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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 강인한 정신력과 첨단장비로 무장한 세계 속의 대한민국 국군, 국군의 뿌리를 찾기 위해 선배군인들이 누볐던 역사의 현장을 찾아나선 답사단, 여기가 과거에 그 자리였구나. 그거를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오직 하나의 열망은 조국독립, 그것을 위해 뜨거운 피를 흘렸던 의병, 독립군, 광복군들 군인정신의 맥을 추적하는 여정이 지금 시작된다.
육군사관학교 정문 앞, 누군가를 기다리는 답사단장 한시준 교수/단국대 사학과,
박민석 육군소령/2017 참 군인대상: 교수님, 반갑습니다. 이 친구는 김좌진 장군 증손자입니다.
한시준: 김좌진 장군 증손자이에요? 반갑습니다.
김도현 해군대위/김좌진 장군 증손자: 잘 부탁드립니다.
박성욱 해병중사/한국광복군 제3지대원 외손자: 반갑습니다.
진권용 공군대위(진)/미하버드대 전체수석졸업,
국군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길에 독립운동가 후손을 포함한 네명의 답사단원들이 함께 했다.
한시준: 여기 한국 광복군들을 대표하는 다섯분의 흉상을 모셔놨어요. 김좌진, 지청천, 이회영, 이범석, 홍범도 장군의 흉상.
국군장병들이 실제로 사용한 탄피 300킬로그램을 녹여 만든 흉상의 주인공은 국권회복을 위해서 만주와 연해주를 누비던 독립운동가들, 또 한편에서는 독립전쟁의 영웅을 기리는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爲國獻身 軍人身分, 군인의 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글귀죠.
김도현: 3군 (육-해(해병대)-공군)을 다 아우르는 공통된 핵심 가치인 것 같습니다..
전시회에서 만난 한국 광복군 군복, 우리나라에 딱 한점 남은 광복군군복이다. 자세히 보니까 피가 묻은 것 같기도 하고, 한국 광복군의 열악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좀 찡합니다. 광복을 염원하며 한국 광복군이 직접 쓴 글귀와 서명에서는 뜨거운 결기마저 느껴진다.
한시준: 백성들이 스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의병을 일으켰고 또 의병들이 독립군이 되고, 독립군이 광복군이 되고 광복군이 바로 대한민국 국군이 되는 것이죠.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도, 바다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강화도, 당시 서구 열강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약소국들의 문을 두드리던 상황, 강화도는 오래 전부터 외세의 침입을 온 몸으로 막아낸 땅이었다. 帥 자기는 조선군 지휘관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동안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왔다. 관군은 물론 의병과 승병까지 똘똘 뭉쳐 적과 대항한 항전의 역사, 특히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일제의 경제수탈이 시작되면서 양반부터 평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의병들은 본격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총을 들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화승총으로 맞선 의병들, 한발을 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의병들은 지혜를 짜내 싸워야 했다.
김준영 향토사학자: 숙달된 화승총수들은 한번 발사하는데 15초 정도 걸려요. 한번 쏘고 15초 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다음에 격발이 안되니까 2열, 3열로 서서 쏘는 거예요. 보통 화승총의 사정거리는 약 200미터, 계속해서 심지에 불을 부쳐놓고 있어야, 탄환이 발사되는 불편한 구조, 의병들은 1분에 네발 정도 쏠 수 있는 화승총으로 필사에 대응을 했던 것이다. 백년전 의병 처럼 화승총을 겨누어 보는 답사단,
박성욱: 개인 편차도 심했을 것 같고 파괴력 같은 경우는 상당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끊임없이 교육훈련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다루기가 엄청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라를 구하는데 어디 총을 들고 싸우는이들만 있었을까.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의거점이자 자금줄 역할을 자처한 백산 안희제(1885~1943), 그는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운동을 펼치는 한편, 언론운동도 투신했다.
안경란/백산 안희제 손녀: 세상에 우리 군인 아저씨들이 어떻게 왔나요. 예전에 독립운동 한 사람들도 지금 군인들과 나라 지키는 것은 똑 같았어요.
고택을 찾아온 답사단을 위해 망개떡을 만들어주는 백산 안희제의 손녀, 백산은 집에 들르면 종종 망개떡을 한 보따리씩 싸갔다고 한다.
안경란: 수고하는 애국지사들 중에 못잡숫는 분들, 그 동지들한테 할아버지가 갖다 주려고 망개떡을 가져갔지. 할아버지가 잡수려고 가져간게 아니예요.
독립운동가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망개떡,
박성욱: 제가 원래 떡을 즐겨먹는 편이 아닌데 이건 수십개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주의 아들에서 독립투사가 된 백산 안희제 처럼 일제의 국권침탈은 우리 민족의 삶을 일시에 흩으러놓았다.
(서울특별시 중구) 하루 종일 수많은 차량이 오가는 남대문로, 이곳에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서울 서소문의 한 빌딩 앞에서 한 조그만 표지석이 답사단을 맞는다. 1907년 8월 1일에 일제의 군대해산에 항거해 대한제국의 투쟁이 시작된 시위병영터,
侍衛兵營址 (Site of Royal Bodyguard Encampment)-시위 병영터는 조선 후기에 임금의 호위를 위하여 조직된 시위대의 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시위대는 대한제국 선포이후 전투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산되었다. 시위대의 해산은 군인들의 항일시위투쟁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군대해산에 항거해 한국군의 투쟁이 시작된 시위병영터,
한시준: 무장을 갖춘 대한제국 군대하고 일본군하고 8월 1일날 오전 9시부터 12시 정도까지 4시간 동안 전투가 벌어집니다.
대한제국군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군대해산을 단행한 일제, 강제해산에 분노한 시위대의 박승환(1869~1907) 대대장은 유서를 남긴채 자결하고 이를 목도한 장병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1907년 8월 1일에 벌어진 남대문 전투에서 대한제국군 68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시준: 대한제국 군인들은 병력수가 그 당시에 지방 진위대까지 합쳐 봐야 한 6,000명되고 시위대는 몇 백명 되죠. 몇 백명 되는 병력가지고 사단이 넘는 병력하고 싸워서 이기겠어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군대마저 해산시킨 일제, 남대문 전투는 군대해산에 맞선 대한제국 군인들의 피끓는 저항이었다.
박민영 책임연구원/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부대에 투입이 됨으로써 전술적으로나 화력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서 대일 전면전의 성격으로 확대 발전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국회도서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망국의 설움을 토해내며 대한제국 최후의 전투에서 처절하게싸운 대한제국 군인들, 그들은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이후 행적은 어땠을까 추적해 보기로 했다.
(국가기록원 대전광역시 서구) 우리 역사에서 중요했던 사건과 그와 관련된 문서가 보관되어있는 국가기록원, 이곳에 백병전 투지에 빛났던 대한제국의 단서가 남아있지는 않을까. 오래된 문서를 살펴 보던 중 1920년 평양 복심법원에서 판결초본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최시흥 등이 천마산대 소속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경기도 화성시) 경기도 화성의 한 아파트, 중국에 살다가 최근 한국에 정착했다는 여성이 장롱 속에서 소중히 보관해 오던 문서를 꺼내 보여준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난 2010년 뒤늦게 국가유공자로 포상받은 이응선이다.
이순자/천마산대 이응선대원 후손: 우리 아버지는 1920년대 평북의 천산이라는 곳에서 활동했는데 천마산이라는 곳에서 활동했어요. 거기서 독립운동했기 때문에 ‘천마산대’라고 말하거든요.
평안북도에서 활동했던 천마산대, 그들은 언제 만들어졌고 어떤 활약을 했던 걸까. 한 신문에서 천마신대에 관한 기사를 찾아냈다. 군자금 모집과 일본경찰서 습격 등을 펼친 천마산대는 1907년 해산당한 대한제국군이 결성하여 만든 무장항일단체였다.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전국의 의병에 합류했고 그 의병들은 독립군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중국 남만주 랴오닝에 우뚝 서있는 한 동상, 중국에서도 항일명장으로 대우받는 동상의 주인공은 1930년대 남만주에서 이름을 떨치던 양세봉(1896.7.15~1934.9.20)장군이다. 그는 무장독립운동가인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지냈다. 抗日名將梁瑞鳳.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항일명장양세봉’ 흉상입니다. 대일항전에서 수많은 전적을 세운 양세봉 장군, 1919년 거족적인 3.1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구국항쟁의 길에 들어섰다.
전정혁 중국지방역사연구가/前요령조선문보 주필: 1920년도에 집을 떠나서 조선에 갔다 올 때 천마산 최시흥 부대에 입대했습니다. 양세봉(1986~1934)-조선 혁명군 총사령, 평안북도 천마산대에서 활동하다가 항쟁의 무대를 만주로 옮긴 양세봉, 양세봉은 1934년 밀정의 계략에 빠져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한시준: 일본군이 와 가지고 양세봉 장군을 무덤에서 다시 꺼내서 목을 잘랐던 곳이죠. 그 현장을 가는 겁니다.
여기 올라가면 그게 보여요.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오, 철조망 조심하세요. 접근조차 쉽지 않은 지역, 여기예요. 돌멩이들이 있죠.
전정혁: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양세봉 장군이 희생된 다음에 여기서 일본군대에게 잔혹하게 목 잘린 곳이 바로 여기에요. 시신의 목을 잘라 시내에 내걸 정도로 일제에겐 미움의 대상이었던 양세봉 장군,
박민석: 역사상 가슴 아픈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책이나 매체에서도 나오지 않는 흔적들을 현장에서 직접 느껴보고, 그때 당시 우리 민족이 느꼈던, 우리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셨던 분들이 느꼈던 아픔이 정말 컸겠구나 라는 것을 백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 제가 간접적으로도 느낄 수 있는데 그 순간에는 더욱 더 가슴 아픈 일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일제의 악랄한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은 인물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한 여성의 삶을 찾아가는 길,
전정혁: 원래 그대로 원시적 모양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렇게 놔뒀어요. 10년전에 서울에서 태어나가지고,
100년전 만들어진 이 길 끝에 국내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기억이 자리한다 (윤희순 노학당기념비 중국 랴오닝성 환렌현).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윤희순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이곳에 민족학교인 노학당을 세웠다.
전정혁: 여기 노학당에 조선 사람도 있었고 중국 한족 사람들의 지지도 받았죠. 그래서 여기가 의의가 깊은 곳이에요.
10년전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녀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시작했다. 강원도 춘천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한 윤희순(1860~1934), 최초의 여성의병장, 여성 의병조직을 만들고 무기제조장에서 탄약과 병기를 제조했다. 또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구국활동을 독려했다. 중국으로 와 25년간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윤희순 처럼 독립운동에 불꽃 같은 삶을 던진 사람들, 그 이름과 현장을 조금이라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박민석 소령은 순간 순간을 소장한다.
박민석: 저희가 이렇게 한번 답사를 왔을 때 이걸 좀 정리해 놓으면 저희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고 향후에 이런 걸 연구하시는 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도 있어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김도현: 서간도 지방에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중국 쪽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밤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답사 내용을 정리하는 두사람,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취업도 했지만 군복무를 위해서 한국에 온 진권영 중위에겐 이번 답사가 더욱 뜻깊은 시간이다.
진권용: 어릴 때 유학을 갔기 때문에 한국사 수업을 정규과정으로 듣지는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를 제외하고는요. 하지만 미국에서도 한국국사 교과서라든지 책을 충분히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읽으면서 한국사를 배웠고요. 지금까지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이라든지 정체성을 잃지 않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한편, 한쪽에서 뭔가를 꼼꼼히 적어나가는 박민석 소령, 매일 빼놓지 않고 쓴다는 감사일기다.
박민석: 과거 독립군들의 활약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힘든 촬영으로 몸과 마음이 피곤하지만 항상 웃으면서 함께 해주는 우리 단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어, 지금 뭐 하세요? 아, 이번 경험에 저희가 해병대가나 해군가가 있듯이 그 당시에 독립군가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당시의 느낌을 더 살펴 보고자 싶어서 준비했습니다.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꼭 한번 불러보고 싶었다는 독립군가,
박성욱: 그 당시에 독립군가를 불러보면서 독립군의 투지와 사기가 충만한 것을 느끼고 싶어서 한국에서 악보를 준비해서 연습을 하려고 가져왔습니다. 독립군가-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투지로 만주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도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을 것이다.
한시준: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신흥강습소가 있었고 신흥무관학교가 생겼던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라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옛터-중국 지린성 류허현 싼위안푸 쩌우자가, 1910년대초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터, 나라가 망하자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망명길에 오른다. 온 가족을 데리고 낯선 땅에 정착해 대의를 모의한 인사들, 안동-신의주-길림성, 석주 이상룡, 자산을 팔아 구국의 초석을 다졌지만, 우당 이회영, 남의 나라에서 뜻을 이룬 이들이 쉽지만은 안았다.
이종걸 국회의원/이회영 손자: 가장 어려웠던 점은 질병에 의해서 돌아가시고 아팠을 때 어떻게 처우할 수 있었는지 이런 내용이 매일 할머니께서 기억에 많이 남으셨던 것 같아요. 역경 속에서도 강인한 독립군이 되기 위해 청춘을 바친 생도들,
한시준: 중국 관원의 그런 감시나 견제를 가급적 피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여도 ‘경학사’ 그러면 정치적인 성격이 없잖아요. 이름을 붙여도 ‘신흥강습소’ 그래서 이름을 ‘신흥강습소’ 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군사인재를 양성하는 무관학교를 설립한 것이죠. 그들이 실제로 훈련을 받았던 장소는 어딜까? 좀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 봤다.
한시준: 이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훈련을 주로 거기서 했다고 합니다.
경제적 자립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관하고 농사를 지었던 생도들, 백서농장 (신흥무관학교), 학교건물을 세우고 연병장을 건설한 일도 모두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운영이 어려워지고 동포들의 성금도 불가능하게 되자 생도들과 졸업한 학우들은 날품팔이로 수입을 모아 학교유지비를 충당했다.
김용달 소장/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신흥무관 학교의 교재나 군사훈련의 과정을 보면 다 민주정치 이런 원칙에 의해서 군사교육과 훈련이 이뤄졌어요.
지리, 역사, 외국어 같은 학과교육과 칠십리 야간행군 등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병행해 나간 신흥무관학교(1911~1920), 1920년 폐교할 때 까지 9년 동안 약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쟁쟁하던 교원들과 더불어 졸업생들은 만주 전역으로 퍼져나가 강력한 독립운동의 화력이 되었다. (교육대장: 지청천, 교관: 김경천, 교관: 이범석). 삼원포 추가가에 신흥무관학교 자리는 외부인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옮겨온 곳이 합리하 지역, (아, 여기가 과거 그 자리였구나 이런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좀 더 비밀스러운 장소인 합리하로 이전을 결정했다. 몇 년전 몇 해도 예전에 모습이 남아있었지만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현실, 예전에 여기 운동장 있고 집하나 있었는데 여기 다 뜯어버렸네, 올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이 한시준 교수는 안타깝기만 하다.
한시준: 신흥무관학교가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만들어졌다가 그 다음에 두번째로 옮긴 곳에 왔습니다. 이쪽으로 온 이유는 여기는 지금 우리가 고속도로로 들어와서 그런데 본래 들어오는 입구는 저 반대편 쪽이었어요. 그쪽으로 들어오면 여기는 그 입구만 가려지면 밖에서 봤을 때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신흥무관학교터 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석도 하나없는 현장, 새로 건물이 들어서면 이 장소는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역사의 현장이 온전히 보존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밀려온다.
박성욱: 고유한 장소가 없어지는 건데 사실 한편으로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 후대가 어떻게 보존해야 되나 생각됩니다.
진권용: 저희가 와서 봤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몇 년, 몇십년 지나면 그런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면 저희 후배들이 같은 자리에 왔을 때 ‘여기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저희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 그런 아쉬움이 좀 있습니다.
답사단은 서간도에서 북간도로 향했다. 차로 5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지린성 투먼시에 위치한 봉오저수지, 우리 무장독립 투쟁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봉오동 전투와 연관 깊은 땅이다.
한시준: 봉오동 전투했던 흔적을 볼 수는 없지만 또 저수지가 가로 막혀서 골짜기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런 걸 상상하면서 한번 봉오동 골짜기를 세심하게 보시기를 바랍니다.
1920년 6월 봉오동 골짜기에 울려퍼진 독립군의 함성, 독립군들은 이 깊은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해 그들을 참패시켰다. 그 승리 뒤에는 저수지에서 약 8㎞ 떨어진 곳에 자리한 한 마을이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이주해 살고 있던 한인들은 1910년경 황무지였던 봉오동 골짜기에 정착해 마을을 이루며 살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곳에는 우리 민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 1미터가 넘는 맷돌은 마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지 짐작케 하고 물은 말랐지만 우물도 그대로다. 당시 이곳은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였다. 그 무렵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봉오동 일대에서는 독립군들이 소규모 부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너 여러 차례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는 국내진격작전을 펼쳤다. 왕칭 대한독립군-혜산진 일본 수비대섬멸(1919년 8월)-갑산 금정주재소습격(1919년 9월)-자성 일본군 70여명 살상(1919년 10월).
일본군들을 유인하기 위한 치밀한 작전이었다. 독립군의 잇단 공격에 일본군은 정규군을 파견해 독립군 탄압에 나섰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 보고 있는 삼둔자 지역(중국지린성 투먼시), 1920년 6월 6일, 이곳에서 봉오동전투의 서막이 열렸다. 삼둔자 전투에서부터 일제의 월강추격대대를 유인한 독립군은 봉오동 하촌 중촌 상촌을 거치며 전투를 치른다. 독립군의 치밀한 계획에 말려든 일본군은 봉오동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대패를 당하고 만다. 홍범도(대한 독립군), 안무(간도 국민회군), 최진동(군무 도독부), 신민단, 만 하루 동안 벌어진 독립전쟁 일회전, 우리측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 사상자는 120여명이나 됐다고 한다.
김춘선 교수/연변대학교 민족역사학 연구소: 무장투쟁이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홍범도가 제일 앞장섰죠. 그래서 거기서 아예 대한 국민회의 주축으로 후원을 받으면서 아예 대한 독립군 같은 무장단체를 결성해 버립니다. 홍범도(1868~1943) 대한 독립군,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경도 일대에서 호랑이 잡던 산포수들을 규합해 의병부대를 만들었고 이들은 러일전쟁 이후 항일전투를 전개하다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 1920년초 홍범도는 자신이 이끄는 대한 독립군, 최진동의 대한 군무모독부, 안무의 대한국민회군과 연합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이끌며 압록강을 넘어 연이은 국내진공작전으로 전투능력을 향상시켜왔다.
장세윤/동북아 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일본군 토벌기록을 보게 되면 홍범도 의병부대의 규모가 약110명에 달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 기린성 왕칭현의 산골짜기, 하천을 건너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오지에 특별한 장소가 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저 멀리 동굴 하나가 보인다. 경사가 심한 암벽 끝에 있는 동굴로 다가가자 동굴 입구에 특별한 문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태평촌 신선동 태극기 표식,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태극기, 대전자(동림) 무관학교에 다니던 네분이 일본군을 피해서 이 동굴에 피신하면서 이렇게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태극기를 그려놓고 네분의 이름을 기록해 놓지 않았나 그렇게 추측이 되고 있습니다.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동굴 속에서 절치부심했던 독립군들의 마음, 그 간절함은 1920년 봉오동 전투에 이어 청산리 전투에서 결실이 맺게 된다. 청산리 지구 전투현장으로 달려가는 차 안, 김도현 대위는 남다른 심정이다.
김도현: 어렸을 때 들었거나 교과서에서 보던 얘긴데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갔는데 이렇게 직접 현장을 간다고 하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청산리 백운평(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중국 지린성 화룡리) 입구에 도착하자 청산리 대첩 80주년을 기념해 2001년에 건립한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淸算里抗日大捷紀念碑가 당당한 위용으로 우뚝 서있다. 높이가 17미터에 달할 정도로 웅장한 모습, 깊은 산속에서 얼마나 힘들게 독립군들이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김도현: 기념비가 큰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인터넷 사진으로 볼 때랑 직접 실제로 보는 거랑 박력이 좀 다릅니다.
박민석: 이 길을 다 걸어서 그 많은 무기들과 군수물자들을 가지고 전투를 했고 일본군을 여기까지 유인했다는 것 자체도 정말 치밀하게 계획된 성공한 작전이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이곳에서 적군을 향해 거침없이 돌격했을 할아버지의 모습과 독립군들의 이름을 마음 속으로 떠올려보는 김도현 대위,
김도현: 청산리 대첩이라고 하면 저희 증조부님이랑 북로군정서만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홍범도 장군이라든지 아니면 여타 다른 독립군부대들이 연합해서 함께 싸운 전투였고 그 이전부터 가꿔왔던 역량들이 한 번에 표출돼서 쾌거를 이뤄낸 게 청산리대첩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6일간의 청산리 지구전투, 그 첫 격전지는 어디일까? 백운평 계곡 중국 싼다오구 청산리, 청산리 마을 어귀에서 이십여 킬로미터를 들어가자 백운평 직소계곡이 나타났다.
이송덕/前연변박물관 연구원: 베개봉 기슭의 직소(直沼)인데 이곳이 청산리 전투의 첫 전투현장입니다. 전투 당시에는 이 계곡이 산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형을 잘 알고 있던 독립군들은 이 계곡으로 깊숙히 일본군을 끌어들여 섬멸했던 것이다. 당시 근대화된 군사훈련과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미군, 영국군과 더불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립군 부대에게 당하며 체면이 구겨지던 상황에서 독립군 토벌을 다짐하며 청산리로 진격해 왔다. 1820년 10월 어랑촌 최남단 874 고지에서 일본군과 맞선 북로군정서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함께 적을 격퇴시켰다.
청산리 지구전투는 단순한 유격전에서 벗어나 매복과 기습, 부대간의 연합작전이 구사된 정규군의 면모를 갖춘 전투였다. 적의 사상자 사망자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자 장교이하 600명, 부상자 장교이하 200명. 당시 우리측 보고서는 일본군 사망자 600여명 부상자 200여명의 쾌거라고 전하고 있다.
(일본 도쿄) 일본 도쿄,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과거기록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찾았다. 청산리 지구전투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본군 병력이 참여했으며 독립군들은 어떤 무기를 갖고 싸웠을까. 1920년대 북간도에서 펼쳐진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상황기록을 살펴 보던중 오래된 자료 속에서 한 뭉치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직접 촬영했다는 사진에는 1920년대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무기와 독립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청산리 지구전투직전인 1920년 10월초에 작성된 관동군 참모부보고서 내용에서는 당시 일본이 간도지역에 얼마나 많은 군대와 무기를 집중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제2차 10월 7일 오전 9시 30분 봉천발 열차 19량
장교 96명, 하사졸 1072명, 마부 6명 총 1174명 말 64마리, 산포 4발, 탄약 10만 470발
봉오동 청산리 지구전투에 대한 잇단 앙갚음으로 일본군은 간도지역 한국인 수천명을 학살했다. 간도참변 1920년 간도에서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중국 상하이) 1920년대 중반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고민에 빠진다. 일본의 끈질긴 독립군 토벌로 무장투쟁이 와해 직전인 상황에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윤봉길 의거를 계획한다. 윤봉길(1908~1932) 독립운동가.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날, 기념식 단상을 향해 던진 윤봉길의 폭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결정적 한방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경로: 상하이-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
임시정부는 중국 각지로 청사를 옮겨 다니는 시련을 맞았지만 장제스는 윤봉길 의거에 감동돼 중국군관학교에 한일특별반 개설을 지원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1940년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처절한 노력들은 1945년 8월 해방의 날로 결실을 맺고, 임정요인들은 그 해 11월과 12월, 상하이를 거쳐 조국 땅을 밟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 김구 주석 상해도착 45년 11월 5일, (독립기념관 충청남도 천안시).
독립기념관 앞 마당에는 임정요인들이 타고온 비행기와 같은 모델이 전시되어 있다 (C-47기-임시정부 요원들 환국 비행기 동일모델).
한시준: 그때 한국 교포들이 상당히 많이 와 있었어요.
박성욱: 김구 주석이 그때 타고 오셨던 비행기를 저희 외조부께서 타고 오셨다 라는 게 아마 이 비행기를 말씀하신 거네요.
우리가 다시 조국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타국에서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항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운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식 관장/독립기념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되어 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진 국군이 한국광복군이었으니까요.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도 한국광복군에서 찾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리고 가장 헌법정신에 부합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는 한국 광복군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기억하려는 노력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후 수단이 전쟁임을 선포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최후 승리할 때까지 항쟁할 것임을 천명했다.
심헌용 선임연구원/군사편찬연구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마자 곧 바로 중국군사위원회에 승인을 통보합니다. 그러나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한 1년 정도 결정을 못내렸다가 1941년 11월경에 ‘한국광복군행동 9개준숭’ 이라고 해서 광복군이 지켜야 될 몇 가지 원칙들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죠.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
-한국광복군은 아국(我國)의 항일작전 중에는 본회에 예속한다.
-임시정부가 한국 경내로 추진하기 이전에는 아국(我國) 최고통수부의 군경만 접수한다.
-해군(해군) 총사령부 소재지는 군사위원회에서 지정한다.
아홉개 조항은 중국 군사위원회가 한국 광복군을 통활지휘한다는 것이지만 임시정부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중국으로부터 군사권을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힘쓴 결과 1944년 마침내 한국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오산고등학교 경기도 오산시)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광복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학생과 일반인 백명에게 한국광복군에 대한 설문을 진행해 봤다. (한국역사 문화교육원 서울특별시 중구)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한국 광복군이라는 의미는 남다르지만 그 규모와 출신 인사들은 누가 있는지 세부적인 내용까지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민1: 독립운동 역사를 배웠는데도 머릿속에 잘 안들어와 있어요.
시민2: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부터 생긴 거라는 인식을 여태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광복군에 대해 100명에게 물었다.
한국광복군 소속---------------------정답률 20%
한국 광복군 규모--------------------정답률 35%
한국 광복군 참전--------------------정답률 40%
한국 광복군 편제--------------------정답률 25%
예상했던 대로 설문결과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한국 광복군을 잘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 광복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많은 응답자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광복군은 창설 직후 가장 시급했던 것이 병력모집이었다. (쑤징허-한국광복군 학도병 인솔임무담당) 목숨을 건 학도병 인솔임무를 맡았던 중국인 쑤징허씨, 총사령부는 중국인까지 동원하며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네 개의 지대를 편성했다.
신헌용: 조국이 광복이 되는 그 즈음에 광복군의 부대를 확대하기 위해 일본군에서 탈출한 병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지에 산재해 있던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한 지대를 편성하는데 그 결과 상당한 규모로 올라선 것이 아닌가 판단하고 있습니다. 한국광복군 출신요인들은 누가 있는지도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질문이다. (임시정부 요인 및 광복군 지휘관 귀국 환영회 모습).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먼저 임정요인들이 귀국길에 오른다. 이후 광복군들은 1946년 5월 광복군 복원선언을 한 후 귀국을 완료했다. 한국광복군 출신 국군 수뇌부-초대 통위부장 유동열,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 제2대 공군참모총장 최용덕, 육군사관학교 교장 김홍일.
몇몇의 한국광복군 출신들은 귀국후 군에 요직을 차지하며 구국의 군인정신을 계승해 나갔다.
(광복회관 신축현장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완공이 얼마 남지않아 마무리공사가 한창인 광복회관 건물, 친일귀속재산을 활용한 재건축이라 광복회장은 더욱 세심하게 마무리 공정을 점검한다.
박유철 광복회장의 아버지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 박시창(한국광복군 (前)육군중장, 1903~1986) 장군이다.
박유철 회장/광복회: 김구 선생님이 가장 원했던 건 상해에 우리 교포들이 있으니까 그분들의 재산, 인권을 보호하고 동시에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학도병들을 인수하라 상해에서 그래서 상해에서 그분들을 인수해 가지고 상해지대장으로 활동하셨죠.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경삼남도 거제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이곳에는 광복군이었다가 6.25 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던 박시창 장군의 유적이 있다 (흥남철수작전-1950년 12월 15일~23일까지 미제10군단과 구군 제1군단이 흥남 항구를 통해 철수한 작전) 박시창 장군은 1950년 1`2월에 벌어진 흥남 철수작전에 투입됐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미군과 한국군은 흥남항에서 피난민 10만명과 배에 올랐다.
박유철 회장/박은식 손자: 항상, 국민을 먼저 생각하라 그거는 박시창 장군이 독립운동 하면서 느낀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이 있지 않았는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은식(1859~1925) 상해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시창 (1903~1986) 박은식 아들,
박시창 장군의 아버지는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박은식 선생, 역사를 통해 국혼을 강조한 박은식 선생의 애국정신이 그의 아들로 전해진 것이다. 청주의 공군사관학교,
진권용: 광복군이시자 제2대 공군참모총장이셨던 최용덕 장군님에 대한 전시회를 열고 있어서 최용덕 장군님에 좀 더 배우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대한제국 군의관의 아들이었던 최용덕은, 원세개가 설립한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뛰어들었다.
진권용: Republic of Korea Air Force 대한민국 공군이라고 써져 있지 않습니까.
이 수송기는 아마 미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전쟁중인 1953년 이거나 전쟁 말기 무렵에 이용됐을 겁니다.
1943년 무렵 공군창설을 준비하며 대일항쟁의 기치를 올린 임시정부, 이때 국무위원회에서는 최용덕의 공군건설계획안을 채택하고 군무부 직활로 공군 건설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1944년 한국과 미국의 공동항공작전을 기획하면서 5명의 조종사 등으로 구성된 한국항공대를 편성했다. 사실 임시정부는 1920년대부터 독립전쟁에 공군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했는데 미국에 있던 노백린 장군에 임무를 부여해 1920년 윌모스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터 미국 캘리포니아).
진권용: 승리의 역사를 배우게 되어서 참 기쁘고 저희 선배님들에 대해서 자랑스럽고 그걸 후배로서 이어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김도현: 주권, 이런 것들이 정말로 소중한 것이구나. 그게 없는 사람들은 정말 비참한 생을 살수 밖에 없구나.
박성우: 광복군의 후손으로서 분명히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계기로 그 긍지와 자부심이 배가 됐습니다.
박민석: 우리 독립군들이 얼마나 멀리 있는 거리까지 이동을 해서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한 활동을 했는지가 제 머릿속에 정리가 되는 그런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시준: 여러 정세의 변화 속에서 혼동하기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여건인데도 그 속에서 독립군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바로 이것이 한국민족의 저력이고 한국민족의 위대함이죠. 끝. (KBS 국군의 날 특집 다큐 건군 70년 국군의 뿌리를 찾아서, “1부 항쟁의 심장부를 가다”에서 정리).
①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8월 강제로 조선의 군대마저 해산시킵니다. 일제의 군대해산에 항거해, 강제해산에 분노한 시위대의 박승환(1869~1907) 대대장은 유서를 남긴채 자결하고 이를 목도한 장병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1907년 8월 1일에 벌어진 남대문 전투에서 대한제국군 68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일본은 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남대문 전투는 군대해산에 맞선 대한제국 군인들의 피끓는 저항이었다.
②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부대에 투입이 됨으로써 전술적으로나 화력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서 대일 전면전의 성격으로 확대 발전했다. 국내에선 항일독립운동이 힘드니까 만주로 망명한 사람들이 있다. 이회영 5형제는 만주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신흥무관학교(1911~1920)를 9년간 운영하였고, 1920년 폐교할 때 까지 약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만주 전역으로 퍼져나가 강력한 독립운동의 화력이 되었다. 교육대장: 지청천, 교관: 김경천, 교관: 이범석.
③ 백성들이 스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들이 독립군이 되고, 독립군이 광복군이 되고, 광복군이 바로 대한민국 국군이 되었다. 독립운동에 불꽃 같은 삶을 던진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이회영 5형제, 양세봉(1896~1934), 최시흥, 윤희순(1860~1934, 최초 여성의병장) 등이 있다. 한국 광복군들을 대표하는 다섯 분은 김좌진, 지청천, 이회영, 이범석, 홍범도 장군이다.부산에서는 백산 안희제(1885~1943)가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④ 만주 독립군은 1920년 6월 6일, 유명한 봉오동 전투를 치른다. 일제의 월강추격대대를 삼둔자 전투에서부터 유인한 독립군은 봉오동 하촌 중촌 상촌을 거치며 전투를 치른다. 독립군의 치밀한 계획에 말려든 일본군은 봉오동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대패를 당하고 만다. 이때 독립군의 지휘관은 홍범도(대한 독립군), 안무(간도 국민회군), 최진동(군무 도독부), 신민단 등이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120여명이나 됐다고 한다.
⑤ 조국을 되찾기 위한 독립군들의 그 간절함은 청산리 전투에서 결실을 맺게 된다. 1920년 10월 어랑촌 최남단 874 고지에서 일본군과 맞선 북로군정서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함께 적을 격퇴시켰다,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 청산리 지구전투는 단순한 유격전에서 벗어나 매복과 기습, 부대간의 연합작전이 구사된 정규군의 면모를 갖춘 전투였다. 적의 사상자 사망자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이하 600명, 부상자 장교이하 200명. 당시 우리측 보고서는 일본군 사망자 600여명 부상자 200여명의 쾌거라고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청산리 대첩 80주년을 기념해 2001년에 현지에다 높이 17미터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淸算里抗日大捷紀念碑를 세웠다.
⑥ 1920년대 중반 임시정부는 일본의 끈질긴 독립군 토벌로 무장투쟁이 와해 직전인 상황에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윤봉길 의거를 계획한다. 윤봉길(1908~1932) 독립운동가.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날, 기념식 단상을 향해 던진 윤봉길의 폭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결정적 한방이 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청사를 옮겨 다녀야 했다. 중국의 장제스는 윤봉길 의거에 감동돼 중국군관학교에 한일특별반 개설을 지원, 이를 토대로 1940년 임시정부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⑦ 광복군 창설 직후 가장 시급했던 것이 병력모집이었다. 총사령부는 중국인까지 동원하며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네 개의 지대를 편성했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병사들과 각지에 산재해 있던 병사들을 모집하여 편성하였다.
⑧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처절한 노력들은 1945년 8월 해방의 날로 결실을 맺고, 임정요인들은 그 해 11월과 12월, 상하이를 거쳐 조국 땅을 밟는다. 김구 주석 45년 11월 5일 상해도착.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먼저 임정요인들이 귀국길에 오른다. 이후 광복군들은 1946년 5월 광복군 복원선언을 한 후 귀국한다. 한국광복군 출신 국군 수뇌부-초대 통위부장 유동열,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 제2대 공군참모총장 최용덕, 육군사관학교 교장 김홍일, 몇몇의 한국광복군 출신들은 귀국 후 군에 요직을 차지하며 구국의 군인정신을 계승해 나갔다.
⑨ 인터넷에서 광복회장을 검색해 보니까, 대한민국 광복회는 1965년 2월에 창립되었고, 현재 박유철씨가 2011년 6월에 19대 광복회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조부는 박은식(1859~1925) 상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었고, 부친은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과 제5대 광복회장을 지낸 박시창(1903~1986) 장군이다. 박유철씨는 4,5대 독립관장을 역임했고, 25대 (2004.9~2007.5) 국가 보훈처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