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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시 부문 당선작 나지환 성간 비행 등 10편
평론 부문 당선작 없음
나지환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를 졸업했다. najh95@naver.com
성간 비행
8월 17일, 종일 비가 내리고, 이번 주의 [성간 비행]은 휴재. [성간 비행]은 느와르 만화인데, 이 만화의 특징은 작중에서 죽는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장례 치러진다는 점이다. 조연에 졸개인 매트가 26화에서 권총 한 발에 죽었을 때는 손 뼘 크기의 컷으로 쓰러지는 뒷모습이 묘사되었을 뿐이지만. 61화였던가? 매트의 아내가 국화꽃을 들고 묘지공원을 배회하는 모습은 한 페이지를 통째로 할애하며 역광으로 가득 찬 가을날로 그려진다.
8월 24일, 종일 비가 내리고, [성간 비행]은 연이은 휴재. 나도 휴직계를 냈고. 초록색으로 젖어 가는 공원을 우산 없이 걸어 다녔다. 어제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벤치의 팔걸이에 거미는 찾아와 줄을 쳤고, 어느새 세 마리의 날벌레를 예쁜 검은 뭉치로 만들어 놓았다. [성간 비행]의 75화에는 자신을 ‘거미’라고 부르는 킬러가 나온다. 거미는 82화에서 죽는다. 거미는 빈손으로 당당히 찾아가 상대방을 안심시킨 뒤 현장에 미리 숨겨 둔 무기를 들어 적을 죽이곤 했는데, 그날은 호텔 방 화분에 올려 둔 나이프를 청소부가 쓰레기인 줄 알고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8월 30일, [성간 비행] 여전히 휴재. 여름의 끝의 직전, 종일 비가 내렸다. 내 생각에 연재가 재개되면, 95화쯤. 거미는 고향에 돌아가 꽃마차에 뜬 채 장례의 강을 떠내려가고. 그 나이프는 작중에 다시 등장하여 다른 누군가의 심장에 꽂히지 않을까. 어쩌면 캘리가 그걸 쓸 수도 있을 거다. 주인공 캘리는 말이 없는 주유소 직원. 어느 환한 날 영롱해진 가로수 아래에 서서 자신이 구제하지 못한 거미를 그리워하는. 악당을 개과천선시키고 싶어 하는 전형적으로 열정적인 주인공이지만. 장마의 끝에 간신히 선 채 범람하기 직전의 연못을 보며 나는 알 수 있다. 캘리도 마찬가지로 구제받아야 할 대상이고, 그게 안 되니까 별이 되고 말 거라고.
남십자좌의 구도를 한없이 닮은 별자리가 되어
숨을 헐떡이면 이미 단풍 절정의 국립공원
물웅덩이에 비치는 새벽 공기
8월 31일, 속보. [성간 비행]은 작가의 병환으로 무기한 휴재 돌입. 비가 멎는다. 나도 또 휴직계를 냈다. 밤이라서 보이지 않지만, 만약 빛이 있었다면 충분한 크기로 육박해 왔을 거대한 뭉게구름이 어둠 너머로도 보인다. 별과 별 사이에는 무수하게 반짝이는 물결 무리, 삶이라는 이름의 거미줄을 향해 사람들은 손을 잡고 날아간다.
매트가 가장 좋아했던 취미는 맥주 병뚜껑 수집.
가끔 나의 개그는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거미는 머리를 깎는 날이면 국수를 먹곤 했다.
가끔 나는 인공위성을 구매하고 싶다.
캘리는 구제받아야 한다.
그건 1화의 도입부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8월 32일. 출근길. 더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처럼,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처럼, 더는 사랑하지도 않을 것처럼, 더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처럼, 더는 누구도 구제할 수 없을 것처럼, 더는 행복할 수 없을 것처럼. 두 팔을 들고 두 다리를 휘저으며, 여름과 가을 사이의 환하기만 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공간으로 날아가는 등장인물들. 퇴근길. 쏟아지는 기억들, 행성 사이의 차가운 중력들 속에서 휘청거리며 날아다닌다. 여름 하나를 덮어 버리기 위해 달려왔고 그래서 행복했던 우리들의 죽음. 사라져서 영원할 [성간 비행]의 미공개 삽화. 친필 사인. ■
산타
당연하게도 눈이 내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산타가 멀리서 나를 보고 웃습니다. 모자를 고쳐 쓰며 말이죠. 제가요, 몇 차례 꿈에 접근하여 알아낸 사실인데, 산타라는 인물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관찰을 했다고 생각하여 기념차 묵혀 둔 술을 꺼냈죠. 눈은 창밖이라는 말을 너무 좋아합니다. 또, 이 오두막의 창문은 지나가는 열차의 차창과 쉽게 몸이 바뀐답니다. 저 네모난 유리창에게도 인연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고 일어나니 서로의 몸이 뒤바뀐 것이지요. 산타의 목소리가 귀에 울립니다. 꿈에 몇 번 접근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술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거죠. 나는 지금 열차를 타고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승객을 봅니다. 긴 머리카락, 붉은 입술, 오리 점퍼, 손에 쥔 회중시계. 당신은 누구이지요? 미로를 빠져나갈 때는 벽을 짚고 무작정 걸어가라던데. 선로를 벗어나고 싶으면 열차의 지붕에서 소리를 지르라던데. 들통났어요. 도망치세요. 혹시 마주칠지 모르는 지인을 찾기 위해 열차를 샅샅이 뒤져 보세요. 맥주 한 병의 승객들. 신문지의 승객들. 사철나무의 승객들. 술이 잘 넘어가서 혼미합니다. 승객들을 나열하는 밤. 나는 지금 위장에 담긴 알코올을 식도로 역류시키고 다시 삼키고 역류시키고 삼키기를 반복하며 한 병으로도 미친 듯이 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차의 일등칸과 이등칸과 삼등칸에 분리됩니다. 나는 로마로 향하는 9시 도착 열차와 10시 도착 열차와 11시 도착 열차 총 세 량으로 지속됩니다. 나는 부족 시대부터 현대 로마까지의 격정적인 문명을 살갗으로 느낍니다. 열차는 속도를 높이고 승객들은 나를 눈여겨보고 눈보라는 몰아치고……. 산타의 호통이 들려옵니다.
돈도 없으면서 몇 번이나 이 열차를 타는 겁니까?
나는 정말로 당신을 구하고 싶은 겁니다.
고집부리지 말고, 다시 시작하세요. 제발……. 나는 잠시 먼 곳으로 이동해 산타를 보고 웃습니다. 하하, 이렇게 눈이 내려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왜 나를 위해 주는 거야. 호호, 하고 말이죠. 내가 있는 자리보다 더 먼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부서진 오두막이 있고, 술병이 있습니다. 눈보라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
작문, 늦여름
죽음이,
갑자기 사라진 뒤
더 좋은 곳으로 떠나는 일이 아니라
볼에 흙을 묻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어린 날 시골집 물수제비로 시작한 여름이
도심 속에서 피아노를 치는 별똥별이 되어
모르는 아파트 정원에 찾아가기까지의 시간
그런 인생 전체가 여름
삶은
단 한 번의 여름이다
아니라고
삶은 여러 번 반복되는 거라고
눈이 오면 고추밭은 뒤덮이고
신발 끈을 묶으려고 고개를 숙였으나
단풍을 주운 적도 있었다고
그런 생각은 그냥
한없이 감정에 가까운 것 같다고
맞아요 나도 그 사람도
감정이 정말 풍부한 사람
눈을 감고서도
무엇이든 만져 볼 수 있는 사람
실은요
눈을 감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겠지만
약속을 했어요
이 여름이 끝나고 나면
나무들을 꽃다발처럼 묶어서 줄게
바람을 얇은 이불처럼 덮어 줄게
여기 있을게
지금 강은 고요하다
마음은 나를 잊은 적 없다
약속은 이루어진다
해당화는 금색이 된다
고속도로는 노을에 물든다
나는 잊지 않는다
그 사람 말이지
울타리 너머로 갈 때 망설이지 않았어
배웅을 나온 사람들보다도
차라리 팔월의 햇빛과 눈 마주치다가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걸어가 버렸어
역광 속으로
물수제비가 되돌아온다
나무들이 우거지게 일어난다
그 차에 시동이 걸린다
단풍들이 또 돋는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역광 속으로
여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사랑했노라 뒤늦게 깨달아야 했고
그 사람 제대로 사랑해 보기도 전에
몰골백발이 되어 갈맷빛 뒷산으로
떠나야 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 사람 일하던 삼겹살집에서
만들어 주셨던 김치볶음밥의 맛을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서야 이해했으며
모든 것이 시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내가 몸서리치는 동안
여름은 해바라기 꽃대궁처럼 우뚝 서 있다
멀리
볼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서는 사람
바짓단을 걷고 따스해하는
몹시 감정적이고
꿈에 가까운 몸짓으로
당신의 마지막 여름이 지나가고
나는 과수원에 앉아서
보이는 것을 모두 적었습니다
작문, 네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이 커다란 여름이 끝나고 난 뒤 찾아올
두 번째 여름이 어떤 모습일지까지도 ■
역광
빈소의 식당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다
자다 깼다를 반복하고 있다
결국에는 깨어 있다는 뜻이다
나비가 필요하다
팔랑거리는 속도로
이런 하루를 지나가게 해 주는
눈을 깜빡거리다 보면
구름의 종착역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
나비에게는
두 장의 날개가 필요했다
한 장은 우리에게 있었지만
다른 한 장은 당신에게도 없다
당신의 꿈이 그걸 가지고 있다
꿈은 선명하고
한여름의 꽃배롱나무 너머로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들이다
꿈은 선명하지만
멀어져 간다
나비가 그렇게 했다
허공은 긴 날갯짓을 멈춘다
가만히 있게 된다
당신은
두 눈을 감은 채로 깨어 있는 법을 익힌다
영원이 그렇게끔 도와준다
우리는 눈부신 역광의 묘지를 걷는다
포카리스웨트 한 병을 한꺼번에 다 마시는 법
화단 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법
지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비하는 법 ■
책등을 펼친 나비
“너희들만 있으면 돼. 우리끼리 떠나는 거야. 청산하고, 따듯한 나라로 가자.” 형이 절박하게 권유하자 배가 움직인다. 동승한 친구들은 망국의 세기를 바라보며 지긋이 웃는다. 다음 날 배가 침몰해서 모두 죽었고, 홀로 무인도에 떠밀려 온 형은 노을을 본다. 어쨌든 떠나온 거야. 떠났으니까 된 거야. 모래사장에 밀려온 늙은 가리비의 껍데기를 도로 흘려보내자 밤이 찾아왔고, 어둠을 관장하는 토속신의 눈동자 속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이. 그건 오두막에서 잠을 설치는 형. 소중한 것을 잃어 가는구나. 형은 수집해야 했다. 아름다움의 증거들을. 이를테면 모래나 뼈. 친구들의 항해일지. 수집 생활을 끝냈을 때, 형은 서재에서 일어나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규제가 없는 꿈이었습니다. 노을이 전소된 이미지 속에서, 형이 펜을 쥐는 것으로 창작의 동기가 움직인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사람이나 가족보다는 창틀에 주저앉아 생을 마감하는 외눈 나비의 건축성 같은 것을 사랑하였다. 새벽에서 낮으로. 나비가 지닌 삶의 패턴이 종료되었을 때, 형은 제출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 편의 단편소설을 한 권으로 묶어 낸 그의 전집이었다.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아?」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나만 있으면 돼. 나 혼자 떠나는 거야. 더운 나라로 간다.” 그리고 주인공은 해일에 잠겨 조타실에서 죽는다. 「여름 수정」은 지중해에 서식하는 가리비가 청춘을 방황하는 이야기다. 수정은 가리비가 해갈의 순간에 껍데기를 내려 두고 우렁찬 빛줄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심정에 대한 비유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하얀 여름을 찾아가는 물컹물컹한 유령이다. 「앞서가는 공포」는 의외로 전혀 자전적이지 않다. 인공섬을 답사하는 여행자의 이야기. 부유하는 이만 평의 모형 정원을 홀로 구축했을 선조가 무섭게 느껴져서 답사를 포기하는 결말. 여행자가 섬에 오두막이나 우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그의 심경 변화가 아니라 섬이라는 유기체의 형상 변화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말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우리 형이 서해를 보며 품었던 감흥은 뭘까. 물에 젖고 마르며 삶을 앞서 나가는. 그 기분은 뭐였을까. 앞서간. 형은 죽었던 것입니다. 형의 해변이 지워진 지 오래되었다. 관짝을 닫고 반짝이는 것을 올려 두었을 때. 덮어 줄 소금흙이 모자랐을 때. 장례식에 참여한 편집장의 결심으로 책의 동기가 움직인다. 눈부시고 가느다란 빛의 가지에 찔리며. 그 어딘가에서 형은 아직도 걸어가네. 수정의 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하네. 장례가 끝난 날. 물결. 형의 친구들은 표정이 어두워진다. 바다 비린 냄새가 나네요. 내가 말하자, 슬슬 돌아가자. 형의 친구들은 답해 주었고. 알로에 주스 한 병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먹구름이 몰려왔습니다. 헐레벌떡 집에 돌아가니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은 사선으로 들이친 작달비에 몽땅 젖고, 창틀에는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 한 권. 그것은 세 편의 단편소설을 하나로 묶어 낸 형의 전집입니다. 양장의 두꺼운 껍데기가 페이지들을 젖지 않게 하려고 비를 맞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들어 물을 털어 내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된다. 청산하지 않는다.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펼쳐진다. 섬은 바다에 잠겨도 끝나지 않는다. 책등을 펼친 나비는 죽지 않는다.” ■
환한 하품
눈물을 녹이고 간 새가 있어서 나는 울지 않았다
만날 수 없는 당신에 대해 호프에서 얘기했고
집에 돌아와 샤워기에게도 얘기해 주었다
자동차는 빛을 뿜으며 달려오고
달리기를 하던 사람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바람이 불었다
먼 밤의 공사장 소리
댐의 수문을 개방하는 소리
잠이 오지 않는 침대의 삐걱임
야광했었던 것들
다시 나방이 되어 나타난 나방들
가마우지의 울음소리
대교의 그림자에 숨겨진 돗자리들
가로등이 빛으로 관할하는 잔디들 너머로
도로가 이어진다
몸을 일으킨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마시고
빨래건조대의 골조를 매만진다
앙상하고 엷은 빛은
거실을
골목을
도시를
채운다
동이 트고
눈물을 돌려주러 찾아온 새가 있어도 나는 울지 않았다 ■
명멸, 회전, 감각
불법유턴을 돌며
택시 기사는 말했다 요즘에는
경찰들이 이런 건 잘 잡지도 않는다고
쫓아오지를 않는다고
그러나 잡혀 버리면,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아, 거기 계신 줄 알았으면 안 돌았지~
그러면 경찰도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아, 그러시면
나도 여기 있지 말걸~
딱지를 끊어 준다고
기사님, 그렇다면
경찰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요
손님 말이 맞지요
나는 그래서 확인을 합니다
특히요, 지금 같은 밤이면
반짝이는 경광등이 눈에 띄어요
나는 그걸 본답니다……
그 말이 맞다
어두운 거리에서 우리는 빛을 본다
빛이 사라지면
산책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곤 했던
그 공원의 이백 그루 플라타너스 나무도 필요가 없다
정말 어두워지면
노래도 안 틀고 이어폰을 낀 채로
정말 어두워서 나는
성수대교에 내려서 크루즈선을 바라보다가
먹자골목의 환호성에 섞였다가
깨달아 버렸네
여기가 어디인지
여기에 있지 말걸
어두워질 줄 알았더라면
어둠 속에서 턴에 턴을 덧그리며 공회전
공허한 시공간의 없는 궤도를 돌며
택시 기사는 말한다, 모두가
운전을 개같이 했고 그래서 우리는
아직 밤에 있다고
어떤 존재에게 잡히면 딱지로는 안 끝나고
정말로 죽음
죽음 이후에는 기억에서의 퇴장
말 그대로 안녕
갓길에는 택시 기사와 경찰관이 마주 서 있다
깜빡이고 있다
횡단보도에서 고개를 돌리면 후미등이 붉게 이어지는 언덕
미터기를 질주하던 말들은 모두 주차장에 가서 죽고
야경이 풍경이 아니라 감각이 될 때
신호등은 2분 30초 만에 되찾은 자기 자신의 초록빛에 무아지경
그리고 회전,
안녕 ■
전기전도율
요즘 이상하게 정전기가 많이 생긴다. 승강기에서. 러닝머신의 스타트 버튼을 누를 때. 이불보를 매트리스에 씌울 때. 타다닥.
끝나 가는 노을을 바라보다가 편의점 문을 열 때. 공원을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며 목도리를 감을 때. 호프집에서 혼자 맥주 마시다 치킨을 반 마리 남겨 두고 소파에서 일어날 때. 타다닥.
이번 겨울은 이상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겨울을 살아가는 내가 이상하다. 체내 전기는 만병의 근원. 전기가 많이 흐르는 사람은 목숨을 일찍 잃는다고, 일본의 저명한 의학박사가 말했다, 라고 네이버 블로그의 어느 할아버지가 말했다.
음이온 팔찌의 효능과 별자리의 영향력을 믿는. 그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그 또한 겨울의 영혼에 직접 손을 댔다가 손이 타들어 갈 듯 강한 정전기를 느끼고 한 발짝 물러섰던 사람.
아, 라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던 사람. 나랑 똑같은 부류의 사람. 목숨을 일찍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긴 목숨을 살아갈 사람. 이상한 겨울을 몇 번이고 마주할 사람.
길게 이어지는 소리. 타다다다닥.
잊을 법하면 눈이 내렸고 쌓이지 않았다. 개미 다섯 마리가 나타나 쿠키 조각을 들고 떠났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워졌다.
요즘에는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이른바, 짜릿함. 추억에 잘 감전되는 체질. 일순간의 마비. 나는 진열장을 열어 작년 성탄절에 남겨 둔 브랜디를 만진다. 유리병 굴곡, 겨울의 영혼에 함께 손을 댔다가 밤새 감전되었던 날들. 이내 내 심장에 강력한 번개가 떨어지던 꿈들.
미루나무는 불타오르고. 피뢰침이 조금 기울어지고. ■
빛이 생각한다
색이 바랜 만국기
우산살이 머금은 태양
운동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나는 교실에 남아 빗질로 침묵을 흩어 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사라지는 것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그 아이를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곁에 있었는데도
지나쳐 버리는 우연이 계속되었다
목소리가 소음에 섞여서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는
우연이 계속되었다
영우는
급우들의 사각지대에서 육 년을 보냈고
졸업식 날 그 아이는
빛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고
영우네 집을 찾았다
영우는
잘 지내나요?
아주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문을 닫았다
영우는
이 세상에서 이름과 존재가 완전히 지워졌고
어두워질 때까지
동네를 걸어 다녀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빛은
만져 보라고 하면
누구나 만질 수 있는 것
아직도 신발장 앞에 서서
알 수 없는 기억을 느끼며
우두커니 서 있을 아주머니처럼
누구나 만져 보고 싶은 것
나는 내일도
다시 영우네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를 거야
아주머니는 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겠지
참 이상한 녀석이야
혼잣말도 할 테지만
언젠가 내 손을
잡아 줄 거야
우선
안으로 들어와,
그럼
나는 말할 것이다
영우가 누구였는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단 사실을
우리의 장마철을
걸레로 닦은 복도의 눈부심을
빗물에 번지던 신호등을
우산 흔들어 물을 튀기던 장난을
손에서 손으로 건네주었던
민달팽이의 이름을
빛이 우리를 생각할 때까지 ■
나선계단
나선계단을 만든다
장갑을 낀 채 몰두한다
코피를 흘린다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목뼈를 뽑아
기둥을 세운다
나는 내 몸을 기어 올라가는
날개 잃은 잠자리
위에서 보면
빛의 원을 그리는
가을
추수는 깊어지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선계단을 오르던 저녁
구름 위에서
신작 영화를 튼다
영사기의 빔에
짧게
반짝거리며
되살아나는
하루살이들의 비행
상영을 마친 극장에서
인파들이 빠져나간다
부활
더 이상 풍경은 없고
내가 나선계단에 서 있다
좀처럼 걸어 내려올 수 없는
아득한
팔걸이 좌석
이제 눈을 뜨고
코피를 닦아 내고 ■
당선 소감
눈을 뜨자마자 횡방향으로 생활이 빗금 그어지고, 종방향으로 꿈과 환상이 빗금 그어진다. 빗금과 빗금이 교차하는 좌표마다 섬이 자라난다. 삶은 군도다.
섬 하나를 골라서 그곳을 걸었다. 질리면 드러누웠다. 해변이 희박해지면 네온으로 빛나는 도시가 보였다. 다시 몸을 일으키면 거기에 지하철 개찰구가 있고.
다시 빗금 그어지고.
군도가 그려진 지도를 두 장 겹치면 해면적이 줄어들었다. 하루에 한 장씩 지도를 만들었기에 셀 수 없이 많은 지도를 포개어 놓았고, 섬이 모두 포개어지면 대륙이 만들어졌다. 대륙의 깊이를 측면에서 바라보면 불연속적인 종이의 층이었지만 상공에서 바라보면 온전한 빛의 평면이었다.
그곳에는 지도를 한 장씩 쌓아 올리던, 그리고 쌓아 올릴 모든 나날이 있다. 과거의 풍경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소급 적용되고, 미래의 풍경은 햇빛에 넘쳐흐를 것으로 이미 결정되었다.
죽어 없는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찾아올 사람들 모두 거기에 모인다. 먼 하늘을 질리도록 바라보며 다 함께 노을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들을 역광 속의 인물들이라고 부른다.
사라진 소중한 기억들이 반드시 되돌아오는 기후와 계절. 나는 그것을 무한 모양 여름이라고 부른다.
하루 종일 새겨진 빗금들을 조율하는 밤의 책상에서 그것들과 마주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쓸 것이다. 순간을 쌓아 올리면 영원이 되기라도 한다는 양. 마침내 꿈이 된 세상에서 사는 양.
가족들께 감사한다. 우리의 우이천과 면목동과 영보리는 무엇보다 아름답다. 내 첫 문우인 정은호에게 감사한다. 내 첫 선생님인 박형준 시인께 감사드린다. 강북구청 꿈나무 장학재단과 장학금을 성원해 주신 강북구민들께 큰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친구 최민국과 김동현에게 감사한다. 언제나 내 옆집에 있는 배종호에게 감사한다. 지원과 격려를 해 준 이지 소설가에게 감사드린다.
매사 힘을 주는 최예슬에게, 그리고 한정민에게 감사한다. 대배우 유정우와 추성욱에게 감사한다.
시를 함께 읽고 써 주었던 나한비에게, 임희준에게, 이정민에게, 이규리에게, 최성중에게, 변혜지에게, 홍우성에게, 이희우에게 감사한다. 예버덩 문학의 집에서 만난 조명 시인, 장소미 번역가께 감사드린다.
먼 곳에서 응원해 준 은정(恩婧)에게 감사한다.
내 시를 평가해 주신 파란과 심사 위원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도에게 감사한다. ■
심사 경위 및 총평
계간 파란 신인상의 심사는 모두 3차에 걸쳐서 진행하였다. 1차 예심에서는 심사 위원들(이현승, 장석원, 이찬, 김건영, 정우신, 조대한)이 모든 투고작들을 읽고 각각 10명 내외로 가려 뽑았으며, 2차 예심에서는 1차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읽고 각각 다시 5명 이내로 뽑아 추천했다. 1, 2차 예심을 통해 총 16명의 본심 후보들이 추려졌으며 이들의 원고를 대상으로 본심이 진행되었다. 본심에서는 다득표자를 우선 검토하고 각각 고른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각각의 심사 위원이 높은 가능성을 보았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의논을 거듭하여 당선자를 내었다. 자세한 심사 경위는 다음과 같다.
올해에도 계간 파란의 신인상에는 다양한 나이, 다양한 성향의 작품들이 투고되었다. 예년보다 응모자의 수는 줄었지만 투고자의 수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한 수량의 원고들이 수준급의 기량을 다툰다는 것을 회를 거듭하면서 새삼 발견하게 된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응모자나 칠순을 훌쩍 넘긴 고령자의 작품도 꾸준히 투고되었다. 자기를 뛰어넘는 진경은 언제 보아도 감격스럽다. 나이보다 족히 한 사십 년은 젊어 보이는 목소리를 갖출 때까지 갈고닦았을 노력을 생각하면 심사의 자리가 절로 숙연해졌다. 투고자들의 이런 진지함에 힘입어 원고를 읽는 동안에는 시를 골라낸다는 생각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다는 생각으로, 누군가의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숨을 죽이고 읽게 되었다. 시들이 점차로 장형화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아예 산문화된 시들도 있었다. 세월호와 같은 공통적인 시대 경험에서부터 여행이나 요리, 영화와 게임 같은 일상들도 여전했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원고를 읽는 이러한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목격되는 아이러니는 시가 말하는 경험이 고통스러워도 그 경험의 밀도가 높고, 심지어는 더 강한 자기부정을 거쳐 나온 언어일수록 더 쉽게 빨려들고 더 힘있게 읽힌다는 점이다. 반대로 어딘지 뭉개고 건너뛰는 언어들, 유려하게 말하려는 원고일수록 잘 읽히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시와 문학의 요람이 언제나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과정이 심사이기도 했다. 일종의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언어적 연마과 타인의 언어에 빚지지 않는 자율성을 갖춘 언어들로 짜인 시들이 1차 예심을 통과하였다. 신인상 자체가 의미 있는 축제가 되도록 가능한 넓은 스펙트럼의 시들이 초대되었다. 다음의 서른한 분의 시들이 비교적 뚜렷하였다.
1차 예심 통과자: 김기숙, 이상돈, 차도희, 유혜연, 황미소, 오라기, 하태희, 손주우, 최은진, 김현우, 이해수, 최보슬, 김보배, 이시윤, 김미진, 김조, 권준형, 문평, 김나희, 김성민, 주서림, 함인우, 양지승, 김원호, 김용희, 김윤, 나지환, 최다성, 김지영, 이우리, 김사루. 이상 31명.
2차 예심에서는 이들 31명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를 거쳐 심사의 범위를 축소시켜 나갔다. 1차 예심에서 이미 한 번씩 일별한 원고들이었지만 재독하는 과정에서 추천의 선택지가 갈리기도 하였다. 2차 심사에서는 합본된 원고들을 읽고 심사 위원당 5명 이내의 추천을 하였다. 본심으로 넘겨질 원고들인 만큼 언어적 개성, 문제 제기의 독자성과 완성도 같은 것들에 중심을 두고 보게 되었다. 2023년 1월 25일까지 2차 예심을 통해 넘겨진 본심 경합자들은 모두 16명(김기숙, 이상돈, 하태희, 최은진, 김현우, 이해수, 최보슬, 김보배, 문평, 김성민, 주서림, 양지승, 나지환, 최다성, 김지영, 김사루)이었다.
2차 예심을 통과한 분들의 작품은 일정한 자기 색깔을 뚜렷하게 갖춘 분들이었다. 투고작이 10편이지만 벌써부터 시집의 외연이 갖추어진 분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분들이었다. 나이와 경험으로 확증된 언어를 갖고 있었고, 그런 만큼 언어적 비약과 상상력의 모험이 타당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안전하달까, 보증되었달까, 신인상의 심사이기에 이런 부분이 아쉬웠다. 어떤 면에는 신인상 심사가 아니라 시집 투고가 어울릴 것 같은 원숙한 자기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완성도가 높았지만 그것은 확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이는 분들의 작품에는 답이 안 나오는 이 세계를 붙들고 고투하는 사람의 주저흔이 적었다. 매끈하고 아름다운 배치와 구도 속에서 재치 있는 구절들이 읽는 이를 탄복게 했지만, 세계에 대한 부정과 자기부정이 임계점에 이른 사람이 내뱉는 숨비소리 같은 것이 적었다. 지금의 우리 시에는 너무 완벽해서 불충분한 답보다는, 불충분하지만 긍정할 수밖에 없는 용기를 가진 질문이 필요하다.
최종심은 2023년 1월 28일 토요일에 이루어졌다. 심사 위원들은 각자 지지하는 시인들을 천거하였고 이들 시인들의 원고를 모두가 다시 한번 돌려 읽었다. 넓은 지지를 얻었던 이상돈, 김보배, 나지환, 최다성, 김지영, 김사루 여섯 분의 원고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매머드 06호」 외의 이상돈 씨는 노동의 현실에서 삼투된 밀도 있고 활달한 언어가 눈에 띄었다. 이 활달함은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언어였다. 만개한 재능이었다. 폐차장으로 들어온 25톤 덤프트럭이나 열차 선로의 침목처럼 기계의 부품 같은 것을 향한 남성적 페티시즘이 고통의 하중을 견디는 남성적인 육체성과 만나는 지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고단함을 누이기에 적당히 딱딱했던 캐빈은/기름때 눌어붙은 볼트가 꿈쩍도 안 해/산소용접기로 10㎝ 두께의 꿈을 잘라 내야 했다”와 같은 알레고리적 진술들이 걸렸다(「매머드 06호」). 그와 같은 핍진성 있는 작품에서 손쉬운 알레고리는 이야기를 빤하게 만들어 버리는 독소로 작용한다.
「무계절」 외의 김보배 씨는 비행운을 보면서 “상처가, 아물기 직전 힘껏 제 살을 그러모은 그런 모양”을 볼 수 있는 분이었다(「무계절」). “다리에도 다리가 있”다는 사실을(「하지」) 심드렁하게 관찰할 수 있을 만큼 예리한 시선과 정교하고 세련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기도의 맨얼굴은 별이 아닌 인공위성의 잔해를 닮았을 것이다”나 “기도를 위해 기도하지는 말자. 하고 기도하는 일. 우주 밖은 우주의 일부니까.” 같은 구절에서 보듯(「우주 밖 우주 일부」) 김보배 씨는 이미 완성된 잘 벼려진 신인이다. 김보배 씨의 도약이 멀지 않을 것이다.
「자폐」 외의 최다성 씨는 시 쓰기의 자리에서 세계의 부조리성과 삶의 우연성에 끈기 있게 천착하고 있었다. 3월 2일의 11시 16분의 세계의 물질성을 균열시킨 「3월 2일 11시 16분」, 물질적 당대성과 미학적 연대기를 총동원해 시적 불모성을 말하는 「2022년 10월 22일」과 같은 작품에서 “음절과 음절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창백한 숨결” 같은 시들을 보면 최다성 씨가 지나고 있는 지점이 가늠될 듯하다. 이토록 총체적인 공간과 실존이 한 면, 한 문장 위에서 숨 쉴 수 있으려면 그것은 아마도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시의 시점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같은 이유에서 신은 말할 때보다 침묵할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자폐」 같은 작품에서 보여 주는 공간의 변주가 매혹적인데 이때 세계의 부조리성이나 삶의 덧없는 우연성이 발원하는 자리가 시 쓰기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 쓰기 자체를 알레고리화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시가 발원하는 자리로 가서 그 신비주의를 해체하고 걷어 내도 거기에는 여전히 감상성이 고여 있었다. “열차가 내 가슴을 횡단한다. 선로가 내 가슴 안쪽으로도 개통된 것 같다. 열차의 운행이 종료되고 나서도 당신과의 기억이 예보도 없이 폭설처럼 쏟아질 때가 있다” 같은 감상적인 문장이나(「역과 눈」) “바람이라고 적어도 이름이 없는 고아의 동선은 시라는 죽음이 찍어 놓고 간 족적의 천문으로만 읽을 수 있다고 믿은 적도 있다” 같은 문장에서(「자폐」) 보이는 감상성을 보다 정교한 사유로 채워 나간다면 대성할 것이라 생각한다.
「재생실」 외의 김사루 씨의 작품은 활달하다 못해 따라가기가 어려운 상상력의 진폭을 보여 주었다. 정원에 대상 몽상이나 식물의 역동성에 대한 천착, 엇박자를 내는 의도적인 행간이 재미있게 읽혔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행과 연이 늘어나고 의미의 초점이 흩어지게 되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놀라움이 발생하지만 결국 모든 인식은 재인식이다. 「정원으로부터의 정원」이나 「플라스크 속의 작은 영원」 같은 작품의 활달한 상상력을 붙잡아 줄 사유가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스툴 고치기」 외의 김지영 씨는 일상의 소재화가 매혹적이다. 선택의 안목에서부터 돋보이는 참신성이 있고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세계의 시간성을 붙잡아 내는 민첩함이 뛰어나다. 얼마간 “반드럽게”나(「온실 슬플린트」) “사람이 불었다”에서(「월령리」) 보듯 그의 언어가 자재롭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의 땅」 같은 작품은 충분히 매혹적으로 읽힌다. 몇 미터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는 이 멀티플렉스 공간에 입주해 있는 성당의 모습이 낯설게 그려져 있다. 성당이라는 독립적인 건물이 아니라 멀티플렉스 안에 입주된 성소라는 배치가 환기하는 세속의 성소 이미지, 그리고 “외국에 나가면 고해소에 가 보세요. 못 알아들을 텐데 어쩌죠? 괜찮아요. 그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무엇을 말할지 몰랐으므로 외국에 온 기분이 들었다. 작은 창문이 열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지은 것 같지 않고 용서를 받아도 용서를 받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자신에게 위엄을 주기로 했다.”에서 보듯 번역되지 않는 고백성사를 통해서 뚜렷해지는 선험적 신앙의 세계는 언어적 세련과 세계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만나는 한 뛰어난 사례를 보는 듯하다. 그것을 내내 심드렁하게 풀어 가는 침착성이 더 돋보였다. 그런데 「모든의 땅」이 초점이 놓인다면 나머지 시들은 얼마간 포커스 아웃되는 느낌이다. 다른 시들에서는 아직 경험과 사유가 조금 모자라게 느껴졌다. 우리는 김지영 씨의 미래로 가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성간 비행」 외의 나지환 씨의 시에서는 현실이 판타지를 횡단하고, 판타지가 현실을 횡단한다. 마치 의식의 흐름 기법이 하나의 기법이기 이전에 사유의 방식일 수 있는 것처럼, 영화의 몽타주 기법이 오히려 시적인 환유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멀티버스나 평행우주가 이 세계 저편 어디에 존재하는 ‘아공간’이라기보다 이 세계의 같은 차원 안에 존재하는 미시적 영역들의 관계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차원과 동시성에 천착해 들어가면 세계는 이질적인 동시성으로 가득 차게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시적인 이질성으로 고통받게 되기도 한다. 나지환 씨의 언어는 몸은 이 세계에 있지만 정신은 저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차를 아련한 감성과 재치 있는 문장으로 구축하고 있다. 시 「성간 비행」 속의 시의 화자는 연재가 중단된 느와르 만화 [성간 비행]의 연재를 기다리면서 8월의 가장 더운 3주를 지난다. 작중 인물들인 졸개인 매트, 킬러 ‘거미’, 주유소 직원 캘리는 ‘어둠(느와르)’의 세계에 살고 있는 캐릭터들이지만 화자의 삶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성간 비행」에서 더위와 궂은 날씨를 지나 도착한 화자의 8월의 32일은 [성간 비행]의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아공간이면서 출근하는 화자의 공간이기도 하다. 「성간 비행」의 화자는 현실에서 상상 공간을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 공간에서 현실 공간을 횡단한다고 할 수 있다. 「책등을 펼친 나비」에서도 세계는 ‘형’이 동기화한 소설적 상상력과 습합된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 시의 화자는 ‘형’의 소설과 ‘형’의 자전적인 삶을 겹쳐 가면서 ‘형’이 보았던 것, ‘형’의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 이처럼 나지환 씨의 시에 있는 사물과 존재들은 중심과 주변으로 소외되지 않고 대등하게 만나고 공존한다. ‘형’의 소설의 인물은 나의 자전적 서사의 일부분이 된다. 「성간 비행」이나 「책등을 펼친 나비」 같은 작품이 상상으로 현실을 횡단했다면 「역광」이나 「작문, 늦여름」 같은 작품은 ‘죽음’이라는 현실의 사건에 바탕을 두고 죽음을 수용하는 사람의 내면을 그렸다. 「역광」에는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이 아름답고 슬프게 그려진다. 존재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한 것에 비해 아직 실감되지 않는 존재의 부재를 견디는 시차를 시에서는 ‘나비’의 이미지로 아름답게 매개한다. “꿈은 선명하고/한여름의 꽃배롱나무 너머로 사라지는 것들은/모두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들이다//꿈은 선명하지만/멀어져 간다/나비가 그렇게 했다//허공은 긴 날갯짓을 멈춘다/가만히 있게 된다”에서처럼 부재는 나비라는 상상적 이미지를 통해서 구체적인 실감을 얻고 화자는 그것을 수용하게 된다. 마침내 시차를 극복하고 죽음을 수용한 사람의 모습을 작품의 아홉 번째 연은 아름답게 그렸다. “당신은/두 눈을 감은 채로 깨어 있는 법을 익힌다/영원이 그렇게끔 도와준다”에서 ‘당신’은 죽은 사람이나 그를 잊지 못한 사람 어느 편의 미망이어도 타당한데 아마도 그것이 영원의 이미지일 것이다. ‘역광’은 피사체를 에워싼 강한 빛으로 피사체의 실루엣을 까맣게 만든다. 이것은 나지환 씨의 시에서 죽음의 매우 아름다운 비유로 거듭난다. 죽음을 수용하는 시차는 그의 다른 시 「작문, 늦여름」에서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진술된다. “죽음이,/갑자기 사라진 뒤/더 좋은 곳으로 떠나는 일이 아니라/볼에 흙을 묻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라는 구절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인식만큼이나 그 인식의 완성이 결국 죽은 사람의 관점을 동일시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담담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볼에 흙을 묻히는 일, 눈에 흙이 들어가는 일, 흙에 파먹히고 흙과 섞이는 물질적인 ‘죽음’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죽음이라는 사건의 의미는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자기 인식이 언제나 간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듯이 죽음이라는 사건 역시 언제나 간접적으로 체험될 수밖에 없다. 죽은 사람의 죽음은 그것을 목격한 사람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역설이 인용된 구절에는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나지환 씨의 시들은 ‘간신히’ 제 존재의 그늘을 유지하는 피로사회의 주인공들을 비추면서 그들이 자신들을 짓누르는 현실을 상상적으로 횡단하면서 불모성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도 가볍지 않고 또 무겁지도 않다. 오히려 “눈은 창밖이라는 말을 너무 좋아합니다. 또, 이 오두막의 창문은 지나가는 열차의 차창과 쉽게 몸이 바뀐답니다.”와 같이(「산타」) 충분히 감각적이고 매혹적이다. 신인상 수상자 나지환 씨에게 우정 어린 악수를 건넨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신인들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의 문제일 뿐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분들이었다. 몇몇의 분들은 신인이라기엔 도리어 너무 익어 버린 분들도 있었다. 1, 2차 예심을 거치면서 뚜렷했던 수준 차이는 막상 본심에서는 불명확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 중요한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한 분 한 분의 작품은 그 자체의 매력으로 심사자들을 유혹하면서 동시에 그 유혹이 발생하는 지점에 대해 성찰하게 하였다. 이상돈 씨의 핍진성과 활달함, 김보배 씨의 완성도 높은 세련미, 최다성 씨의 끈기 있는 자기부정, 김사루 씨의 예측 불가능한 진폭, 김지영 씨의 민첩성도 충분히 높이 살 만했다. 완결성만을 본다면 나지환 씨의 시가 다른 응모자들의 그것보다 서툴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지금 우리 시에 필요한 것은 매끈한 대답이 아니라 패기 있고 투박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지환 씨의 투박한 패기가 지금 우리 시단에는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많은 문제들은 이미 그 해답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제시되어 있는 상황이 바로 그 해답을 무력하게 하는 요소이다. 낡은 말이지만 그 매끈한 해답들은 다시 내파될 필요가 있다. 고통스러움과 살고 싶음으로 응축된 질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응모작들을 일별하면서 넌지시 짐작하게 되는 ‘계간 파란 신인상의 모범 답안’이나 ‘적중 문제’ 같은 시들을 내파하는 자리에서 나지환 씨의 시들이 시작되고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시의 지평을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뜨겁지만, 우리의 시가 놓여 있는 소중한 공감과 연대의 지평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비좁은가. 환대와 박수갈채가 아닌 고독과 몽매, 회의와 자기부정의 시간을 내파하는 언어의 힘을 생각해 본다. 이 막막한 시간을 타기할 힘은 더욱 근원적인 자기부정을 통과한 언어에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자에게는 거듭 축하의 인사를 낙선자들에게는 계속적인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이현승)
심사 소감
내가 읽는 시의 변화를 감지한다. 시를 읽는 내가 바뀌고 있음을 확인한다. 주체와 대상은 상호 침투하여 서로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간다. 신인상 대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시를 검토하는 과정은 긴장의 돛이 팽팽하게 펼쳐진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 매우 많은 모멘텀을 요구한다. 그것은 즐거움과 어려움과 아픔을 수반한다. 투고된 시를 읽은 후 가려내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지니는 가치를 잘 알기에 매번 최고의 집중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새로운 시인을 뽑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그렇다고 지난한 일도 아니다. 심사자는 판관이 아니다. 논리와 증거에 의거해 형량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심사 과정에서 나는 신인을 선발하고 있는 ‘우리’가 시와 시인을 판결하는 심판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나에게 어떤 권한과 책임이 주어졌기에 나는 투고자의 당락을 결정하고 있는가. 판단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과 회의 역시 무섭게 나를 짓눌렀다.
투고작들의 상향 평준화 때문에 나는 번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드라지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확실하게 매혹적인 작품도, 뚜렷하게 수준 미달 작품도 이전보다 대폭 줄어들었다. 이러한 결과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아직 알 수가 없다. 전반적인 조감(鳥瞰) 결과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기시감’이다. 기성과 비슷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신인 투고자들 서로의 경향과 감각의 차이가 매우 근소하다. 이것을 평균의 상승이라고 판단해도 될까. 이러한 특성을 개성의 무차별 또는 성향의 군집에 따른 차이의 상실이라고 바꿔 말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제3회 신인상 투고작들을 새겨읽는 과정에서 흥미를 느꼈던 점은 세대 차이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창작의 열도와 강도가 불꽃으로 타오르는 시기의 미등단 시인들과 3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에 이르는 예비 시인들이 다른 집합을 형성한다. 나는 젊은 분들의 시에서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는 현재의 이곳에―성취 여부를 미래로 미루어 놓았던―새로운 이미지의 성채(城砦)를 휘황하게 쌓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중장년 신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등단이라는 제도와 절차의 문법과 양식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논리적인지를 깨닫고 말았다. 몇몇 분들은 이미 시인이었고, 자신만의 시 세계를 건설하고 있었다. 삶의 고통과 모순을 온몸으로 살아 내며 시 한 편 한 편에 영육의 불꽃을 피워 올려 읽는 사람을 감응과 전율로 물들이는 이분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는 새로운 시의 맨얼굴을 목격했고, 시인의 삶이 껴안은 에너지가 시의 힘으로 온전히 반영된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나는 시 공부에 태만했다. 내게 부족한 것이 배움이었다. 이 작품들 때문에 나는 행복했다. 시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신인상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2차 예심 후 최종심에 제출한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상돈, 김보배, 나지환, 최다성, 김지영. 다섯 분 모두는 시인이다. 우리는 이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다섯 명 중에서 마지막으로 논의한 셋은 나지환, 김지영, 김보배였다. 나지환과 김지영, 2인으로 범위를 좁힌 후 최종 독회를 열었다.
김지영이 아쉬웠다. 시에 점수를 매길 수는 없지만, 만약, 시를 학점으로 평가한다면 김지영의 작품은 당연히 A였다. 그만큼 안정적이었고 그만큼 좋았다. 시간이 김지영에게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단연코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을 다음 기회로 밀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 때문이었다. ‘그들끼리의 비슷함’이 선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지환은 그들 안에서 ‘자기도 모르는’ 미세한 차이와 균열을 껴안고 있었다. 그것이 매력이었다. 나는 ‘두려운 낯섦’을 내포한 불안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했다. “빛이 우리를 생각할 때까지” 같은 유려한 마무리에서(「빛이 생각한다」) 나지환이 건네는 신호를 포착하게 되었고, “야경이 풍경이 아니라 감각이 될 때”로 집약한 촌초(寸秒)의 집중이 돋보였다(「명멸, 회전, 감각」). 나지환이 설치한 방지턱을 넘기 위해 제동장치를 밟은 후 천천히 그의 언어가 집약해 놓은 풍경을 감상하게 되었다. 나지환을 시인의 자리에 초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작품은 「역광」이었다. 갑작스런 지인의 죽음을 황망히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물밀려 온 이미지들, 아니 ‘내’가 배열한 죽음과 이별의 이미지 속에서, ‘나’는 흔들리는 감정을,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봉합한다. 나비의 날갯짓을 삶의 허무로 낭비하지 않는다. 떠나간 지인을 매장하고 돌아서면서 “화단 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법”이라는 문장을 독자의 망막에 박음질하는 장면에서 나는 나지환이 좋은 시인이 될 것임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성간 비행」에서 산문을 다룰 줄 아는 능력과 감각까지 확인했다. 거칠지만, 조금 울퉁불퉁하지만, 그것이 이상하게도 낯섦과 두려움을 한꺼번에 생산해 내고 있었다.
감정은 시의 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감정은 언어로 운송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가 감정을 도외시할 수도 없다. 나지환은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우리의 감정을, 근래의 신인들과 다르게, 정직한 언어로, 질식시키지 않고, 우리의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애이불비 같은 단어를 곱씹게 하면서, 시가 시대와 세대를 배반하고, 유행에 익숙해진 독자마저 배반하고, 원형을 상기시키는, 익숙했지만 지금은 낯설게 된, 그리하여 우리를 두렵게 하는, 감정이라는 본원(本原)으로 우리를 귀환시켰다. 나지환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이제 나지환은 시인이다. 더 큰 통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석원)
새해를 맞이하고 가장 기다린 일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계간 파란 신인상 응모 원고를 살피는 일이었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저마다의 새로움을 품고 각지에서 보내온 원고를 읽는 기쁨이 무척 크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올해로 제3회를 맞는 계간 파란 신인상 응모 원고들을 살펴보며 반가운 이름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실제로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지만 아직 시(詩)라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괴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료들이라는 생각에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한 인간이 심사 위원의 자격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한구석에 있었고, 그 힘으로 더 눈에 힘을 주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오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저마다 다른 방식을 가지고 다양한 시선으로 원고를 살피고 있을 다른 심사 위원분들의 시선 또한 큰 힘이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은 고독한 일이며, 그 글을 읽는 작업 또한 고독한 일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했다. 나의 고독과 시선이 완전하지 못함을 알고 있고 앞선 두 번의 심사 경험으로 내가 다 읽어 내지 못한 부분은 다른 심사 위원들께서 충분히 이끌어 줄 것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회와 제2회의 심사평을 여러 차례 읽었다. 시를 사랑하지만 자주 시에게, 세상에게 실망하곤 한다. 그럴 때 선배님들과 동료의 글이, 심사평에서 시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져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이번에도 이후에도 응모자분들도 그 마음을 읽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의 형식을 갖추지 못했거나 한눈에 보기에 심각한 수준의 원고를 제외하고는 최소 3회 이상 읽었다. 미욱한 안목이지만 정성을 들인 대부분의 원고를 정중하게 대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세밀하게 순차를 나누지 않고 예심 탈락 폴더를 만들어 그곳에 많이 아쉬운 원고를 넣었다. 거기서 남겨진 원고들을 다시 읽었다. 꼼꼼히 재독 후 확실히 예심에 올려야 할 원고와 아직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원고를 두고 1차 예심에 올리지 않기로 결정한 원고들을 넣었다. 다시 한눈에 들어오지 않던 원고들을 읽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원고는 대략 열다섯 편 정도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예심 탈락 원고부터 다시 살폈다. 혹시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재독 후에 아까운 원고들은 상위 폴더로 이동시킨 후, 다시 그 상위 폴더에 있는 원고들을 재독하여 혹시 놓친 원고가 있는지 살폈다. 그 과정에서 다시 서너 편 정도를 상위 폴더에 올렸다. 약 스무 편의 원고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 후에 최종적으로 내가 예심에 올릴 원고들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는 이유는 정성을 들인 원고는 반드시 누군가 정성을 들여 읽어 준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랜 습작기를 거쳐 간신히 등단을 했던 나는 습작기의 답답함과 암울함을 꽤 잘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학은 승자들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패배를 통해서, 슬퍼하는 자들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전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저 줄 세우기로 1등만을 뽑는 일은 현재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눈이 가고 안타까운 원고들이 많았다. 3회의 신인상에 꾸준히 응모하며 점점 더 다듬어지는 시를 쓰는 투고자도 있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원고도 보였다.
여느 문예지를 보는 일보다 더 즐겁게 원고를 검토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저마다 개성을 간직한 문장들 때문이었다. 유려한 문장의 시편들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기존의 동시대 젊은 시인들의 영향을 과도하게 받은 시편들 또한 많았다. 특히 최근 시인의 작법이나 형식을 여과 없이 수용하여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작업인지 의문이 들었다. 가혹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신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새로움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새로움이라는 것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문학의 바깥에 많다. 이것을 어떻게 체화하는가가 시인의 역량이 아닐까. 지금까지 신인에게만 과도하게 새로움에 대한 요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러나 이번 심사를 거치며 기성 시인들 또한 새로움에 대한 책무가 있고, 그것을 등한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다면 신인의 작품에서 형식적・내용적 새로움을 기대하는 일은 그리 과도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두 손에 쥐고 고민했던 원고는 김지영과 나지환의 원고였다. 두 분 모두 지난 신인상 때부터 인상적인 원고를 투고했고, 한층 발전한 시 세계를 펼쳐 보였다. 김지영의 경우 명료한 정황과 절제된 언어로 화자의 세심한 감각을 전달하는 시편들이 인상적이었다. 작년보다 한층 발전한 원고를 읽으면서 저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안정성이 높아진 대신 의외성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단점을 지우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개성은 단점에도 있을 것이다. 성장이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탈락한 잔가지들에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나지환의 원고는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언어와 세계관을 끌고 나가려는 의지가 돋보였다. 지난해의 원고에서 장황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황들의 연쇄가 장점이자 단점이었듯이 여전히 설명적 언술과 좋은 문장이 교차하는 가운데 자신의 방식을 개선하는 데에 집중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높은 점수를 준 것은 본심에 오른 많은 원고 중 형식적 기시감이 가장 덜하다는 점이었다. 유행에 예민하다는 것은 그저 유행을 따르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을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나지환의 앞으로의 행보를 꾸준히 응원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춥고 외로운 일이겠지만 더 오래 혼자서 나아가기를 바라며 나지환을 올해 당선자로 추천한다.
당선자 이외에도 아쉬운 이름들이 많다. 최다성의 작품들은 원고의 후반부가 아주 아쉬웠다. 특히 일기 형식의 시편들은 형식 자체도 새롭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내용도 기존의 작품과 기성의 관념들을 빌려 오는 일이 자신의 취향과 존재 증명 이후에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것인지, 하려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는 이미 일기의 형식을, 고백을 내포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인데, 다시 일기의 형식을 빌려 무언가를 보여 주려 하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여러 시편에서는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문장과 형식을 고민하며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최보슬의 작품은 좋은 문장과 좋지 않은 문장이 혼재한 가운데 안타까움을 특히 많이 느낀 원고였다. 좋은 묘사가 있었으나 앞뒤의 정황들이 그 문장을 받쳐 주지 못해 모호한 상황에 놓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추상적 인식에 기대기보다는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에게 감각을 전달해 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일차적으로 사유한 관념을 이미지로 치환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결국 독자가 스스로 그 관념을 펼칠 수 있도록 더 섬세한 방식의 사유가 필요할 듯하다.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 낸 원고들을 보면서 제 일처럼 기뻐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신인상 제도가 가진 모순과 함께 신인상 투고자의 상황도 꽤나 모순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통과제의이면서 시험인 신인상 제도 앞에서 신인상 투고자는 고분고분하고 선량해야 하는가가 이번 원고들을 읽으면서 든 새로운 의문이었다. 존대와 높임말을 사용한 다정하고 부드러운 문장이 과연 좋은 문장인가? 부드럽고 따스한 위로는 부드러운 말들로만 이루어져야 하는가? 착한 것은 과연 다 좋은 것인가? 혹은 착함과 무해함을 위장한 비겁함이 거기 숨어 있지는 않은가? 투고자는 이 제도를 통과하기 위하여 고분고분하고 단정한 언어만을 구사해야 하는가? 책임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좀 고개를 빳빳하게 든 시발(詩發) 정신이 깃든 원고들을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김건영)
시는 어디에나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인상 투고 작품엔 언제나 시가 있고 삶이 있다. 투고된 작품들을 읽으며 시간여행을 한 듯하다. 언어의 바퀴로 이루어진 기차를 타고 한 사람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속도로 삶을 통과하기 때문에 서로가 보내는 신호를 쉽게 놓쳐 버린다. 하나의 행간을 벽에 걸어 두고 오래 바라보았다. 시를 쓴 사람의 산책길, 책상, 표정, 마음의 형태 등을 상상했다. 행간에서 그 사람의 생활의 냄새가 풍겨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번 심사에서 내가 찾고자 한 것은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줄 수 있는 투명한 유리였다.
먼저 강하지, 김기숙, 정호재, 유혜연, 박선아, 최보슬, 김조, 김나희의 작품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강하지 씨는 ‘나-엄마’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서사가 후반부로 갈수록 힘을 잃는 느낌이 있다. 어떻게 하면 서사로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을지 연구해 보면 좋을 듯하다. 형식은 ‘나’로부터 구성되어야 어색하지 않다. ‘엄마’라는 기표가 꼭 필요할까? 김기숙 씨는 삶의 파토스가 강렬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다만 그 파토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분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정호재 씨는 무심한 발화 속에 풀어지는 풍경이 의미심장하여 좋았으나 그 풀어지는 풍경의 범위가 한정적이었다. 유혜연 씨의 뾰족하고 활발한 언어도 아름다웠다. 그 정렬되지 않은 감정들을 어떤 캔버스에 담을지 고민해 보길 바란다.
박선아 씨는 작품이 안정적이지만, 묘사가 필요한 부분에서 진술을 하고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할 지점에선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말을 부연하고 싶을 때 감춰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최보슬 씨의 작품은 후반부가 아쉬웠다. 전반부에 보여 준 어떤 당당함을 더 밀고 가셨으면 한다. 김조 씨의 언어는 매끄러웠다. 두부가 담긴 틀처럼 일정한 자신만의 형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형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묶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하여 보면 좋겠다. 김나희 씨의 작품은 유려했지만 행간이 꽤 엉켜 있었다. 지금까지 시를 썼던 방식은 잠시 접어 두고 전혀 다른 과정으로 작업을 해 보기를 추천드린다.
그다음으로 주목한 분은 이상돈, 김현우, 이해수, 김미진, 주서림, 양지승, 최다성, 김사루 씨였다. 지난 투고에 비해 가장 언어가 많이 달라진 분은 이상돈 씨였다. 삶과 사물이 어떻게 부딪치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알고 계신 듯 보였다. 그 불꽃들이 그려 낸 그을음 속에 오랫동안 있었다. 김현우 씨의 유쾌하고 발랄한 언어에도 힘이 있었으나 다만 그것을 그려 내는 과정이 익숙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행과 연을 다르게 쓴다면 그 멋진 상상력이 더욱 빛을 발할 것 같다. 이해수 씨의 작품은 기대치가 높아져서 그런지 아쉬움도 컸다. 행과 행의 충돌에서 비롯된 일상의 균열이 특유의 장점이었던 것 같은데 그 이상의 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미미한 세계를 주목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가 사라진 느낌을 받았다. 한 끗 차이는 생각보다 넓고 크다.
김미진 씨의 언어는 ‘나’를 잘 드러낸다. 그런데 그 주변에 등장하는 문장들과 호응이 잘되지 않는다. ‘나’를 표현할 때와 대상을 적어 내려갈 때의 차이를 느껴 보시기를 바란다. 주서림 씨의 리듬도 좋았다. 이질적인 것을 겹쳐 놓고 끌고 가는 솜씨가 돋보였다. 다만 그 훌륭한 솜씨에 ‘나’의 얼굴이 가려져 볼 수 없었다. 화려한 언술은 줄이고 담백하게 서술하면 어떨까. 양지승 씨는 문장을 덜어 내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 같고, 최다성 씨는 다소 긴 산문시이지만 길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을 줄이고 늘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틈, 그 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여 보면 좋을 듯하다. 김사루 씨의 작품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를 저 세계의 어떤 낭만성으로부터 건져서 현실과 밀접하게 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분은 김지영 씨와 나지환 씨다. 두 분의 작품 모두 제3회 계간 파란 신인상으로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김지영 씨의 언어에 대한 미적 감각은 전혀 의심할 바가 없었다. 특히 화자의 정황에 적확한 시어의 사용과 활용을 통한 감각의 변이가 아름다웠다. ‘애들아 이런 세계도 있어 몰랐지?’라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러나 작품 전체의 호흡과 감정선이 균일했고 그것이 운용되는 방식이 눈에 익었다.
나지환 씨의 작품을 신인상으로 추천한다. 나지환 씨의 작품 속 화자는 어딘가 불안하고 불편하고 방랑적이다. 나지환 씨의 언어는 움푹 꺼진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자신의 세계에서 비롯된 고통과 고독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복귀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나지환 씨가 그려 낸 화자의 얼굴이 지금의 젊은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지 못한 생활에 던져진, 언어의 돌을 주머니에 넣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흥얼거리며 걸어 나가는, 나가야만 하는 얼굴들 말이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앞으로 어떤 가역반응을 발생시킬지 기대가 된다. 신인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응모작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분의 동료라고 생각한다. 이미 훌륭한 작품에 말을 덧붙여 마음이 편하지 않다. 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의 작품을 여러 번 봤다는 것으로 나의 미숙한 눈을 감출 순 없겠지만 그래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언어의 바퀴로 된 기차는 다시 여러분 곁으로 돌아가고 있다. (정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