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유령이 찾아오는 침실.
“돌아온 유령은 질문을 물고 온다”
메이비스의 죽은 남편, ‘조지’가 물고 온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번 시간에도 우리는 프랭크의 말을 백퍼센트 신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 프랭크는 메이비스에게 제대로 질문했을까?
그가 묘사하는 메이비스에서 우리는 프랭크가 가지는 선입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생 소외계층이 사는 동네에서 살아온 노동계급 출신의 여자였다. 70대 초반이고 우울증이 심한 상태였다 (67쪽)”, “메이비스는 정서적으로 무감각해 보였다. (67쪽)”, “메이비스와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편이었다. (69쪽)”, “나이 든 환자들, 특히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상담하는 과정은 상당히 어려울 수 있다. 가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융통성도 부족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메이비스도 같은 이유에서 도와주기 어려운 환자였다. (72쪽)”
그는 메이비스가 충분히 교육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질문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스스로가 말하듯 하나 마나 한 추임새 따위나 넣으면서, 가끔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메이비스의 말에 반박 (사실은 그게 남편이 아니고 환각 같은 것일수는 없을까요?(83쪽) / 남편을 그리워한 나머지 뇌에서 속임수를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84쪽)) 하면서 말이지요. 이런 프랭크에게 메이비스는 곧잘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그녀는 그가 불평한 단답형으로밖에 대답할 수 없게 됩니다. 그가 질문한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을 터이고, 혹은 그의 이야기에 동조하고 싶지 않으나 반박할 수 없는 짧은 언변 때문이기도 했겠지요. 그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프랭크는 뭔가가 더 있는 것 같다는, 그가 알아채지 못한 중요한 뭔가가 있다(72쪽)고 생각하나 그는 남편과의 섹스가 그립다는 그녀의 말 뒤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지 못하고 치료를 마무리 합니다.
2. 메이비스는 정말 남편과 성관계를 맺어왔을까..
남편과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메이비스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부부가 같이 뭘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고 낯설거나 수상쩍은 일로 생각(70쪽)하는 그녀는 어떤 부부 생활을 했을까.
“귀신은 무의식의 투사다... 독자는 이미 육신을 떠난 원통한 영혼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자명한 진실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귀신은 우리의 기억과 금지된 소망 만큼이나 실재한다 (78-79쪽)”
정말로 그들은 섹스를 나누었을까..
3. 메이비스에게 조지가 왜 찾아왔을까.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회귀한 것은 변형되어 나타난다.
자식은 부모가 무의식적으로 흘린 것들을 줏어먹고 큰다고 하셨습니다. 테리는 언어 없이 몸짓으로만 이야기하는 부모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테리의 사회성 없음은 그런 부모의 밑에서 성장한 영향은 아니었을까요. 여자한테는 관심 없고 차에만 관심 있는 테리. 부부가 무엇인가를 ‘같이’하는 것이 이상했던 메이비스가 보여주듯이, 조지는 여자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남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요.
테리는, 어쩌면 돌아온 유령은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한다면서/ 나에게 사랑을 줘야할 당신들은) 왜 그러셨어요?
파이란
파이란이 부친 편지의 수신인이 되기로 한 강재가 보입니다.
언어의 한계를 가졌으나 최선을 다해서 써내려간 파이란의 편지가 주는 진정성이 있었기에 강재는 그 편지의 수신으로 자신을 자리매깁니다. 파이란이 강재를 결정한 “당신은 친절합니다”라는 이 문장이, 친절이란 단어가 강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무엇으로 다가왔을 거 같습니다. 강재는 삶의 방향을 틉니다.
술집 종업원으로 팔릴 수 있었던 스스로의 몸을 지키는데 성공한 파이란이, 배 한척 값에 자기를 팔기로 한 강재에게..
남루한 강재를 보았음에도 고마움을 버리지 않은 파이란이 전하는 마음이 강재를 변하게 합니다. 늦게 도착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서로 만나지 못했기에 강재는 파이란의 편지에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조직생활이 맞지 않고, 조직에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강재였기에 파이란의 편지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용식이 봤다면, 다른 조직원들이 받았다면, 비웃으며 버려졌을 편지를 강재를 소중하게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이 정확한 계산(이자, 돈)하에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강재는 ‘값이 없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강재가 ‘사랑’을 겪은 자이기 때문이였습니다. 철저히 계산으로 만들어지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용식은 ‘값이 없는’ 결정을 내려 자신의 세계에 구멍을 내는 강재를 살려둘 수 없었습니다. 비록 이 결정으로 인해 강재는 물리적으로 생명을 잃지만, 그 결정은 잠시나마 강재 스스로를 바로 서게 만듭니다. 그러니 분명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을까요. 적어도 경수에게만이라도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죽어가는 강재에게 들리는 파이란의 노래는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결정에 대한 대가로 목숨을 잃는 그에게 바쳐지는 파이란의 또다른 송가가 아니었을까요..
‘사랑’이 또 커졌습니다. 여러가지로 마음에 남는 것이 많은 영화였습니다.
오늘도 많이 배우고, 생각하고, 또 다른 시야를 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후기 글인데 뜨겁습니다. 수업 마치자마자 이렇게 정돈된 글을 정리하듯 읽을 수 있어서 넘나 감사했습니다😍
혼자 읽고 쓰는 것도 즐겁지만. 함께 읽고 쓰는 건 훨씬 더 즐겁습니다😃
이 감동(이라고 쓰고 기억력^^;;이라고 읽어야하는.. ㅎㅎㅎ)이 사라지기 전에!
사고의 확장은 늘 즐겁네요~ 이 기회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메이비스에게 남편의 유령이 찾아온 것에 대해, 억압된 것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억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제가 이해를 못했습니다. 남편의 모습으로 아들이 엄마인 메이비스에게 간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인가요? 메이비스가 유령을 보는 것은 아들에 대한 자책(?)으로 인한 것인가요? 남편의 죽음이후 남편의 유령을 보는 메이비스의 우울증이 아들에 대한 자기 방어인가요?
어려웠어요. 저도 그 말이 어려웠습니다. 강의를 5분만 보면 잠들게 해주는^^ 라캉의 이야기를 잠시 끌어와 보겠습니다.
육용희 선생님이 질문하신 것이.. 억압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이 아들과 연관되는지 물어보신 것이라고 이해하고 제 개인 의견을 남겨봅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첨언해주실거라 믿으며 말입지요.
수면 효과 짱인 라캉은 말했습니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라고 말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대타자라는 것은 주체의 요구에 답을 주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입니다. 아기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말못하는 아기의 기저귀가 젖었어! 배고파!등을 척척 알아내주는 엄마 말입니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란 말은 나도 모르는 나의 욕구를 척척 알아채주는 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메이비스에게 억압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그녀가 알아채지 못한 무의식(욕망)은...? 테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무의식이란 주제가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고, 주체가 말을 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말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 -라캉 <실리세> 중에서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실수 같은 것이 실은 그 사람의 본심이다 라는 말인데요.. 술먹고 하는 주정에 담긴 진심이라거나 농담처럼 이야기했으나 그 안에 자기도 모르게 담겨 있던 진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거에요..
저는 메이비스가 아들인 테리에 대해 말한 ‘여자들이 따르는 남자가 아니고, 돈을 좋아하고,차를 뜯어고치는 취미를 가진’이 바로 조지의 본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 테리에게 메이비스는 애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아마도 조지가 살아 있을 때 메이비스가 가지고 있던 생각, 감정들이 저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어요.
그녀가 말하는 조지는 그녀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자기조차도 완벽하게 속이는 우리에 대해 기억하실 거에요..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으나 (남편과 섹스를 즐기는 사이였다) 숨겨진 욕구(사랑 받는 여자 혹은 무관심했던 남편에 대한 불만)는 변형된 모습(테리)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이상.. 여기까지가 제 추론입니답!
답변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아들 테리의 모습이 곧 남편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과 일치하고, 남편과 함께 살면서 어떤 애정도 받지 못했는데, 그 받지 못했던 애정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이후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유령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여기에서 억압은 억제했던 감정으로 읽으면 될런지요?
억압은 충동을 자극하거나 일으키는 기억이나 이미지, 생각들을(묶어서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으로 몰아넣고 그 무의식 안에 저장하려는 정신의 작용을 말합니다. 충동을 만족시킬 때 늘 쾌락이 생기지만, 그 쾌락이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 의식은 충동을(충동을 일으키는 표상을) 억압하게 됩니다. 그래서 억압은 방어나 검열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 정상적인 여성들의 경우 대개 신경증에 해당하는 히스테리를 갖고 있는데, 억압이 많을수록 히스테리 증상도 강해지는 성향을 보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억압된 것이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늘 돌아온다는 것인데, 여기서 일어나는 더 큰 문제는 회귀하는 과정에서 타협과 변형을 거치기 때문에 억압된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제거하면 효과가 사라진다는 인과율이 적용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꿈이나 말실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상의 형태가 회귀한 그것들의 예인데, 증상을 즐겨라, 증상이야말로 진리다, 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근거는 증상이야말로 현실에 완전히 예속/종속되지 못하게 만드는 주체의 출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메이비스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유령을 봅니다. 유령이 출몰하는 한 그의 우울증은 계속될 듯합니다. 리비도가 약동하지 않고 고여있기 때문입니다.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 '잠자리'뿐이라는 메이비스의 말을, 의사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녀에게 금지된 소망은 분명하다. 그것은 죽은 남편과의 잠자리다' 확정적으로 단언해 버립니다. 이는 참 위험한 판단이자 규정입니다. 지식과 이론을 장착한(장착했다고 믿는) 남성성은 그 도구를 동원해 대상의 문제를 말 그대로 대상화하여 빠르게, 효과적으로 심의하고 판정하려는 관성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소망 안에 갇혀 있으므로 메이비스는 더 나아지기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참 치명적인 판단입니다. 그래서 늘 경계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그녀는 거기에 전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무언가 더 존재합니다." 라는 라캉의 말을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이비스는 전적으로 분명하게 자신이 그리워하고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무언가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존재합니다. 우리가 메이비스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그녀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끌고 와서 공동체적 질문과 모색의 단계로 확장하려는 이유는
한 개인의 고통과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해 삶 자체를 제 자리에 고정시키는 (남편의 유령을 불러들이는) 증상을 특정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적 명상이자 새로운 서사로 전환시킴으로 비로소 개인과 공동체의 출구가 함께 열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해졌으나 덜 말해진, 혹은 반만 말해진' 메이비스의 말에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 무엇이 더 말해져야 하는지를 상상하고 그로부터 가능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촉발해 보자는 것입니다. 개념과 이론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근거를 토대로 창의적이고 핍진한 이야기를 창안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전환시키자는 뜻입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유령은 어느 쪽이든 '더 받을 것이 있다'고 요구합니다. 유령을 불러들인 메이비스의 요구일 가능성에 방점을 찍어 봅니다. 남편에게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걸 받아야 한다고 믿는 한, 그는 대상의 자리에 머물 뿐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겐 잠자리 말고 더 필요해. 당신에게 더 받아야 했어.' 이런 말이 숨어 있다면, 메이비스는 영원히 우울증 환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죽었으나 살아돌아오는남편의 유령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유령처럼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아들 테리에게로 시선을 옮겨 간다면, 비로소 발이 묶여 있던 자리를 벗어나 주체가 될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릅니다. 통상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이 제 자녀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는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심리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억압의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밑바닥에는 어린 아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그늘에 있는 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자아동일화는 부모들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아들 테리가 보이는 모습은 곧 조지와 메이비스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역추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들입니다. 분리, 독립 불가능, 교섭과 증여 불가능, 소통과 관계 맺기 불가능, 자동차에 대한 물신(페티시즘).... 메이비스는 어쩌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외면하기 위해 이미 죽은 남편이 해야 할 일을 더 요구하는 쪽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처해 있던 조건을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모자관계가 새롭게 열리기 위해서라면 대상에서 주체로 자기를 바꾸는 고통스런 실험과 시도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발제에 이어 정성스런 후기와 좋은 댓글까지 모두 감사합니다. 여러가지를 되새기면서 잘 읽었습니다.^^
이번주에도 책과 영화 두편 모두 생각할 거리가 넘쳐났던 거 같아요.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에게 새로운 영역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메이비스에 대해 생각하면서 저에 대해 연결해 보았습니다. 나눔을 갖기 전에는 프랭크의 시선에서만 생각하던 것이 메이비스에 대한 세밀하고 조금은 다정해진 시각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행간을 하면서 계속 제가 얼마나 가부장적인 시각에 갇혀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 하는 말들에 대해 여전히 쉽게 납득이 되면서 다른 면을 보지 못하거나 보려하지 않던 것들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네요. 저는 늘 헌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헌신이 주는 관계의 안정감에 대한 집착을 생각해 보았어요. 어쨌든 관계맺음의 주도권을 포기하더라도 안정감을 택하기 위해서 어쩌면 저도 메이비스와 많이 다르지 않았던 것 같네요. 메이비스의 열정은 남편이 원한 방식이었을 것 같네요. 여러 글들을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들 해보게 됩니다. 좋은 발제에 이어 후기까지 감사합니다.
자세한 답변 고맙습니다. 책에서 보여준 이야기들이 사실 그리 멀리 않은 이야기들인 거 같은데, 제 삶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주체로 살아가는 게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남 탓을 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미루고 외면하는 게 가장 손쉽고 편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나는 내 삶의 주체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메이비스가 아들과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지 고민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