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당 지학대종사 행장(是夢堂 知學大宗師 行狀)-6차 수정본
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 동강(洞江)의 유생(儒生) 광산(光山) 김씨(金氏) 집안에서 영후(永候)를 아버지로, 안동(安東) 김씨(金氏) 계순을 어머니로 1948년에 태어난 스님의 속명(俗名)은 상수(相洙)입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총명(聰明)하여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외움에 막힘이 없었고, 책을 읽을 때는 밥 먹고 잠자는 일조차 잊을 정도로 탁월(卓越)한 집중력(集中力)을 보였습니다.
대종사께서는 1965년 백양사(白羊寺) 석산(石山) 큰스님을 은사(恩師)로 출가(出家)하셔서 사미계(沙彌戒)를 수지하시고 백양사 강원(講院)에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두루 열람(閱覽)하신 후 통도사(通度寺) 월하(月下) 큰스님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受持)하셨습니다.
백양사 학인 시절 스스로 지은 시몽(是夢)이라는 자호(自號)를 법명(法名) 대신(代身) 평생 사용하셨습니다.
1978년부터 서옹대종사(西翁大宗師)를 법사(法師)로 섬겼는데, 이때 탄공(呑空)이라는 법호(法號)를 받으셨습니다. 탄허(呑虛) 큰스님 문하(門下)에서 5년간 수학(修學)하시면서 한글대장경 <화엄경(華嚴經)> 번역(飜譯)에 참여(參與)하셨고, 이후 송광사(松廣寺), 월정사(月精寺), 봉암사(鳳巖寺) 등의 선원(禪院)에서 5하안거(夏安居)를 성만(盛滿)하셨습니다.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역경원(譯經院) 역경위원(譯經委員)과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종정(宗正) 사서실장을 지내셨으며, 중문(中文) 법화사(法華寺) 주지(住持)를 맡으신 후에는 제주(濟州)에 남겨진 신라불교(新羅佛敎)와 고려불교(高麗佛敎)의 희미한 흔적(痕迹)을 더듬어 이를 복원(復元)하기 위해 청춘(靑春)을 바치셨습니다.
특히 17년에 걸친 발굴조사(發掘調査)와 7회에 걸친 학술회의(學術會議)를 통해 우리의 역사(歷史)에서 잊혀졌던 불세출(不世出)의 영웅(英雄) 해상왕(海上王) 장보고(張保皐) 대사(大使)가 법화사를 창건(創建)했다는 사실(事實)을 밝히고 복원함으로써 장보고 대사를 우리 곁에 다시 오게 하셨으며 장보고 대사의 정신(精神)을 함양(涵養)하는 사업(事業)에도 마음을 두셨습니다.
법화사 주지 재임(在任) 기간 중에 제주불교신문(濟州佛敎新聞)을 창간(創刊)하셨고, 서귀포불교문화원(西歸浦佛敎文化院)을 설립(設立)하셨으며, 제주불교연합회장(濟州佛敎聯合會長)을 역임(歷任)하심으로써 제주불교 발전(發展)에 기여(寄與)하셨습니다. 또 사회복지법인(社會福祉法人) 연화원(蓮花院)을 설립하시고 어린이 불교학교(佛敎學校)를 열어 어린이 포교(布敎)에 앞장서셨습니다.
제주불교의 중심(中心)인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本寺) 관음사(觀音寺)가 파행(跛行)으로 치달을 때는 여러 차례 주지 직무대행(職務代行)을 맡으셔서 정상궤도(正常軌道)에 올려놓으셨고,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 주지 재임 중에는 중창불사(重創佛事)를 주도(主導)하셔서 도량(道場)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광주(光州) 정광학원(淨光學園) 이사장(理事長)을 맡으셔서 교육불사(敎育佛事)에도 힘을 보태셨습니다.
백양사 주지를 끝으로 공적(公的)인 활동(活動)을 접으시고 인천(仁川) 대복사(大福寺)에 머무시면서 독서(讀書)와 글쓰기로 소일(消日)하시다가 업연(業緣)을 순순히 받아들이시고 울주(蔚州) 정토마을에서 상좌(上佐)들의 배웅을 받으며 정토(淨土)로 향하셨습니다. 이때가 2024년 1월 9일 오후 2시 55분, 계묘년(癸卯年) 동짓달 스무여드레 미시(未時)였습니다.
곡기(穀氣)를 끊으시면서부터 입적(入寂)에 임박(臨迫)했을 때까지 제자(弟子)들이 여러 번 화두(話頭)가 또렷하신지 여쭈었는데 스님께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셨습니다. 사대(四大)가 무너지는 고통(苦痛) 속에서도 본분사를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수행자(修行者)는 공부하다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베개 삼아 죽을 각오(覺悟)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실 정도로 수행정신(修行精神)이 투철(透徹)하셨으며 평생(平生)동안 소박(素朴)하고 검소(儉素)한 수행자의 면모(面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대하실 때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莫論)하고 차별(差別)하지 않으셨는데 가난한 노보살님이 스님의 방을 찾더라도 문을 활짝 열고 맞이하셨고, 저명인사(著名人士)가 찾아오더라도 촌로(村老)와의 대화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불자(佛子)들은 아버지의 등에 기댄 것과 같은 든든함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스님은 문장(文章)이 깊고 아름다워 문인(文人)들의 추앙(推仰)을 받으셨는데, 이는 대장경(大藏經)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역사(歷史)와 고사(故事)에도 해박하여 인용(引用)과 변주(變奏)함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국 사찰(寺刹)에서 전각(殿閣)을 새로 짓거나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거나 비(碑)를 세울 때 당해 사찰의 대중(大衆)들이 글을 청해 오면 거절(拒絶)하는 법(法)이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상량문(上樑文), 발원문(發願文), 비문(碑文), 연기문(緣起文) 등의 글을 지으셨는데, 비록 지금 사람들이 스님의 진가(眞價)를 알지 못할지라도 천년(千年) 뒤 후손(後孫)들은 빛나는 그 문장을 통해 스님의 진면목(眞面目)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좌(上佐)로는 법현(法玄) 일미(一彌) 한북(漢北) 삼현(三玄) 고웅(古雄)이 있고 몇몇 법상좌(法上佐)와 유발상좌(有髮上佐)가 있어 대종사의 수행(修行)과 전법(傳法)의 유지(遺旨)를 따르고 있습니다.
대종사의 칠십육년(七十六年) 생애(生涯)를 짧게 소개하다 보니 빠뜨린 게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시몽대종사의 존령전(尊靈前)에 용서(容恕)를 구합니다.
덧붙임 :
1. 대종사의 사제 지운 지범 스님과 도반 종대 스님, 조카 상좌 금강 스님, 속가 외조카 임철 거사님, 스님의 말년을 시봉했던 보광명 보살님의 도움으로 이 글이 완성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2. ‘탄공당 지학대종사’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이견이 있으므로 기존 표현을 그대로 쓸 생각입니다.
3. 외조카 임철 거사님은 형제와 친척의 기억을 근거로 1947년생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으나 작년에 대종사께서 친히 지범 스님에게 1948년생으로 밝히셨다고 하므로 그를 따릅니다.
4. 나중에 혹시라도 비(碑)를 세울 인연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그 경우를 대비해 간략하게 썼습니다. 만일 오류가 있을 경우 알려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한북 합장 |