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7 ㅡ 5공주의 특별한 여수행 (사소)
지난 해
엄마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드리고
올 해 첫 추도식이 끝날 무렵
착실한 오빠는 언제부터 편집해 준비했는지
엄마의 생전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틀어 줬다.
어린 손자 손녀들의 육아 비디오에 담긴
쓰러지시기 전 엄마.
생신 때랑 명절 때, 새 건물을 둘러 보실 때랑
일상의 모습 속에 젊었던 우리 육남매와
서로 개다리춤 경연을 펼치던 어린 손주들,
그리고 브라보! 술잔을 치켜든 우리 아빠.
그 속에서 함박웃음을 지으셨던 엄마!
우리가 홧김에 심한 말을 할 때도
"너 왜 그러니?" 이렇게 좋은 말로 하라며
욕설 한 번 함부로 내뱉지 않고 타이르셨던
우리 엄마!
엄마의 육성이며 그때 입으셨던 옷이며
부드러웠던 몸매며 따스한 손길
모든 게 살아 오는 듯 했고
우리는 오빠가 어떻게 이걸 다 모았을까?
감동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추도식이 끝나고 어느새 5공주는 우리집으로 옮겨와 날이 훤해질 때까지 밤새 비로소 저마다 가슴 속 얘기를 슬며시 꺼내놓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넷째 동생은 엄마가 쓰러지신 후 병상에서 보내셨던 지난 18년 동안의 응어리가 이제 좀 풀린다는 얘길 전해왔다.
그렇게 5공주의 여행 계획이 세워졌고,
올 5월 여수바다를 보러 우린 떠났다.
언니들 사랑을 하도 많이 받아,
찢어진 빤쓰를 입어도 예쁘다는 말을 믿고,
서른이 되기 전까지 자기가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다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막내,
막내는 언니들에게 어디서 몇 시,
어느 좌석 기차를 예매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우리는 기꺼이 복종했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순간은 호텔에서
넷째가 챙겨온 귀밥파개! 를 치켜 들면서였다.
그걸 보는 순간
우리 자매는 웃음으로 쓰러졌고,
언니들은 차례대로
막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은혜롭고
성스러운 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
여수 맛집을 다 뒤져
괜찮은 식당과 카페를 예약해 준 넷째 제부의 치밀한 기획력과
기차에서 먹을 과일 간식까지 싸온 세심한 큰언니 덕분에 호사도 누렸다.
해질 무렵
노을이 보이는
요트에 올라 바람을 맞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셋째 동생도 울고 있었다.
가만히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멀리 점점 노을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
그때 요트에서 김광석의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사교성 좋은 큰언니는
같이 요트에 탄 낯선 모녀를
몇 년 사귄 것처럼 사진을
이리 찍어주고 저리 찍어주며,
2천원이 더 비싼,
멋있게 날개를 펼친 저 건너 요트를
우리가 탔어야 한다는 둥 너스레를 떨며 천연덕스럽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기꺼이 쏟아 부었다.
이어 흘러나온
'여수 밤바다' 장범준의 음성은
언니의 농담과 함께
우리의 젖은 마음을 바람에 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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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몇 달 전 쓴 글입니다.
오늘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신 아빠가
몇 시간 병원 허락을 받아
엄마가 하늘 쉼터에 모셔진 후
처음 만나러 가시는 날,
오늘
이 글을 올려 놓고
많이 웃고 오겠습니다.
첫댓글 18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계셨다니, 그래도 5공주 덕분에 외로운 병상은 아니셨겠네요. 부모가 아플 땐 더욱 딸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버님도 곧 보내드려야 한다니, 남은 시간 많이 웃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빕니다.
쓰러시지기 전 많이 행복하게 못 해드린 것만큼이나, 오랜 세월 고통 속에서 살아계시게 하는 게 엄마를 위한거라 착각하고 젖을 떼지못한 아이처럼 마냥 붙잡았던 세월이 회한으로 남더군요. 부모앞에서 울지 않겠다 다짐한 것을 오늘도 지킬 수 있었어요. 햇살도 따스했고 바람도 차분했고요. 입원중이라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하셨던 아빠가 오늘에야 엄마께 술 한 잔 올리며 인사할 수 있었구요. 많이 함께 웃었구요. 모든 것들이 우릴 도와줬어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