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탄. 임검이 웬수다
"나굴아 네게 주는 내 선물이야"
"어머 좋아라. 무슨 선물이야?"
"뜯어보면 알지 뭘 물어 보니"
"꺄악 이게 뭐여 가발 아녀?"
"웅 가발이야, 우리 머리가 짧아서 그런지 시비하는 작자들이 많아서 가발로 캄푸라치를 해야 해"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디, 근데 가발 값 비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가발을 이리저리 들쳐 보고 만져보던 나굴이가 막상 써보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뭉치에게 물었다.
"좀 줬어. 지름신이 입질을 해서 확 질렀지"
나굴이와 뭣 좀 하려고 하면 고양이가 나타난다든지 혹은 순찰대원이 나타난다든지 등으로 해서 나굴이와 첫날밤을 치루려는 뭉치의 핑크빛 꿈은 산산 조각이 나는 것이다. 이에 뭉치는 꿍쳐 두었던 용돈을 털어 가발 두개를 샀다. 뭉치의 짧은 머리와 나굴이의 단발 형 깻잎 머리로는 모텔을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짜낸 빈곤한 전략이었다.
나굴이는 남과 다른 뭉치의 지혜스러움과 뭐가 있는 지략에 대하여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나굴이도 느낌으로야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뭉치가 그런 전략을 꾸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쨋든 분위기가 잡혀서 거사를 치르려고 하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훼방꾼들에 의해 산통이 바싹 깨진 탓에 나굴이도 몸이 달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훼방꾼들에 의해 산통이 깨지고 나면 허전하기 그지없고 또 거기가 가려워서 벅벅 긁고 싶어지곤 했다.
"옴마, 옴마 내가 왜 이러는거야. 이러다가는 미칠지도 몰라. 엉엉"
뭉치와 부비부비를 하고 나면 몸이 달아서 온 몸이 활짝 열리는데 훼방꾼들 때문에 산통이 깨진 몇 번에 나굴이는 불안감이 슬며시 들어왔다. 혹시 너구리신이 우리를 막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었다. 함께 할 운명이 아닌데 억지로 운명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굴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부정했다.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만약 운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갈 데까지 가겠다는 각오로 어금니를 재차 물었다. 혹시 친구 집으로 데려간다거나 아니면 물레방앗간으로 데려 간다고 해도 따라 가기로 작정을 했다.
두 마리의 불량청소년 커플은 늦은 밤에 만나 모텔로 직행했다. 늦은 시간이 되어야 모텔 카운터의 눈이 피곤으로 인해 침침해 지고 그래야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뭉치의 말에 동의했다.
"불 꺼, 불 안 끄면 안 할 거야."
"그래 그래, 불 끌께"
이제 막 거사를 치르려는 판인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혹시 너구리증을 안 가져온 분은 빨리 가져 오셔야 합니다. 임검반에서 단속 나온다는 연락이 왔어요."
"네 알았어요."
아아 이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뭉치는 생일이 빨랐기 때문에 너구리증을 발급받았으나 나굴이는 아직 민증도 나오지 못한 솜털이었다.
"나굴아 임검은 11시가 되어야 마친단다. 어쩌면 좋니"
"어쩔 수 없지 뭐, 우린 안 되는가봐"
모텔 카운터에 부리나케 다녀 온 뭉치가 나굴이에게 말했다. 망신, 망신 이런 개망신이 다 있나. 빤쓰을 도로 입으며 나굴이는 꼬질대로 꼬졌다.
"나굴아 11시 땡하면 잽싸게 와, 문 열어 놓을테니까. 카운터에도 말해 놨어. 임검 끝나는 대로 들여보내 달라구"
"알았어. 근데 막 슬프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나굴이의 슬픈 모습을 보며 뭉치의 가슴은 미어졌다. 이거 이거 푸닥거리라도 해서 액운을 활활 털어 버리던지 해야지 미치겠다.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뭉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졌다.
"오빠, 오빠"
살풋 잠이 들었었나 보다. 뭉치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작은 손길과 목소리를 낮춘 나굴이의 음성에 자극을 받아 불같은 기세로 나머지 작업에 돌입했다. 불길이 타오르는 듯 한 초야를 치루면서 드디어 둘은 한 몸이 되었다. 둘은 마침내의 소원을 이루고 새벽까지 단잠을 잤다.
먼저 눈을 뜬 것은 뭉치였다. 둘은 서로를 감싸 안고 다시 얽혔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수줍어서 이불 속에서 서로가 부스럭 거리며 속옷을 입고 나서 겉옷을 입고 옷매무새를 고쳐 볼 양으로 불을 켰다.
"허억"
"꺄악"
둘의 얼굴이 동시에 확인되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비명을 질렀다. 둘 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태가 어떻게 된 심판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둘은 동시에 서로의 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 되고 말았다. 뭉치의 뇌리에 나굴이가 울부짖는 환영이 지나갔다.
아~아~ 앞에 있는 여인은 휴지처럼 구겨지듯 쓰러져 눈물을 펑펑 쏟고 있다. 둘이 함께 했던 시트에는 장미꽃이 피어나 있었다. 증좌가 저렇게 도도하니 빼도 박도 못하겠다. 짧은 시간에 만감이 교차했다. 어쩔 것이냐 이 일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심판인지 알아는 봐야겠다. 아니다. 이건 꿈이다. 혹시 나굴이가 둔갑을 했을지도 모른다. 둔갑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대책이 없을 때에는 토끼는 것이 상수이다. 등등 뭉치는 번뇌에 휩싸였다. 망할 놈의 임검. 임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꺄오꺄오 하면서 고민하고 있는 뭉치를 향해 그녀는 눈물을 흘리다 말고 깊고 그윽한 눈으로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기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꼬까 머리를 하고 있는데 군인인가요. 아니면 학생인가요?"
당시 중학생 머리를 까까 머리, 고등학생 머리는 꼬까 머리로 불렀다. 남학생들끼리는 스포츠가리로 불렀으나 여학생들은 스포츠가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꼬까머리로 불러 주었다. 꼬까머리는 군인머리와 불과 1~2cm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가 굵직한 남학생의 꼬가머리와 군인의 꼬까머리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뭉치는 갑자기 물어 오는 질문에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천지사방으로 굴리고 있던 잔머리도 스톱했다.
"...."
뭉치도 새삼스럽지만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인 듯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깊고 그윽한 눈빛에는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갈무리되어 있는 교양과 지적인 느낌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어머 어머, 고등학생인가봐 이를 어째 엉엉"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다시 울었다. 번뇌가 시작된 모양이다. 뭉치는 찔끔했다. 여대생인가 보다. 환장하겠다. 연상녀를 따먹었나 보다. 그것도 여대생을... 뒷수습이 안 된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토껴야겠다. 한숨을 길게 쉬면서 문과 자신과의 거리를 확인하고 있는데 그녀의 말이 허공을 갈랐다.
"어쩔거예요?"
어찔했다. 뒤통수를 몽둥이로 한 대 맞은 것처럼 휘청했다. 대책이 없어서 36계 줄행랑을 감행하려던 찰나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하다. 이제는 토낄 기회도 사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하실 거냐구요"
몽롱한 정신으로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는데 그녀의 눈은 또렷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기대 반, 체념 반씩의 비율이 좌충우돌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동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하실 거예요? 이것 한 마디 대답해 보세요."
그녀의 얼굴이 뭉치의 얼굴로 한발 가까이 밀고 들어왔다. 움찔하며 뭉치의 얼굴이 뒤로 밀려나자 밀려난 만큼 다시 밀고 들어와 뭉치의 뒤통수가 벽에 닿았다. 더 이상 뒤로 밀릴데도 없거니와 다른 데로 눈길을 피할 각도도 없었다. 다만 그녀의 눈만 보일 뿐이다.
"하자는 대로 할게요."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바짝 다가와서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데 당해낼 재주도 없다. 자초지종을 납득할 수준으로 풀이해 주고 이렇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결론도 아니었다. 준비도 없이 저질러진 일이니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이성적인 논리로 가져가야 하는데, 눈앞에 다가와 있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대화를 기술적으로 끌고 갈만한 지적 기술도 또 이런 경험도 전혀 없는 뭉치는 다만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눈앞까지 잉잉하고 쳐들어와서는 다른 데로 눈길도 주지 못하도록 눈길을 막아 버린 그녀. 그녀는 뭉치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쪽쪽 빨아 먹으며 뭉치의 생각까지도 빨아먹었다. 그것은 게아재비가 양팔로 꽉 잡아 꼼짝 못하는 송사리의 몸에 천천히 촉수를 박아 넣고 진액을 쪽쪽 빨아 먹어 껍데기만 남겨 놓은 형상과 같았다. 뭉치의 생각을 담아 놓은 주머니는 이녁에게 다 빨아 먹혀 홀쭉해졌고 머릿속은 텅비어 버렸다. 뭉치는 무장해제를 당한 포로 신세가 되어 재판관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꼴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 맞추고 싶다는 욕구가 불현듯 솟구치며 지난밤의 희열이 되살아났다. 뭉치는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어떤 꼴인지도 모르고 그녀의 복숭아 빛깔이 감도는 고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녀는 담담히 받아들이더니 잠시 후에 뭉치의 목에 양손을 감았다. 뭉치의 손이 그녀의 젖가슴으로 쑤욱 들어오자 그녀는 입술을 떼고 말했다.
"책임지세요. 우리의 운명이에요."
또박또박 말하고 나서 그녀는 뭉치의 입술을 덮쳤다. 잠시 후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뻐 죽겠어. 우리 신랑"
"...."
뭉치의 청춘은 이렇게 해서 거덜 나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용용이었다. 혀가 좀 짧고 단순 무식한 뭉치는 용용이를 부를 때마다 죽을 맛이었다. 결국 뇬뇬이가 가르쳐 준대로 자기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자기야로 부를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