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김씨 호남파 후손들이 나주 땅에 들어온 것은 입향조 부호군공(副護軍公) 9世 휘(諱) 총(緫)선조의 손자인 왕자사부(王子師傅) 죽오당(竹梧堂) 11世 휘 건(鍵 1513-84) 조상 때이다. 죽오당은 당숙부(堂叔父)인 문경공 한훤당선생이 남긴 가르침을 이어받아 성리학 연구에 힘쓰신 학구파 선조이시다. 1534년(중종2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중종35년 행의(行誼)로 왕자를 가르치는 왕자사부(王子師傅)에 발탁되었으며 중종38년 예산현감(禮山縣監)에 봉직하는 동안 학문과 효제(孝悌), 청백리로 이름을 떨치신 후손들이 기억해야 할 조상이다.
부친상을 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3년 동안 극진히 상을 지켰고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평소 세 아들에 소학(小學)을 중히 여겨 가르쳤고 지금의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에 단풍정(丹楓亭)을 세워 후학 양성에 전념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나주에 세거하여 호남파의 본거지가 되었다. 후손들은 왕자사부 죽오당의 유적을 기리기위해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단풍정 부근에 왕자사부죽오당김선생(王子師傅竹梧堂金先生)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여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 나주군 다시면 가운리 묘소 부근에 재실(齋室) 영모재(永慕齎)를 세워 매년 음력10월15일 제향을 모시고 있다.
1583년(선조16) 나주를 중심으로 도내 유림들이 상소를 올림에 따라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을 모실 서원 건립이 허락되었다. 그때 나주목사로 있던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이 적극 지원하여 이듬해인 1584년(선조17) 사당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 서원터는 나주의 서문밖 대곡동(大谷洞 현재의 경현동 부근)이었고, 창건 당시의 명칭은 금양서원(錦陽書院)이었다. 이때 서원의 규모는 매우 정연하고 컸다. 강당 회극당(會極堂), 동랑 영인당(永仁堂), 서랑 정의당(精義堂), 서재 시습재(時習齋), 동재 일신재(日新齋), 대문 지원문(知遠門) 그리고 담장 밖에 10여칸의 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규(院規)는 학봉 김성일이 직접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본받아 작성하였다.
학봉 김성일에 이어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임윤신(任允臣) 목사 때 지방 유생들의 발의로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4위를 함께 배향하여 서원의 이름도 오현사(五賢祠)로 바뀐다.
경현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당시 나주목사로 와 있던 목장흠(睦長欽)과 지방유림들이 합력하여 중건하였으며,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에 김선(金璇) 등의 상소로 ‘경현(景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그 뒤 1693년(숙종 19)에는 기대승(奇大升)과 김성일(金誠一)을 추가배향하여 모두 7위를 모시게 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현재의 서원건물은 1977년 후손들과 향내 유림들에 의해 영안마을로 이전 복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