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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명학교 이야기
앞 장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병천에는 성공회의 진명학교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근대식 교육기관인 흥호학교(興湖學校)와 청신의숙(淸新義塾) 등 근대식 교육기관이 몇몇 있었다. 이는 이 지역에서의 근대식 교육에 대한 열망이 어느 정도 강했는지를 나타내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중 흥호학교는 우리 병천교회의 신자였던 강대형(아브라함)이 1908년 사재를 들여 직접 세워 서양학문을 가르쳤는데, 재정의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1912년 문을 닫게 되었으며, 그 후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와 합쳐지게 된다. 역시 청신의숙(淸新義塾)도 가전리에 사는 김구응 선생이 1907년 지역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지역민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학생들을 모집하여 서양학문과 한문을 함께 가르쳤으나 재정난으로 인해 곧 문을 닫게 된다. 이 밖에도 1915년 감리교회에서 운영했던 장명학교(長命學校)도 있었으나 이는 진명학교가 만들어진 한참 후인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것이며 또 일인(日人) 교장을 두어 운영하던 곳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하는데 힘을 쏟았던 흥호학교나 청신의숙과는 구별된다. 그리고 이도 곧 사라졌다.
다른 사료에 의하면 흥호학교에 대한 이견도 있다. 이를 소개하자면 유관순 열사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인사로서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많이 다르며, 이는 해방 후 민족정신을 강조함으로써 나라의 구심점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조병옥 박사가 병천(아우내)을 아우내만세운동의 성지로 만들고 유관순 열사의 가족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또한 강대형의 셋째아들인 강준희(애단) 신부의 회고록 『이대로 섬기기를 원합니다』(대한성공회 출판부, 1998.)에도 나타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흥호학교는 강대형의 뜻에 따라 그가 주축이 되어 분명히 세워졌으며 유중권은 그 학교를 설립하는데 일조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지금 병천-향토음식 순대와 유관순 열사의 유적지 등으로 매일 외지사람들이 몰려드는 관광지로서의 병천-의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100년 전 작은 농촌 지역이었던 장터 아우내의 시각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잘 설명된다.
아무리 지역유지들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있어 교육기관을 앞다투어 지었다고는 하나 상주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근대식 교육기관이 필요치도 않았을 뿐더러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 구하기가 그리 쉽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배울 학생들의 수는 그 작은 지역에서 어차피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놓고 볼 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은 그 학교라는 것이 지금의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마을마다 있던 서당 수준의 것을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선견지명의 눈을 가진 지역유지들이 그 서당에 근대식 교육기관의 학교이름을 붙인 현판을 내다걸고 서양식 교육을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이 학교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교사이다. 즉 청신의숙(淸新義塾), 흥호학교(興湖學校), 그리고 그 후에 세워진 장명학교(長命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교사는 모두 김구응 선생이었다.
그리고 이런 교육기관들은 사실 학교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준비가 부족하고 의욕만 앞섰던 이 교육기관들은 하나둘 심각한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12년 성공회 병천교회가 현재의 부지에 제1성당, 제2성당, 사제관, 전도사관, 기도실 등 여러 채의 건물을 가지면서 아울러 여기에 함께 교사(校舍)를 마련하면서 통폐합되고 그 이름을 진명학교(進明學校)라 하게 된다.
즉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근대식 교육기관과 흥호학교가 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 교회에서, 또는 몇몇 교인들이 1908년부터 근대식 교육기관을 운영했다는 것과 1912년 이후, 다시 말해서 병천교회의 부지 안에 교사(校舍)를 마련하여 학교다운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춘 다음 그 학교의 명칭을 진명학교라고 했던 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진명학교는 병천 지역의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지역발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게도 많은 문화 혜택을 주는 등 지역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908년에는 김태순(엘리야) 신부가 병천에서 태어나 진명학교를 졸업하고 사제가 되었고, 강준희(애단) 신부 또한 이곳에서 진명학교를 졸업하고 사제가 되어 2명의 사제를 배출한 학교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학교의 교사였던 김구응 선생은 이 지역의 지도자로서 3.1아우내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이와 같이 선진의식을 가진 지역 유지와 교인들의 뜻과 지역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진명학교는 당시 조선성공회의 중점 선교사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성공회가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교육사업’과 ‘한국인 사제 양성’ 이 두 가지는 최대 관심 사업이었다. 아래에 기술된 내용은 과거 성공회보에 게재된 것들로서 조선성공회(주교)가 얼마나 한국 민족의 근대식 교육을 위해 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략)“........조선성공회에서 각처에 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지 못하였으나 수원과 강화온수동과 천안 부토리와 목천아내 근처에 교인들은 불가불 자기 자녀를 성공회학교에 보내어 상당한 학문을 배우게 하고 또한 성공회 사립학교가 없는 지방에서는 다행히 정부에서 공립학교를 세웠으매 본 주교가 간절히 바라는 바는 부모 된 자는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내어 육신적 학문을 배우게 하고 또한 겸하여 집에서나 성교당에서 성도를 배우게 할 것이니라........”(후략)
(전략)“..........바라노니 모든 부형되신 이들은 자기 자제에 대한 교육상 의무를 깨달아 본 교회에서 교육상 기관을 설립한 본의를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대개 연소한 청년은 교육의 필요함과 그 효력을 알지 못하고 망동하겠으나 그 부형들은 반드시 자기의 의무를 다하여 저희들을 효유하며 경계하여 학교에 부지런히 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시기를 주의하시옵소서.”
이렇듯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교구 차원에서의 교육사업은 무척 비중 있게 다루어졌었다. 뿐만 아니라 병천 지역에서 직접 진명학교를 운영하였던 성직자, 교사들은 물론 전 병천교회 교인들과 지역민들이 학교에 대한 애정을 갖고 얼마나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기사 내용들이 있어 아래에 소개한다.
“본 교회를 다년 근무하신 이는 김부제 바나바씨온데 해씨가 청년교육을 극히 힘쓰사 열심하신 결과로 오늘까지 교육하기에 이르렀사오니 해씨의 열심을 찬송하나이다. 대저 어느 곳을 물론하고 사립학교를 유지하기가 극히 어려움은 다만 재정에 관한 연고라. 본 학교 경비를 대강 말하건대 선교회로 지출되는 바는 신학문 교사의 월봉에 지나지 못하고 한문교사는 학부형이 담당하오나 다른 경비는 월사금으로 유지하오며 년년히 동절(冬節)을 당하면 난로비를 국어교사 박아고스듸노(박병무 전도사)씨께서 전담하다가 작년에는 본 군청에서 보통학교로 매호에 곡식 일 두씩 기부하라 하매 교인과 학부형들이 본 교회로 기부하였으므로 겨울을 지냈사오나 금년 겨울을 당하매 경비를 지출할 도리가 없음으로 학부형회를 개최할 새 일반학생도 회집게 하고 사년반 학생 이인(二人)을 택하여 모든 사업이 학문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문제를 국어로 설명하고 일인(一人)은 조선어로 번역하게 하고 또한 구세 된 생도 둘을 택하여 천지만물지중(天地萬物中)에 유인(唯人)이 최고란 문제를 국어로 설명하고 한 아이는 조선어로 번역하매 일반학부형께서는 희열이 만심하여 자기 자질이 항상 장난만 하는 줄 알았다가 이같이 설명을 듣고 곧 열심을 발하게 되었나이다. 날로 경비예산에 대하여 학부형 제씨들이 금 일환 오십전씩 기부하였으므로 수입금액이 칠환 오전이 되었는데 외인 부형의 기부금액이 일원 오전이온즉 이 교인의 열심 곧 더하기를 위하여 천주께 기도하사이다.”
“본 교회 내 진명학교에서 다년 교사로 근무하시던 임병무씨는 천주의 부르심을 입어 경성 마포수도원에 신학 공부하기 위하여 가셨으므로 해씨대에 수원 진명학교에서 교수하시던 정아덕씨가 교수하시오니 천주께 감사하오며 또한 학교 경비 곤란함을 인하여 본 학교를 유지할 계칙이 없더니 교인과 학부형 제씨께서 열심을 발하여 기부한 금액이 육십오원이 되매 해 금액을 기본금으로 삼아 신구학(新舊學) 교사에 월봉을 지불하기로 작정하였사오니 천주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나이다.”
나라 전체가 어려운 시절이었던 만큼, 또 그 어려움이 더했던 농촌지역이었던 만큼 학교운영에 대한 제반 경비를 조달하는데 무척 어려움이 따랐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제와 교사, 학부형은 물론 지역 내 모든 유지들과 주민들이 합심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진명학교는 분명 병천지역 내에서 큰 자랑거리며 자부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교육기관이 병천지역에서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는 등 지역 활동의 구심점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며 이러한 교육의 힘과 지역의 역량 집중은 후에 아우내 만세운동의 산실 역할을 담당하기에 충분했으며 또한 나아가 지역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교구교육의회에서 제정한 규칙
조선교구내 교육사업을 위하여 조직한 교육기관의 목록은 좌와 같으니 일천구백십팔년 유월 오일에 교구교육의회에서 인정하다.
1. 신품자와 전도사 양성소(수도원)
2. 경성 내 교구기숙사 - 갑) 남자기숙사 을) 여자기숙사
3. 지방 기숙사 - 갑) 강화 을) 진천 병) 연백 정) 인천
4. 보통학교 - 갑) 강화 온수리 을) 천안 부대리 병) 천안목천병천리
5. 서당........(후략)
이렇듯 진명학교가 이 지역의 자랑거리이며 자부심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었다. 이에 가난한 농촌 지역의 학생들로부터 충분한 수업료를 받을 수도 없는 실정이었고, 또 그렇다고 교구로부터 넉넉한 운영자금이 지원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당시 성공회보를 통해 조마가 주교는 교육기관의 운영자금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는데, 서울, 인천, 수원, 진천 이 네 곳에 있는 교육기관에만 영국에서의 지원금을 나눠주며 나머지 교육기관은 어렵더라도 자체에서 해결하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교육기관의 어려운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교인은 물론 지역 내 유지 및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서 돕기도 하였다. 다음은 기부금을 쾌척한 지역민들의 명단이다.
(전략)“........ 본 지부에서 관리하는 여학교는 재정의 곤란으로 인하여 정지까지 되었던 것을 본 교회 지부회 위원 제씨와 전도사 박아고스디노씨의 주선 하에 인근동 유지의 협찬을 얻어 경비상 후원을 조직한 결과 지금은 모든 것이 원만히 진행 중에 본교 여교원 김미리암(영숙)씨의 열심 교수하심과 후원 제씨의 성의를 감사하오며 또한 남학교 교원 송갑열씨는 가사로 인하여 사직하시고 본 교회 이마태씨가 교무를 집행하오니 해씨의 열성을 감사하오며 더욱더욱 해씨의 열성을 부조하여 교육사업이 진흥되기를 바라나이다.”
여학교를 후원하시는 제씨는 아래와 같음
송인섭, 천기형, 송관섭, 김찬응, 송근섭, 유연하, 임정호, 이창여, 전용순, 박병무, 민철호, 임병갑 (무순)
이 중 박병무(어거스틴/위 내용 중 박아고스디노와 동일인)는 당시 병천교회 전도사였으며 유연하, 이창여, 임정호 등은 교인이었고, 송관섭, 송인섭 등은 감리교회의 교인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성공회 병천교회 교인이 아닌 일반 지역 주민들 명단인 듯하다. 이렇듯 진명학교는 교회를 떠나 전 병천 주민들이 사랑하고 아끼며 자랑스럽게 여겼던 교육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임인재(요셉) 당시 전도사가 성공회보에 기고한 글인데, 이를 보면 진명학교가 얼마나 지역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아병천발전소감(我幷川發展所感)
- 병천 고객 임인재(요셉) -
기고자는 결백한 지면을 더렵혀 감사와 희망 하에서 감격한 심사를 다소간 끄집어내어 소감됨을 잠시 소개함이 있을까 하나이다. 만족한 말씀을 드리기 어려움을 애석하게 생각하오나 독자 여러분이 용서하여주심을 믿습니다. 금번에 기고의 동기를 득함은 하등의 독특한 문제를 연구함이 아니라 병천의 발전에 대하여 충심으로 감격하던 바이었고 따라서 그 발전의 작자 내지 작자의 최후의 승리로운 환희를 보고 싶었던 것을 잠시 쓰고자 하나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병천은 실로 비애의 세계이요, 암흑의 사회이요, 영리의 생활 등 들을 것도, 볼 것도, 끄집어내어 자랑할 것도 없는 몽매침묵의 세계였도다.
이와 같은 과거의 병천을 말씀함은 좌상공담(座上空談)으로 남의 과거를 조소함도 같지 마는 이는 사실 안 듯 합니다. 그러나 오인은 들었노라. “오인은 모름지기 과거를 초월치 아니하면 미래를 보지 못함”이라 함이 있은 즉 병천의 침묵은 영원히 무의미의 병천으로 해석하기 불능하도다. 그런즉 병천은 영원히 암흑면의 향(鄕)이 아이오, 이것을 정복시키고 조일의 백광(白光)을 보고 최후의 희망이 새록새록 있을 것을 자신하노라. 금춘 이래로 우리 병천에도 일대각종(覺鍾)의 성(聲)이 파급되어 무릉도원의 백일몽을 불각(不覺)하던 병천 청년도 두뇌에 무슨 감촉이 생긴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동기로 하여 대대적 활동을 행하여 전도기관을 확포하며 따라서 교육장려의 두 주먹을 쥐고 기운차게 활동하여 오던 결과 지난 팔월 분에 본 교회 내에서 운동구락부를 조직하고 잡지, 신문 기타 서적을 구독하여 지식을 계발하며 강연 또는 토론도 하여 부의 발전과 우리 교인이 교육에 번창함을 도(圖)하며 경(更)히 외교청년이 다수 참교케 되어 장래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천국의 풍군도 이에서 산출되기를 열망하며 겸하여 구락부 내에 영어부와 노동야학부를 설치하여 우리 교육 장려의 본의를 환하는 바이라. 배우고 아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라 하노니 우리 문화운동은 무엇보다도 우리 불쌍하고 암매한 더벅머리와 고수상투에게 우리의 글을 가르쳐주어서 저들의 두뇌를 개량함이 최급무라 절규하겠도다. 불연즉근(不然則根)이 없는 나무와 신경(神經) 없는 토우(土偶)에 하유(何喩)리오, 따라서 무엇보다도 제일 막개무량한 바는 우리 사회의 여자교육이 비열낙오에 처한 지라. 그런즉 우리 사회의 운명을 증진하려면 여자교육이 일대 문제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도다. 고로 우리는 십일월 십구일에 병천성공회 내에 여자 야학부를 증설하게 되어 무엇무엇 가르쳐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이 수종(數種)의 기관이 설치됨은 시대의 순응인지 우리 자각인지 알지못함이어니와 금일의 병천은 발전의 간판을 게양케 되어 실로 하느님께 영광이며 오인의 기쁨과 환영하는 바이라. 금일 우리 병천은 옛날 암흑면을 탈하고 변천에 지(至)함을 감(感 )하는 동시에 악마에게 불절불요(不折不撓)함을 기도불이(祈禱不已)하는 바이며 기업자의 견고심으로 결실의 추(秋)를 보고자 분투용진함을 원하나이다. (1921년 2월)
위의 기사 내용에서 보듯이 진명학교는 일반 과목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영어반을 따로 운영하였고, 晝耕夜讀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동야학부를 두기도 하였다. 또한 여학생들만을 위한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깨달아 이를 신설하고 운영하였다. 이 모든 것이 도시 지역도 아닌 작은 농촌지역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으매 틀림없다.
이 진명학교는 1920년대 이후 일제가 모든 사립학교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제도권 하에 두기 위한 정책을 쓰면서 일대 변화를 예고하게 되는데, 당시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진명(또는 신명)학교들은 이 변화의 물결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다. 즉 일제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서 그 지원을 받아가며 공립화가 되든지 아니면 영국으로부터의 지원을 제대로 받아 명문사립의 길을 걷든지 했어야 했는데, 이도저도 못하고 교회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체적으로 어려운 운영을 하다 보니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었다.
결국 이런 상황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성공회의 교육선교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영국과 일본 간의 영일동맹은 깨어지고 영국의 선교사 신부들은 수난을 받게 되며 속속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많지 않던 영국으로부터의 모든 지원도 그나마 끊기게 되고, 일본 군정이 강화되면서 시골 지역까지 속속 세워지는 국민학교로 아이들을 보내라는 조선성공회 총감사제의 권고사항이 하달된다. 그도 그럴 것이 1941년부터는 일본인 사제가 총감사제라 하여 조선성공회의 주교를 대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병천 뿐 아니라 전국에 산재해 있던 많은 성공회의 진명학교는 모두 자연스럽게 문을 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