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일두고택(一蠹古宅)>
일두고택은 개평마을을 대표하는 고택이다. 아직도 몇 백년 묵은 마을에 사람이 살고 있고, 상업화되지 않은 전통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을의 중심에 일두고택이 있다. 선인이 밟은 땅, 선인이 살던 집, 오늘 나도 밟아본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집의 위용과 학자의 기품을 대변한다. 관과 민이 모두 선호한 소나무, 그 상징이 그대로 일두고택의 상징이 된다.
1.사적지 대강
명칭 : 일두고택(一蠹古宅)
위치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
방문일 : 2022.12.1.
입장료 : 없음
2. 둘러보기
1) 소개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였던 정여창(鄭汝昌)의 고택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중건한 것들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 정병호의 고조부인 서산군수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채는 청하(淸河)현감을 지낸 선조가 300년 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를 게시(揭示)한 문패가 4개나 편액(扁額)처럼 걸려 있다. 원래의 집이 이 터에 있어서 500여 년을 연기(延基)하여오는 명기(名基)의 터전으로 풍수지리설을 운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이 터를 열거한다.
대문간을 들어서서 직행하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內樓)가 전출(前出)한 구조이다.
‘文獻世家(문헌세가)’·‘忠孝節義(충효절의)’·‘百世淸風(백세청풍)’ 등을 써 붙인 사랑채는 전퇴(前退)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지그시 앉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측면을 통과하고 다시 문을 지나야 안채에 들어서게 되는데, 원래 중문채와 문밖의 곳간채는 따로 있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의 뒤편으로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으며, 그와 별도로 일곽을 이룬 가묘(家廟)가 또 있다.
사랑채의 내루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 : 굽은 기둥)를 세우되 세간(細竿)한 석주(石柱)로 초석을 삼은 특색을 지녔으며, 또 누하(樓下)의 주간(柱間)을 판벽(板壁)으로 막아 수장처로도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주목되는 구조로는 사랑채 앞마당 끝 담장 아래에 석가산(石假山)의 원치(園治)가 있다. 보통은 후원에 주력하여서 앞마당에는 취평(取平)한 채로 반듯하게 두는 일이 고작이나 이 집에서는 사랑채의 내루에서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게 조산(造山: 인공산)을 꾸몄다. 조선 중후기 주택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 정여창(1450~1504)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다음백과 전재)
이렇게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면 솔송주문화관을 지나 일두고택에 이른다. 솔송주는 정여창가에서 전해내려오는 전통주로 청와대의 각종 행사 및 남북정상화담 등에서 쓰인 술이다. 솔송주는 솔잎과 소나무순으로 만드는 술로 정여창의 부인이자 정종의 손녀가 처음 만든 술로 알려져 있다.
아래는 일두고택 내부
사랑채
집안에 이처럼 아름드리 소나무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집은 흔치 않다. 1987년 <토지>, 2003년 <다모>, 2018년 <미스터 선샤인>을 비롯한 수많은 드라마가 촬영되었던 고택이다. 오늘도 어디선가 무리를 지어 와서 집을 살피고 있는 젊은이들 모습이 심상치 않다. 이리저리 바라보고 재어보는 품새가 촬영을 위한 예비답사를 온 거 같다.
여행객들의 발길은 물론 시청자들의 눈길도 계속해서 사로잡는 전통과 품위의 양반 고택이다.
만 평방미터 정도의 집터에는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등의 여러 건물이 있다.
정여창은 한동안 두류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하고 성리학을 탐구한 다음 <유두류산도화개현작>(遊頭流山到花開縣作)이라는 시를 지었다.
風蒲獵獵弄輕柔 바람결 부들은 가볍고 부드러운 것 희롱하는데,
四月花開麥已秋 사월달 화개현은 이미 보리가을이 되었구나.
看盡頭流千萬疊 두류산 천만 겹을 이미 다 보고나서
孤舟又下大江流 외로운 배는 다시 큰 강을 따라 내려간다.
첫줄에서는 산중에서 볼 수 있던 광경을 그렸다. 계절의 변화가 늦어 산중에는 이제 겨우 봄이 온 것이다. 둘째 줄은 인간세상의 움직임을 나타냈다. 벌써 보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을 산에서 나오는 사람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다음 두 줄에서는 차원이 다른 말을 했다. 두류산 천만 겹이란 거기서 쌓은 학문을 은근히 이르는 말이다. 산에서 이룰 것을 이루었으니 밖으로 나와, 당장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큰 강의 흐름이라고 한 넓은 천지에서 포부를 펴겠다고 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권, 전재)
문헌세가
충효절의. 흥선대원군이 썼다고도 한다.
탁청재(濯淸齋), 사랑채의 이름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집이다. 정여창의 호 일두(一蠹)는 좀 한 마리, 겸양의 의미이겠으나, 지나친 느낌이 있다. 충의에 절의에 문헌세가에 탁청재, 모두 근엄한 도를 쫓는 유학자 기풍 일색이다.
안채
사랑채 앞의 인공산의 중심을 이루는 소나무가 뒤 안채를 구분하는 담장을 넘어 위용을 자랑한다. 나무 한 그루의 위세가 집 전체의 분위기를 어떻게 압도하는지 보여준다.
석가산 앞쪽에서보다 뒤쪽에서 보는 것이 더 장관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 위용이 눈에 삼삼하다.
돌아나와 석가산의 소나무를 끼고 다시 사랑채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선비들은 충효절의를 다짐하는 문헌세가의 가풍을 느끼면서 어떤 고담준론을 주고받았을까. 팔작지붕의 높은 처마가 그 절의의 기운을 또한 상징한다.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정여창, 1504년 갑자사화에 다시 부관참시된 정여창의 처절한 운명,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굽히지 않은 그 기개가 역으로 읽힌다. 소나무의 위엄은 그 처절함을 이겨낸 인고의 덕분이리라.
<鞍嶺待風> 안령에서 바람을 기다리다
待風風不至。(대풍풍부지) 바람을 기다리나 바람은 오지않고
浮雲蔽靑天。(부운폐청천) 떠다니는 구름이 푸른 하늘을 가리는구나.
何日涼飆發。(하일량표발) 언제나 서늘한 광풍이 일어나
掃却群陰更見天。(소각군음갱견천) 음산한 무리 쓸어버리고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으리.(번역 필자)
표(飆)는 회오리 바람, 광풍을 말한다. 시적으로 별로 완성도 높은 작품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간절한 기개만은 시를 넘어 전달된다. 오언에서 칠언으로의 임의적 형식 변화는 시적 완성도보다 메시지 전달에 의미를 두었음을 말해준다. 유배되어 가는 유배객의 처절한 심정, 당시 권력층에 대한 불만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유배길은 결국 저승길이 되었다. 이렇게 끝나가는 학자로서의 미완의 인생이 더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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