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혼돈-토후
무가치 한 것. 헛된 것. 장소개념으로 광야나 사막이라고 한다.
그 땅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려고 만들어 놓은 광장, 곧 성전이다.
하샤마임과 하아레쯔로 엘로힘을 창조했다.
하샤마임과 하아레쯔가 하나가 되어야 엘로힘이 된다. 창조 목적이다.
베레쉬트라는 계획을 가지고 성전 안에서 엘로힘을 창조하였는데
그 엘로힘이 곧 그 하늘이고 그 땅이다.
그리고 그 땅은 시작하는 것이다. 창1;2절을 1절과 토막을 내서는 안 된다.
1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2절이다.2절은 1절에 근거해서 연결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역이 내 마음으로/호흡이 된 것/수용된 것
하나님의 말씀이 내안으로 들어와 호흡하지만 그 말씀으로 되어진 것이 없기 떄문에
삶이 텅빈 것이다. 하나님의 완성된 호흡으로 하나 되어보니 하나님과 나 사이가
천지차이인 것/내 속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진 것이 아직 없는 것.
하나님에 대한 배움이 아직 없으면 하나님과 내가 거리가 멀고 그 멀어진 깊이가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는 상태가 깊음/태훔이다.
아직 수면에 운행/밖의 하나님, 에피성령
이 태훔이 기점이 되면 /진리로 하나가 되면 /내가 그리스도로 꺠달아지면
브엘세바/야곱의 우물이(샘)되는 것이고 생수가 넘쳐흐르게 되는 것.
또 하나님의 호흡, 생명이 들어와 나와 일치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에게
적용이 되면 내가 어두운 자라는 것을 깨달아 지면-아 ! 나에게는 빛이 필요해 !
이것을 말해 버리는 것이 호쉐크 /어둠이다.
신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황무지-미드바르 에레쯔/땅, 들, 흙, 토지,옆방, 길, +광야, 세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마르로 말을 못 하신다. 왜냐하면 해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미드바르/광야는 아마르를 다바르로 보여주는 곳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보여 주셔서 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하나님은 진리로 보여주고 싶고 말하고 싶은신데 그 방법이 다바르이다.
★아마르: 가라사대... ‘그분의 깊으신 뜻’/말할 수 없는 말이다. 표현이 불가능.
하나님의 호칭이 붙어서 하나님 쪽에서 말하고자 하시는 뜻과 내용.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제시가 안 되면 우리는 아마르를 모른다.
하나님 쪽에서 어떻게든 알게 해 주셔야 한다.
알게 해 주시려고 한 말 그것이 다바르이다.
아마르라고 하는 그 뜻을 모양으로 만들어서 제시해서 말하면 다바르 !
사람이 이해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동원해서 그분의 아마르를 알게 해야 하기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동원했다. 그것이 바로 다바르이다.
●성전-다바르.●예수-다바르.●율법은 전부 다 다바르이다.
애굽은 보여주지도 못하는 곳이다.
진리를 말하려면 다바르를 끄집어내야 한다.
애굽에서 나오라고 말하는 이유가 나와서 광야에서 다바르 하라는 것이다.
다바르를 통해 약속의 성취를 이루라는 것이다.
아마르를 다바르로 보여주는 곳이 광야이기 때문이다.
에레쯔라는 말이나 미드바르는 같은 말이다. 에레쯔는 다바르 하는 곳이다.
★광야에서-토후/아무것도 없다.
에레쯔 미드바르를 토후라고 말해 버리셨다. 에레쯔(땅)=토후(혼돈)
아무것도 없고 텅빈 세계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아무것도 없는 그것이 하나님과 나를 만나서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시고-마짜
에레쯔하고 동일한 이름으로 쓴 것이 토후이다.
토후가 무엇인가? 그것은 광야라고 말할 수 있다.
삼상 12: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삼상 12: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헛된 것을/헛되니라-토후
사무엘은 토후를 쫒으면 안 된다고 쓰고 있다.
왜냐하면 토후는 유익하지도 않고 구원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유익하다-야알. ★구원하다-나짜르
토후는 하 아레쯔와 같으니 하 아레쯔는 성전을 말함이다.
사무엘은 벌써 성전이 유익도 없고 구원도 못해 !
왜냐하면 그들은 헛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 성전이 구원도 못하고 어떤 가치를 부여하지도 못하는
유익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시 107:40
여호와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케 하시나
★황야에서-베 전치사가 있는 토후이다.
토후 안에서/그 성전 안에서가 된다. 그 성전은 텅 비었다.
그 토후에는 길이 없다. 길이 아닌 것 이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길-데레크 ★유리케 하시나-타아. 종합해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하아레쯔/성전인데 이 성전은 유익도 없고, 구원도 못하고
길이 아니라는 것이고, 길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성전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고 텅 빈 것이다.
하나님이 이와같이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거짓선지자가 보여주는 성전을 덥석 잡으라고 하는 것이다.
거짓선지자들은 보여지는 것만 계속 강조하고 그것만을 잡으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제는 땅의 것에서 벗어나 다른 가치를 찾아야 한다. 하늘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사 40: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빈 것 같이-토후. ★아무것도 아니라-아인 ★없는 것 같이-에폐쓰
★열방이-고이. 그 이방의 모든 것.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우리민족 빼고 나머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하나님 입장에서 말한 이방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하늘에 속해 계신다.
그분이 땅에 있는 것을 이방이라 하신다.
롬 2: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육체를 따라 판단하면 표면적 유대인/육신의 의식이 지배-절기,성찬,침례/육신의 할례
육체를 따라 판단치 않고 영의 의식이 지배하면 이면적 유대인이다.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 성경문자를 속뜻으로 /영으로 깨달았으면 이면적 유대인.
육적 몸을 벗는 것이 그리스도의 할례이다.
우리말로 풀어 말한다면 목적이 있어서 나타내고 보여주신 장자
겉의 것, 성전,예수. 표면적인 것이 다 드러나고/다 죽고
진리를 깨달은 상태를 이방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밖에 계신분이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이방이라 한다.
그 이방이 하나님 입장에서는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당시 이방의 이름으로 나오는 에돔, 모압, 암몬, 이두메 이런 민족들이
이방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진리를 못 받으면 에돔이 된다. 하 아담이 되면 이스라엘이라 부르신다.
아담이 이스라엘이 못되면 너희들이 모압이고 암몬이고 에돔 아니고
무엇이겟느냐? 하나님과 내가 하나된 것이 이스라엘이다.
결국은 이스라엘과 이방이 하나이다.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었던 이방이 진리가 되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토후가 의미를 가지면 ‘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방법이시다.
사 40: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그 앞에는-네게드
정면 반대쪽.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하늘 입장에서는 이방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여기시느니라-하솨브
엮었다. 짰다. 빈 것으로 엮었다.
그 땅에다가 하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엮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늘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이 땅은 하늘의 도움이 절실하다. 하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땅은 텅 빈 것이다.
땅을 하늘이 끌어들인 것은(엮은 것은)그 땅 때문이 아니라,
땅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펼칠 목적 때문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땅은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 반대편에 있다.
이처럼 내가 텅 비어서 주인이었던 내가 죽고 전적으로 하늘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주님과의 관계가 완성으로 갈 수 있다.
내가 땅의 가치로 가득차서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버린 자라면
하나님과 엮일 수 없다. 하늘의 가치가 펼쳐질 수 없다.
사 34:11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혼란의 줄-토후. ★공허의 추-보후
당아와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가 레11장의 부정한 동물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부정한 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성전이 하나님의 진리가 나타난 곳이 아니면
레11장의 부정한 동물들이 사는 처소가 될 것이고
하나님 쪽에서는 그 안에 토후, 보후를 베푸실 것이다.
사 29:21
그들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케 하느니라
★헛된 일로-토후
베 전치사가 있으므로 그 의를 그 토후 안에서 왜곡한다.
★억울케 한다.-나타/왜곡한다. 굽게 한다.
토후의 가치를 잘 모르면 의가 망가진다. 의는 토후 때문에 빛나기도 한다.
무가치한 것 텅빈 것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가? 완성,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성전의 상태는 무가치하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 못한다.
의미 없음.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완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혼돈이라고만 번역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무가치한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방법이다.
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토후이다.
선지자들은 이 무가치한 것이 얼마든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치밖에 모르고 그 너머의 생명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
이것이 엄청난 사실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왜 교회당의 크기에 열광하는가?
이미 성전은 무가치하고 구원도 못하고 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왜 현대교회는 거기에 생명을 걸고 그 길로만 가려고 하는가?
성전건축이 목적인 사람들/목회자들이 있다.
평생에 성전건축 한 번 하고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나는 성전건축을 몇 번 했다고 자랑하는 이들도 있다. 큰 교회 담임으로 가는 꿈.
성전 크게 지어서 사람들 많이 모으면 그것이 성공인가? 욕심이다. 탐욕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
길이 아니라는데 구원도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텅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통탄할 노릇이다.
성경을 잘못 알고 있다.
겉으로만, 문자적으로만 표면으로만 본 결과이다.
이미 기독교는 종교에 빠져 있고 종교화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벌써 창1:2절부터 성전은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구원도 못하는 텅 빈 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는데 그 말씀을 못 알아 들은 것.
속뜻으로 깊은 의미로 숨겨있는 영적 뜻을 찾아 진리를 전하는 이들의 방법은 동일.
해석이 같을 수밖에 없다. 같은 성령이 깨닫게 하셨다면 그 의미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이다.성경은 생명이 되는 복음밖에는 기록해 놓지 않으셨다.
창세기 1;1절부터 마지막절 까지 다 동일한 십자가의 진리,
죽음과 부활. 내 육신의 생각, 내 가치관, 내 의가 박살나고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