 운명론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 시점이 “창세 전”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고정된 시간 트렉(track) 안에 갇히신 분이 아니다. 그는 피조시간계 너머, 초자연적 영원한 시간 속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모든 예정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의와 사랑으로 충만한 만유의 주재이시기에 그의 기쁘신 뜻은 모든 신령한 복의 궁극적 근인(根因)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론이나 운명론 같은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역동적이며,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의 예정을 따라 인간사를 이끌어 가신다. 세상사가 아무리 가변적이고 예측불허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영원한 예정을 따라 역동적으로 인간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예정하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는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고, 당신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믿는 자의 지혜이며 행복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 부어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흑암의 우주 공간을 유리하는 별무리 같은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불신자들로서는 선택/예정을 하나님을 향해 날리고 싶은 비판의 화살로 삼고 싶을지 몰라도,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확신을 위한 든든한 반석과 같은 것이다. 구원의 출발점이 내게 있지 않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해설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바울은 왜 선택/예정을 거론했을까? 두 가지로 대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대인들이 선택을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할 때 바울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들임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1세기 유대교가 묵시문학의 영향으로 왜곡된 종말사상 위에서 메시야 왕국의 정치적 성취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종말, 즉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일 때, 바울은 시작, 즉 알파 포인트(alpha point)를 언급함으로써 유대교 사상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릇된 종말사상을 교정해 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령한 복의 근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그것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의 독자인 나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해 보자. 신앙인으로서 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터져 나오는 찬송이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과 만물 통일(엡1:7-10)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평생토록 교회 다녔기 때문이 아니다. 5대째 예수 믿는 집안이기 때문이 아니다. 안수 받고 목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죽을 고생을 하며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거액의 기부금 출연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수십 곳에 개척교회를 세운 공로 때문이 아니다. 수만 명 모이는 대형 교회를 일군 목회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기간에 큰 사업을 일으킨 입지전적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탁월한 설교가여서가 아니다. 21세기 종교개혁자라는 칭송을 받는 자여서가 아니다. 영향력 있는 책들을 쓴 저명 작가여서가 아니다. 불쌍한 노숙자들에게 무수한 날들 밥을 퍼 주고 독거노인들에게 연탄을 날라 준 특급 봉사자여서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여서가 아니다. 남다른 구제 활동으로 진열장에 가득한 감사패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다. 40일 금식기도를 세 차례씩이나 한 기도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받고 죄 사유(赦宥)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폐부 깊숙이 침착된 죄의 참상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말갛게 씻기시고 새 영(靈)을 부어주신 것이다. 이 결정적 과정이 없이는 갈기갈기 금이 가서 흉측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받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따지고 싶을 것이다. “아니 내가 왜 죄인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단 말인가?” 바울 사도는 지적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감사하지 않는 것,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것, 마음이 미련하게 되어 어두움의 지배를 받는 것,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며 오만을 떠는 것, 결과적으로 어리석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죄라고 선언한다(롬1:21-23). 타락한 영혼에 군살이 배기고 죄가 자리를 잡게 되면 건전한 종교성과 도덕성은 뒤틀리고 왜곡되어 희미한 양심의 울림마저 정지된 채 인간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해 부패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창조주 하나님을 팽개쳐 버리고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롬1:25). 또 성적 타락 같은 것은 개념마저 지워버리고 동성애도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마땅한 사랑의 한 양태이고 성경도 지지해 주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런 모든 행위가 죄라는 지적에 대해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상투적 주장일 뿐, 자신은 결코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러한가? 바울은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 살며 자기들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고 확신에 차서 어깨를 치켜들고 활보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그럼 왜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남들의 눈을 피해 도둑질하느냐? 왜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한 것으로 여기면서 왜 신전 물건을 도둑질 하느냐?”고 반문한다(롬 2:21-22). 그러면서 그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할 것 없이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부패한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끊임없이 남을 속이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지적한다(롬3:13-15).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악 됨을 지적하는데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성경의 거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자. 죄인인 것을 깨끗이 인정하자. 살 길은 여기서부터다. 자기 합리화만 하려하고, 자기 정당화만 하려 한다면 칠흑 같은 어둠의 벽은 자기를 더 꽁꽁 가두어 놓을 것이다.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만족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게 하셨다.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죄를 속량할 수 없다.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죄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죄란 아차 실수해서 잠시 주저앉았다가 일어서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주먹질을 해대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죄값을 치를 길이 없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려면 누군가가 속전을 내고 자기를 사서 풀어줘야 하듯,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서 죄의 결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도 없느니라”(히9:22, 사역. 참조. 출24:8). 역사 속의 한 지점에 객관적으로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울은 우리가 십자가의 피의 구속(救贖)을 믿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 지금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실현하며 살 것을 호소한다(롬8:1-17).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음이 어떻게 인류 구원을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 한 분의 죽음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우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셨고(참조. 창3:15), 그의 속죄의 피를 믿는 자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고 의롭다함과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한 사람 아담의 범죄가 인류 모두에게 죄를 몰고 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어 생명과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롬 5:12-21). 이것은 대표성과 연대성의 원리로 답하는 것인데, 아담이 타락한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또한 모든 인류가 아담과 연대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을 대표하고 또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연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罪)나 의(義)가 DNA처럼 유전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죄나 의는 생물학적 유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여 해당 그룹 전체를 통째로 보쌈해 버린다. 아담의 죄는 그의 모든 후예들을 사로잡아 사망으로 이끌어 가고, 제2의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의는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사로잡아 영생으로 이끌어간다. 사람들은 보통 가난, 질병, 기아, 갈등, 전쟁, 불화, 신분 등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죄’다. 죄는 인간을 부패하게 만들고, 부패한 인간은 끝없이 참혹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죄는 인간을 흑암으로 끌고 가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죄와 사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믿는 우리에게는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속량해 주신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올려드릴 뿐이다. 이제 8-10절로 가 보자. 이 본문은 독자에게 문맥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왜 바울은 7절에서 그 중요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속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놓고 갑자기 다른 이야기 곧 “하나님의 뜻의 비밀”에 대한 생소한 이야기로 전환하는 것인가? 두 이야기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부조화는 우리를 보다 더 큰 질문 속으로 끌어들인다. 사실 양자(兩者)는 부조화가 아니라 완전한 조화다. 창세 때 아담이 타락의 길을 걸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라. 그의 타락은 결국 창조세계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지 않았던가. 지금 만물은 비정상 상태 곧 썩어짐의 노예 상태에서 허무한 데 굴복하며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있지 않은가(롬 8:20-22). 바울이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간결하게 언급한 후에 ‘하나님의 뜻의 비밀’ 이야기로 넘어간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우주적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즉, 그는 제2의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온 우주의 회복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 맹목적적 묵시문학적 환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우주 만물의 비극적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과 함께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만물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비밀스런 의도를 갖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밀’은 신약에서 ‘계시’ ‘공지’ 개념과 맞물려 나타나는 특별한 단어다. 하나님의 만물 회복의 비밀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그 사실 곧 우주적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이란 다름 아닌 아나케팔라이오사스다이(avnakefalaiw,sasqai)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만물을 통일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피조세계를 하나로 재통합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은 이미 성취되었고, 우리가 알게 되었고, 첫 숟가락을 뜨는 것처럼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 되었다(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은 처음 창조 때의 상태를 능가하는 최상의 질서, 조화, 아름다움, 생명의 충만 상태로 회복시키기 원하시며 십자가를 통해 이 대사역을 이미 시작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겨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그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신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해결 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죄 사유의 은총은 나 한 개인에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사건이다. 십자가 구속과 죄 사유의 은총은 피조세계 전체의 궁극적 회복을 조망한다. 믿는 자가 ‘나의 구원’ ‘구원의 확신’ ‘내 집’ ‘내 가족’ ‘내 교회’를 마음에 품고 그 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관이 너무 협소하고, 때로는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어떠하고, 다른 민족의 삶이 어떠하고, 한국 교계가 어떠하고, 이단의 위험성이 어떠하고, 권력 구조가 어떠하고, 국가의 도덕성이 어떠하고, 사회 시스템이 어떠하고, 생태계가 어떠하고, 다음 세대에게 닥쳐올 미래가 어떠하고 등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관심하지 않은가? 우리의 구원관은 달라져야 한다. 눈을 떠서 주변을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보고, 피조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피조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머리가 열려서 새로운 차원에서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구원관을 지양하고 우주적 구원관을 확립해야 할 때다. 3) 성령으로 인치심(엡 1:11-14) 바울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찬미의 환호성을 올렸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때문이었다. 이제 바울은 신령한 복의 세 번째 항목을 크게 두 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의 의도를 따라 예정을 입어 그의 유업이 되었다(11-12절). 여기서 핵심은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글개역개정은“기업이 되었다”라고 하나 원문상 “유업이 되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것은 클레로오의 수동형 클레로데멘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클레로오는 “몫을 받다, 선택하다, 소유로 삼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수동태가 되면 “~의 몫으로 받아들여지다, ~의 몫이 되다, ~에 의해 선택되다, ~의 소유가 되다”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부르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애지중지하신다. 누가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워 금 100돈의 포상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겠는가? 인간에게 소유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저 집이 누구의 소유인가? 저 땅이 누구의 소유인가? 저 물건이 누구의 소유인가? 글을 쓰는 사람은 볼펜 한자루도 소중히 여긴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기를 분신처럼 여긴다. 농사 짓는 사람은 자기 연장을 살뜰히 간수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면 얼마나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겠는가? 스스로 학대하고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아무데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셨고,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시고, 우리의 행보(行步)와 우리가 하는 말을 아시며, 우리가 하늘 끝에 올라가 있든 어두운 천 길 지하 구덩이로 내려가 자리를 펴든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주한다 할지라도 거기서도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다(시 139:2-10). 시편 기자(다윗)는 말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시 139:17).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넌 내 거야. 내 사랑하는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산 내 소유야. 내가 책임진다”라고. 그런데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몫이 되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공적 권리선언 혹은 배타적 권리확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성경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여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바로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 이것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출 19:6) 곧 하나님 나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은 여기저기서 믿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확인시켜 준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9; 참조. 신 7:6; 9:29; 32:9도 볼 것) 지금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체로서 궁극적 완성의 날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다. 요한계시록 1:6; 5:10; 21:1-2, 22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성전의 궁극적 성취로서의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은 근원적으로 자기 뜻의 의도대로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함을 입어 성취된 일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바울은 에베소서 1:5에서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고 진술한 바 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대해 그 근원부터 밝혀주는 것은 성경뿐이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사로잡는 유명 디자이너의 옷이나 1천만 원 이상의 명품 핸드백이나 고가의 장신구로, 자신이 소유한 최고급 승용차나 대저택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위나 경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수 없다. 근원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계획하시고 당신의 뜻의 의도를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예정하시어 당신의 유업을 삼으신 일로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실이다. 신적 작정과 시행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없이는 꽃장식 금마차에 바퀴가 없는 것이나 같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작업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자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이시다(참조. 요 1:1-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유업으로 삼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미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2절, 필자 사역).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의 소망은 우리에게 용기와 인내를 주며,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게 하고, 종말론적 확신을 갖고 미래를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은 이런 특별한 소망을 가진 우리를 당신의 유업으로 삼아주신 것은 우리로 그의 영광을 찬미하는 존재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 지향점을 알지 못하면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궁사가 화살촉을 과녁에 조준하듯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 맞추지 않으면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게 돼 있다.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며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해도, 자기기만의 잘못된 레일에 올라타게 되면 처음에는 제대로 가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바울의 여러 고백들과 책망이 메아리쳐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고전 9:26)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로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피곤한 인생살이를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고 빛나는 삶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4) 바울의 기도(엡 1:15-19)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바울의 13개 서신서 안에서 그의 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본문들 가운데 하나다. 바울은 여기서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을 직접 보여준다. 물론 기도의 정의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슨 말로 기도할 것인가이다. 기도는 허공에 띄우는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그 언어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기도를 배우는 것, 즉 성경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기도를 했는지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내가 가르칠 테니 들어봐라’는 식의 기도, 풍부한 성경지식을 과시하는 듯한 기도, 신앙경력과 헌신을 자랑하는 듯한 기도,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의 문학적 감성을 뽐내는 기도, 뛰어난 구변으로 대중연설을 하는 듯한 기도, 푸념인지 넋두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기도, 남을 탓하며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 같은 기도,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것 같은 인신공격성 기도, 하늘 곳간을 열어 소나기처럼 쏟아부어 달라고 하나님께 으름장을 놓는 것 같은 기도, 신세 한탄 조의 기도, 회개인지 변명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도, 겸손히 간절하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소환해 놓고 윽박지르는 듯한 기도···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기도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예수께서 왜 제자들에게 “[너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사역을 기도로 시작하였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공문서까지 구비하고 조직을 동원하여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그리스도가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라고 하실 때, 그는 벼락을 맞는 듯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온몸에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 바울은 하늘에서 내리찍듯 자신에게 꽂히는 강한 빛으로 인해 시력을 상실하였고, 얼마 후 아나니아의 안수로 회복되었지만, 동행자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다메섹에 들어가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당시 그는 어린 시절의 예루살렘 유학생활에 대한 자부심이며, 풍부한 율법 지식이며, 랍비 신분 획득이며, 유대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누렸던 사회적 신분이며,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헌신이며, 들불처럼 번지는 신흥 이단종교(바울로서는 기독교)에 대한 강고한 처단 의지와 실행과 이로 인한 온갖 칭찬이며 ···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자기 발뒤꿈치 바로 뒤에서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 때 그의 참담한 심정은 지옥보다 더 깊은 흑암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목할 것이 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되어 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만나주신 주께 매달려 기도하였다(행 9:11). 자기 자신이 그분을 만났고, 음성을 들었고, 빛을 본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 길은 자신에게 충돌해 주신 그분을 찾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생명이 되시는 그분께 기도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의 섬세하신 계획을 따라 아나니아의 방문을 받고 그에 의해 안수를 받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아나니아의 예언을 따라 선교사역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뿐 아니라 세 차례 선교여행을 하며 개척 목회, 순회목회를 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기도로 모든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처음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가운데 아라비아 나바테아 왕국에 3년 동안 머물고 있을 때에도(갈 1:17; 행 9:23) 기도에 전념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가서 잠시 머무는 동안 아레다 4세의 위협으로 공포심에 짓눌려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며 열심히 기도했을 것이다(행 9:23-25; 고후 11:33). 그리고 광주리를 타고 밤에 다메섹을 탈출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도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였는데(행 22:17), 이때 그는 신비상태에서 주께로부터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행 22:17). 그는 아직 1차 선교여행도 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길리기아 다소로 가서 약 8년 정도 체재하는 가운데 신비상태에서 셋째 하늘 곧 낙원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고후 12:1-2), 이는 분명 기도 중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드디어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청빙이 있어 바나바와 함께 일 년간 동역한 후에 교회의 파송을 받고 1차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 장로를 세울 때 금식기도를 하였고(행 14:21-23), 2차 선교여행을 할 때도 틈이 날 때마다 기도처를 찾았으며(행 16:16), 축귀(逐鬼) 사건이 빌미가 되어 실라와 함께 옥에 갇힌 중에도 한밤중에 다른 죄수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기도와 찬송을 하였고(행 16:25), 3차 선교여행 중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한 후 헤어질 때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행 20:36), 다메섹 서남쪽의 해안도시인 두로의 제자들과 작별하기 전에도 바닷가에서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행 21:5).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가이사랴에서 구금생활을 하다가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가던 중 배가 난파되어 가까스로 멜리데섬에 올랐을 때도 그는 그 섬의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도하고 안수하며 치유해 주었다(행 28:8). 그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였고(엡 1:15-19; 3:14-19; 빌 1:9-11; 살전 1:2; 살후 1:11), 자신이 세우지 않은 교회들과도 계속 교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롬 1:9; 골 1:3, 9-12; 몬 1:4).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에 항상 힘쓰고(롬 12:12; 골 4:2; 엡 6:18),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고(빌 4:6), 쉬지 말고 기도하고(살전 5:17),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도고와 기도를 하라고(딤전 2:1) 당부한다. 또 그는 방언기도의 유익과 한계성을 언급하면서 영으로 기도하고 또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교훈한다(고전 13-14, 15). 그는 또한 기도자가 자신이 처한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창조의 원리와 사회적 상식과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장착해 주신 본성에 비추어 매무새를 경건히 하고 기도할 것을 교훈한다(고전 11:1-16).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대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서슴없이 부탁한다(롬 15:30; 고후 1:11; 살전 5:25; 살후 3:11). 이러한 기도의 사람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의 핵심 내용은 “저 성도들이 ~을 알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지식이 없으면 믿음이 견고히 설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지식은 마른 막대기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성경이 때로는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식에게 폭력을 가하고, 믿음에게 조롱을 보내는가? 지식에 대한 행패가 열등의식의 표출이고 믿음에 대한 경멸이 오만에 의해 생성된 불안의 표출이라면 이는 적그리스도적-반성경적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알고자 힘쓰는 사람들을 학문 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반성경적 행위이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독려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 대한 무지가 문제이지 그분에 대한 앎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곡해된 영성만 추구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위이다. 성경진리를 추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헌신된 자세로 최선의 학문적 노력을 경주해야 하고 동시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던 욥이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확신에 이르러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크게 두 가지를 알게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둘째,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마음 눈이 열려 보배로운 영적 지식들을 알게 해 주소서. 마음 눈이 닫힌 사람들은 영의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들은 물질세계를 넘어선 초월세계를 볼 수 없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들만 실재라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육신의 눈이 볼 수 있는 것들만 실재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왜소한 생각인가? 우주에 떠도는 먼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음 눈이 열린 사람들은 물리적 실재 너머에 영적 실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영적 감지력으로 초월적 세계에 있는 것들을 인식한다. 마음 눈이 열리지 않고는 영의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가치들을 볼 수 없다. 마음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선한 일들과 그가 베푸시고자 하시는 복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음 눈이 열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그가 베푸시는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마음 눈이 열려 세 가지 영적 사실들을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 (2) 하나님 나라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유업”(개역개정에는 “기업”)은 하나님 나라를 뜻한다. 믿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받은 자들이며 또한 궁극적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나라다.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부터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하늘 시민권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 쇠하지 않고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나라를 받은 자들이다. 이 나라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기에 풍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자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당신의 힘의 위력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지극히 크신 능력을 나타내 주셨다. 그분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세상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시어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늘에 나는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바다의 어족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 모두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나라와 권세와 영광 모든 것의 영원한 소유자시다. 그분은 사람들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려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치를 차지하게 하시는 분이시다(삼상 2:7-8). 우리가 그분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의 권세를 힘입어 영육간 최상급 부요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이상과 같은 지식을 갖출 때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것을 확신하면서 그들로 그렇게 보배로운 영적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기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참조. 약 4:8).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분이 응답해 주시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참조. 렘 33:3). 5) 교회란 무엇인가?(엡 1:20-23) 이 본문은 에베소서의 교회론을 대변하는 핵심 본문들 중의 하나다.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이 본문 하나로 신약의 교회론 전체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은 짧은 몇 마디 말로써 교회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실 바울은 이미 앞에서도 교회가 무엇인지 여러 가지 암시해 주었다. 이를테면 그는 간접적 방식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의해 형성된 선택공동체로, 만물통일의 구심점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공동체로 제시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영의 세계와 물질 세계, 초월 세계와 현상 세계, 신비 세계와 현실 세계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의 이러한 설명방식은 소위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 즉 교회를 “이 시대”와 “올 시대”의 중복지점에 정위시키는 독특한 종말론적 관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핵심은 역사의 종말에 최종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이미 이 세상과 교회에 침투하여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 살아야 할 목회자도 묻고 싶고, 신학자도 묻고 싶고, 일평생 교회를 떠나 살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묻고 싶은 질문이다. 아니 세상을 깊이 관조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불신자라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뭐 하는 사람들이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공산당들의 준동으로 심히 불안했던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었던 용기와 희생과 혁혁한 활동에 대해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런 기대 속에 교회를 바라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75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는가? 최근 10여 년을 뒤돌아볼 때 국정을 책임진 자들이 보여준 실망스러운 행동들, 성폭력 사건들, 특수 경제 범죄 사건들, 나라의 도덕성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사회상식을 무시하는 듯한 낯뜨거운 발언들, 마구 쏟아내는 막말들, 하나님을 모욕하는 언사들, 세인들의 보편적 기대를 저버린 행위들 ··· 어쩌다가 한국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아니 목사가 목사라는 것이 미안해지기까지 하는 이 상황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려면 부활·승천하시고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방을 좇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어디로 가셔서 무엇을 하시는지? 그리고 동시에 이분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께 어떤 임무를 맡기셨는지 물어야 한다.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본문의 문맥을 관찰하면서 바울이 교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자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해 주시라고 간구한다(19절). 뒤이어 나오는 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힘의 위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언급한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20절). 하나님은 당신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고전 15:17). 부활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가장 큰 소망이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부활을 푯대로 삼고 달려가는 삶을 사는 자들인 것을 밝히면서(빌 3:11-14), 종국에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선언한다(빌 3:21). 누가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는가? 첨단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섬모(纖毛) 하나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힘의 위력은 그리스도를 살려내신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하늘 위로 끌어 올리시고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 이곳은 물리적 공간의 어느 지점이라기보다는 초월적-영적 영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인간의 이성적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승귀의 위치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그분의 위치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그곳은 악한 천사적 존재들보다 뛰어난 최고 권자의 위치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승귀의 그리스도는 1세기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영물들보다 훨씬 뛰어난 권세자이시다. “통치,” “권세,” “능력,” “주권,” “이름”은 사탄(=마귀, 디아볼로스)의 왕국의 핵심 세력들 곧 악한 천사적 존재들을 가리킨다(롬 8:38; 고전 15:24; 엡 3:10; 6:12; 골 1:16; 2:10, 15). 이것들은 본래 천사적 존재들인데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영물들이다(유다서 6). 이 악한 영들은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사탄)의 명령을 따라 활동한다(엡 2:2). 바울은 그의 서신서 여러 곳에서 “귀신”(다이모니온)을 언급하는데, 이 영물은 우상을 매개로 인간의 종교성을 교란시키기도 하고(고전 10:20-21),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침투하여 건전한 이성의 활동을 훼방하기도 한다(딤전 4:1).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도 귀신들은 사람들로 병마에 시달리게도 하고, 괴이한 행동을 하게도 하고, 복음전파 활동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탄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으면 도리어 그와 동급이 될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켰다. 이 결정적 사건 이후 아담의 후예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사탄은 노아시대 사람들을 불경건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하였고, 바로를 분기(奮起)시켜 모세를 대적하게 하였고, 아합을 격분시켜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려 들게 하였고, 사울에게 시기심을 발동시켜 다윗을 제거하려 들게 하였고, 다윗의 마음을 오만과 욕정으로 채워 살인죄와 간음죄를 범하게 하였고, 발람 선지자를 더러운 탐심에 눈이 멀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게 하려 하였고, 3년 동안 예수와 동행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던 그의 제자들을 십자가 처형이 임박한 때 다 배반하고 줄행랑을 치게 만들었고, 가룟 유다로 예수를 은 30에 팔아넘기게 하였고, 유대 군중들로 예수 대신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빌라도를 향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며 괴성을 지르게 하였고, 세상의 수많은 독재자들로 살인마가 되게 하였고,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군으로 여러 나라 연약한 여성들을 유괴하듯 강탈하여 그들을 성노예로 전락시켰고, 권력욕에 눈이 먼 자들로 무고한 시민을 향해 총탄을 발사하게 하여 민족의 비애를 가중시켰고, 이단들을 간악하게 만들어 무지한 자들로 집단 우매에 빠지도록 하였고, 자칭 지도자라 하는 자들로 오만과 독선에 취해 이 시대의 개혁자인 양, 하나님의 선지자인 양 자기기만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역사 속에서 사탄이 자행해 온 짓, 하고 있는 짓, 앞으로 예견되는 짓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참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그의 핵심 세력들, 그리고 그의 졸개들의 행패를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의 속량으로 이미 이것들의 송곳니와 수염을 다 뽑아 버리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선언이며(골 2:15) 영원한 하나님 나라 확립의 공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는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붙들고 산다면 그 어떤 시련과 역경도 돌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곳은 만물보다 뛰어난 우주적 통치권자의 위치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승귀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다(시 8:6). 이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 곧 우주적 통치권자가 되신 것을 의미한다. 하늘과 하늘들 위의 하늘과 공중과 땅과 땅 아랫 곳과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우리는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뛰어난 최고의 통치권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리며 까악까악 부르짖을 때 먹이를 마련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해를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매일 동편 바다 끝에서 솟아오르게 하시며 전 인류로 그 열기의 혜택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햇빛을 비춰주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이 한 혈통으로부터 나와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여 살게 하시고 연대(年代)를 정하여 존속케 하시는 분이시다. 누구에게 나를 다스리도록 내어줄 것인가? 누구에게 나를 이끌어 가도록 허락할 것인가? 나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인가? 날개를 달고 날아갈 재물인가? 우리가 믿고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분은 우주적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뿐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도전하려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자신이 쟁취하려 한다. 니므롯은 시날 땅에 바벨탑을 쌓으며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큰 소리쳤다(창세기 11:4).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에게 도전하는 그들에게 언어를 흔잡케 하심으로 그들을 징치하셨다. 우리는 주의 높으신 권세를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에베소서 교회론의 진수(眞髓) 중의 진수는 승귀의 그리스도가 교회에 주어지셨다고 하는 것이다. 한글개역개정은 22절 하반절을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번역한다. 이는 원문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다. 이 번역은 국문법적으로 모호하고, 의미구성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영역본들을 보라. 거의 모든 영역본들이 원문과 일치한 번역을 내놓고 있다. 원문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이 그[그리스도] 곧 만물의 머리를 교회에 주셨다”라는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그토록 높으신 우주적 통치권자(그리스도)를 교회가 받았으니 교회가 어떤 실재인가를 인식해 보라는 것이다. 우주적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땅에 존재 하는 교회와의 신비적 결합은 교회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리스도에게 교회가 무엇이지 생각하게 한다. 이 결합은 교회가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우주 중에 가장 중요한 실재임을 암시한다. 교회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매일 시달리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높으신 권세와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특별한 기관이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에이전트와 같은 기관이다. 하나님이 승귀의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교회를 어떤 존재로 여기시겠는가?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기의 몸으로 여기신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23절 상반 절). 이것은 일종의 그림 언어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얼마나 귀중히 여기시는지에 대한 표현이다. 그분은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본능과 의식을 전량 가동하여 자기 몸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신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충만케 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신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23절 하반절). 교회를 자기 몸으로 여기시는 그리스도는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케 된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며, 에베소서 교회론의 핵심이다. 바울은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과감하게 교회를 만물 안에 계시면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충만하게 된 실재라고 선언하고 있다. “충만”이라는 것은 물이 가득 부어진 컵처럼 승귀의 그리스도의 모든 것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 곧 더할 나위 없이 충족한 상태를 의미한다. 영적 차원에서 볼 때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로 충만케 된 실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충만인 것을 깨닫고 그 사실을 삶 속에서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이 교회를 충만케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성령을 부으시고(참조. 막 9:10; 마 16:28; 눅 9:27), 필요한 모든 은사들을 보내 주시며, 영육간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교회는 자신이 충만인 것을 실제 삶을 통해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적 삶을 위해 힘쓰는 교회는 결코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결코 자신을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게 하지 않는다. 참된 교회는 악한 영들을 분별하고 그것들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의지하여 그것들과 담대히 맞서 싸워야 한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삶 속에서 실증해 보임으로 세상에 참된 부요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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