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光州)로 가는 길
김창승
김 군은 光州로 가기위해 양화점에서 맞춘 가죽 구두를 내어 신고 끈을 조여 매었다. 이 가죽구두는 그가 처음으로 신어 보는 삼각형 코모양의 옥스포드형 뽀삐 구두다. 며칠 전부터 약을 바르고 연탄불에 구워가며 반질반질 광을 냈고 굽에는 찡을 넣었다. 그가 걸어 가면 짜그락 찌그락 소리가 났다. 김 군은 이 뽀삐 구두를 신고 뾰죽뾰쭉 갓 길어나기 시작한 머리칼로 光州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光州로 가는 초행의 길가엔 아지랑이가 짙은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 피어오르고 그의 벅찬 가슴도 꿍꿍 방망이 소리를 냈다. 초봄의 개나리도 막 노오란 물을 빨아 올려 한 두 방울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긴 겨울 내내 움추렸던 황토빛 들판도 외양간 소 울음소리에 기지개를 펴며 짙은 안개 속에 실려 오는 봄기운을 찬미하듯 몸을 부풀리고 있는 이른 봄이었다. 그는 창가에 스치는 봄날의 풍광을 꿈결처럼 느끼며 생애 처음으로 홀로 설, 光州 용봉동으로 가는 중이다. 그에겐 이미 열여덟 번의 봄이 있었지만 光州로 가며 바라보는 이 초봄의 산천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 새로운 봄이 분명했다. 한 마리 종달새가 창공을 날고 있었다.
북쪽으로 달리던 버스는 한 시간 반 만에 계림동 버스터미널로 들어섰고 김 군은 버스에서 내려 빛고을 光州 땅에 첫 발을 내딛었다. 짜그락 찌그락 구두 뒷굽에서 나는 쇠 울림소리가 신선했다. 내려 바라본 光州는 그가 살았던 소도시보다 훨씬 크고 밀집된 도시었다. 건물도 집들도 사람도....... 저 멀리 전일빌딩 건물이 이마를 드러내며 서 있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계림소방서를 지나자 계림극장이 있었다.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영화간판을 올려다봤다. 상영 중인 영화는 '스타워즈', 별들의 전쟁이었다. 극장 앞을 가로 질러 걸어가자 큰 네거리가 나왔다. 光州의 등뼈 같은 금남로였다. 그는 그 길을 통해 光州로 빨려 들어갔다. 별들의 전쟁에서 작은 혜성이 큰 별로 빨려 들어가듯이 그렇게 光州로 빨려 들어갔다. 충장파출소를 지나 충장로 길을 음미하듯 천천히 걸어 우체국 앞까지 와 섰다. 불과 두 시간 전, 가죽구두 신고 떠날 때의 그는 오래전의 인물 같았고 아주 멀리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선 신열이 나는 듯 했고 약간의 현기증도 났다. 그러면서도 감미로웠고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어떤 친밀감이 드는 거리었다. 끈끈한 인연의 길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썰물 밀물처럼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게 신기했고 네거리 음악사에서 흘러나오는 김민기의 "친구"는 그의 光州입성을 환영하는 듯 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감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 할 사람 어디 있겠소." 흘러나오는 음악의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서 있자니 아침이슬 같은 도시의 한복판에서 오래도록 소식 없는 친구를 꼭 만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김 군과 광주와의 만남은 이렇듯 설레고 신열이 나는 이른 봄의 아지랑이 같았다.
김 군은 광주에 온 이후 늘 그 거리로 갔다. 그 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계림에서 몇 편의 영화를 봤고 황금동 뒷골목에서 토끼탕에 소주를 마셨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광주 사람이 되어 갔다. 때는 독한 소주보다도 더 지독한 70년대 말, 깜깜한 밤이었다. 그는 금남로에서 동무들과 어깨동무로 아침이슬을 부르며 시대의 어둠을 넘어 새아침이 열리길 염원했다. 학교 캠퍼스는 최루탄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안개처럼 자욱했고 거리는 외침의 구호로 가득 찼다. 光州는 시대의 전위가 되어 점점 뜨거워졌다. 그의 눈에도 점점 핏발이 서 갔다.
80년 오월에
검푸른 바다 같은 제복은 군화발로 이 아침이슬 같은 도시를 뭉개고 친구들을 뭉갰다. 그 때, 김 군은 이 도시를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마지막 버스로 이 도시를 떠난 그 밤 이후, 그는 서울, 경기 소도시를 떠돌며 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서도 그의 마음속엔 늘 이 도시, 거리, 친구들이 있었다. 눈을 감으면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光州의 아픔과 함께하지 못한 무기력과 나약함을 탓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한 번은 꼭 그 도시에 서 있기를 열망했다. 광주로 가는 길이 그의 꿈이 되었다.
2014년 이른 봄날에
그는 光州 인근 시골로 내려왔다. 그리곤 곧장 光州에 갔다. 늘 꿈에 그리던, 죄송했던 光州였다. 그의 처음 그날처럼 버스에 올라 光州로 가서 잊을 수 없었던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계림동, 금남로, 충장로, 우체국, 그에게 光州의 나침판 역할을 했던 전일빌딩 앞까지. 그는 그 빌딩 앞에서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더 걸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숨이 막혔다. 그 곳엔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꼭 다문 먹빛 동상이 서 있었다. "그 날!" 이었다. 아! 옛 친구였다.
친구여!
친구여! 용서해 다오. 그는 눈을 감고 전율하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친구들의 함성, 친구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잘 왔다. 친구야. 다시 光州로!, 어머니 품으로”
다정한 눈빛, 다감한 얼굴의 친구들 음성이었다. 그때 엄마의 음성도 들려왔다. 늘 거리에 있던 자식을 걱정했고 이 光州에서 하늘로 가신 어머니셨다. 그 자리 거기서 그는 다시 光州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옥죄던 가슴이 홀가분해졌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종달새 한 마리가 창공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충장로 우체국 앞까지 걸어왔을 때 한 젊은이가 이 거리를 깊게, 신기한 듯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오래전 그처럼
<심 사 평-오덕렬(수필가)>
○ 제2회 무등산 사랑글 공모전
- 수필 우수작
○ 김창승의 <광주(光州)로 가는 길>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어느 9월의 무등산>, <아! 무등산>, <무등산>, <무등산 길을 찾아>, <무등산 은빛 억새>, <광주(光州)로 가는 길> 등 7편이었다. 그중에는 에세이적인 성격이 짙은 수필도 있고, 창작·창작적인 수필도 있었다.
당선작을 가려내기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작품들의 장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주제를 온몸으로 실현한 <광주(光州)로 가는 길>(김창승)이 돋보였다.
이 수필의 장점은 공모 주제를 잘 살렸다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수필하면 ‘나’의 시점의 ‘붓 가는 대로’라는 이론 아닌 이론을 서두 한 문장으로 깨버린 것이다. “김 군은 光州로 가기 위해 양화점에서 가죽구두를 내어 신고 끈을 조여 매었다.”가 그것이다. 즉 ‘김 군’으로 주인공을 설정하고, 3인칭 시점으로 시야를 넓혀 글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수필은 시·소설과 달라서 사실의 소재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가 제재로 삼는 문학이다. 그만큼 문학화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점을 주인공을 ‘김 군’으로 내세워 극복하려 했고, 구성을 염두에 둔 작품이다. 광주 입성을 환영하는 노래 ‘친구’에서 ‘아침이슬’로 이어지는데 마음속으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이 아닐까. 상관물로 ‘종달새’를 등장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김 군→종달새→(작가)’로 독자를 끌고 가고 있다. 종달새는 하늘로 치솟아 자유를 노래하고 있었는가. 아니다. “창공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문학은 진화·변모한다. 지금 수필문학은 비창작 일반산문인 에세이(수필)에서 창작·창작적인 수필로 진화의 한 단계를 마친 상태다. 이 작품은 그 변모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창작수필 작가로 성장할 잠재력을 보이고 있다. 이에 김창승의 <광주(光州)로 가는 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축하하며 대성할 것을 기대한다.
2014. 9. 16.
심사위원장 오 덕 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