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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측의 증인 (3)
볼 부부는 런던 서쪽의 패딩턴 그린 근처의 한 작고 초라한 집에 살고 있었다. 메이헌 씨는 그 집으로 갔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자, 파출부임이 분명한 몸집이 크고 단정치 못한 한 여인이 문을 열었다.
"볼 씨 댁이죠? 부인께서 돌아오셨는지요 ?"
"한 시간 전에 오셨어요. 하지만, 만나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내 명함을 갖다 주면 틀림없이 만나자고 할 거요." 메이헌 변호사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 여인은 그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앞치마에 손을 닦고 그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런 뒤 그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고 그를 바깥 계단에 세워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분 뒤 그녀는 약간 달라진 태도로 돌아왔다.
"들어오세요."
그녀는 그를 조그만 응접실로 안내했다. 메이헌 변호사는 벽에 걸린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용하게 들어온 키가 크고 가날픈 여자를 마주 보고 깜짝 놀랐다.
"메이헌 씨? 선생님이 제 남편의 변호사시죠? 그이가 당신을 보냈나요? 좀 앉으시겠어요?"
그는 그녀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영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를 좀더 자세히 관팔해 보니, 툭 튀어나온 광대뼈며, 짙은 감색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하며, 이따금씩 나오는 그 가벼운 손동작이 명백히 이국적이었다. 야릇한 분위기의 아주 조용한 여자였다. 너무 조용해서 불안할 정도였다.
바로 첫 순간부터 메이헌 씨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직면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볼 부인 - " 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절대 포기해서는 - "
그는 멈췄다. 로메인 볼은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고 냉정했다.
"그 사건에 관해 모두 말슴해 주시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해요. 제게 신경쓰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저는 최악의 상태를 알고 싶어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나지막한 어조로 되풀이했는데, 거기에는 그 변호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어감이 기들어 있었다. "저는 최악의 상태를 알고 싶어요."
메이헌 씨는 레너드 볼과 나눈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그녀는 가끔 머리를 끄덕이며 주의깊게 들었다.
"알겠어요." 그가 말을 마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이는 제가 그날 밤 자기가 9시 20분에 들어왔다고 말해 주기를 원한단 말이죠?"
"남편은 정말 그 시간에 들어왔습니까?" 메이헌 씨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것은 문제가 안 돼요."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제가 그렇게 말하면 그이가 석방될까요? 그들이 제 말을 믿어 줄까요?"
메이헌 씨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문제의 핵심을 너무도 빨리 알아차렸던 것이다.
"저는 바로 그게 알고 싶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충분한가요? 제 증언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나요?"
그녀의 태도에 감춰진 간절함에 변호사는 어렴춧하게나마 불안을 느꼈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없습니다." 변호사는 마지못해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요 - " 하고 로메인 볼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변호사는 점점 더 의아스러워졌다.
"볼 부인 - " 하고 그가 말했다. " 당신의 심정이 어떤지 잘 알고 있습니다 - "
"그러세요 ?" 그녀가 말했다. "흥미 있군요."
"상황이 그러하니만큼 - "
"상황이 그러하니만큼 - 저는 혼자 힘으로 해보겠어요."
그는 당황하여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렇지만, 볼 부인 - 부인은 너무 긴장하고 있어요. 부인이 남편에게 너무 헌신적인 나머지 - "
"예 ? 뭐라고 하셨어요 ?"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날카로왔던지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주저주저하며 되풀이했다. "부인이 남편에게 너무 헌신적인 나머지 - "
로메인 볼은 여전히 입가에 그 이상한 미소를 띤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헌신적이라고 그이가 말하던가요?" 그녀가 상냥하게 물었다.
"아! 예, 그랬을 거예요. 남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어리석고 - 어리석고 - 정말 어리석군요 - "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변호사가 그 분위기에서 줄곧 느끼고 있었던 긴장감이 이제 온통 그녀의 어조에 집중되어 있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이를 증오해요! 증오해요, 증오한다고요! 전 그이가 교수형 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요."
변호사는 그녀의 눈에 끓어오르는 격정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아마 저는 그것을 보게 될 거에요. 제가 선생님에게 그날 밤 그이는 9시 20분이 아니라, 10시 20분에 들어왔다고 말슴드린다면요? 그이는 자기에게 들어올 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을 했다고 하셨는데, 제가 선생님에게 그이는 그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기대했으며,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씀드린다면요? 그날 밤 그이가 들어와서 자신이 한 일을 제게 모두 털어놨다면? 그이의 외투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말씀드린다면? 그런 다음 어떻게 할까요? 제가 법정에 서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말한다면?"
그녀의 눈은 그에게 도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점점 더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려고 애쓰며, 차분한 어조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아내는 법정에서 자기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습니다 - "
"그 사람은 제 남편이 아니에요 !"
그 말이 너무 빨리 나왔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말을 잘 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 "
"그 사람은 제 남편이 아니라고요."
침묵이 너무 깊어 핀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전 과거에 빈에서 여배우로 지내고 있었어요. 제 남편은 아직도 살아 있어요. 하지만 정신병원에 있죠.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오히려 잘 된 일이죠." 그녀는 도전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한 가지만 말해 주시오." 하고 메이헌 씨가 말했다. 그는 여전히 냉정하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레너드 볼에 대해서 왜 그렇게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그녀는 약간 미소를 띤 채 머리를 흔들었다.
"예, 선생님은 그걸 알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얘기하지 않겠어요. 전 제 비밀을 지키겠어요."
메이헌 씨는 짤막하게 마른 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얘기를 더 나눈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겠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내 변호 의뢰인과 이야기해 본 다음 다시 연락드리겠소."
그녀는 그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와, 그 이상한 검은 눈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말씀해 주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은 오늘 여기에 오실 때 그이가 무죄라고 - 정말로 - 믿으셨나요?"
"그랬소 - " 하고 메이헌 씨가 말했다.
"정말 한심하시군요."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소." 라고 변호사는 끝을 맺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인." 그녀의 놀란 얼굴을 뒤로 하고 방을 나왔다. '이거 야단났는데!' 하고 생각하며 메이헌 씨는 거리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상한 여자, 아주 위험한 여자, 여자들은 원한을 품으면 악마로 변하는군.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불행한 젊은이한테는 이제 지탱하고 일어설 다리 다리 하나가 없는 셈이다. 물론, 어쩌면 그가 그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잰장!' 메이헌 씨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젠장 - 그에게는 불리한 증거가 너무 많아. 하지만,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아. 그녀는 모든 이야기를 꾸며대고 있어. 그래도 법정에서까지야 그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
검찰측의 증인 (4)
경찰의 법정 진술은 간단하고 극적이었다. 검찰측의 주요 증인은 죽은 여인의 하녀였던 재닛 매킨지와 피고의 정부(情婦)인 오스트리아 국적의 로메인 하일저였다.
메이헌 변호사는 법정에 앉아서 로메인 하일저가 말하는 그 끔찍한 이야기를 죄다 들었다. 그 얘기는 지난번 그 부인과 만났을 때 한 그대로였다.
피고는 자신의 변호를 보류한 채 재판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메이헌 변호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레너드 볼에 대해 그 사건은 불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피고측에 선 그 유명한 왕실 고문 변호사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만일 그 오스트리아 여인의 증언을 흔들리게 할 수만 있다면, 뭔가 될 것도 같은데." 하고 그는 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게 좀 어려워야 말이지."
메이헌 변호사는 한 가지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레너드 볼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9시에 그 살해된 여인의 집에서 나왔다면, 재닛이 9시 반에 프렌치 양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는 그 남자는 누구일까?
오직 한 줄기 빛을 찾아볼 수 있다면, 과거에 돈이 없어 자기 아주머니(죽은 프렌치 양)를 여러 번 속이고 협박한 망나니 조카한테서였다. 재닛 메킨지도 변호사가 알기로는, 그 젊은이를 꽤 좋하해서 자기 여주인에게 돈을 좀 주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늘 다니던 곳의 어디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을 보아 레너드 볼이 프렌치 양의 집을 떠난 뒤 프렌치 양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확실히 그 조카일 가능성이 높았다.
변호사는 그 밖의 모든 다른 방향으로도 조사해 보았으나,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레너드 볼이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프렌치 양의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크리클우드에 있는 프렌치 양의 집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다른 어떤 남자를본 사람도 없엇다. 조사해 본 것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메이헌 변호사가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게끔 된 편지를 받은 것은 재판이 다시 시작되기 전날 저녁이었다.
그것은 6시경 우편으로 왔다. 싸구려 편지지에 무식하게 휘갈겨 써서는, 우표도 비뚤게 붙인 더러운 봉투에 넣은 것이었다.
메이헌 변호사는 그것을 한두 번 읽고 나서야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친애하는 선생님
당신은 그 젊은 친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변호사 양반이오.
만일 그 바람둥이 외국 여자가 말하는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싶으면 오늘밤 스티프니에 있는 쇼네 셋집 16번
지로 오시오. 200파운가 들거요. 목슨 부인을 찾으시오.
변호사는 이 이상한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물론 못된 장난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점점 더 그것이 진짜라는 확신이 들었으며, 그것만이 피고를 위한 유일한 희망 같았다.
로메인 하일저의 증언은 피고를 완저히 구것으로 몰아넣어서, 변호인측이 구상하고 있는 방향, 즉 부도덕한 생활을 한 여인의 증언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을 것만 같았다.
메이헌 변호사는 결심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의뢰인을 구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는 쇼네 셋침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빈민가에서 그 쓰러질 듯한 건물을 겨우 찾아네어 목슨 부인을 찾자, 4층의 한 방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그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이 없어 다시 두드렸다.
두 번째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득고 문이 반 인치 가량 조심스페 열리고, 허리가 구부러진 사람이 빼꼼히 내다보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 그건 여자였다 - 갑자기 낄낄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당신이었군 그래." 그녀는 씩씩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온 사람은 아무도 없소?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니겠지? 그럼 좋아요. 들어와요 - 들어오라니까."
변호사는 좀 머무적거리며 문지방을 넘어 가스등의 불꽃이 어른거리는 그 조그맣고 더러운 방으로 들어갔다. 이부자리도 개지 않는 채 너저분한 침대가 한쪽 구석에 있었으며, 평범한 전나무 탁자 하나와 다 쓰러져 가는 의자 두 개가 잇었다. 메이헌 씨는 그 불쾌한 세방의 거주자를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허리가 굽은 중년 여인으로, 회색 머리는 더부룩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스카프를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변호사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자, 다시 그 이상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가 예쁜 얼굴을 왜 감추고 있는지 궁금하죠, 그렇죠? 히히히. 그게 당신을 유혹할까 봐? 하지만 보여 드리지 - 보여 드리고 말고."
그녀가 스카프를 옆으로 젖히자, 그는 심하게 문드러져 있는 새빨간 흉터 자국을 보고 숨이 탁 막혔다. 그녀는 스카프를 다시 가렸다.
"이젠 입맞추고 싶지 않으시겠지? 히히,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나 나도 예전에는 예쁜 여자였다오 -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지, 황산이오, 황산 - 그게 이렇게 만들었소. 아! 하지만 나도 갚아 줄 거야 - "
그녀가 갑자기 불결한 말을 소름끼칠 정도로 마구 내뱉기에 메이헌 변호사가 진정시키려고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잠잠해지더니 손을 신경질적으로 쥐었다 풀었다 했다.
"이젠 그만하시오." 하고 변호사가 위압적으로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이 레너드 볼이라는 내 의뢰인의 협의를 풀어 줄 정보를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오. 그럴 수 있겠소?"
그녀는 교활하게 그를 곁눈질했다.
"돈은 어떻게 됐죠 ?" 그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정확하게 200파운드요."
"증언을 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할 수 있소."
"그렇게는 안 될걸. 나는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나, 당신이 나한테 200파운드를 주면 한두 가지 힌트는 줄 수 있지. 알겠소?"
"어떤 힌트를 ?"
"편지라면 뭐라고 할 테요? 그녀가 쓴 편지라면. 내가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신경쓰지 말아요. 그건 내 일이니까. 그것만 있으면 될 거요. 하지만 나는 200파운를 받아야겠어."
메이헌씨는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고는 마음을 굳혔다.
"10파운를 주겠소. 더는 못 줍니다. 그것도 그 편지가 당신이 말하는 대로일 경우에만 주겠소."
"10파운드 ?" 그녀는 사납게 소리쳤다.
"20 - "하고 메이헌 변호사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그는 갈 것처럼 일어섰다. 그런 그녀를 자세히 지켜보며, 지갑을 꺼내어 지폐로 21파운드를 세었다.
"보다시피 - " 하고 그가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요. 받든 말든 알아서 하시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돈만 해도 그녀에게는 굉장히 큰 액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력하게 욕설을 퍼붓고 날뛰더니, 결국엔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침대로 가서 그 누덕누덕한 시트 밑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여기 있소, 빌어먹을 !" 그녀는 버럭버럭 소리지르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것일 게요."
그녀가 그에게 던져 준 것은 편지 뭉치였는데, 메이헌 변호사는 그것들을 풀어 평소의 그 차분하고 정연한 태도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여인은 그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태연한 얼굴에서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편지를 하나씩 자세히 읽어 본 다음, 맨 위의 편지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런 다음 그 뭉치를 다시 조심스럽게 묶었다.
그것은 로메인 하일저가 쓴 연애편지였는데, 수신인은 레너드 볼이 아니었다. 맨 위의 편지는 그가 구속되던 날에 쓰여진 것이었다.
"내 말이 맞을 거요, 안 그래요?" 하고 그 여인이 투덜거렸다. "그 편지만 있으면 그년이 꼼짝 못하겠지?"
메이헌 변호사는 그 편지들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한 가지를 물었다.
"이 편지들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소 ?"
"그런 말을 하면 비밀이 탄로나요." 그녀는 곁눈질하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는 게 더 있지. 나는 법정에서 그 창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소. 그년이 집에 있었다고 말한 10시 20분에 그년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아내 봐요. 라이언 로드 극장에 가서 물어 봐요. 그들이 기억할 게요 - 그와 같은 늘씬하고 잘빠진 여우라면 - 빌어먹을!"
"그 남자는 누구요?" 하고 메이헌 변호사가 물었다. "여기에는 세례명밖에는 없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더 세고 거칠어졌으며, 손을 계속 쥐었다 풀었다 했다. 마침내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얼굴로 가져 갔다.
"나를 이렇게 만든 남자. 이제는 몇 년 전 일이 되었지만. 그년이 내게서 그를 가로챘소 - 그 때 그년은 깜찍한 계집애였지. 그래서 내가 그를 뒤쫓아가서 - 그에게 덤벼들자 - 그가 그 빌어 먹을 물건을 내게 집어 던졌어요! 그랬더니 그 망할 놈의 계집애가 웃는 거예요 - 앙큼한 것 같으니라고! 나는 몇 년 동안 그년에게 원한을 품어 왔어요. 그 계집을 따라다니며 감시했지. 그래서 이제야 겨우 붙잡은 거라고요! 그 계집은 이것 때문에 틀림없이 벌받을 거요, 안 그렇소, 변호사 양반?"
"아마 위증죄로 금고형을 받게 될 거요." 하고 메이헌 변호사가 조용하게 말했다.
"감옥에 간단 말이지 - 그랬으면 정말 좋겠소. 가시려고? 돈은 어디 있어요? 그 멋진 돈이 어디 있냔 말이오?"
그는 군말없이 그 지폐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숨을 깊게 쉬고는 돌아서서 그 더러운 방을 나왔다. 뒤돌아보니 그 늙은 여인은 그 돈을 보고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라이언로(路)에 있는 그 극장을 쉽게 찾아네어 로메인 하일저의 사진을 보여 주자, 제복을 입은 수위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문제의 그날 저녁 10시가 조금 넘어서 한 남자와 그 극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와 하께 온 남자는 특별히 눈여겨 보지는 않앗지만, 자기에게 상영중인 영화에 대해 물어 보았던 그 부인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한 시간 뒤인, 영화가 끝나는 시각까지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메이헌 변호사는 만족해 했다. 로메인 하일저의 증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말투성이였다. 메이헌 변호사는 그녀의 증오 뒤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레너드 볼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메이헌 변호사가 그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말해 주었을 때, 그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런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 그러나, 메이헌 변호사가 보기엔 처음에 그녀가 놀라움을 표시하고 나서 한 변명에는 진실성이 결여된 것처럼 느꼈었다.
볼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헌 변호사는 그것을 확신했다.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던 것이리라.
그 두 사람 사이의 비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메이헌 변호사는 조만간 그게 무엇인지 밝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변호사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잠시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택시를 불러세워 운전사에게 주소를 말했다.
"왕실 변호사 찰스 경이 이 사실을 당장 알아야 해." 그는 올라타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
검찰측의 증인 (5) 마지막
에밀리 프렌치 노파 살해에 대한 레너드 볼의 재판은 사람들의 관심을 널리 불러일으켰다. 우선 피고가 젊고 잘생긴 데다 아주 비열한 죄로 기소되었으며, 검찰측의 주요 증인인 로메인 하일저에 대한 흥미까지 겹친 것이었다. 수 많은 신문에 그녀의 사진과 함께 신문에 그녀의 사진과 함께 그녀의 출생과 과거에 대한 여러 가지 억측 기사가 실렸다.
재판 절차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속개되었다. 가지가지의 전문적인 증거들이 제일 먼저 나왔다. 그런 다음 재닛 매킨지가 소환되엇다. 그녀는 대체로 전과 똑같은 진술을 했다. 반대 심문에서 피고측 변호사는 볼과 프렌치 양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설명에 관해 한두 번인가 진술이 모순 되게끔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그날 밤 그녀가 응접실에서 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도,ㅡ 거기에 있었던 사람이 볼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그녀의 증언 저변에는 피고에 대한 질투심과 반감이 많이 깔려 있다는 그낌을 그
럭저럭 납득시켰다.
그리고 나서 다음 증인이 소환되었다.
"당신의 이름은 로메인 하일저입니까?"
"예."
"당신은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졌습니까 ?"
"예."
"지난 3년 동안 당신은 피고와 함께 살며 그의 아내로 알려져 왔지요?"
로메인 하일저의 눈이 잠시 피고석에 있는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엔 이상하고도 불가해한 어떤 것이 담겨져 있었다.
"예."
심문이 계속되엇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한 마디 그 저주스런 사실들을 뱉어냈다. 문제의 그날 밤 피고는 쇠막대를 가지고 나갔다. 그는 10시 20분에 돌아와서, 그 노부인을 죽였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소맷부리는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는 부엌에 있는 난로에다 그것을 태워 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겁을 주며 위협했다.
진수이 진행됨에 따라, 처음에는 기고에게 약간 호의적이었던 법정의 분위기가 이젠 그에게 아주 불리하게 굳어져 버렸다. 그는 이제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고개를 축 숙이고 우울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검찰측 역시 로메인의 악의(惡意)에 가득찬 진술을 억제토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수도 있었으리라. 검찰측에서는 그녀가 좀더 공평하기를 원했다.
만만찮게 무게를 잡으며 피고측 변호사가 일어섰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의에 찬 거짓말이며, 그녀는 문제의 그 시각에 집에 있지조차 않았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으며, 볼을 일부러 사형시키려고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지었다고 고의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추궁했다.
로메인은 아주 거만하게 이 주장을 부인했다.
그 때 그 편지를 제출하여 깜짝 놀랄 만한 결말에 접어 들었다. 숨막힐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그것이 법정에서 소리내어 읽혀졌다.
"사랑하는 맥스, 운명의 여신들이 드디어 그를 우리 손에 넘겨
주었어요! 그는 살인죄로 구속되엇답니다 - 예, 물론 그 노부인
을 살해한 혐의로요!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레너드가
말예요! 드디어 나는 복수를 하게 되었어요. 불쌍한 겁장이!
나는 그날 밤 그가 옷에 피를 묻힌 채 들어왔다고 말하겠어요.
또, 그가 내게 털어놨다고도 말하겠어요. 그를 교수형당하게 하
겠어요. 맥스, 그가 교수형에 처해질 때, 그는 자기를 죽게 한
사람이 바로나 로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나면
행복해지는 거예요, 내 사랑! 드디어 행복이 찾아온 거라고요!"
그 필적이 로메인 하일저의 필적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출석해 있었으나,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편지를 보더니, 로메인은 기세가 완전히 꺾여 모든 것을 자백하고 말았던 것이다. 레너드 볼은 그가 말한 9시 20분에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녀는 그를 파멸시키려고 그 이야기를 모두 꾸며냈다는 것이다.
로메인 하일저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검찰측의 주장도 무너지고 말았다. 왕실 변호사 찰스 경이 몇몇 증인들을 소환했고, 피고 자신도 증인석으로 가서 반대 심문에도 동요되지 않고 남자답게 담담하게 진술했다.
검찰측에서 다시 기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판사의 요약도 피고에게 전적으로 유리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반작용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배심원들이 평결을 내리는 데에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피고가 무죄라고 봅니다."
레너드 볼이 풀려난 것이다!
메이헌 변호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기의 변호 의뢰인에게 축하해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코안경을 열심히 닦고 있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리고는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그의 아내가 바로 그 전날 밤 자기에게 그런 습관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습관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흥
미로운 -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다. 우선, 그 로메인 하일저라는 여자만 해도.
그는 그 로메인 하일저라는 외국인 때문에 여전히 그 사건에 사로잡혀 있었다. 패딩턴에 있는 집에서 보았을 때는 가냘프고 조용한 여자 같았는데, 법정에서는 그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열대 지방의 꽃처럼 활활 타올랐었다.
그는 이제 눈을 감아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잇엇다. 키가 크고 격렬하며, 우아한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오른손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쥐었다 폈다 하는 모습을 말이다.
습관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는 그 손놀림이 습관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아주 최근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앗는데, 그게 누구였더라? 아주 최근이었는데 -
그게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는 숨을 헐떡였다. 쇼네 셋집에 있던 그 여자였어 -
그는 머리를 휘두르며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야. 불가능해 - 하지만, 로메인 하일저는 여배우였다고 했지.
왕실 고문 변호사가 그의 뒤에 다가와서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사람한테 축하 인사 했소? 정말이지 아슬아슬했어요. 가서 그를 만나 보지 않겠소?"
그러나, 그 작달막한 변호사는 손을 늘어뜨렸다.
그는 딱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뿐이다 - 로메인 하일저를 만나 보는 일이다.
그는 시간이 얼마간 지난 뒤에야 그녀를 만나는데, 그들이 만난 곳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 알아내셨군요." 변호사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얘기를 모두 하자,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그 얼굴? 오! 그건 아주 쉬웠죠. 가스등의 불빛이 너무 약해서 선생님이 그 분장을 알아보실 수 없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왜 - 왜 - "
"왜 혼자서 그런 수를 썼느냐고요?" 그녀는 자신이 지난번에도 그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며, 약간 미소지었다.
"정말 감쪽 같은 희극이었소!"
"이보세요 - 저는 그이를 구해 내야만 했거든요. 그이에게 헌신적인 여자의 증언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았을 거예요 - 그건 선생님도 충분히 주의를 주셨쟎아요. 그리고, 저는 청중들의 심리에 대해 좀 알고 있죠. 제가 증언한 것을 제가 잘못되었다고 자백하여 법률상으로 저를 꼼짝 못하게 하면, 피고에게 유리한 반응이 금방 나타나는 거 아녜요?"
"그럼, 그 편지 뭉치는?"
"한 통만으로는 -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한 통만으로는, 그걸 뭐라고 하죠? - 조작한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그 맥스라는 남자는?"
"가공의 인물이죠."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서도 그의 혐의를 풀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는데?" 메이헌 변호사는 불만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저는 감히 그런 모험은 하지 않겠어요. 선생님이야 당연히 그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계셨겠지만 -"
"그럼,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군요? 알겠소." 하고 키가 작달막한 메이헌 변호사가 말했다.
"메이헌 씨" 로메인이 말했다. "선생님은 전혀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저는 - 그이가 유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