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글쓰기 86ㅡ이모티콘의 마법 (사소)
국어과 하팀장은 재입사 후 한두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돌연 퇴사의 의사를 밝혀왔다.
갑작스런 선언에 내가 어찌할 바를 몰랐던 건, 그만큼 그녀와 인연은 각별했기 때문이다. 8년 전, 학원을 연 첫 해 여름날 , 면접을 보러 온 하샘의 긴장된 모습이 또렷이 기억이 났다. 30대 국어샘은 훤칠한 키에 각선미가 두드러진, 쌍꺼풀이 짙고 눈은 큼지막하니 시원해 보였다. 특히 안구는 약간 튀어나와 그 유리에 무엇을 담는지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인상이었다.
시강을 보니 아직은 서툴렀지만 국어 교육을 전공한데다 검정고시 강사나 학교샘을 해온 경력이 있으니, 포인트를 잡아주면 잘 성장할 듯 싶었다. 문제는 그녀의 짧은 치마였다. 마침 상담 온 학부형이, 흘끗 드러난 허벅지를 보더니, 아들이 사춘기인데 저런 복장은 수업에 집중 못할 것 같다며 등록을 보류하고 가버렸다. 고민 끝에, 짧은 옷만 있어서 당장은 정숙한 복장이 힘들다는 하샘에게 상시 할인 의류 사이트를 몇 개 알려주었다. 이후 다시 가을 옷도 온통 짧은 옷이라고 겸연쩍게 웃는 그녀에게 지급된 두 번의 특별 복리후생비는 매우 유용했다.
하샘은 실력도 해가 갈수록 발전했고 책임감을 갖춘 리더가 돼갔다. 그런데 4년 차가 되자, 중간 관리자와 논쟁을 벌이다가 자존심이 너무 상하다며 돌연 퇴사를 결정해 버렸다. 중간 관리자가 연봉얘기를 나누던중 " 당신은 얼마 이상의 가치가 전혀 될 수 없다"는 말에 저격을 받았던 탓이었다. 중간관리자가 기성의 사고로 실언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개입하여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 버렸고, 원장에겐 전혀 불만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아쉽게 하샘은 떠나갔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고도 싱글맘인 하샘이 안쓰럽기도 하고 성실하게 일해준 고마움이 지워지지 않았다. 마침 친구 농장에서 수학한 달콤한 첫사과를 보니, 꽃을 좋아하던 하샘이 생각났다. 택배로 안부를 물으니 하샘은, 기억해 줘서 고맙다며 본인도 아쉽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어느날은 하샘 비슷한 뒷모습만 보고 쫓아가보기도했지만, 청주 사람이 평택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나 학원엔 위기가 닥쳐왔다. 팀원들과 불화가 심한 데다 야망이 가득한 국어팀장이, 수능을 한 달 앞두고 돌연 가방을 싸버렸던 것이다. 불안한 마음이 난생처음 일시적 공황장애를 겪게했다. 도미노처럼 국어과가 붕괴될 것 같았고, 밤이면 막막함이 두렵게 밀려왔다.
고향에 내려가 있는 하샘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하샘은 한 달 만에 그곳을 정리하고 든든한 지원군으로 달려와주었다. 국어과 팀장으로 입성하여 우리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그런 의리의 하팀장이 재입사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퇴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면담 전, 넌지시 하샘 속을 알만한 사람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샘은 원장을 믿고 굳은 결심으로 고향을 떠나왔는데, 다른 직원들 카톡엔 이모티콘도 주고 그러는데, 이제까지 자기한테는 건조한 내용뿐이라고, 너무 서운하다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은 내 입가에 어이없는 실소가 번졌다. 의도하지 않으면 잘 표현해 내지 못하고, 마음에만 담는 내 본 성격이 문제였다.
면담을 하며, 하팀장은 내가 가장 믿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하팀장이 내가 관리를 해야 할 사람이냐고 물었다. 하팀장은 그래도 표현을 받고 싶다며 비로소 빙긋이 웃었다.
나는 하팀장을 위해 신박한 신상 이모티콘을 구입하는 사람이 됐다. 적극적으로 인공지능 이모티콘으로 표현하는 훈련도 하고 있다. 이후 하팀장 덕분에 국어과는 더 융성해졌고 팀원들도 화합이 좋아 하팀장에게 다른 관의 관리까지도 맡기게 되었다.
그런데 또 며칠 전, 하팀장 얼굴이 유난히 수척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 하니, 학생들이 시험을 못 봐서 스트레스를 받고 몸이 아프다며 표정이 회색이었다. 동안 일에 너무 몰입해 체력이 고갈된 것 같아 한의사에게 보내 보약을 먹게했던 터인데, 이제 서울로 상담치료까지 다닌다니 마음이 아파왔다.
학원 일로 하팀장이 상하면 안될 일이었다. 동생같은 하팀장을 어떻게 캐어할 건지 근심이 점점 커져갔다. 오늘은, 보고에 대한 답으로, 하팀장의 섬세한 상담에 대해 매우 고맙다며, 원색 찬란한 애정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그랬더니 하팀장에게서 이제까지 보내왔던 것 중, 제일 예쁘고 명랑한 이모티콘과 함께 고맙다는 톡이 배송됐다.
아니글쎄, 며칠 전 까지도 시들시들 뾰로퉁하던 하팀장이, 이모티콘 하나로 아이비가 물을 빨아 올리듯 급 파릇파릇 싱싱해지고 팔랑이는 게 아닌가? 몸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나까지도 이렇게 잠시 기쁨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마법의 이모티콘 효능 신봉자가 돼가고 있다. 하팀장이 이모티콘으로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다면 나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
가 기꺼이 될 것이다. 또 이모티콘에 마법가루를 묻혀 다양한 레시피로 요리해 다른 이에게도 선사하고 싶다. 누군가 이모티콘의 효능과 인간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쓴다면 나도 피실험자로 참여하고 싶다.
첫댓글 감정 아이콘의 효과가 대단하네요. 저도 좀 배워야겠습니다.
ㅎㅎ 인류에게 나중에 남는 귀한 것은 이런 게 아닐까싶어요. ^^
이모티콘의 효능도 개별적인 차가 클 것 같은데요~ ^^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자기랑 톡할 때는 이모티콘 쓰지 말고 모음으로만 말하지 말라고(예를 들면 ㅇㅇ 같은, ㅋ) 하는 항의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넹 . 가끔 자기 감정이 투사돼서 역이해 되기도 해요.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이모티콘에게 심부를 시키는것 은 힘들지요. ㅎ
아, 저도 단톡에서 어느 분에게 자신의 좋은 일에 반응을 안 해줘서 섭섭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
ㅎㅎ그 표현 했던 분 깨알 귀여운 자기 감정에 솔직한 분이시네요. ^^
저는 이제까지 스스로 이모티콘을 구입해본 적이 없는데, 앞으로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얼리어답터는 못되더라도 레이트어답터라도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저희들 단톡방에도 원색 찬란한 애정 이모티콘 하나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ㅎ
ㅎㅎ 요새는 아예 구글플레이에서 이모티콘을 정기 결제 하는 것으로 바꿔봤어요. 원없이 쓰게 생겼는데 당황할까 좀 걱정되긴합니다만 어릴대 딱지 통에 딱지를 가득 채워놓은 기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