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한 편의 긴 글을 완성해본 것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미숙할 것 같습니다. 너무 긴 것 같기도 하고요... ㅜㅜ 잘 읽어주시고 수업때 나누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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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 포스티노> 발제문_안전한 은유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일 포스티노>를 보고 전 남자친구 생각이 났다. 스물여섯 살 때 만난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우리만이 서로의 슬픔을 잘 아는 것 같고, 우리만이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렇게 그를 ‘특별히’ 사랑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끼리 공유하던 은유의 세계가 있었던 거구나."
은유는 '방'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언어가 씻겨 내려가는 파도라면, 은유의 방은 섞이지 않는 구슬들이다. 세상으로부터 독립된 안전하고 완전한 시의 세계다. 은유란 자기만의 언어다. 다른 사람들이 침범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 파블로가 본국에서 추방당한 것도, 마리오가 베아트리체의 고모나 다른 어부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모두 남들과는 다른 시선을 지녔기 때문일 수 있다. 나 역시 시인을 꿈꾸며 은유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 그들이 보고 느끼는 외로움 같은 것을 아득히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마리오가 베아트리체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이루어졌을까를 생각하면 은유의 힘을 알 수 있다. 베아트리체가 공을 가슴골에 넣고 굴리다가, 목을 타고 입술로 가져가는 모습, 그리고 서로 입을 맞추는 순간이 강렬했다. 마리오의 시는 두 사람의 존재와 존재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단순히 몇 번을 만났고, 몇 마디를 나눠봤는지가 아니라, 마리오의 은유가 베아트리체의 마음에게로 가는 다리를 놓아 줬다. 당신만을 보며 쓴 시, 그리고 그것을 읽는 베아트리체는 마리오의 마음에 도착한다. 마리오의 노트 두 번째 장에 그려져 있던 원 하나가 생각난다.
베아트리체가 입에 물었던 공을 마리오가 가져오고, 공은 다시 베아트리체에게로 간다. 그렇게 둘의 입맞춤은 성사된다. 마리오는 보름달을 보며 공을 만지작거렸었고, 베아트리체는 창문을 열고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방은 더이상 닫힌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을 상징한다. 베아트리체는 마리오의 시를 읽는 것만으로 그에게 자신의 가슴과 몸, 심지어는 그 환한 얼굴 표정조차 적나라하게 내어준 묘한 느낌이 들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갑작스러운 스킨십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깊이를 나눈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울린 것은 마리오가 사랑을 얻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뻤고 절묘했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마리오가 네루다를 위해 섬마을의 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에서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눈물이 터져버렸다.
”1번, 칼라 디 소토의 작은 파도. 2번, 큰 파도. 3번, 절벽의 바람. 4번, 덤불에 이는 바람. 5번,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6번, 고통의 성모 교회 종소리와 신부님. 7번, 별빛이 반짝이는 섬의 밤하늘. 8번, 파블리토의 심장 소리.“
마리오와 네루다는 이런 대화를 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보게.”
“못해요.”
“할 수 있어.”
마리오는 파블로의 요구에 ‘베아트리체 루소’라고 대답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이다.
네루다가 떠나고 1년 후, 우연히 그 소리를 다시 들어본 마리오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한 듯하다. 그가 생각한 것은 단순히 베아트리체가 아니었다. 파도 소리와 종소리, 성당의 신부님 목소리, 베아트리체 뱃속 아들의 심장소리…… 그러한 마을의 일상적이고 꽤나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녹음했다. “떠나야겠어. 여기 사람들은 너무 멍청해.”라고 말했던 마리오가, 이 마을이 아름다운 이유로 마을의 일상을 제시한 장면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시인이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쟁취하는 것, 아름다운 언어로 마음을 녹이는 것, 그를 가지는 것만으로 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애를 할 때 욕심을 많이 내는 편이었다. 결혼 전엔 줄곧 그랬다. 질투하고, 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하고, 빼앗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좁고 좁은 한 사람과의 관계에만 대입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안에서 안전해지는 마음이 있었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싶어했다. 은유를 이루려고 했고, 나만의 언어를 만들고 싶어했다. 안전한 섬처럼 도착한 곳에서 은유는 이루어졌을 수 있다. 그러나 왜 마리오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을까? 또 왜 나는 그런 마리오를 보고 눈물이 났을까?
마리오는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 시인이 되었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개인적으로는 결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몇십 분간 현실 부정을 했다. “이 영화 안 본 눈 삽니다” 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 성장과 투쟁의 이야기에 반해 비참한 죽음이 너무나 아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리오가 연설하지 못한 시는 짓밟혔다. 그러나 마리오는 파블로에게 당신 덕분에 이 작은 마을을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이야기했을 것 같다. 그러나 파블로는 마리오가 죽고 난 후에야 마을로 돌아온다. 혼자 해변에 서서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파블로는 마리오가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마리오를 그리워할 것이다.
여기서 이상하게 파블로를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거였다. 진작 돌아오지, 진작 돌아왔더라면 선거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고, 마리오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나의 한계이구나, 이것이 나의 욕심이구나, 이것이 나의 부족함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마리오였다면, 파블로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나는 그저 안전한 은유에 머물렀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칼을 만지면서, 목을 쓰다듬으면서, 그 목소리에만 기대면서.
마리오는 파블로의 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블로 당신 덕분에 알게 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었다. 마리오가 파블로의 시를 동경했던 것, 해변과 절벽과 마을을 더 깊이 사랑해서 공산주의 사상을 택한 것, 결국 죽음으로 몰린 것은 파블로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시인의 천명이라고 해야 할까. 오히려 마땅히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슬픔을 끌어안는 것이 시인일 것 같다. 평범하고 가난하고 멍청한 것들, 그러나 사랑스러운 것들을 쓰다듬고 느끼고 비로소 사랑해낼 때, 우리는 시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시인이 꿈이지만, 시를 잘 모른다. 그저 겉보기에 멋있는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라면, 내가 시인이 되는 길은 요원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시 쓰는 것을 동경하면서도 시인이 될 용기는 없었던 마음에 대해서 찾아볼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가 입에 물고 있던 구슬처럼, 관능적인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는 것만으로 멈추지 않고 싶다. 은유에 미덕이 있다면 더 쓸쓸한 것을 향하는 시선일 것 같다. 나 혼자의 몸을 편안하거나 쾌락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더 똘똘 뭉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마리오가 지은 ‘파블로 네루다께 바치는 노래’처럼. 파블로가 지은 ‘모두의 노래’처럼.
나는 전 남자친구가 아니라 무엇을 그리워해야 할까?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까? 아니 무엇을 사랑하려 마음 먹으며 살아가야 할까? 아직도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발제문을 쓰는 동안 여러 가지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땅콩을 와그작와그작 씹는 소리, 화장실 문을 열고 오줌을 누는 소리, 엄마가 배를 긁으며 코를 고는 소리였다. 멀리 있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가까이 있는 것에 귀가 기울여지는 밤이다. 그것이 '시'와 가까울 것이며, 그것이 시의 '특별함'일 것 같아서다.
첫댓글 앗 조회수가 1이 되었는데 그사이에 살짝 수정했으니 다시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초고에 가까워서 또 수정하고 싶어지면 어쩌지 걱정이네요 ㅠㅠ
와우~발제문이 예술입니다. 영화를 보고, 발제문을 읽으니, 감동이 더해집니다. 영화 내용과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내는 수준이 전문가급이네요. 전남친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 마리오의 사랑, 다른 은유로 표현된다는 사실이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헉... 이런 평가를 받게 되다니 저야말로 감동입니다. 잘 읽어주셔서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