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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후기 7월 22일 수업 후기 (1부 & 2부)
김영주 추천 0 조회 104 24.07.22 22:52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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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7.22 23:03

    첫댓글 후기 글인데 뜨겁습니다. 수업 마치자마자 이렇게 정돈된 글을 정리하듯 읽을 수 있어서 넘나 감사했습니다😍
    혼자 읽고 쓰는 것도 즐겁지만. 함께 읽고 쓰는 건 훨씬 더 즐겁습니다😃

  • 작성자 24.07.22 23:16

    이 감동(이라고 쓰고 기억력^^;;이라고 읽어야하는.. ㅎㅎㅎ)이 사라지기 전에!
    사고의 확장은 늘 즐겁네요~ 이 기회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 24.07.23 03:08

    메이비스에게 남편의 유령이 찾아온 것에 대해, 억압된 것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억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제가 이해를 못했습니다. 남편의 모습으로 아들이 엄마인 메이비스에게 간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인가요? 메이비스가 유령을 보는 것은 아들에 대한 자책(?)으로 인한 것인가요? 남편의 죽음이후 남편의 유령을 보는 메이비스의 우울증이 아들에 대한 자기 방어인가요?

  • 작성자 24.07.23 19:27

    어려웠어요. 저도 그 말이 어려웠습니다. 강의를 5분만 보면 잠들게 해주는^^ 라캉의 이야기를 잠시 끌어와 보겠습니다.

    육용희 선생님이 질문하신 것이.. 억압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이 아들과 연관되는지 물어보신 것이라고 이해하고 제 개인 의견을 남겨봅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첨언해주실거라 믿으며 말입지요.

    수면 효과 짱인 라캉은 말했습니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라고 말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대타자라는 것은 주체의 요구에 답을 주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입니다. 아기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말못하는 아기의 기저귀가 젖었어! 배고파!등을 척척 알아내주는 엄마 말입니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란 말은 나도 모르는 나의 욕구를 척척 알아채주는 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메이비스에게 억압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그녀가 알아채지 못한 무의식(욕망)은...? 테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무의식이란 주제가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고, 주체가 말을 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말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 -라캉 <실리세> 중에서

  • 작성자 24.07.23 19:28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실수 같은 것이 실은 그 사람의 본심이다 라는 말인데요.. 술먹고 하는 주정에 담긴 진심이라거나 농담처럼 이야기했으나 그 안에 자기도 모르게 담겨 있던 진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거에요..

    저는 메이비스가 아들인 테리에 대해 말한 ‘여자들이 따르는 남자가 아니고, 돈을 좋아하고,차를 뜯어고치는 취미를 가진’이 바로 조지의 본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 테리에게 메이비스는 애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아마도 조지가 살아 있을 때 메이비스가 가지고 있던 생각, 감정들이 저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어요.
    그녀가 말하는 조지는 그녀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자기조차도 완벽하게 속이는 우리에 대해 기억하실 거에요..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으나 (남편과 섹스를 즐기는 사이였다) 숨겨진 욕구(사랑 받는 여자 혹은 무관심했던 남편에 대한 불만)는 변형된 모습(테리)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이상.. 여기까지가 제 추론입니답!

  • 24.07.24 01:34

    답변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아들 테리의 모습이 곧 남편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과 일치하고, 남편과 함께 살면서 어떤 애정도 받지 못했는데, 그 받지 못했던 애정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이후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유령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여기에서 억압은 억제했던 감정으로 읽으면 될런지요?

  • 24.07.24 11:57

    억압은 충동을 자극하거나 일으키는 기억이나 이미지, 생각들을(묶어서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으로 몰아넣고 그 무의식 안에 저장하려는 정신의 작용을 말합니다. 충동을 만족시킬 때 늘 쾌락이 생기지만, 그 쾌락이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 의식은 충동을(충동을 일으키는 표상을) 억압하게 됩니다. 그래서 억압은 방어나 검열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 정상적인 여성들의 경우 대개 신경증에 해당하는 히스테리를 갖고 있는데, 억압이 많을수록 히스테리 증상도 강해지는 성향을 보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억압된 것이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늘 돌아온다는 것인데, 여기서 일어나는 더 큰 문제는 회귀하는 과정에서 타협과 변형을 거치기 때문에 억압된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제거하면 효과가 사라진다는 인과율이 적용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꿈이나 말실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상의 형태가 회귀한 그것들의 예인데, 증상을 즐겨라, 증상이야말로 진리다, 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근거는 증상이야말로 현실에 완전히 예속/종속되지 못하게 만드는 주체의 출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24.07.24 12:09

    메이비스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유령을 봅니다. 유령이 출몰하는 한 그의 우울증은 계속될 듯합니다. 리비도가 약동하지 않고 고여있기 때문입니다.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 '잠자리'뿐이라는 메이비스의 말을, 의사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녀에게 금지된 소망은 분명하다. 그것은 죽은 남편과의 잠자리다' 확정적으로 단언해 버립니다. 이는 참 위험한 판단이자 규정입니다. 지식과 이론을 장착한(장착했다고 믿는) 남성성은 그 도구를 동원해 대상의 문제를 말 그대로 대상화하여 빠르게, 효과적으로 심의하고 판정하려는 관성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소망 안에 갇혀 있으므로 메이비스는 더 나아지기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참 치명적인 판단입니다. 그래서 늘 경계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그녀는 거기에 전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무언가 더 존재합니다." 라는 라캉의 말을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이비스는 전적으로 분명하게 자신이 그리워하고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무언가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존재합니다. 우리가 메이비스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그녀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끌고 와서 공동체적 질문과 모색의 단계로 확장하려는 이유는

  • 24.07.24 12:33

    한 개인의 고통과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해 삶 자체를 제 자리에 고정시키는 (남편의 유령을 불러들이는) 증상을 특정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적 명상이자 새로운 서사로 전환시킴으로 비로소 개인과 공동체의 출구가 함께 열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해졌으나 덜 말해진, 혹은 반만 말해진' 메이비스의 말에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 무엇이 더 말해져야 하는지를 상상하고 그로부터 가능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촉발해 보자는 것입니다. 개념과 이론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근거를 토대로 창의적이고 핍진한 이야기를 창안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전환시키자는 뜻입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유령은 어느 쪽이든 '더 받을 것이 있다'고 요구합니다. 유령을 불러들인 메이비스의 요구일 가능성에 방점을 찍어 봅니다. 남편에게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걸 받아야 한다고 믿는 한, 그는 대상의 자리에 머물 뿐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겐 잠자리 말고 더 필요해. 당신에게 더 받아야 했어.' 이런 말이 숨어 있다면, 메이비스는 영원히 우울증 환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죽었으나 살아돌아오는남편의 유령에 매이지 않고,

  • 24.07.24 12:48

    오히려 유령처럼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아들 테리에게로 시선을 옮겨 간다면, 비로소 발이 묶여 있던 자리를 벗어나 주체가 될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릅니다. 통상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이 제 자녀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는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심리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억압의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밑바닥에는 어린 아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그늘에 있는 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자아동일화는 부모들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아들 테리가 보이는 모습은 곧 조지와 메이비스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역추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들입니다. 분리, 독립 불가능, 교섭과 증여 불가능, 소통과 관계 맺기 불가능, 자동차에 대한 물신(페티시즘).... 메이비스는 어쩌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외면하기 위해 이미 죽은 남편이 해야 할 일을 더 요구하는 쪽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처해 있던 조건을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모자관계가 새롭게 열리기 위해서라면 대상에서 주체로 자기를 바꾸는 고통스런 실험과 시도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 24.07.24 12:49

    발제에 이어 정성스런 후기와 좋은 댓글까지 모두 감사합니다. 여러가지를 되새기면서 잘 읽었습니다.^^

  • 24.07.24 17:54

    이번주에도 책과 영화 두편 모두 생각할 거리가 넘쳐났던 거 같아요.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에게 새로운 영역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메이비스에 대해 생각하면서 저에 대해 연결해 보았습니다. 나눔을 갖기 전에는 프랭크의 시선에서만 생각하던 것이 메이비스에 대한 세밀하고 조금은 다정해진 시각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행간을 하면서 계속 제가 얼마나 가부장적인 시각에 갇혀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 하는 말들에 대해 여전히 쉽게 납득이 되면서 다른 면을 보지 못하거나 보려하지 않던 것들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네요. 저는 늘 헌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헌신이 주는 관계의 안정감에 대한 집착을 생각해 보았어요. 어쨌든 관계맺음의 주도권을 포기하더라도 안정감을 택하기 위해서 어쩌면 저도 메이비스와 많이 다르지 않았던 것 같네요. 메이비스의 열정은 남편이 원한 방식이었을 것 같네요. 여러 글들을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들 해보게 됩니다. 좋은 발제에 이어 후기까지 감사합니다.

  • 24.07.25 00:09

    자세한 답변 고맙습니다. 책에서 보여준 이야기들이 사실 그리 멀리 않은 이야기들인 거 같은데, 제 삶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주체로 살아가는 게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남 탓을 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미루고 외면하는 게 가장 손쉽고 편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나는 내 삶의 주체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메이비스가 아들과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지 고민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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