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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중에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답변과 관련 발언들을 정리한 후기입니다.
1.추앙과 해방주체
추앙을 한다고 해서 해방주체가 되는가. 주체적인 측면을 읽어보겠다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로 보이지만 노동문제, 자본문제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같이하지 않고는 뭐가 안 되기 때문에 조직문제로 계급문제로 발전 할 수밖에 없다. 서로의 삶을 응원한다는 것이 연대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추앙을 할 만한 내용이나 가치관이 무엇이 있는가. 누구나 개성이 있고 누구에게나 존경할만한 무엇이 있다. 사회 속에서 추앙을 받을만한 저 사람은 무엇을 갖고 있길래 추앙해야 하나. 작가가 암시하는 것이 있는가. 염미정이 자본을 쫓아가거나, 사람 관계에서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가.
염미정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추앙한 사람이다. 애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고 애인은 딴 여자와 도망가고, 삶 속에서 계속 상처를 받는다. 인간에 대해서 신뢰를 버리고 문을 닫는다. 이 드라마의 시작은 동아리 활동이다. 사내 동아리를 구성하고 공동체가 결성되어 활기차게 돌아 가도록 회사에서 동아리를 구성하게 만든다. 그 동아리에 들지 않은 세 명이 있는데 그 중 한명이 염미정이고 세 사람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는 말이 ‘내성적인 사람은 내성적으로 살게 내버려 두면 안 되나’이다. 이 세 사람이 모여서 해방일지라는 해방동이리를 만든다. 추앙한다는 것이 나를 맹목적으로 신뢰해 달라는 요청이다. 맹목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가치로 지향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있고 세속적이지 않고 그런 사람이 지향할만한 사람으로 형상화된다.
전국적으로 노조가 생기기 이전만 해도 노동자라는 존재가 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리던 시대에는 기업문화가 오너가 자기 이윤을 위해서 노동자들이 동아리를 만들거나 자율적인 대화를 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런 동아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80년대 말 90년대를 거치면서 어떤 식으로든 노조가 파업도 하고 투쟁을 하니까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노동자들이 노조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도록 신노사문화, 신경영전략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런 하향식의 동아리가 생긴다. 회사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지 않는, 노조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주도권으로부터 회사가 거기로부터 소외된 사람, 거기에 부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주체적으로 상당히 비판적인 관점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의미라면 적어도 회사의 기득권 세력에 영합하지 않고, 상처받고 소외받았으면서 인간성을 지키면서, 우리끼리라도 뭐라도 해보자 응원해 달라 이런 의미라면 노동해방의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겠다.
조금 자의적이지만 최소한의 교양이랄까 최소한의 인간적인 교양이 있어야 하지 않나할 때 교양의 핵심은. 자기보다 힘 있는 자에게 빌붙으려 들고, 자기 보다 약한자들은 밟으려고 들고 이런 자들은 경멸해야 한다. 강자에게 빌붙을 필요없다고 생각해야 하고, 그게 기본 교양이다. 이런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존경할만하다. 누구라도 그런 마인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평등사회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존경할 만한다.
2.노동시간 단축과 국가권력
분업과 생산력의 문제, 현재 인류가 노예노동 안하고 살만한 노동시간 줄이는 생산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기계화 자동화에 더해 분업이 불가피했다고 보고, 느리게 갈수는 있지만 각자가 소생산자가 될 수는 없고, 대량화 되거나 조직화되려면 사회화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분업이 작동한다. 얼마나 분업되어 있고 폐해를 극복하는 문제, 이 두 문제가 맑스 초기에는 아침에 뭐하고 저녁에 뭐하는 구조였다가, 나중에는 노동과 나머지 활동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자본론> 가서는 결국은 노동일 축소가 기본이다, 현재 핀란드가 28시간, 독일도 그 수준으로 축소되었고, 그런 차원에서 보면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생활이 가능하게 하는 그런 정도의 임금체계나 노동시간 구조로 가려면 자본과 엄청나게 싸워야 한다. 알아서 잘 가지지가 않는다.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 단계를 넘어서서 누군가가 떼돈을 벌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지가 되어야 하는 사회 구조가 아닌 생산수단부터 공유가 되거나 이런 구조가 됐을 때 자본주의 시대, 몸에 스며들어 있던 본능들까지 죽여가고 없애고 새로운 욕망체제를 갖추어 가야 한다.
노동을 두 층으로 나눴듯이 영어에서 Labor와 Work를 구분하는 것처럼 노동과 활동을 구분해서 자유로운 활동으로서 사용가치를 만들수도 있는 그런 영역을 점점 키우는 작업을 하는데, 그 변화는 하루아침에 안 되고 기본적으로 생산양식을 바꾼다. 소유관계를 바꾼다 하는 거는 국가권력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고 봐야한다. 국가권력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조직적인 활동을 필요로 하고 주체는 노동자밖에 없다고 봐야하는 그런 구조 아닌가. 고헤이가 이게 좋다는 거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있다, 이런 방향이 맞다 말할 수 있다. 쿠바에서는 실제로 일부분 해내고 있다고 보이고, 그런 방향으로 가기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냐, 노동자 개무시 하는 상황에서는 그것부터 극복해 가야 한다.
어떻게 갈 것이냐. 접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어떻게 접점을 찾느냐가 중요하다. 국가권력에 강세를 두는 쪽에 대해서 고헤이나 아나키즘 쪽에서는 국가권력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도 과도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 국가사멸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지만 국가권력 자체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국가권력 자체가 지니는 폭력성, 관료화, 온갖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고, 대리주의 비판도 있다. 그것들이 가진 과도성에 너무 비판적으로 초점이 맞춰지기도 하고, 반대로 고헤이나 아나키즘 쪽에서 제시하는 최소한의 운동들, 공동체 운동 이런 것들이 고헤이쪽에서 전략적이고 과독적인 측면에서 이거라도 할 수 있다고 내놓을 게 많다. 반대로 국가권력을 중심에 두는 쪽에서는 국가권력 가지고 안돼 하듯이 이거 가지고 안돼 하는거다. 그 두 가지가 다 같이 하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협동조합 운동은 운동대로 하되, 지향점이 평등사회다, 사회주의고 그쪽으로 가려고 하는거다 하면 언제라도 같이 가는거다. 어떻게 하면 접점을 만들거냐가 문제다. 굳이 적대할 필요도 없고 같이 갈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이게 묘한데 아도르노 변증법 보면 이 사람이 좋아했던 거는 짜임관계라는 구조다, 별자리다. 별자리에서 어느 것이 중심이 아니라 각각의 별들이 인식가치나 책임을 공동으로 지고 있다. 따로 따로 노는 것 같지만 전체가 살아야 별자리를 이루듯이 우리가 각각의 주체들이 각각의 책임과 인식 가치를 갖는 것이 이상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 아도르노는 변증법에서 모순은 기본이다. 모순과 적대를 변증법의 밑바탕에 깔린 체온으로 본다. 헤겔과 맑스가 중요한 이유는 그 모순을 정면 돌파하려 했다는 것, 회피하지 않고. 자본주의 모순과 싸우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안 된다고 보는 거고, 차이를 존중하는 거는 유토피아다. 서로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유토피아다. 그렇지만, 거기까지 가기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PT독재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이 두 가지가 아도르노 이론에서는 공존한다. 묶으려고 노력도 잘 안 한다. 두 가지 마인드를 같이 가지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 압축돼서 표현되는 공동체 운동이나 그런 것들을 버려야 될 이유가 없는 중요한 아이디어고, 그걸 통해서 뭐라도 체험을 하고 작은 영역에서라도 실천해 간다면 앞으로 사회가 변했을 때도 연착륙을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인다. 계속 확대해 나가고,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입장에서 국가권력을 그냥 두고는 온갖 공동체 운동들이 자본에 흡수됐듯이 포위돼서 일종의 알리바이가 되거나 윤활유 역할밖에 못하는 것도 문제다. 궁극적으로 체제를 바꾸는 데까지 가야 한다. 두 가지는 큰 틀에서 봐야 될 문제다. 기본은 체제 변화를 위한 국가권력 전환의 문제에 초점을 두되,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공동체 운동들은 그 자체로 존중하자. 이게 왜 따로 놀아야 하나. 그건 아닌 것 같다.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것만으로 된다. 국가는 근본적으로 문제라고 할 때는 논쟁을 해야 되고 국가권력 바꾸는 거는 불가피하다는 것도 공유하면 문제가 없는 것 같다.
3.노동자국가
노동자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전제가 많이 있다. 현재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형식적 민주주의고 실제로는 자본독재다. 우리 사회의 압도적인 다수 80%라고 대충 추산해서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최소한 80%는 장악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입법, 사법, 행정 전체의 국가기구의 80%는 노동자민중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어야 민주사회 아닌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끝까지 밀고 가면 결국 노동자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깔려있고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민중의 국가, 줄여서 노동자국가이다.
논의 과정에서 보면 중국을 놓고 어떻게 보느냐. 중국은 사회주의 아니다. 자본주의에다 독점이고 불가피하게 제국주의로 가기 때문에 대안은 딴 데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 있고, 시장 사회주의는 기존의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중국 특색의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이고, 맑스의 <자본론>도 그런 입장에서 일정 정도 수정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또 다른 입장도 있다. 중국이 시장 도입하는 것은 명백히 자본주의적인 요소고 중국이 인류의 모델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고, 그렇더라도 과정 중에서 국가도 과도적인 형태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표방하는 다양한 공동체운동도 과정일 수 있다고 본다면 중국은 어떻게 봐야하느냐 했을 때 중국도 그 과정에 있다. 더 사회주의로 가려는 와중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런 차이를 놓고 보면 앞으로 우리도 국가를 먼저 바꿀 수 있다. 국가권력을 먼저 바꾸는 것이 사회 전반, 생산양식을 바꾸는 것 보다는 빨리 이룰 수 있다. 그랬을 때 빨리 이뤘을 때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도 청산 못하고 있고 제국주의에 포획되어 있고, 그럴 때 중국이 겪고 있는 문제들과 똑 같이 문제를 갖고 있다. 그걸 극복하는 과정을 한국도 해야 한다. 생산양식 계속 바꿔가야 하고 자본가들과 싸워야 하고, 욕망구조 바꿔야 하고, 굉장히 장구한 과정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는 어느 하나가 최종 답이라고 볼 것은 아닌 것 같고, 중간 단계로 보고 살아 있는 역동을 통해서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가 핵심이다. 국가권력을 중심에 놓자 할 때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예전처럼 비판적 지지니, 이중대니 하면서 할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안 된다. 좀 더 명쾌한 대안을 가지고 대안세력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의회나 당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적인 문제들이 쏟아져 나온다. 현재의 분열 상태는 어떻게 극복할 거이냐 문제다.
4. 열린 논의와 존중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촘촘하게 사회 전역에서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논쟁을 하고 접점을 찾아가야지 나만 맞고 다 틀렸다 하면 답이 없다. 오히려 내가 틀렸다 생각하고 새로 해야 하지 않나. 논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것이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논쟁할 수는 있는데, 서로 주고받으면서 더 나은 결론으로 가야하는데, 누가 한 마디 하면 다시는 얼굴도 보기 싫어하는 구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자료는 있더라도 대체로 자료들이 자신들이 인용하는 자료는 편파적이다. 자기들한테 유리한 자료만 제시한다. 그것들을 섞어서 볼 수 있는 교차해서 검증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상황을 그림같이 보여주는 테제가 칸트의 이율배반이다.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세상에 한계가 없다고 주장해도 말이 되고, 한계가 있다고 주장해도 말이 되는 두 가지 모두가 논리정연하게 된다. 칸트는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라고 손을 들었다. 평행선이다. 변증법적 모순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상호 이행 전도 통일을 염두에 두는 거고, 상대방 속에 자기가 있다는 것을 보려는 것이다. 이게 안 되니까, 시민사회는 시민사회, 국가권력은 국가권력, 시민운동은 시민운동, 서로 따로 따로 하는 것, 칸트 인식론에서 모든 영역에 칸막이 쳐 가지고 서로 넘나들 수 없다고 알튀세르 같은 경우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다. 초기 맑스와 후기 맑스 완전히 다르고, 과학과 이데올로기 완전히 다르고 이런 식으로 간다.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이 엄청나다. 그게 마치 과학인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칸트 주의자다. 칸트를 좋아한다. 헤겔을 끝까지 욕한다. 헤겔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게 없는 변증법 말한다, 헤겔은 전혀 안 그렇다. 모든 대립하는 것들이 나중에 보면 유기체 속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대립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발전과정에서 보면 흡수된다. 자본가들은 그 짓을 잘한다. 뭐든 들어오면 다 잡아먹으려 들고 흡수한다. 노동운동 쪽은 힘이 없으니까 우선 자기 정당성을 만들고 고수하기 위해서 원칙 지켜야 하는 것이 오랫동안 체질화되니까, 그 사이 자본 쪽으로 넘어가고 난리가 나니까 그나마 지키자 하는 것 같다. 이기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세력을 키워야 한다. 시너지를 만들어가야 한다. 프락치들 하고는 이야기가 안 되겠지만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성실한 사람들하고는 끝없이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운동문화에서 같이 자본독재와 싸우자 하는 사람이라면 추앙까지는 아니더라도 존경하는 마음은 서로 가져야 하지 않는가.
5. 구제적인 象
홉스도 ‘커먼 웰스’를 말하는데 상상 속이 아닌 구체화된 커먼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마인드가 원래 의미는 높은 단계의 공산사회 이미지인데 현재는 자본주의 안에서 그 모델을 만들고 정신을 확장시키는 실천 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양면성이 있다. 이 복잡한 사회에서 과연 국가가 사멸한다는 것은 몽상 아니냐 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국가권력을 바꾸지 않고는 자본독재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권력의 변화를 위한 정치세력화는 있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시작할 수는 있다. 그 과정은 복잡하다. 그에 더해서 결국은 중국은 국가 사멸 꿈도 안 꾼다. 국가 사멸은 그냥 필요가 없어져서 서서히 잠이 들거나 사멸해 간다는 것이지 지금 당장 국가를 없애자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지금 단계에서는 자본독재와 싸우는 과정에서는 노동자국가로 국가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고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모델은 뭐냐. 장기적으로 그런 형태로 국가가 필요 없는 단계로 갈 때는 어떻게 사회가 돌아가느냐 할 때는 공동체 형태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그 단계까지는 왔으니 합의가 된다. 어떤 상황이 됐을 때, 노동자정치든 국가든 공동체든 어떤 형태든, 가상적인 형태라고 하더라도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 안 나온다. 그 부분에서 예전의 소련이 모델이다. 중국 사회주의가 모델이다. 북한이 모델이다. 쿠바가 모델이다라고 미리 단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급선무다.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노동자국가 모델은 이런 거고 주체적인 문제는 이렇게 풀거다. 교육문제, 토지 문제, 재벌 문제는 이렇게 풀거다. 이거에 대한 정책집이 100권 필요하다. 온갖 분야별로 정책 대안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 작업을 전원이 다 합치지 않더라도 모여서 할 수 있는 일 아니냐, 지식인들, 전문가들 끌어들이면서 노동자들 감독하고 검증하면서 만들어 갈 수 있는 단계에 있는 것 아니냐, 현재의 재력이면 할 수 있는데 마인드가 절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어떻게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어떤 방식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갈 것이며 그 사회의 모습은 어떤거냐 할 때 전략과 전술 문제는 뺀다. 일단 소련은 나름대로 중세시대의 권력 가진 황제를 물리치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거기까지는 성공했는데 실제로 진행을 하다보니까 많은 한계에 부딪혔다. 마르크스가 바랐던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본인들은 국가 단계를 탈피해서 새로운 사회에 다다랐다 선언도 하고 했지만 인정이 안 됐다. 거기도 한계에 부딪혀서 망했다. 단순히 국가권력만 통해서 노동자국가를 세웠다는 것만으로는 택도 없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 세계적인 제국주의가 포위해서 공격하는 게 있고, 내부적으로 어떤 경제를 건설할 것인가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후발 자본주의로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포스트 맑시즘이 나타나면서 기존 운동을 부정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 잡는다는 것을 부정하고 이런 사조가 세계를 휩쓸었다. 여전히 또 그런 세상을 견디다보니까 신자유주의 같은 폭압적이면서 극단적인 자본주의 폐해가 나타나니까 다시 세계적으로 맑스를 다시 찾고 <자본론> 공부하자는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그러면 소련에서 고민하다가 이루지 못한 노동해방의 사회는 우리는 어떤 모습을 꿈꿔야 하나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보자 이렇게 느낀다. 거기에 전략전술을 이야기하자면 엄청난 일이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모습이 소련이 어디에서 왜 실패했고 거기서 왜 제대로 된 사회를 왜 못 만들었느냐를 반성할 때 이 운동하는 과정에서부터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명확한 꿈을 꾸면서 그런 공동체를 지향해 가면서 우리가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나중에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한다는 것은 한계에 부딪히니까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상부터 잡아보자는 것이다.
소련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중국에서 무엇을 배울거냐 뭘 거부할거냐. 북한은 어떻게 볼거냐.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뭘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무엇은 배워서 안 된다고 비판할거냐. 100권의 청사진을 그릴 때 중요하게 기본 철학으로 정책 원론 차원에서 들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다. 소련에 대한 평가는 극에서 극으로 평가가 다르지만, 싹 쓸어버려야 할 문제는 아니다. 뭘 배워야하는가 뭘 배워서는 안 되는가 면밀히 공부해야 한다. 현재 좌파 변혁 마인드가 있는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는 사상가들이 있다. 알튀세르, 지젝, 들뢰즈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다. 노동운동 속에도 스며들어와 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할거냐. 한 두 논문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상당히 집중적으로 전문가들이 해주면 좋은데 병폐다. 식민지 지식인의 병폐다. 외판원 되었다. 요약 정리해서 학생들에게 전파하고 그 중에 멋 있는 말 있으면 현실에 적용하고 즐거워하는 거다. 어린애 같은 거다.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 노동해방이든 사회주의든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실천적 과제로 두고 재평가해서 새롭게 쓸 부분들이 요소들이 있는지 운동을 방해하는 저해 요인들 쓰레기 같은 것인지 평가해야 한다. 여차하면 운동을 방해만 한다. 면밀히 봐야 한다. 그 동안 소련 무너지고 나서는 맑스주의는 안 돼, 특히 스탈린은 안돼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갔다. 다 버리기 시작해가지고 맑스 이름만 남았다. 그거는 마치 비판적으로 뭘 한 것 같지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거다. 다시 비판적으로 주체적으로 봐야한다. 맑스나 레닌 엥겔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그냥 그대로 내둬서는 안 된다.
6. 현장과 학문의 연계
학자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는 세상하면서 교육 현장에서 그려볼 수 있지는 않았나. 학자 영역에서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계신 분들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려볼 수 있지 않나. 절대 동의하지만 어렵다. 이런 토론장도 예전만큼 관심이 퇴색되기도 했다. 현장 안에서는 신자유주의니 새로운 정책으로 노동자 탄압해 들어오면 해고되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와중에 어떻게든 죽지 말고 싸워서 권리를 획득해가지고 현장에서 해결할지가 1차적인 책무이고 그거를 해야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받는데, 이거를 넘어서서 사회 전체는 어떤 모습으로 발전시켜가고 우리가 최종적으로 꿈꾸는 사회는 어떤 사회냐 접목시켜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다. 현장에 계신 분들이 다 천재가 되어야 한다. 몸이 열 개는 되어야 한다. 거기다가 성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하신대로 현장에서 그렇게 하면 좋은데 노동자들이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집회 나가면 구호를 인간해방, 노동해방 당연하게 걸었지만, 지금은 민주노총 집회에 가도 해방 자체는 이미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노동해방이 뭔지도 잘 모른다. 오히려 대기업 같은 경우는 노동시간을 늘려 달라, 잔업특근을 늘려달라. 스스로 임금노예화를 더 시켜달라고 하는 마당이고, 비정규직은 안정적인 노예 만들어 달라는 거고, 노동해방이라는 의미조차도 현장에서는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 노동자들이 과연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굉장히 큰 고민이다. 자본주의에서는 해방주체로서 단결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 밖에 없는데 고민이 많이 된다. 우리 노동자들이 뭐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고민이 필요한 것 같고, 노동자들이 임단협이나 이런 것 할 때는 자기 문제는 치열하게 나가는데, 오늘도 서울에서 최저임금 집회를 하는데 소수가 모여서 집회를 하는데 계급적인 문제에서는 현장에서 이야기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이렇게까지 오게 된 거는 공포다. 노동자들에게 심어진 언제 잘릴지 모르는, 4차 산업 시대가 되면 실업으로 몰려갈 수도 있고, 실업이 당장 닥치지 않더라도 임금이라든지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거다. 이게 본능적으로 오는거다. 공포기제가 퍼지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투쟁하는 것도 두렵다. 오히려 투쟁을 막는다. 경험한 것이 노동조합이 회사와 문제가 생겨서 잔업특권 거부를 했는데, 퇴직을 앞둔 노동자들이 몰려와서 잔업특근 안하면 퇴직금에 영향이 가니까. 3-40년 일한 사람이 잔업특근으로 인해 그 액수가 빠지니까 크다. 이런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 만들거냐. 노동자대학원 이야기도 했지만 상시적으로 인문적 소양을 넓히고 스스로가 추앙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태세가 갖춰져야 노동해방이 되고 해방주체가 되는 것이 가능한 것 아니냐. 그래야 국가를 건설하는 주체가 될 것인데, 그런 점에서 현재로서는 답답하다.
현상적으로는 분명히 그런데 변화의 가능성이 있냐하는 걸 보자면 안정적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불안하다. 자동화되면 더 심할 거란 걸 알고 있고 토대부터가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부분이 한 쪽에는 생긴다는 것이 하나의 가능성이다. 거기에 지금까지 되어오는 과정에 제일 큰 것이 한국사회가 엄청난 경제성장을 하면서 뿌릴만한 여력이 있었다. 잔업하면 차도 괜찮은 것 굴리고 아파트도 괜찮은 것 사고했는데 요거 자체가 어려워진다면, 더 이상 성장 한계에 부딪히고 위기 자꾸 등장하면 뭔가 대안이 필요하지 않은가가 현실적인 설득력을 갖지 않겠는가. 신자유주의를 한동안 겪으면서 이건 아니다 하면서 다시 맑스로 돌아갔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토대에서의 변화는 중요한 의식 변화를 만들지 않겠느냐 기대 합니다. 일어나는 변화는 중요한, 우리가 물고 늘어져야 하지 않나. 이대로 가면 안 된다. 바꿔야 된다 하는 거를 회사 차원이 아니라 자본주의 전체문제다라는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나.
7.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주체되기
현재까지의 민주당 집권 세력들이 자본독재에서 한 발도 안 벗어났다는 것, 노동탄압 열심히 했다는 것, 민영화 다 했다는 것. 이런 측면에서 대안정치 없이는 갈 길이 없다. 독자세력화 하지 않고는 말이 안 된다. 민주당 지지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지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한계를 짚으면서 다음 단계로 가도록 격렬하게 그 안에서 싸워야 한다. 이재명 지지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한계를 돌파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노동해방의 의미가 단순히 국가권력을 잡자가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새로운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가 핵심인데, 결국은 우상 같은 영웅이 나타나서 우리를 노동해방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억압받고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겠다는, 우리도 국가 경영할 수 있다. 성공한 사례가 있다. 우리 노동자도 사회경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자는 것이다. 정권에, 기성 정당에 기대하면서 거기에 혼을 다 빼고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보자.
두려움 때문에 나서는 게 어려운데 돌파해야 하는데, 지젝이 이상한 이론가다. 칸트주의 헤겔주의 왔다갔다 하면서 라캉은 칸트주의자인데 라캉 인식론 끌어들이기도 하고, 좋은 말도 가끔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주체로 나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죽음 충동이다. 죽어도 좋아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끝없이 살거야 하는 순간 노예가 된다. 헤겔의 마인드인데 생사를 건 투쟁을 하지 않고 주인이 안 된다. 진짜 필요하다는 거다. 죽어도 좋아 하고 들고 나오면 방법이 없다. 그럴 때 사는 거다. 모든 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한 구석에 땡기는 게 다 있다. 털리는 것 아닌가, 잘리는 것 아닌가 걱정 없는 사람 있겠나. 받아들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안 된다.(영진)
첫댓글 소중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발제문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발제문을 저 보다 더 잘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알찬 토론으로 발제문의 부족한 부분들 채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맛 있는 음식으로 공간을 풍요롭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 자주 뵐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글이 좋았습니다. 함께 생각하고 토론할 기회를 만들어주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